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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주목한그리스도인(8)주신사명에목숨을건사람(요1:22-23)p.147
세례요한은 말씀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용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목적이 말씀 안에서 분명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푯대가 분명하지 않으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오늘도 하여가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안에서 궁극적인 사명을 발견하는 것만큼, 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말씀 속에서 찾는 것만큼 중요하고 놀라운 축복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내년이 오기까지 기다리실 수 없어, 지난 한 주간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성경을 읽으시면서, 내 사명의 말씀, 내 비전의 말씀들을 찾아보고 계시지요? 성경 한 권을 꾸준히 여러 번 읽으면서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말씀들, 내 인생을 걸어볼 구절들을 만나시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명이 중요합니까?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애국자가 되고,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은 세계적인 영웅이 됩니다. 어떤 것에 목숨을 인생을 걸고 사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목숨을 사람에게 걸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관심과 사랑에 목을 매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전에 모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 가운데,
그대가 나의 연인이 되준다며헌~ 나는 그대의 노예가 되어도 좋아~
여러분, 연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젊은 시절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기라도 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이 혹시 나중에 재혼을 하게 되시거나, 자녀들이 결혼을 하게 될 때 이런 말에 마음을 빼앗겨 결혼하고 연애를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거기까지입니다. 목숨을 걸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 정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 그렇게 목숨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던 약속이 이내 변하고 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서로를 얻겠노라 젊은 시간을 탕진해 버리고 만 사람들끼리 만난 인생인 것입니다.
반면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당신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꾸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꿈은 이런 것입니다. 저와 함께 꿈꿔주실 수 있으실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 그 사람은 꼭 붙드시고 붙들라고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인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요, 인생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선택한 당신의 삶의 가치도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끌어올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결단하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목매어 살지 않겠습니다. 사람만 바라보며 살지 않겠습니다. 한나가 이것을 잘했던 것이지요? 나를 위로해주는 남편 엘가나에 목매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성전에 올라왔던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격동함 속에 버티고 산 것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꿈에 자신의 생애를 맡겼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이요, 하나님 나라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고,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꿈이 있습니다. 사람이 줄 수 있는 위로는 한계가 있고, 제대로 된 위로가 아닙니다. 나에 대해서 부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주는 위로에 그렇게 목매지 마시고,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 모태에서 나를 짓기 전부터 나를 아시고 계시는 분, 오늘도 내 인생의 연한을 계수하고 계시는 분께 내가 누구인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가운데 나를 향한 내 사명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새롭게 꿈을 제대로 된 꿈을 꾸어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 아무데나 인생을 걸겠습니까?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일에 자기 인생을 걸었던 세례요한처럼, 우리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몇몇 분들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너무 이기적이신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향해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길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결국을 보십시오. 그들의 인생이 가장 가치있는 삶,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큰 꿈으로, 가장 큰 사명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엊그제, 수능 만점자가 소개되었는데 보셨습니까? 불수능이네 뭐네 해도, 참 신기한 것은 만점자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사교육을 조장한다고 아뇨, 학원에서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만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 학생이 소개가 되었는데, 3년간 백혈병으로 고생한 학생입니다. 그 엄마가 장사를 하는데, 면역력이 약해진 아들을 위해서 모든 과일이며 채소를 익혀서 먹였다고 하지요? 새벽부터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엄마가 그 학생을 위해서 먼저 공부를 하고, 알아보고, 그 학생에게 소개해주고 그렇게 해서 그 학생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위해서 그 아들은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했던 것이지요? 엄마를 위해서 엄마 웃으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공부했는데, 그 결국은 수능 만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해서 남 주냐? 그러는데? 여러분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손에 물 마를 날 없이 수고하시는 어머니를 위해서 공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야 자리에 누우시는 아버지를 위해서 공부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가 기뻐하시며 자랑스러워하시며 환히 웃으시는 모습을 위해서 공부하면 수능 만점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내신 1등급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인생이 이렇게 대단한 인생이 될진대,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인생은, 이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수능시험에 좋은 점수 나오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닌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선물하는 놀라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니 우리 예수님도 아버지를 위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고백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께 영광 돌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더니, 자신이 영화롭게 되었노라 저 학생은 이야기를 합니다. 아, 그 아들요? 백혈병 완치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매년 입원하고 골수를 이식받고 멸균실에서 생활한 아들이 언제 공부할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어머니가 그 아들을 위해서 대단한 정성과 사랑을 기울이셨던 것이고 그 은혜를 알고 그 아들이 더욱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게임할 돈, 시간은 사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백혈병 간호를 해야만 어머니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아뇨,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한 분 한 분은 이미 그 존재만으로도 나로 말미암아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들이신 것입니다. 그분들의 영광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효의 시작은 내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효의 마지막은 내 몸을 세우고 내 이름을 널리 알려, 부모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옛 어른들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기억하고,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꿈이 뛰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잊지말고, 오늘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대로 아멘하고, 온전히 이루어드리기까지 우리의 삶을 살아, 오늘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더욱 영광돌리는 하나님 자녀된 도리를 다하는 참 자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세상을 뒤흔드는 존재가 됩니다. 세례요한처럼 온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며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워야 되는 삶을 억지로 힘겹게 부담스럽게 해야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더욱 존귀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대답을 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바울의 이 고백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는 인생,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소명>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인 존 콜트레인은 195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거의 죽을뻔 했다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 후 그는 마약을 끊었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탁월한 사랑’이라는 제목의 곡은 그의 재즈 연주 중 최고로 꼽히는 곡으로, 런타임 32분 동안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자신의 영혼을 그분께 바치는 연주입니다. 한번은 콜트레인이 이 곡을 연주하고 난 뒤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 란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이 말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2:29-30)라는 의미로, 시므온의 기도를 라틴어로 옮긴 것입니다. 콜트레인은 자신이 최고로 연주하여 올려드린 이 무대로 하나님 여한이 없습니다. 고백을 했던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이처럼 가슴 벅찬 일입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내 살아온 인생에게 마침내 허락하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콜트레인의 고백은 바울의 이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자기 전부를 소진하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꺼이 순교할 수 있고,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것이지요. 말씀에서 사명을 발견한 사람이 이처럼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끝없이 달려 갑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세례요한 같은 사람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이 사명을 위하여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임을 사명으로 알았기에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즉 말씀에서 사명을 발견하고 나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렸던 것이지요. 외치는 자, 그것은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으로, 주님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에서 사명을 찾았으면, 이제 구체적으로 그 사명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인생을 걸어보겠노라 했으면, 내가 무엇으로 존재하면서 어떤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의사가 될 것인가? 변호사가 될 것인가? 가수가 될 것인가? 운동선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가사도우미가 되고 환경미화원이 될 것인가? 이 길을 또한 잘 결정해야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로 살되,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리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눈빛이며 옷, 태도, 말투 모두가 하나님의 소리가 되겠노라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인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로 살 것인가? 아무런 고민없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여러 가지 상황이 급하다보니,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른 삶이 아닙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준비해야, 준비한 대로 열려지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준비하면 소신 지원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등급표와 점수를 보고 갈 수 있는 곳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걸어온 길이 어떠했습니까? 가고 싶은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아니면 갈 수 있는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소리가 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자기 속에 하나님의 소리를 채웠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고 생활하면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속에 채웠습니다. 자기 존재를 그 자체를 하나님의 소리가 되게 하기 위하여 부던히도 갈고 닦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목표가 있고, 우리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세례요한은 그렇게 노력을 하고나서, “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격도 갖추었고 실력도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흉내만 내는 사람, 시늉만 하는 사람, 그럴듯하게 짝퉁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일류와 삼류의 차이가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이지요? 김연아 선수를 아시지요?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수상을 했던 우리나라의 보물, 그 선수는 은퇴할 때까지 김밥과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분명한 규칙을 정하고 지키면서 한번도 어기지 않으면서 호기심과 유혹을 이겨내고 실력과 자격을 갖추기까지 노력을 한 것이지요? 김밥과 라면을 먹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다른 스케이팅에 관한 규칙과 선수자격, 대회 규정들에 관한 것들을 대했을 선수의 태도는 안 봐도 훤한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게 더 큰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삽니다. 아니, 성경에 기록합니다.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아서인지, 요즘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보다 나은 목표, 보다 큰 목표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냥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다. 꿈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세대를 봅니다. 그것이 가장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루가 다르게 되고 싶은 것이 많아 꿈이 많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면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그저 엄마가 하라고 하면 그거 할게~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저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서, 돈 적당하게 벌면서 나 쓸만큼 벌어서 쓰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 뭘 그렇게 아동바동 사는지, 그냥 적당히 살자고 말이지요. 고작 30년도 채 살지 않은 청년들이, 죄송합니다. 나이 많이 잡수신 노인들처럼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어르신들은 지나가는 시간을 야속해하며 하나라도 더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는데, 젊은이들의 시간은 무료하기만 합니다. 지겹기만 합니다. 그냥 눈감고 잠자고만 싶습니다.
세상이 다 그러하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할까요? 우리도 그냥 되는대로 살아야할까요? 일찌감치 포기하고 지금의 내 수준에 맞는 길을 찾아가야할까요? 아닙니다. 지금부터 준비하시면 됩니다. 말씀 속에 내 사명을 발견하시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 무엇으로 이 세상을 존재할지,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주신 계획과 꿈이 우리 안에 오늘도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고, 절제하고 지키며 나를 가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주목하는 그리스도인,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주시고, 찾아와주시고 곁에서 도와주실 때, 우리는 세상이 주목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어떻게 되겠지, 요행을 바라고 있으면 안됩니다. 기연을 꿈꾸는 게으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갈량이 게을러서 집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유비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만류할 때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4)
나를 향하여 주신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예수님처럼 한결같이 걸으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가야할 길을 가야합니다. 오늘 미루고 내일 미루고 모레 미루면,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너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으면, 조금만 천천히 가고 쉬었다가고 오늘만 놀다가자고 하시면, 여러분 똑같이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여러분의 사명이 담긴 성경구절을 보여주시면서, 여러분 계속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부모님을 영화롭게, 내 인생을 빛나게 하고 싶으시면, 1분 1초를 아껴서 그 사명과 꿈을 위해서 준비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훈련해야 합니다. 말은 사업가가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노라 하면서 여전히 몸은 이불 속에 있으면 절대로 그 꿈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되려면, 변호사가 되려면, 가사도우미가 되고 환경미화원이 되기 위해서도 시간을 아끼며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충하다가 아니면 말지 뭐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 수 있는 곳을 흘러가지 마시고, 그마저도 없어 주변의 여러 사람 속상하게 만들지 마시고, 좁고 협착하지만 가고 싶은 길을,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길을,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실력과 자격을 갖춘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새로워지길 축원합니다. 정말 괄목상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분투하고 인내하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시간을 만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더욱 아름답게 빚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훈련하여 던진 돌이 더욱 강하게 뾰족한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만져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골리앗을 잡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될 수 있는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주목받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 그렇게 계속해서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그리스도인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를 위해서 세례요한이 선택했던 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에서 훈련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주목받았던 사람들을 살펴보세요. 여지없이 광야의 훈련의 시간들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광야는 포기를 의미합니다. 세례요한의 경우,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이었으니 제사장으로 살 수 있는 안락한 삶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제사장 가문으로 누릴 수 있던 모든 특권을 버리고 그는 광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또한 광야는 포기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추위요, 그것이 외로움이요, 그것이 굶주림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냥 세례요한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훈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라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희생할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절대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에게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의 인터뷰 중 이런 대답을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버스가 옆을 지나갈 때면 머리를 들이받고 죽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고통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을 했으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렇게 매일 자기를 이겨가며 훈련했던 곳이 바로 광야였던 것입니다. 그 광야를 통과했기에 그는 그의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고, 온 국민이 뜨겁게 행복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저토록 피나는 훈련을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녁에 침상에 일어나 옥상을 거닐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야영중인 하나님의 법궤, 온 이스라엘의 군대가 싸우는데 홀로 태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벽에 단잠을 깨우고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십시오. 매일 매일 정해두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공부도 하시고, 연습도 하십시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십니까? 포방터 닭볶음탕집 아들이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온 국민이 욕하면서 보다가 이제는 응원하면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방송국 카메라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렇게 열심을 내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천국의 천군천사와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게으르실 겁니까? 오늘 저 하늘나라 게시판에 뭐라고 여러분을 향한 댓글이 올라오고 있을지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마귀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 얼마나 고소하고 참소하고 있을지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자기를 쳐서 훈련하는 그 곳에서 위대한 인생이 탄생합니다. 안락한 자리에서 주변을 흘깃 거리면서 맛볼 수 있는 결실은 없습니다. 평생을 고생한 엄마를 계속해서 주방에 넣고 자기는 카운터만 보겠다고 하는 아들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추운 곳입니다. 배고픈 곳입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자기와 싸우며 피흘리는 곳입니다. 결코 안락할 수도, 화려할 수도, 만족스러울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이기에 오히려 더욱 내 하나님을 만나고 내 사명을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셨습니다. 아니 이미 그분은 출생부터 그의 30년 공생애를 준비하신 모든 시간이 광야와 같았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도로 쓰임받기 전에 아라비아 광야로 3년을 나갔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 아버지의 양치기로 10여년, 또한 사울에게 쫓기면서 10여년, 광야에서의 시간을 오래도록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야말로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았던 것입니다. 광야의 훈련이 없는 인생은 결코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합니다. 역사는 광야에서 자기를 훈련한 소소의 사람들이 다수의 훈련이 없는 인생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제대로 받은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 곳을,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들어갔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진정한 리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훈련받은 사람에게 이끌림을 받기만 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을 이끌어가시겠습니까? 자기 삶의 모든 자리, 모든 순간에서 광야훈련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침내 시대가 필요로 하고, 시대를 이끄는 리더가 될 것입니다. 광야 훈련없이 그저 알량한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타고난 재기로 적당히 적당히 리더가 된 사람은 공동체를 위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훈련이 부족한 그런 리더임을 확인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당회에서 보시겠지만, 올해 우리 하일교회가 인원도 많이 줄고, 재정도 많이 줄고 계획했던 사업들도 지원도 후원도 다 못하고 그랬습니다. 이건 저의 책임입니다. '제가 하일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여기까지 입니까?' 우울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제가 게을렀던 부분들, 나태했던 부분들, 집중하지 못하고 노력하지 못했던 부분들, 마음을 빼앗겼던 부분들이 또 이것 저것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내년에는 더욱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한해를 돌아보시면서, 보고서를 쓰시고, 또한 내년 사역지원서를 나를 향한 훈련과 도전을 포함하여 작성하시고 제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시대를 책임지는 리더로 조금 더 성장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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