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교구의 설정과 선교회들의 진출
2. 조선교구의 설정과 선교회들의 진출
1) 조선교구의 설정과 파리 외방 전교회
한국에 진출한 첫 선교회는 파리 외방 전교회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1811년 10월 24일 자로 교황에게 보낸 조선인 신자들의 서한과 그 서한의 내용을 지지하는 북경주교의 서한은 교황청으로 하여금 조선 땅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촉구하였다. 1824년 포교성은 여러 수도회에 서한을 보내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 선교지는 유럽 교회에 그다지 매력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선뜻 나서는 수도회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827년 샴 교구의 보좌주교로 활동 중이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브뤼기에르(Bruguiére)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리고 1831년 9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원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代牧)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조선 교회의 사목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교황청이 한국교회를 위해 파리 외방 전교회를 지목한 것은 이 회가 당시 큰 선교단체 중 하나이므로 한국에 선교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 교회를 포르투갈 보호권하의 교구인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교구 설정 이후 1835년 첫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계속 파견되었고, 조선 교회가 발전하자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하여 사목하였다. 1909년에는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성 베네딕도 수도회를 초빙하였고, 1920년 원산지목구를 설립, 사목권을 이양하였으며, 1923년에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를 초빙하여 1927년 평양지목구를 설립, 사목권을 이양하였다. 1933년에는 아일랜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초빙하여 1937년 광주지목구를 설립, 사목권을 이양하였으며, 같은 해 전주지목구를 설립하여 한국인 성직자에게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그리고 1941년에는 서울대목구의 관할권을 한국인 성직자에게 이양하는 등 국적이 다른 많은 선교·수도회를 초빙하고 관할권을 나눔으로써 한국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울 성가 소비녀회, 포항 예수성심 수녀회의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각종 교리책을 출판하고,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120여 명의 한국 성직자들을 양성해냈다.
그런데 파리 외방 전교회는 당시의 대표적 선교단체였던 예수회나 도미니코회와 같이, 복음의 전파 방법을 사회·문화 활동에 두었던 단체가 아니었다. 이 선교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들이 선교 활동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던 상황에서 선교의 순수성을 찾고자 하는 교황청의 노력으로 창설된 단체였다.한국에 입국한 초기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 문화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입국 하자마자 사회복지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언론 출판 인쇄사업, 지역사회 개발사업, 한국 문화연구 등을 추진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들이 전개한 활동들은 형태나 규모에 관계없이 근대적인 지식과 서구적인 방법에 의한 한국 최초의 사회개발사업이었다는 점, 그 후에 전개된 한국사회개발사업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선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사회문화 활동들은 상당한 한계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 한계성은 1세기 이상 계속된 박해 상황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선교사들의 사회적 배경과 천주교 수용 계층의 계급적 특성, 그리고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파리외방 전교회의 선교 방법은 사회문화 활동을 통한 복음 전파에 두었던 선교회가 아니었다. 이 선교회는 피선교지 교회의 자립과 영성 강화에 관심을 갖는 단체였다. 또한 당시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성속이분법(聖俗二分法)에 토대한 경건주의 신앙(敬虔主義信仰), 그리고 문화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참여보다는 사회로부터의 초월에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당시의 신자들은 사회문화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활동을 뒷받침할 인적·재정적 능력도 갖추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이 전개한 대부분의 활동은 한국 사회나 한국 문화의 발전보다는 교리의 습득이나 전파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 내용도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저급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초기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은 민족사에 있어서 대전환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식계급들은 서구문물의 흡수를 통한 개화와 자강, 그리고 독립을 갈망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폭넓은 사회문화 활동이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당시의 발전가치와 선교사들의 활동이 결합될 경우 한국 교회는 민족사에서 응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가졌던 초월주의적·내세주의적인 신앙과 사회 무관의 정교분리정책(政敎分離政策)은 한국 교회를 사회무관심주의로 흐르게 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창립 정신은 물론 민족사와의 만남도 스스로 차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며, 한국 교회의 토착화나 민족 교회로서의 성장도 저지시키고 말았다.
한불수교(韓佛修交) 이후 종교의 자유,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또 다른 국면에 부딪쳤다.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선교의 피해는 물론 일제의 물결을 타고 몰려온 급속한 개화의 파동은 선교사들을 더욱 당황하게 하였다. 종교 활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나 간섭은 나름대로 이해나 타협을 통해 타개해 나갔으나 급변하는 새 세대의 정신사조, 새 물결, 새 문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새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선교방법을 모색해내지 못함으로써 그 시대인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1890~1910년 사이에 개종이 많았으나 ‘한일합방’이 되면서 개종운동이 점차 이완되고, 한국인들의 정신 상태는 2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책이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박해시대와 마찬가지로 외교인에 대한 직접 선교는 생각하지 않았고, 일제식민당국의 정교분리원칙(政敎分離原則)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간접 선교 또는 문화 선교를 멀리하게 되었고 따라서 직접 선교, 즉 복음 선교에 전념하는 안일한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활동은 19세기 조선 말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한계를 드러낸 유교의 통치 체제 아래에 놓여 있던 조선인들을 자각시키고,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성속이원론적(聖俗二元論的) 신앙구조와 유럽우월주의 등은 한계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말 일제 강점기에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을 외면하였던 태도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갖고 있던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성속이원론에 토대한 초월주의적 신앙유형 및 내세주의 신앙은 사회문화 활동의 폭을 크게 제한하였다. 또한 문화 우월주의적 태도와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행세는 그들이 전개하는 그나마의 활동도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통이나 내재적 요구, 그리고 역사적 현실과는 유리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이 주도한 개화기의 한국 교회는 창립 때의 교회정신과 단절되는 한편 민족사와도 단절되는 이중 단절의 부정적 측면을 나타내게 되었다.
2)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진출과 교육 활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한국인의 교육열이 높아지고 많은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천주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교세통계표에 나타난 천주교 학교 수는 60여 개교를 헤아렸는데 그 모두가 초등교육기관이었고, 중등교육기관 이상의 학교는 없었다. 1910년 천주교 학교 수는 120개로 증가하였다. 문제는 적절한 교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천주교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필요한 기초 교육뿐만 아니라 종교 교육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이 아울러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특수한 교사를 얻기 위해서는 천주교 자신이 사범학교를 운영해야 했다. 그래서 사범학교의 설립이 한국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조선교구장 뮈텔(Mutel) 주교는 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먼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마리아니스트회와 한국 진출을 교섭하였다. 그러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재정이 어렵고,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뮈텔은 1908년 유럽으로 건너가 그해 8월까지 마리아니스트회, 살레시오회, 성 베네딕도 수도회, 그리스도교 교육회, 빈첸시오회 등 닥치는 대로 수도회들을 찾아가 한국 진출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부정적인 답변을 보낼 뿐이었다. 뮈텔은 다시 로마로 갔고 포교성의 격려로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서면으로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즉, 한국에서 직접 선교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생활을 실현하고 아울러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경영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어 1908년 9월 15일 수도원을 방문하여 다시 간청하였고, 며칠 후 베네딕도회는 한국 진출을 결정하였다. 당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회원 수가 부족하고 사제가 9명뿐이어서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음에도 교황과 뮈텔 주교의 한국 진출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9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하 베네딕도회로 약칭)가 서울에 진출하였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처음으로 국적이 다른 선교회의 선교사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근본적으로 관상 생활의 베네딕도 회칙을 따르면서 동시에 선교를 목적으로 1884년 창설된 비교적 역사가 짧은 선교회였다. 그런데 선교 활동이 그들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일반 선교회의 경우처럼 직접 선교가 아니고 간접 선교라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즉, 성당 사목을 하거나 독자적으로 지역을 맡아 교구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교구 안에서 공동체적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문화적으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또한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은 문화적 활동이었다. 문화 활동을 통해, 특히 평신도, 의사, 예술가, 교육가들을 파견하거나 직접 수공업 학교나 농업학교 등을 운영함으로써 교구 내의 선교를 돕는 동시에 교구 내의 일반 주민의 생활수준의 향상에도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베네딕도회는 한국 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회로, 한국 교회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을 설립·운영했다. 10여 년에 걸쳐 다양한 기술 교육을 실시한 실업학교 운영은 한국의 실업교육사에서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1910년 베네딕도회는 실업학교 숭공학교(崇工學敎)를 설립하였고, 1911년 9월 2년제 사범학교 숭신학교(崇信學敎)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숭신학교는 ‘한일합병’ 이후 한국인을 위한 사범학교 운영을 일제식민 당국이 금하였기에 1회 졸업생만 배출하고 폐교하였으며, 숭공학교도 재정이 어려워 힘겹게 유지해 나갔다. 숭공학교는 1914년 7월 학생수가 70명에 이르렀고, 전망이 좋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전쟁으로 수사들이 동원되자 학생 수를 제한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이 독일인이 경영하는 숭공학교를 적산으로 몰수하려 하였기에 파리 외방 전교회 측에 형식적으로나마 숭공학교의 경영권을 인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네딕도회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한국 진출의 첫째 목적인 사범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그 초기에 좌절되었고, 실업학교도 변화된 상황에서 예전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수도회인 동시에 선교회이므로 선교지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다른 활동 분야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 분야가 서울에서는 모두 거절되었다. 서울 수도원의 신부들은 수도생활을 하는 한편 성당 사목을 하려 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종현(鐘峴)과 약현(藥峴), 두 성당밖에 없었다. 그래서 베네딕도수도원이 자리한 백동(白洞)에 제3의 성당을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고 베네딕도회는 백동 성당을 설립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교구장 뮈텔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를 맡도록 제의하였다. 그러나 베네딕도회는 적은 능력으로 그곳에 이미 정착한 개신교와 경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함경도를 선택, 1920년 간도(間島)를 포함한 함경도가 원산교구(元山敎區)로 설정되고 베네딕도회에 선교가 맡겨졌다.
1920년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이 교구의 선교를 베네딕도회가 담당하기로, 그리고 서울 철수를 동의했음에도 노르베르트 베버 총원장은 숭공학교의 폐교가 한국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교성에 서한을 보내 재고를 간청하였다. 한국의 개신교가 성공하고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원인은 그들의 교육사업과 사회사업 때문이니 한국의 천주교가 개신교와 경쟁하려면 이런 사업으로 한국인의 신임을 얻어야 하므로 기존 시설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숭공학교는 처음부터 평판이 좋았고, 한국 천주교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으므로 이 학교가 폐교되면 한국 천주교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당시 서울의 신문들은 베네딕도회의 그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들이 서울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서울의 베네딕도수도원과 교육 사업의 포기는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참작하더라도 한국 선교 사업의 전체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등고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서울에 진출, 일제의 탄압과 세계대전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베네딕도회는 수도생활과 교육사업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러나 1920년 원산교구의 설정과 더불어 베네딕도회는 이 지역의 선교를 떠맡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고, 동시에 교육 사업도 중단하였다. 베네딕도회는 덕원(德源)에서 제2의 출발을 하였다. 당시 함경도는 천주교 선교에서 제일 낙후한 지역이었다.
1921년 서울 수도원 내에서 소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 교육을 시작하였고, 수도원과 함께 1927년 11월 덕원으로 이전하여 그해 12월 1일 덕원에서 개교하였다. 그리고 소신학교 설립 14년 만인 1936년 첫 사제를 탄생시켰다. 또한 1942년 2월 16일 인가를 받지 않은 서울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가 폐교되고 이듬해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도 폐교되자 이 두 신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받아들여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 교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한공산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1949년 5월 11일 신학교 건물이 몰수되어 설립 22년 만에 베네딕도회가 설립한 덕원신학교는 폐교되었다.
덕원 이전 이후 수사들의 활동은 의료, 농공, 출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의료 활동을 통해 괄목할 만한 전교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28년 5월 정식으로 일제식민 당국의 인가를 얻어 의원을 개원하고, 서울 국립병원 원장의 추천을 얻어 3년 동안 의사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의원 개설 후 1929년 5월까지 약 1년 동안 18,88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처음에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실비로 받았으나 약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점차 무료 진료를 줄이고 약값을 올려 받았다. 1929년 여름에는 수도원에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고 1933~1934년 이를 증축하였다.
농공 활동은 서울에 있을 때 기초를 닦았던 목공소, 철공장(대장간), 농장(목축 포함) 등을 덕원으로 그대로 이전하여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장이 확대되면서 제분소를 건립하였고, 육림·원예·양봉 사업, 자물쇠 공장, 칠 공장도 운영하였다. 농장 경영과 건축 사업은 가난한 신자들의 구빈 활동에도 도움이 되었다. 1927년 인쇄소를 설립하여 출판, 인쇄 활동을 했다. 1930년 출판을 시작하였는데 첫 결실은 1933년 간행된 한글판『미사 규식』이었다.
뒤늦게 탄생한 원산교구에서도 현지인 포교지 교구의 신설을 서둘러 1928년 원산교구를 덕원면속구와 함흥교구로 분할하였고, 함흥교구를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임하였다. 또한 1940년 덕원수도원 구역을 면속구로 분리시키는 동시에 종래의 포교지(원산대목구)를 함흥대목구로 개칭하고 적당한 시기에 그것을 한국인 성직자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국의 첫 선교회인 파리 외방 전교회와 첫 수도회인 베네딕도회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1835년 한국에 진출한 이래 40년간 박해를 받으면서 늘 숨어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을 완전히 또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보다 75년 후에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한국관 형성 배경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배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한국정부를 체험하지 못하였고 ‘한일합방’ 직전에 도착하였으므로 한국 자체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조차 갖지 못하였다. 또한 베네딕도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원산교구를 담당하게 된 이후 한국의 통치자인 일본 당국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현실적인 한국을 연구하고 소개할 수는 없었으나 반면 한국의 전통문화, 외래문명에 오염되기 전 한국문화의 원형을 밝히고 소개하는 데에는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들은 수도자였기 때문에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처럼 언제나 일선 사목에 종사해야 할 재속신부들보다는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고, 한국인들에게 고등교육을 실시하고자 내한하였던 만큼 기초 지식으로서 한국의 언어, 역사, 민속 등을 깊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3) 메리놀 외방 전교회와 골롬반 외방 전교회의 진출
유럽 대륙을 모국으로 하는 파리 외방 전교회와 베네딕도회에 이어 1923년 5월 10일 미국을 모국으로 하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1911년 6월 29일 설립, 이하 메리놀회로 약칭)가 한국에 진출하였다. 메리놀회는 한국에 진출한 두 번째 선교회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로부터 92년 만이었다. 유럽이 아닌 미국을 모국으로 하는 선교회였으므로 선교의 다양성을 표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선교회는 어느 선교회이든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일으키고 신자를 증가시키고 교회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을 근본 사명으로 하지만, 그 방법은 선교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실제로 다르다. 메리놀회는 1927년 평안도를 관할구역으로 설립된 평양지목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메리놀회 소속 첫 한국인 신부를 배출하였고, 평양에 메리놀 센터와 한국어학당을 설립하여 선교에 주력하였다.
메리놀회의 진출에 이어 1933년 10월 29일 성 골롬반 외방 전교회(1916년 아일랜드에서 설립, 골롬반회로 약칭)가 진출하였다. 『Demange 주교 일기』(Journal de Mgr. Demange) 1933년 10월 29일자. 전라남도 선교를 목적으로 목포에 거점을 마련하고 전라남도 선교를 준비하던 중 1937년 4월 13일 광주교구가 설립되자 그 관할권을 부여받았고, 1938년부터 강원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다 1941년 춘천교구가 설립되자 그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하여 1831년 파리 외방 전교회를 시작으로 1945년 8·15 해방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3개의 선교회와 1개의 수도회가 선교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선교·수도회는 각기 모국을 달리 하였고, 수도회들에 의한 한국 교회의 지역적인 분할은 수도회의 모국에 의한 한국 교회의 내적인 분할의 모습도 띠웠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 노력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일합병’ 이전에 비해 새로운 입교자들의 증가율이 감소되고 신자들의 종교열이 식어졌다고 해도, 특히 재정난으로 선교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일제하 35년간 선교사들은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1910년 1개 교구이던 것이 1940년 일제 말에는 9개 교구로, 신자수도 73,519명에서 177,038명으로 약 2.4배 증가하였다. 이 같은 교회의 신장은 파리 외방 전교회·베네딕도회·메리놀회·골롬반회 선교사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4) 작은 형제회와 수도 영성
3개의 선교회나 1개의 수도회와는 성격이 다른 또 다른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였다. 1937년 9월 15일 대전에 진출한 작은 형제회는(1223년 설립) 관상 생활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에 진출해있던 캐나다관구가 한국 교회 사제단의 피정을 지도하면서 한국 진출을 모색, 1937년 4월 16일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라리보 주교는 4월 22일 서울교구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대전에 수도회 설립을 허락하고 서울교구 성직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 설립을 요청하였다. 캐나다 관구 소속 회원 2명이 진출하여 1938년 12월 대전 목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작은 형제회가 진출한 19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였고,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종교계에 대한 압박도 심하였다.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 태평양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 모습과 활동을 잘 펼 수는 없었지만 프란치스칸 영성을 지닌 작은 형제회의 진출은 한국 교회에 수도 영성을 소개하는데 기여하였다. 베네딕도회가 진출해 있었지만 원산교구를 관할하고 있었고, 3개의 선교회들이 각기 관할구역을 나누어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당시에 작은 형제회는 성당 선교라는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생활로 한국 교회에 영성의 축을 형성함으로써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교를 위주로 달리고 있던 한국 교회에, 일제 말기의 혼란기에 프란치스칸 영성에 의한 수도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831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로부터 1937년 작은 형제회까지 106년 동안 3개의 선교회와 2개의 수도회 등 5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진출하여 한국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첫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92년,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세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10년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한편 1909년 교육 사업을 목표로 진출한 베네딕도회에 이어 두 번째로 진출한 수도회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펼치고자 하는 작은 형제회로 28년 만이었다. 포교지 교회라는 이유 때문이겠지만 100여 년 동안 겨우 2개의 수도회만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수도 영성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선교회에도 각기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러나 선교회들은 최고의 목표가 포교지에의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회들의 선교 노력을 뒷받침해준다는 측면에서도, 피선교지 현지인들의 신앙 활동의 다양한 접근이라는 측면에서도 수도회가 두 개뿐이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표 1> 조선교구 설정 이후 8·15 해방 때까지의 남자 선교·수도회
수 도 회(교황청 설립) |
선 교 회 |
계 |
성 베네딕도 수도회(1909) 작은 형제회(1937) |
파리 외방 전교회(1831) 메리놀 외방 전교회(1923)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1933) |
5 |
2 |
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