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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인생(8) 군대장관에서 도망자로 사무엘상 21장 10-15절
엊그제 까지 양을 치던 작은 목동 앞에 놓여진 거대한 인생의 소용돌이, 조금의 배려도 없이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 앞에, 하나님은 요나단이라고 하는 신앙의 벗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꼭 한 사람은, 이러한 좋은 벗을 갖게 되시길, 그리고 이런 좋은 벗이 되시길 지난 수요일에 축복해드렸습니다. 분명 여러분은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벗들이 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걸출한 두 영웅의 우정은 너무나도 짧게 끝이 나고 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뒤 사울은 곧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는데, 맡기는 일마다, 가는 곳마다, 출전하는 전쟁마다 큰 성공을 거둠으로 다윗은 새로운 영웅으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습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사울왕의 귀에는 자꾸만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유행가처럼 불려지던 그 노래가 길거리만 나가면 창문만 열면 들려왔던 것입니다. “사울의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자는 만만이로다” 이를 견디지 못한 사울은 질투의 눈을 부릅뜨고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야 이것 봐라, 내가 죽인 자는 천천, 다윗은 만만? 이제 이자가 다음에 바라볼 것은 이 나라와 왕좌밖에 무엇이 더 있는가!” 그리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은 악신에 들려, 수금을 연주하고 있는 다윗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창을 두 번이나 집어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두 번 모두 창을 피했지만 얼마나 놀랬을까요? 저처럼 악보에 코를 박고 코드를 보고 기타를 쳐야하는 다윗이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이 사울왕의 질투와 시기 속에 위태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도 알지 못했던 궁 밖에서는 여전히 다윗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는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고, 사울은 자신에게서 떠난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임함을 느끼고 계속 좌불안석이었습니다.
딸 미갈을 다윗에게 시집을 보내면서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기 위해,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이고 오라고 요구하였건만, 다윗은 오히려 200명을 죽이고 돌아왔던 것이지요? 사울이 세우는 모든 악한 계략은 전부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후에도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계속되는 승리로 명성을 날리게 되면서 이에 사울은 자신의 약속이나 체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다윗제거를 위해서 모든 힘을 쏟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의 다윗을 향한 적개심을 보면서 누구보다 마음 아파한 것은 바로 왕자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 가서 다윗을 자비롭게 대할 것을 탄원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요나단은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나아가 다윗을 위해 간청하지요. 그러나 사울은 오히려 격노하면서 “다윗이 살아있는 한, 나와 네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을 어찌 모르느냐? 저는 죽어야할 자다!”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너는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다.” 막 해서는 안되는 말까지하면서 아들에게도 창을 던집니다. 그날 요나단은 아버지의 다윗을 향한 증오가 얼마나 커다란지를 깨닫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면서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곤 둘만의 약속대로 다윗을 피신시킵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지체말고 빨리 달음질하라!”(삼상20:37-38) 그렇게 다윗은 아버지와 요나단을 떠나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도망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에서, 이제는 쫓기는 도망자로 다윗의 옷이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다윗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름부은 자, 다윗의 생애가 왜 이렇게 험난하고 고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여정에 어떤 것을 준비해 두셨을까요?
블레셋 최고의 용사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 군대의 새로운 영웅이 되어 백전백승하던 신예 장군 다윗, 그러나 너무 뛰어났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왕의 창을 피해, 왕자 요나단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왕궁을 탈출한 다윗은 그때부터 십년을, 그 소중한 20대의 대부분을 유대 광야 곳곳으로 고달프게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직접 선택한 자, 기름 부은 자의 리더십 훈련을 꼭 이렇게 시키셔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시절 다윗은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한 곳에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그는 여기 저기 그렇게 방랑하며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망자의 세월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보호,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오늘 도망자 다윗을 뒤쫓아 가면서 한 사람, 그 마음에 합한 리더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보실 수 있길, 그리고 오늘 우리의 피곤하고 고단한 삶 속에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도 아울러 발견해 보실 수 있길 축복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최고의 무사들을 선발해서 다윗을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국가 기관이 총동원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죄어드는 그 순간, 다윗은 왕자 요나단에게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20:3)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삼상20:8) 그냥 요나단 형, 형 손에 나를 죽이라고 그럽니다. 얼마나 다윗이 오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를 확인해봅니다. 그 생명의 위기 속에서 다윗이 지었던 시가 시편 59편인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두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시59:4) 얼마나 답답하고 급했으면 좀 주무시고 계시지 마시고 깨어서 돌아보시라고 고백할까요? 나는 정말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답답한데 하나님은 아무 말도 없이 주무시는 것 같은 순간을 마주하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심정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까요?
도망친 다윗은 먼저 놉땅으로 갑니다.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놉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여호와의 궤를 모시고 있던 곳입니다.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었던 다윗은 일단 여호와의 제사장이 있는 이곳,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이곳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아직 사울이 다윗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려 쫓기 시작한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장군 다윗이 별 무장도 없이 혼자 지친 모습으로 도착했을 때 벌써 이상한 낌새를 차립니다. 그때는 이미 사울왕이 젊은 영웅 다윗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이 온 이스라엘에 알려졌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산 사람을 돕다가는 멸족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눈치를 챈 다윗이 먼저 선수를 칩니다. 자신은 사울왕의 밀명을 받아 비밀임무를 수행중이라고 여러 소년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삼상21:2) 그리고는 거룩한 떡 진설병으로 굶주림을 면합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무기를 달라고 합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무기를 찾다니요? 그러나 마침 그곳에 두었던 자기가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았던 칼을 가지고 도망합니다. 뭐라고 하면서요?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삼상 21:9) 언제 자기가 칼을 써보았다고 칼을 들고 갈까요? 골리앗과 싸울 때도 필요없던 칼이 왜 오늘 다윗에게는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다윗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드신 것 같은 상황, 인간적인 모든 상식을 총 동원해서 지금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기가막힌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읽으신 본문입니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21:10)
오늘 다윗이 도망간 곳이 어디라구요? 블레셋의 가드땅입니다. 가드가 어디입니까?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골리앗을 죽였던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나타났으니 그곳 사람들은 기가찼을 것입니다. 늑대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이 호랑이 굴에 뛰어든 셈이 된 것입니다. 골리앗이 죽던 그날 다윗과 이스라엘에 죽은 블레셋 군대의 숫자가 얼만데요? 그 식구들이 그 가족들이 그 자녀들이 오늘 다윗의 이름만 외치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곳에 지금 다윗이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칼만이라도 가지고 가면 정치적 망명이 쉽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만큼 다급했고 사리분별이 어려운 형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노여움을 사 이스라엘 전체의 공권력이 자신을 추격해오는 판에 안전한 곳이라고는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 블레셋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나라의 국정원과 모든 특공대에 쫓기는 한국군 수장이, 월북한 것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이 누구냐고 얼른 죽이라고 그럽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삼상21:11)
바로 그때 눈치 빠른 다윗은 갑자기 미친 척합니다.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고, 문짝을 긁어대며 발작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지요? 이를 본 블레셋 왕은 기가 차서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삼상22:14-15) 하나님께서 오늘 아기스 왕이 다윗을 아주 하찮게 보도록 눈을 가려주시는 바람에 가까스로 아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 세금을 면하여 주겠다던 아버지 집은 어떻게 되나요? 역적의 집이 안녕하겠습니까? 오히려 왕에게 잡혀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는 인질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아버지와 형들도 기록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속히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삼상22:1) 평온했던 온 가족이 한꺼번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축복일까요? 골리앗을 죽인 자에게 준다던 왕의 약속은 어디있습니까? 세상의 약속, 오늘도 그 눈이 시기와 미움에 사로잡혀 버리기가 쉬운 인간의 약속은 이렇게 허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다윗이 도주하는 장면들만 쭉 놓고 보면, 얼마전 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가는 전투마다 승리하던 용감한 장군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참한 몰골이 될 수 있나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토록 용감한 믿음의 사람인 다윗도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까, 거짓말도 하고, 미친 사람 흉내도 내면서 살아남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인생이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이내 말합니다. “미치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다윗은 정말 미친 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만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다윗으로는 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윗에게 도움을 주었던 놉땅 아히멜렉의 집이 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삼상22:18-19)
그리고 그 와중에 한 사람이 도피해서 다윗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면목이 없을까요? 나 하나 고생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 하나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과 사람들이 있으면 정말 괴로운 것이지요? 게다가 자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관한 소식을 들으면서, 그것도 제사장가문 에봇을 입은 사람 85명이 죽었다는데 다윗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사무엘의 기름부음,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왕 되게 하시려는 비전, 다 내려놓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냥 예전처럼 양치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요 며칠간의 일들을 다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꿈이었으면 좋겠다 뺨을 꼬집지 않았을까요? 형 말을 듣고 얌전히 있을걸 내가 뭐라고 골리앗 앞에 달려나갔을까 막 후회하지는 않았을까요? 도시락만 얼른 주고 집으로 돌아갔어야는데 무슨 공명심에 눈이 멀어 사람들에게 상금을 물어보고 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무거운 고통과 마음에 빚을 지고 살아야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원망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생명마저도 더 이상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그 생명을 저버리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로 온 사람들, 그리고 자기 때문에 곤란을 겪게되는 사람들을 향한 빚 때문에라도 그는 더욱 이를 악물고 살아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의 생명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목숨값을 지닌 사람으로 그의 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갑자기 시를 쓰는 인생 안 하고 싶어지진 않으십니까?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참 무서운 본문을 택했고, 위험하고 어려운 인물을 소개하고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저 골리앗 너머의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이 아니라 이렇게 무서운 곳이었구나 하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야의 과정이 없이 세워지는 인물은 없음을 또한 확인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다윗처럼 광야를 살고 있는 우리 하일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은 위로하고 싶으시구나, 그리고 오늘 다윗에게 주신 것과 같은 아름다운 영광과 결말을 주시고 싶어하시는구나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순간과 형편에도 오늘 다윗과 같으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막상 닥쳐서는 이 믿음, 이 마음 붙들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요? 성경이 소개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여러 사람의 피흘림 속에 세워집니다. 예수님은요? 두 살 아래 사내아이가 다 죽는 울음소리 속에 헤롯의 눈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가시면서 그 생애가 준비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기억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온통 울음소리가 많은 곳에, 무고한 사람들의 피흘림 한복판에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처럼 더욱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고 당장 우리가 해야할 일들에 집중하시고 최선을 다하시는 종들이 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우리를 향해 준비되고 진행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 당시, 그 어린 핏덩이들의 죽음은 포악한 바로와 헤롯대왕의 폭정 때문이라고 하지만, 오늘 놉땅의 죽음은 사울의 악함 이전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다윗 때문이었던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밀고를 통해 사울왕의 눈에 들고 싶어했던 도엑의 욕망 이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이 중에 하나만 없었더라도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저 사울과 도엑이 변하길 기다리기 보다, 오늘 우리의 입술에서 거짓을 제하는 것이 빠릅니다.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급하고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무서운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우리 입술에서 거짓말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더욱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편법을 써서, 거짓말로 상대방을 이용하고나면, 내가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죄없는 상대방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힘든 시절, 살아남으려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을 힘겹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 기억들이 혹시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그때의 잘못과 실수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 오늘 말씀을 주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망자 다윗이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이며, 기도하는 중에도, 갖은 인간적인 방법을 쓰는 모습, 거짓말을 하는 모습, 교회에 와서도 말씀이 아니라 칼과 음식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다윗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 본인도 그렇게 살아남으면서 얼마나 비참하고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달래주시고 덜어주시고 위로하시며 함께 하시는, 마침내 그를 기름부으신대로 이스라엘과 유다, 통일 왕국의 왕으로 세우시는, 오늘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저와 여러분도 만나시길 축복합니다.
도망자 다윗은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푸른초장에서 양을 치면서 늑대가 나쁘고 사자만 나쁘다고 생각하던 다윗에게 사람의 악함을 가르치셨던 것이지요? 사람이 저 짐승만도 못함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급박하고 얼마나 무서웠으면 블레셋으로 들어가고, 미친 사람행세를 했겠습니까? 다윗은 그 당시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편 57:4)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 미움과 구박의 자리에 서 보셨는지요? 인생살이에서 큰 잘못이 없는데도 나를 오해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중상하고 죽이려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정글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미움과 질시를 받을 때만큼 고통스러운 때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우리는 크게 성장합니다. 사람들의 채찍에 맞고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심정을 배우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인간은 사랑해야하고 용서할 대상이지, 믿고 신뢰할 대상은 아님을 한번 또 확인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로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실 때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목사를 보고 목사를 믿고 교회를 다니시면 안됩니다. 목사와 예수님은 차원이 다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보시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아무리 전도사 때부터 일평생 교회를 섬겨도 건강하고 안 아픈 극히 일부만, 정말 하나님과 성도들의 사랑을 받은 목사님들이 70에 은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어야 한 교회에서 30년 정도가 최고입니다. 있다가도 떠나고, 병들어서 죽고, 시간 지나면 바뀔 목사를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시험거리만 가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날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교회의 주인이, 머리이신 예수님과 그의 몸된 성도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순례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오늘 이 광야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다윗을 광야로 몰아세우신 것일까요? 다윗이 머물던 광야는 온도변화가 심하고 물이 부족하고 모래천지인 곳이기에 쉽게 탈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사막을 지날 때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진액이 빠져 나가듯 힘든 것을 경험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못하시는 영역은 이 우주가운데 없다는 것이지요? 물고기뱃속, 산의 뿌리에 있던 요나도 돌보시는 주님이, 우리 인생의 광야, 사막 한복판, “도저히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자아포기를 선언하는 순간,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도망자 시절은 우리의 기존 가치관을 뒤엎어버립니다. 평소에 우리가 애지중지하던 것들이 사막과 광야에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합니다. 고급 자동차도, 멋진 집도, 그토록 잠못자고 이룬 학위도, 보석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늘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물 한 모금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봐주고 가치를 인정해 줄 사람들과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을 때 의미가 있지 사막에서는 다 쓸데 없는 것들인 것입니다. 도망자가 되어 인생의 사막에 들어가면 평소에 중시하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고,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목록이 재정리되는 것이지요? 돈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도망자는 고독합니다. 인생의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고, 수많은 시편, 수많은 노래들이 지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세상의 방송들을 다 끄고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편) 더욱 하나님을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우리에게 하나님 집중할 수 있는 광야의 기회를 주실지 모릅니다.
또한 도망자 다윗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면서 자신의 자아가 철저하게 부서지는 경험을 합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낮아보이는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자존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퍼런 자아는 오늘도 남을 힘들게 하고 자신을 힘들게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광야 덕분에, 비로소 우리의 어줍지 않은 자아가 부서지고 녹아집니다. 변함없이 내 곁에 함께 해주신 하나님을 그 사랑을 드디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스스로 돌이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반성을 잘 하지 못합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그 인생을 두 번다시 없는 최고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성경은 늘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그가 미친척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후 썼던 시인데 그 서두는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은 오늘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미친 척, 그 발연기가 뭐 대단하기나 했을까요? 그 연기로 아기스의 눈을 가려주신 하나님, 그 신하들의 주청을 거절하게 하신 하나님,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오늘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 생애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단 일분도 허트루 살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다윗은 사울이라는 무서운 도끼날로부터, 아기스라는 서슬푸른 도끼날로부터 자기를 지켜주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 찬송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에 서서 넘치게 해야할 감사는 무언가 내 원하는 것, 자랑할 것이 풍성하게 넘치도록 주어졌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임재와 돌보심, 역사, 그 손길을 체험하면서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절박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기도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붙들며 새로운 용기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단순한 전쟁터의 용사가 아닌, 인생과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세워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하일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이처럼 힘들고 고단하고 어려운 중에 더욱, 하나님 주시는 용기와 힘으로 새 역사를 위해 일어나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과 생명 사이가 한 걸음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인생을 오늘도 세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 그 주님의 섭리와 돌보심을 더욱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고백하시고 찬송하시는, 최선을 다해 내 생명의 참 무게를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다윗의 생애, 그 영광과 축복의 찬란하고 빛나는 순간이 아닌, 오늘 도망자요, 거짓말하는 자요, 많은 사람을 고생하게 하고 죽게 만드는 인생의 고난과 수난의 모습을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고난없는 영광이 없음을, 오늘도 요행과 영광만을 원하는 우리에게 다시금 인생의 법칙을 확인케 하심을 깨닫습니다. 주님, 포악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세상 속, 질투하고 시기하고 죽이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기억하는 종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또한 모든 순간 악한 이들의 계획과 도모를 바라보며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서 거짓과 허망한 말들을 제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더욱 커져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마침내 선을 이루시고 마침내 허락하신 약속과 비전을 이루실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오늘도 내게 허락하신 인생의 무게를, 생명의 가치를 기억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사망과 생명사이가 한걸음이라고 고백한 다윗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더욱 주님의 손을 붙잡고 실족하지 않는 걸음으로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의 순간, 광야의 걸음에 여전히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며 용기주시고 힘을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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