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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8개 구간을 제7코스에서 역(逆) 코스로 진행하고 있으므로 제1
코스(수락.불암산), 제8코스(북한산) 등 2구간을 남겨놓은 상태다.
거리는 총 157km의 3분의 1도 되지 못하나 난이도에서는 유일한 '상'(상1,
중5, 하2) 구간과 5개의 '중' 구간중 1구간이 남아있댜.
제1구간인 '수락.불암산 코스' 14.3km가 바로 최고로 난(難)한 코스란다.
역 코스로 가기 때문에 노원구(서울시)와 남양주시(경기도) 별내면에 걸쳐
있으며 해발 508m 암산인 불암산(佛岩)이 먼저다.
날머리가 되는 수락산(水落)은 노원구 상계동과 의정부시, 남양주시(경기)
별내면(別內)에 자리한 해발 638m 사암산이다.
지금의 서울은 안양천 지역 외에는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 외에는 모두 해발 300m대 이하의
낮은 산이기는 해도.
그러나 내가 현재의 손자들 연령대였을 때 이 산들의 행정구역은 예외없이
경기도 땅이었다.
제1코스인 불암산과 수락산도 경기도 양주군에 속해 있었고.
훗날(1960년대) 산 능선을 경계로 현 서울시 쪽이 성북구로 편입되었다가
도봉구로 분구되었고 일부가 노원구로 다시 분구된 것이다.
이 코스는 1월 7일 나홀로 걸은 후 다시 손자들과 함께 걸은 구간이다.
작은 손자는 아직 완쾌되지 않았고 YMCA관현악단 첼로(cello) 주자인 큰
손자는 주말 연주회 때문이었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노원구 공릉동) 4번출구에서 손자들과 만났다.
서울의 중학생이라면 서울시내의 지하철역 쯤은 아무 데나 능히 찾아갈 수 있으련만 두
아들을 할아버지에게 인계하고 돌아가는 엄마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3호선 끝에서 6호선 끝을 다녀가는 지루한 지하 노정인데도 그래야 안심된다면 과보호
라고 비판하겠는가.
자녀교육 문제를 논할 때 새끼훈련에 냉혹한 어미사자의 잔인성(?)이 종종 회자되지만
맹수의 왕이라는 그들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과보호 비판에 인용하는 것은 무리다.
이 시대의 세태가 과보호의 한 원인이라면 말이다.
우리 부모들의 자녀사랑을 대변하는 속담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 귀한 놈에게는
매를 주고 미운 놈에게는 떡을 준다"에 과보호의 흔적이 있는가.
대로(화랑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북부간선도로가 시작되는 사거리에서 노원로를 따라
한참 가면 원자력병원(공릉동) 후문의 월편, 공릉산백세문(孔陵山百歲門) 앞이다.
낯 설은 공릉산. 이런 이름을 가진 산이 서울에 있다니?
이조 제8대 왕 예종(睿宗)의 정비 장순왕후(章順王后/한명회의 딸)의 능(恭陵)이 있다
해서 공릉산(漢字가 다른 恭陵山)이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의 한북정맥 줄기에 있기는
하지만 해발 115m 야산에 불과하다.
불암산은 정상부의 큰 바위가 마치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하늘이 내린 보배같은 산이라는 뜻으로 '천보산'(天寶山)이라고도 불리는 산이다.
'필암산'(筆岩山)이라는 이름도 지니고 있다.
먹골(墨洞/중랑구), 벼루말(硯村/노원구)과 함께 필(筆)·묵(墨)·연(硯)으로 지기(地氣)를
다스린다는 풍수지명(風水地名)이었단다.
그러므로, 불암산이 역사성과 전설이 있는 이름인데도 자기네 마을 뒷산이라는 이유로
공릉동 주민들이 임의로 붙인 공릉산 사용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을 통해서 산에 오르내리면 백세 장수할 것이라는 뜻에서 붙인 백세문과 달리.
공릉동(孔陵洞)은 '릉(陵)'자 돌림 마을 역내에는 왕 또는 왕족의 묘가 있음을 의미하는
상식을 벗어난 무릉(無陵) 마을이다.
일제의 행정개혁때(1914) 양주군 노해면(蘆海) 공덕(孔德) 마을이 서울시 성북구 태릉
동(泰陵)으로 편입되었으나(1963)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절충한 이름이란다.
공덕리의 첫자와 태릉동의 릉자를 취합하였기 때문에 무릉(無陵) 마을이다.
백세문도 마냥 바람직한 문은 아니다.
'9 9 8 8 2 3 4'가 가수의 노랫말이 되고 한 때 중구에 회자되었다.
"백세(白歲/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 앓다가 4일째에 죽는 것"을 소망하는 뜻이
라는데 업그레이드 된 새 판(version)이 진작에 나왔단다.
2~3일 앓는 것 마저도 고통스럽고 자녀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구구팔팔 복상사(腹
上死)"를 바란다고.
하지만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며 그렇게 된다 해도 심각한 국가적인 문제다.
이 문제는 다른 메뉴에서 논하기로 하고, 후자(새 버전)가 우리 고령자의 실상이라면
이 땅의 미래가 암담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전자는 안정된 사회환경에 영향 받은 인간의 소박한 본능이라 할 수 있으나 99세까지
팔팔해야 하는 이유가 복상사라면?
동물적 향락본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늙은이들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고령자들은 왜 국가로부터 우대를 받고 후세대의 공대를 받아야 하는가.
나는 까미노(Camino)와 헨로미찌(四國遍路道) 등 순례길에서, 알베르게(albergue)와
젠콘야도(善人宿) 등 숙박소에서, 거쳐가는 마을과 음식점 등에서 많은 공대를 받았다.
그 때마다 이방 늙은이를 공대하는 까닭을 묻는 내게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았다.
젊은이들과 같이(처럼) 걷는 것 만으로도 공대받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젊은이들에게는 미래의 롤모델이 되고 거동을 포기하였거나 자신감을 상실한 늙은이들
에게는 천금의 각성제가 되고 있는데 어찌 공경(honor)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
그렇다.
연로한 만큼 경륜 있는 애국을 하고 후대에게 도덕적 윤리적 모범이 되는 엄중한 책무를
이행하는 고령자라는 이유로 국가는 우대를 하고 후세대는 공대를 하는 것이다.
99 88을 향락하고 복상사라는 동물적 쾌락을 추구하는 늙은이라면 동냥을 주기는 커녕
쪽박마저 빼앗아야 할 것이다.
날로 늘어나는, 백해무익한 늙은이들을 봉양해야 하는 세대가 불쌍하며 휘청거리게 될
나라 살림이 걱정이다.
(불암산 / 산은 옛 산이로되.....과연 옛 산 그대로인가)
혼자 오를 때는 백세문을 지나 갈림길 쉼터에서 한동안 옛 추억에 잠겨있었다.
큰 손자와 같은 중학교 2학년때인 1950년.
비극의 6. 25민족동란이 발발하여 서울이 북한 공산군 치하에 있던 3개월.
그때, 용산구 원효로 2가에 있던 내 집 일대는 미공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남은 가재를 동대문밖(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옆) 친지집으로 옮겼으나 서울
공습이 날로 심해감에 따라 다시 불암산 북쪽 자락의 친지집 농장으로 옮겼다.
이 일을 모두 중학교 2년생 홀로 자전거로 했는데, 그와 동일한 경우에 직면한다면 중학
생인 내 손자들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예전에 비해서 놀랍도록 영악스럽기는 해도 역경 극복의 의지는 개탄할 정도로 허약한
이즈음의 청소년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 나를 도운 사람은 친지집 딸인 사대 부중 2년생 H양이었다.
성인 남자들은 모두 행방이 묘연한 피난길에 있고 나 외에는 무력한 아녀자뿐이었는데
H의 도움이 어찌나 고마웠던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잔재가 남아있던 시대라 사대 부중 외에는 남녀 공학은 꿈도 꾸지 못
한 때였는데도 불암산 농가에서 함께 지낼 때 우리는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불투명한 앞날이었지만 그 시간에는 갖은 시름 다 잊을 수 있었다.
각기 자기 학교와 관계된 내용이 화제의 거의 전부였는데(그때는 그랬다) 내 학교(용산
중)는 명성에 비해 화젯거리가 적었다.
유력한 일본인과 친일명사(?)의 아들들이 다니던 학교였기 때문인데 H는 나이에 비해
사려 깊은 여자였다.
사대 부중도 자랑할 만한 학교인데도 내 기분을 헤아려 자제하는 아량을 보였으니까.
1951년 1.4후퇴때 피난길이 다른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고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서울로 복귀하고 한 세월 후에 우연히 만난 지인을 통해서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피난생활 중에 병사했다는...
후덕하여 맛을 잃어가는 세상에서 맛내는 소금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이 여인을 잃었기
때문에 세상은 그만큼 더 맛이 없어졌을 것이다.
나는 거주지를 서울 밖으로 옮겨본 적 없는 한평생에서 그 때 이후 단 한번도 불암산을
찾지 않았는데 손자들보다 먼저 홀로 이 산에 오르기를 참 잘 한 것 같다.
하마터면, 근 70년 전의 애틋한 추억에 몰입하여 손자들을 당혹스럽게 함으로서. "어린
손자들과 함께 걷는 서울둘레길"에 본말전도의 사태가 벌어질 뻔 했으니까.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는 공자의 말이다(論語)
"산고수장"(山高水長)은 범중엄의 말이다(중국 북송 때 학자 정치가)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다"는 황진이(명기)의 말이고 "산천 의구라는 말은
옛 시인의 허사다"는 이은상(시인)의 말이다.
공자와 범중엄의 생각은 표현이 다를 뿐 대동소동(大同小同)이다.
그러나 황진이와 이은상이 맞붙으면 적잖이 시끄럽겠다.
원시에게는 황진이의 말이 맞고 근시는 이은상 편이 될 것 같으니까.
3년 모자런 70년이 지났는데도 멀리서는 의연한 불암산이 다가가면 만신창이니까.
그래도 나는 황진이 편이고 싶다.
산이 의구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비열한 인간의 탓일 뿐이니까.
그녀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불암산을 자주 찾는 늙은 벗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와락 외로움을 느끼게 했다.
허허한 산록에 상전벽해의 변화가 왔다.
그 때는 100만여에 불과한 인구가 태산보다도 높은 보릿고개를 넘느라 몸 돌볼 겨를이
없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등산의 '등'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즘은 1천만이 넘는 시민이 경제적 안정에 따른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당연히 건강을 챙기게 됨으로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등산인구로 인해 서울의 모든
산이 몸살을 앓고 있지 않은가.
좁디좁은 오솔길의 대부분이 대로처럼 넓어짐에 따라 예상되는 각종 피해를 막기 위해
관계자들이 갖은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데 불암산도 예외가 아니다.
과잉 공급이라 할 정도로 각종 체력단련기구들을 산길 도처에 설치하느라 파괴된 면적
또한 적지 않고.
(잠시도 안심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스마트폰)
불암산 구간은 완만한 오르내림에 안내표지들이 딴 길로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 정자를
비롯해 각종 쉼터들이 안배되어 있으므로 시각장애인 외에는 아무나 걸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헷갈리게 하는 표지판들이 있다.
이는 불암산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구간의 기초지자체들(구청과 일부 경기도)이 사려
깊지 못한 경쟁을 함으로서 빚어진 문제다.
서울둘레길 외에도 북한산둘레길을 비롯해 산마다, 해당 구청마다 둘레길 자락길. . . .
하나의 길에 몇개의 길이 뭉뚱그려졌다가 각기 흩어지면서 오도하기도 한다.
심지어 스탬프 부스(booth)까지 따로 설치하여 혼란스럽게 하는 지자체도 있다.
불암산에도 전망대들이 있으나 되레 불암산 전설을 불러오는 전망 없는 전망대들이다.
전설은 불암산이 본시 금강산에 있는 산이었다고 시작한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려 하는데 한양(현 서울)에 남산이 없다는 이유로 결단하지 못
하고 있다는 소문이 금강산까지 날라왔다.
새 왕조 수도의 남산이 되고 싶은 불암산은 한양을 목표로 금강산을 떠났다.
그러나 불암산의 남산 꿈은 깨지고 말았다.
현재의 위치에 도착하여 한양의 남산이 이미 존재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금강산으로 복귀할까, 이 자리에 눌러앉을까 양난에 고민하던 그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불암산이 서울을 등지고 있는 듯한 형국인 것은 돌아가려는 자세(엉거주춤한)에서 주저
앉았기 때문이라나.
아무튼 불암산 전망대의 서울 전망은 반쪽짜리다.
(반쪽 전망대)
암산에는 기묘한 바위와 돌들이 곳곳에 널려 있기 마련이다.
남반도에서만도 설악산을 비롯하여 무수한 산이 그러하나 가장 빼어난 곳은 천관산(전남 광양)과
한라산의 오백나한을 들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불암산도 그 범주에 속한다.
크게는 산 이름 불암이 있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공룡의 머리부분 같다 해서 공룡바위도 있다.
하나의 바위가 넓적바위, 음바위, 밑바위, 여근석(해설판참조) 등으로 불리고, 다른 유수한 산들의
그럴싸한 남근석에는 미치지 못해도 남근석도 있는데 토테미즘(totemism)의 영향일 것이다.
(위의 위/학도암의 좌상, 위의 아래/고창 도솔산의 좌상)
불암산 구간에서 압권은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鶴到庵 磨崖觀音菩薩坐像)이다.
유감스럽게도 서울둘레길에서 조금 비껴있기 때문에 절대 다수가 놓치고 있지만 2000년 7월 15일
자로 지정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다.
이조 16대 인조2년(1624년)에 무공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학이 찾아드는 곳"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절의 대웅전 뒤,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불상이다.
1870년에 민비의 불심, 발원에 따라 조성했다는데 고창(전북)선운사 뒤 도솔산 동불암지 마애여래
좌상(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보물 제1200호)을 생각하게 하는 좌상이다.
비중에서는 국가 보물과 지방문화재 간의 차가 크지만.
<사족>
민비(1896년 명성황후 추존)는 1866년에 이조26대 왕 고종의 왕비가 되었으나 가례를 올린 날에도
독수공방을 하는 등 초기부터 마음 고생이 많았다.
살해당하는 등 훗날의 격변기와 달리 고종이 궁녀출신 귀인 이씨에 빠져있었기 때문인데 이를 극복
하느라 불심이 강해졌던가.
손자들의 시선에 걸린 것은 '불암산 명예산주. 방송인 崔佛岩' 의 이색 석비.
"불암산 이름을 빌려 살아온데 대한 용서를 비는" 글귀다.
손자들에게 최불암은 모르는 배우, 방송인인 것이 당연하니까.
그는 반백년을 '불암'으로 살아왔지만 과연 불암산을 의식하고 그 이름을 빌려서 살았는가.
본명(崔英漢)을 두고 백부(澤)가 지어준 예명(佛岩)을 사용하게 된 까닭은 그가 배우(연극)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미 동성명이며 2년 연상인 연극배우가 활동중이기 때문이었다는데.
불암산을 염두에 둔 예명인지는 지은 이만 아는 일이겠지만 그럴 개연성은 적을 것 같다.
작명한 1960년대 이전의 본인과 불암산 간의 연기(緣起)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굳이 무관한 산을 빗대어 이름짓는다면 당시에는 서울 소재도 아니며 무명의 불암산 보다
더 연관되고 염원적인 산명을 차용(?)했으리라.
그러므로, 해당 구청에서 일약 스타덤(stardom)에 오른 예명의 주인공에게 명예산주를 준
것은 상호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비석의 글 또한 허사(虛辭)에 다름아니다.
생성(도암샘) 약수터.
1996년에 노원구청이 조성했단다.
노원구가 분구(1988년) 8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공들인 작품이었을 것이다.
개설 시기가 일천한 서울둘레길과는 무관하지만 신설 구(區)답게 구민의 웰빙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었을 것이지만 1996년에 통수했다는 파이프는 물 구경한지 오랜 듯 하다.
절로 된 옹달샘이 아니고 꽤 많이 투자한 인공약수터라면 수량과 수질도 확인하였으련만.
물이 마른 것은 건기(乾期)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지저분하게 방치한 것은?
(수락산)
1코스의 제2 스탬프대는 양자 택일의 위치(逆코스의 경우)에 있다.
불암산과 수락산의 경계에 해당되며 '난이도 상'의 핵심인 4.3km 덕릉고개를 넘는'기원
길'과 당고개공원의 '마을길' 중에서 택일하는 위치.
마을길도 당고개역으로 내려갔다가 가파르게 올라야 하지만 손자들의 체력과 점심식사
문제 때문에 후자쪽이 불가피했다.
아들의 가세가 빈곤층이 아닌데도 식사때에 예민한 손자들과 함께 하는 길은 내가 그들
에게 적응하는 것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다 해서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1대1이 아닐 경우 그들이 합일된 1대 2의 관계가 아니면 좌고우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사람과 사다리를 타본 적이 없는 사람 간의 최선의 만남은
유경험자의 양보 밖에 없는 원리를 나는 끊임 없이 활용하고 있다.
암벽타기 훈련장을 갖춘 당고개공원 양쪽길(불암산 수락산)은 짧기는 해도 아주 된비알이다.
곧 지나온 2스탬프대 위치처럼 두 길이 갈리고(순코스) 합치는(역코스) 지점을 지나면 수락산의
폐 채석장이다.
노원구의 '알림판'에 따르면 100년이 넘은 채석장.
1960~70년대,개발독재시대에 필요한 석재를 공급하기 위해 이 산을 크게 절단냈으나 그 반세기
이상 전인 20c 초(1910년 이전)에 이미 채석하던 산이다.
그러니까, 일제에 의해서 절단이 시작되었으므로 수락산이야말로 국치(國恥/1910년 8월 29일)
과정의 치욕을 몸으로 겪은 산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채석장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갖은 사고의 원인이 되고 있는데 수락산
채석장은 신기하도록 뒷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이즈음이라면 각종 시민단체들의 결사적 반대 때문에 용이하지 않은 채석이지만 당시는 일제와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독재시대라 거칠 것 없이 자행한 자연 파괴였다.
그랬음에도 이처럼 잘 정리 정돈하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공들여 조성해 놓은 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속죄행위라 하겠다.
수락산(水落山) 이름은 "거대한 화강암 암벽에서 물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서 따왔다"는 것이 서울
둘레길 측의 말이지만 다른 전설도 있다.
한 포수가 이름이 수락(水落)인 아들을 대동하고 호랑이 사냥을 나섰다.
돌연한 소낙비를 피해 큰 바위 밑으로 간 부자. 비 멎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포수.
이 사이에 호랑이가 아들을 업고 달아났다.
잠에서 깨어난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포수)는 자책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며 헤매다가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이후로, 비가 오면 산에서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절규, '수락아' 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기 때문에
마을민들이 수락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나.
아무튼, 산고수장(山高水長)은 중국 송나라때의 범중엄(范仲淹/학자 정치가)이 군자의 덕행을 산과
물을 빗대어 한 말이지만 수락산의 실상은 다르다.
사암(砂岩)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비탈길을 조심해야 하는 수락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도(638m)
웅장한 산세에 깊은 계곡, 석벽과 암반, 기암과 괴석 등으로 이뤄진 산이다.
그럼에도 100여명이 앉을 수 있다는 넓은 마당바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기암들이 경기도쪽에 있기
때문에 서울둘레길은 무미건조할 수 밖에 없다.
전설이란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를 말하며 어떤 공동체의 내력 또는 자연물의 유래,
이상한 체험 따위를 소재로 한 화제가 주로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기원길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한 거인손자국바위와 함께 전설의 주인공이라는 거인은 없다.
"자연생태계의 보존과 분해되어 가는 마을공동체의 회복"이라는 가치를 깨우치려는 의도라지만 파괴와
분해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가 불과 반세기라면 전설의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노원골 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지자체 노원구가 거금 57억원을 들였다는 수락산디자인거리다.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보행자 중심의 자연친화적 거리 조성이라니 제정신인가.
게다가 한전의 전신주 지중화공사와 병행해서 지상에 전신주 없는 깨끗한 거리로 조성했다고 자랑
하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구청 살림을 맡겼으니 오호 통재라 노원구민이어!
산자락에는 차량만 막으면 자연친화 길이 절로 된다.
건강을 위해 걸으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므로 애초부터 보행자거리다.
그러므로 무공해 흙길보다 더 좋은 길이 없는데 거금을 들여 길을 망치고(포장) 있는 사람들.
노원구에는 디자인거리 감이 없어서 산자락을 망가뜨리고 온갖 음식조리 공해를 확산시키는가.
띄엄띄엄 숲 사이에 끼어 서있는 전신주를 땅속에 묻어야만 친자연이 되는가.
구민의 피땀에 다름아닌 세금이 이렇게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건만.
잿밥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인가.
나무들의 SOS에는 맹농아가 되어 있으니.
서울둘레길1구간의 역코스는 벽운동계곡(수락골)을 건너면 곧 산길 구간을 마친다.
1960~70년대의 내 단골 산행코스 중 하나가 경기도쪽 마당바위 길로 올라와 정상에서 철모바위,
코끼리바위, 치마바위 등을 거쳐 벽운동계곡 따라 내려오는 길이었다.
장거리 교통이 편리해 감에 따라 근교 단골 산들에 서운한 감을 주게 되었지만.
신설과 확포장 등 도로의 사정이 서울 등산인구의 지방 분산 효과를 가져왔다면 지방 인구의 서울
집중 현상도 초래했다.
특히 철도(지하철 포함) 교통의 효과는 소요산과 용문산에서 보듯 상상 초월이다.
현재 공사중인 지하철4호선의 당고개 ~진 접(남양주시) 연장 공사가 완료되면 철마산과 천마산이
상당 기간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불암산과 수락산 등산 인구의 분산 효과를 기대해 본다.
위의 두 사진은 동일 위치의 1월(7일)과 6월(6일)의 현상이다.
나홀로 였던 1월 이후 두 손자의 약속 이행이 학교생활로 인해 지연되었기 때문에 날짜
간격이 길어진 것.
신비스럽고 오묘한 자연에 과도하게 심취하면 팬티이스트(Pantheist/범신론자)가 절로
되어질까.
육교로 동일로(?)를 건넘으로서 수락산과 완전 결별.
중랑천을 따르다가 상도교를 건넜다.
P턴 형식의 천변로가 끝나는 지점의 창포원에 당도.(천변로는 머잖아 연장될 것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공백 기간이 있었으나 손자들은 변함 없이 즐겼다.
내가 가장 주의 깊게 살핀 것은 마지 못해 하는 것과 스스로 즐기는 것의 차이였는데.
한겨울에 시작하여 완결 시기는 여름이 되었지만 반년에 가까운 공백에도 오히려 더
친밀한 손자들과의 관계임을 확인하게 되어 전화위복인 듯 기뻤다.
서울창포원은 이름대로 붓꽃((菖蒲/Iris)을 주로 한 특수 식물원이다
세계 4대 꽃 중 하나로 꼽힌다 하나 서울시는 왜 서울 강북의 한 쪽 끝자락,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단일종 식물원을 조성했을까.
수락산자락에 만든 노원구의 수락산디자인거리와는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국내산 약용식물의 대부분을 한 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 약용식물원, 습지원(각종 수생식물과 습지
생물들을 관찰하는 데크 설치)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기는 했지만.
서울둘레길의 시종점(1코스의 들머리, 8코스의 날머리)을 창포원으로 정한 이유까지 누가 속시원히
답해줄까.
'완주 인증서'가 시장(박원순) 이름으로 발급되고 있을 뿐 창포원도 서울둘레길도 현 시장의 작품은
아닌 듯 한데 황당한 조건을 걸었다가 스스로 물러난 전임 시장이 답변에 응할 기분일까.
산과 길에서 순방향(시계방향)에 비해서 역방향(반시계방향) 진행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무수히 체험했다.
국내의 백두대간 오르내리기 각 2번에서, 까미노의 마드리드 길과 뽀르뚜 길
에서 무수한 방황이 오직 역방향이기 때문이었으니까.
서울둘레길도 역방향 진행자에 대한 배려는 없다.
다만 전체 거리가 짧고 링반데룽(ringbanderung/환상방황)에 걸릴 위험지가
없으므로 큰 대미지는 없으나 순방향에 비해 불편한 것 만은 분명하다.
순. 역 가릴 것 없으며 이미 6회나 완주한 북한산둘레길의 서울지역 구간만
남았으므로 일본식 금언으로 표현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시작이 반"이라 하지만 일본인은 100리 중 99리를 반으로 보니까/
100里の道も 99里を半ばとする)
서울둘레길은 손자들과 함께 걷기 때문에 마친 저녁시간에도 단독으로 하는
일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홀로인 이 구간에서 단골집을 찾아갔다.
아마도 몇년만의 일이다.
내게 단골집의 개념은 자주 들르는 것이 아니라 공백 기간 또는 횟수에 관계
없이 들르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집을 의미한다.
마시고 먹은 음식값 받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주인녀.
15년쯤 전의 일이다.
백두대간과 9정맥을 완주하면 축하상을 차리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
한데도 아직껏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그녀.
마지막 8코스의 전야에 근년에 드물게 대취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