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외 4
이 정 식
가슴 속 깊이 스미는 갈바람
민둥산 억새의 마지막 흔들림은
일렁이는 파도의 부서짐이라
소리 없는 숨죽임에 울부짖는
마른 잎새가
스산한 오솔길을 메움은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함이라
산골 마을 외딴집
하얀 연기 피어오르면
외지로 떠난 자식 생각에
흰 수건 머리 두른
저녁 짓는 어미가 그립다
첫 눈
겨울이 오는 길목에는
아직도 가을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달무리 고운 밤하늘에
철지난 한 줄기 바람이 흩어진다
메마른 잔가지 사이로
산비둘기 한 마리 퍼드득 날아간다
아직 쉴 곳도
머무를 자리도
마련치 못 했는데
온 종일
모래성을 쌓던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모두 떠나버린 텅 빈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로
지나간 이야기들이 쏟아져 내린다
하얗게 덮인 그길 한 가운데
또 하나의 추억들이
하나 둘 발자국처럼 남았다가
사라지고 또 흩어지고
가 을
후미진 언덕배기
황금물결 가득한
그곳에 가면
한 자락 곱게 가을이 물든다
물길 따라
발길 따라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넉넉한 그 곳
그곳에 가면 가을이 익어간다
천년의 세월
천번의 가을이었거늘
한 조각
조각배 되어
영롱한 금빛 물길 따라
또다시 그렇게
서럽디 서러운 가을은 간다
시월의 마지막 밤으로
회 상
계절이 머물다 간 그 자리엔
퇴색해 버린 수많은 이야기들이
파편의 잔해(殘骸)처럼 널려있다
언젠가 다시 찾은 그 자리
가을비 그리움 되어 내리고
누군가의 가슴에 소중한 추억록을 쓴다
철 지난 바닷가의 파도는
빈 마음 달래는 아련함인가
그렇게 무표정으로 바라 본
수평선 저 멀리 아우성이 몰려온다
이젠 온실 속 곱게 핀
프리지아이기 보다
외진 길모퉁이 돌 틈에 피어 난
이름 모를 한 송이 야생화이고 싶다
어제 불던 바람
지금 창밖엔
어둠이 내리고
어제 불던 바람만이
나의 창(窓)을 두드린다
달빛에 비친
바람의 그림자
꽃처럼 향기롭고
사랑처럼 달콤한
당신의 목소리
이제는
창가를 맴돌며
달려드는 미소들
난
오늘도
창을 열고
실바람의 얘기를 듣는다
<심사평>
한국신춘문예 2014년 여름호 시부문 당선작으로 이정식의‘그리움’외 4편을 선정한다.
시를‘문학의 왕’이라고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함축적 인 언어의 미학에 있다.
무조건 짧고 집약된 언어의 사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과 사물에 대한 해법을 대상과 일치하게 짧게 사용한 언어를‘함축적인 언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과학적으로 접근하자면‘원자’또는‘핵’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시’는 때로는‘화두(話頭)같은 비밀스러운 말로 오래도록 음미해도 여운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 이정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좋은 시를 지을 충분한 역량과 자질을 오랜 시간 닦아 왔음을 이번 응모작품들에서 알 수가 있다.
시‘가을’의 3연에서 -천년의 세월/ 천번의 가을이었거늘/ 한 조각/조각배 되어~-와 시‘어제 불던 바람’의 2연에서 -달빛에 비친/바람의 그림자~-라고 읊으므로서 그의 시 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우수작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시 작업에 정진의 도(道)를 더해 한국문단의 빛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심사위원 엄원지, 김성호 -
<당선소감>
진한 커피향이 달콤한 창가에 앉아 하얀 세상을 바라봅니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나와의 소통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온전한 나를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그렇게 말씀 하셨죠. 등단이란 '가시면류관을 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많은 이야기들을 실타래를 풀 듯 하나하나 풀어 가고자 합니다. 시 부문 당선 소감을 써 보내라는 소식을 접하고 짝사랑 했던 그녀를 만난 것처럼 기쁘기도 하지만 등단이라는 기쁨이 한편으로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부족한 저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 주신 한국신춘문예 심사위원님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아름다운 글을 쓰고자 노력 하겠습니다.
◆ 이정식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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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년 서울 출생 / 단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 타임즈코리아 기자 / (주)스포츠리그 기획이사 역임 / 숭실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서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