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호치민은 겨우 중국을 탈출하여 다시 소련으로 왔습니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잠깐 흑해 연안에서 휴양을 하고 모스크바 스탈린 학교로 와서 자신이 파견하였던 베트남 혁명 청년들을 위한 별도의 과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청년은 ‘천 푸’였습니다. 천 푸는 이후 호치민보다 더욱 교조적인 스탈린주의자, 코민테른 혁명가가 됩니다...
호치민은 모스크바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치민의 마음은 베트남 혁명 운동 전선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중국이 아니라 태국(시암)에서 활동하고자 하였습니다. 참고로 베트남을 크게 남부와 북부로 나눈다면, 북부는 중국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중화문명권이라고 할 수 있고, 남부는 태국과 가까우며 인도 문명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의 반 프랑스 독립운동도 한 편에서는 중국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태국을 거점으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호치민은 중국 국민당의 국공합작과 발맞추어 베트남 독립혁명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 호치민은 중국이 아니라 태국에서 일을 도모하고자 한 것입니다.
태국에 가기 전에 호치민은 코민테른이 후원하는 벨기에 브뤼셀의 반제국주의 동맹 회의(혹은 ‘피압박민족대회’)에도 참석합니다. 이 회의에는 세계의 저명한 식민지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였습니다. 인도의 모티랄 네루(자와할랄 네루의 부친), 중국 손문의 미망인인 송경경(쑹칭링),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 수카르노, 일본의 공사주의자 가타야마 센(片山潛) 등이 그들입니다. 참고로 이 회의에는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가들도 대거 참석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활동 중이었던 조선어학회의 이극로, 그리고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 그리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불교계 독립운동가 김법린 그리고 당시 딸 허정숙과 함께 세계 여해 중이던 민족변호사 허헌 등이 참석하였습니다.(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경인문화사, 2012, 231쪽)
(좌로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 이미륵(이의경), 이극로, 동아일보 1927, 5. 14; 조선일보 1927, 5. 14)
호치민은 마침내 1928년 7월 태국 방콕에 도착합니다. 당시 태국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이미 약 2만여명 살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판 보이 차우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앞 서 보았던 베트남 혁명청년회의 주요 멤버가 되는 호 통 마우, 레 홍 손, 팜 홍 타이 등도 원래 여기 태국에서 거쳐 광저우로 온 인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광저우에서 베트남 청년회가 결성된 후 태국에 그 지부가 세워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호치민은 그 청년회 지부를 토대로 행동반경을 넓혀 갔습니다. 조직 혁명원만이 아니라 베트남 교민 사회 전체를 계몽하였습니다. 당시 호치민이 활동하던 태국 북동부의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이거나 장인들로서 힘든 육체 노동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태국 주민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태국 말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호치민은 그러한 현상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몸소 노동의 본을 보였습니다. 학교를 건립하는 공사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하였습니다.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세계 정세와 인도차이나 형국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웃 태국 주민들과 공동 작업을 하면서 태국어 학습도 독려하였습니다. 호치민 자신 하루 10개의 태국 단어를 외우는 공부를 철저히 하였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하였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편 중국 남부의 청년회 동지들은 조직 유지를 위해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었지만, 풀려났습니다. 이후 찬 반 쿵, 호 통 마우, 레 홍 손, 람 둑 투 등의 지도 하에 청년회 조직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점점 이견이 커졌습니다. 찬 반 쿵, 호 통 마우와 레 홍 손은 점차 마르크스 혁명론에 경도되었고, 람 둑 투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노선을 견지하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코민테른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좌익 모험주의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권력 투쟁을 위해 ‘선명성’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장개석의 배반으로 참혹하게 파탄난 것은 좋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박두한 세계 대 공황의 그림자는 공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학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은 제6차 대회에서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의 통일전선을 청산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계급투쟁의 시기, 프롤레타리아 혁명 봉기의 시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호치민 혁명 과업의 첫 번 째 결실이었던 베트남 혁명 청년회, 즉 공산당의 전신은 분열 해체되고 맙니다. 먼저 찬 반 쿵이 베트남 북부 하노이로 돌아가 ‘인도차이 공산당(동 두옹 콩 산 당)’을 조직합니다. 이어서 레 홍 손, 호 통 마우 등이 홍콩에서 ‘안남 공산당’을 조직하고 베트남 남부, 즉 코친 차이나에 세포 조직을 건설합니다. 그에 더하여 베트남 중부 지역에 또 하나의 공산당 조직인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연맹’이 만들어집니다. 청년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 후신으로 3개의 공산주의 조직이 난립한 것입니다.
참고로 위와 같은 코민테른의 정치적 편의주의와 소련 중심주의는 우리 식민지 조선 최대 민족주의 조직이었던 신간회마저 파탄내었으니, 이 제6차 코민테른의 결정은 세계 식민지 해방 독립 투쟁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남겼다고 할 것입니다.... 신간회의 제3대 집행위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참고로 신간회 초대 위원장은 이상재, 제2대 위원장은 허헌 이었음)은 신간회가 좌익 급진주의자들의 술책으로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하였다고 합니다... (김진배, 가인 김병로, 삼화인쇄주식회사, 1983, 86쪽)
테트남 공산주의의 세 분파들은 서로 경쟁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좌익 최대의 병폐는 ‘분열’과 ‘오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전후의 혼란기 좌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호치민이 있었습니다. 혁명 전선에서의 맏형이었고, 누구보다도 식견이 높았고, 인간적이었으며, 도량이 넓었습니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결국 모두 호치민을 찾게 되었습니다. 호치민은 1930년 각 분파들을 홍콩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회의는 어렵지 않게 정리되었습니다. 이념의 차이보다 지역주의와 개인 감정이 많이 개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호치민은 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파들을 해체하고 다시 하나의 조직으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베트남 공산당’이 출범하게 됩니다. 당시 이 당의 조직원은 3천5백명 이상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베트남 민족해방과 공산주의 역사에서 호치민의 지위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우리 식민지 조선의 좌익 상황과 달랐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박헌영은 해방 전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최고의 명망가였지만, 북한의 김일성 일파를 압도하지 못했고, 민족주의 세력을 포괄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김일성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여운형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여운형이 소련과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면, 좌익은 물론 민족주의 세력과도 연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여운형은 그만큼 혁명의 경력, 인품, 식견에서 높고 큰 인물이었습니다(이정식, 여운형, 서울대 출판부, 초판 2쇄, 2008). 젊은 인재 가운데에서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 현준혁을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역시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애국자이고 투철한 혁명가였습니다. 해방 후 평남 공산당 조직의 책임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과도 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운형은 물론 현준혁도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한국 좌익의 비극입니다.
* 이상 호치민에 관한 내용은 윌리엄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서 인용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