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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8경 제5경 비비낙안(萬頃八景 第五景 飛飛落雁) 비비정(飛飛亭)
그리워지네-안정희
예로부터 이곳은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 하였고 완산8경중의 하나이다
오늘은 기러기가 어디에 있겠냐고 정자위에 앉아 전주쪽을 바라보는데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다
만경5경 비비낙안은 비비정(飛飛亭)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말한다
낙안(落雁)은 떨어질 락(落) 기러기 안(雁)으로 땅에 내려앉는 기러기라는 뜻으로 때로는 기러기 떼 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비비낙안은 바로 한내천 백사장에 내려앉아 노는 기러기 떼가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시와 운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만경강 한내를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비정 정자 아래로 흐르는 한내천은 삼천과 추천 전주천이 합수되어 다시 거듭 소양천과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으로 흐른다
비비정(飛飛亭)
삼천과 추천 전주천이 합수되어 다시 거듭 소양천과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이 시작 되는 곳을 한내(한천교 아래)라 한다
한내란 큰내라는 뜻으로 호남으로 빠지는 관로의 요충이었다
또한 한내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한 마지막 길목이었고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한 월천이기도 하다
이렇듯 민족의 애환이 서린 한내 언덕바지에 자리한 비비정 은 그 아름다운 유래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인상깊었던 정자였는 데 완산지의 「飛飛亭 在北 三十萬曆癸주武人崔永吉建, 爲別야, 中間撤去, 英祖壬申年, 觀察使 徐公命九重建, 以爲官정」 기록으로 보아 府北 30리에 있던 곳으로 보인다
비비정은 1573년(선조6년)에 무인 최영길이 별장으로 지은 것인데 중간에 철거된 것을 1752년(영조 28년)에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하여 관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소실되자 최영길의 9대손 최광용 이 을유년에 감영에 품계를 했지만 중건을 보지 못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비비정기」를 보면 우암이 최씨 집안을 찬양하기 위하여 「장비」나 「악비」등 중국명장의 이름을 붙여 비비정이라고 했을 뿐 지명을 취한 것은 아니다
「비비정기」는 최영길의 손자인 최양의 청탁을 받고 쓴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최양이 찾아와서 나에게 정자의 기문을 청탁한다
그의 조부 최영길이 창주첨사를 지냈는데 정자는 1573년(선주 6년) 창건했다는 것으로 그의 부친 최완성도 나난만호를 지냈으며 최양 또한 조업을 이어 무관이었다
당시 무관들은 추세 속으로 권문에 아첨하여 뇌물이나 바치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청고한 인물이어서 정자를 일으키어 풍아하게 살았고 최양은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데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하겠다
비비정이라 이름한 뜻을 물으니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라고는 하나 내가(송시열) 생각하기에는 그대의 가문이 무변일진대 옛날에 장익덕은 신의와 용맹스러운 사람이었고 악무목은 충과 효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둘이 다 함께 이름이 비자였다
비록 세월은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무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장비와 악비의 충절을 본뜬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다 할지라도 뜻은 큰 것이 아니겠는가
한편 예로부터 이곳은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비비낙안>이라 하였고 완산8경중의 하나이다
설립연대 : 1573년(선조 6년)
위 치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137
치 설명 : 후정리 삼례읍사무소에서 도보로 5분거리에 위치
교통 정보
버 스 : 전주 → 삼례(삼례교 지나서 하차, 시내버스 수시운행)
자가용 : 전주 1번 국도 → 삼례교 → 좌회전 후 500m 쯤에서 좌회전
-자료인용: http://blog.qubi.com/samnyestn/entry/TCDraftPost(삼례역)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의 남쪽 언덕 위에 세운 정자인 비비정은 ‘완산지‘에 의하면 1573년(선조 6년)에 무인 최영길이 건립했으며 그후 철거되었다가 1752년(영조 28년)에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했다고 한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정자가 없어졌다가 1998년에 복원되었다
예로부터 이곳은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비비낙안’이라 불렸으며 완산8경 중의 하나이다
비비정 아래로는 예전엔 한내라 불리었던 강(현재 삼례천)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으로는 드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한내는 물이 유난이 차갑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큰 냇가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깊은 산 속에서 물이 흘러 형성된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류하는 지점이자 전주천과 삼천천이 합류하여 만경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한내는 군산과 부안에서 오는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가 쉴 새 없이 오르내렸던 곳이다
‘비비낙안'의 의미는 비비정에서 한내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떼를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자연을 벗삼아 시와 운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한다
탐사팀이 방문했을 당시 비비정 주변은 토목공사로 인해 주변이 공사자재와 각종 쓰레기로 인해 지저분해져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만경강은 참으로 아름다웠을 듯 하다
여기서 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맑은 물줄기 흰 모래사장 그리고 각종 물새떼들 그리고 드넓은 호남평야등 아름다운 옛 모습들이 상상됐지만 현재는 다리공사로 인해 물은 상당히 탁하고 지난 폭우때 떠내려 온 듯한 수초와 쓰레기들이 아직 수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덕지덕지 엉켜붙어 있어 완산8경이란 명칭이 무색할 정도였다
다행히 완주군은 2011년까지 총 28억원을 들여 비비정 일대에 농가 레스토랑과 습지 체험장 등을 갖춘 삼례 비비힐(신문화 공간)을 조성한다고 한다
이 곳에는 민박시설과 비비살롱 다목적 야외 이벤트 공간 텃밭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탐사팀은 비비정을 뒤로하며 27번국도를 타고 만경강 유역을 따라가 본다
익산천과 만경강이 만나는 유역에는 대규모 농지가 조성돼 있다
왕궁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왕궁면 익산사이를 가로질러 익산쪽으론 어전평야 김제쪽으론 백구평야를 적신다
만경강 유역 너른 들판은 군산지역과 더불어 일제시대 미곡수탈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불과 90년전만해도 만경강은 구불구불 뱀처럼 유유히 드넓은 평야를 흐르던 사행(蛇行)하천이었다
하천의 급격한 변화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된다
일제는 1917년 대수로 건설공사를 통해 만경강을 반듯하게 만들었다
만경평야의 침수방지 농업용수확보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진행된 하천 개수사업의 결과로 만경강의 모습은 제방으로 둘러싸인 직강하천으로 변하면서 하천부지는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어 지금은 자연제방·배후저습지 등과 같은 원래의 지형을 식별하기도 어려워졌다
이제 예전 물길의 흔적은 오래된 측량지도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만경강 주변에는 제방의 위치가 바뀌면서 만들어진 배후습지가 모두 8곳이 있다
일반적으로 물길이 돌려지면 과거 하천부지는 육상화되면서 논밭이나 민가로 변한다
탐사팀이 찾은 익산 춘포면 판문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옛물길의 시작점으로 추정되는 판문마을 앞 연못 역시 논으로 개간돼 경작되다가 진흙층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서 연을 심었다고 한다
판문마을에서 한 평생을 살았다는 강희철(80)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제방 쌓기전 비가 오면 온돌방까지 물이 찼었다지 살을 좀 붙이면 익산 배산까지 물이 넘칠 정도였다고 들었당께”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강 할아버지는 선친을 통해 전해들은 제방 축조 당시를 설명해 준다
어떤 이들은 제방이 쌓아져서 옥토가 만들어졌으니깐 주민들에겐 큰 도움이 된 것 아니냐고 묻곤 하는데 이런 말 들을때 나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오른당께 한숨을 내쉰 강 할아버지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일제는 당시 식민통치를 하면서 제방을 만들고 주민들에게 논을 소작 주면서 본격적으로 쌀 수탈을 시작했지
당시 주민들은 지게로 하루종일 흙과 돌을 날라 제방을 쌓아갔지만 주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하루 좁쌀 한줌이 다였거든
강 할아버지는 그때 선친에게 전해들은 일본인들의 말을 아직도 기억해낸다
조선인은 배가 고파야 먹을 것을 얻기위해 일을한다고 했다지 아마 결국 제방축조는 일제시대 곡식 수탈을 위해 일본이 쌓은 것이고 거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피땀이 쌓인 것이여
이렇듯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생생한 증거였다
당시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특히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대평원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탐사팀은 만경강 제방을 따라 만경제수문에 도착했다
제수문이란 하천에서 홍수에 대비한 방수로의 수량을 조절하고 해수의 역류를 막아내는 수문을 뜻한다
만경제수문은 상류지역의 염분 피해를 막고 안정적인 농수확보를 위해 일제 때 만들어졌다
제수문에는 작은 인도교를 만들어 강 양쪽을 연결하고 있었다
강폭은 대략 30~40미터정도였으며 수문은 총 12개였지만 탐사팀이 갔을땐 2개만 열어 방류중이었다
제수문에서 내려다보는 만경강물은 황갈색을 띠고 있다
근처에 오염원이 있는지 악취도 약간 났다
100년전 만경강 하구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땅이었지만 제수문 축조등으로 인해 만경강의 가장 큰 지류인 탑천 유역이 옥토로 변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수난을 함께 해온 만경강은 오늘도 아픔을 간직한채 말없이 새만금을 거쳐 서해바다로 나아간다
전라일보(2009.10.14)
[옮긴 글]
완산승경
전주와 완주에는 완산승경(完山勝景)이 있다. 승경(勝景)은 <뛰어나게 좋은 경치>를 말한다. 전주팔경(全州八景)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완산승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완산승경은 모두 32 곳에 이른다. 완산승경 중에는 전주팔경 5 곳이 있다. 전주팔경 중에는 오늘날 <동포귀범>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완산승경 중에도 옛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없는 곳이 더러 있다.
1. 기린토월(麒麟吐月)
기린토월은 <기린봉이 달을 토하는 모습>이다. <토월-토할吐.달月>은 ‘달이 떠오른다’는 말이다. 기린토월은 전주팔경에서도 첫손으로 꼽힌다. 기린봉은 전주시 인후동과 노송동, 우아동 일원에 있으며 높이는 271미터다.
2. 유연낙조(油然落照)
유연낙조는 <유연대에 해지는 저녁노을 모습>이다. <낙조-떨어질落.비칠照>는 ‘저녁노을’을 의미한다. 유연대는 전주시 중화산동에 있다.
3. 완산칠봉(完山七峰)
완산칠봉은 전주를 상징한다. 완산칠봉 가운데 가장 높은 완산수봉의 높이는 186미터이며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으로 이루어졌다.
4. 한벽사경(寒碧四景)
한벽사경은 <한벽루의 사계절 풍경>이다. <사경-넉四.경치景>은 ‘네 가지 경치 즉 사계절의 경치’를 말한다. 봄의 동고성 진달래와 강나루 물버들, 여름의 만마관 누비고 불어오는 맑은 바람, 여름의 옥류동 숲길 소슬한 가을바람, 한겨울 눈 속 남고산 도는 달밤이 바로 한벽사경이다. 한벽루는 전주팔경 가운데 <한벽청연(寒碧晴煙)>에도 등장한다.
5. 동성수납(東城睡衲)
동성수납은 <동고산 승암산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의 모습>이다. 동성은 교동에 있는 동고산성으로 승암산이라고도 불린다. <수납-잘睡.수선할衲 혹은 승려衲>은 ‘졸고 있는 스님’ 혹은 ‘참선하는 스님’을 말한다.
6. 남고모종(南固暮鐘)
남고모종은 <남고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다. <모종-저녁暮.쇠북鐘>은 ‘저녁 종소리’를 의미한다. 전주팔경에도 나온다.
7. 사대병암(四大屛岩)
사대병암은 <사대원 주변의 계곡과 그 주변의 모습>을 말한다. 사대원은 이조시대 길손들의 숙소로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에 있었다. 사대원과 좁은목을 가리켜 사대병암이라고 불렀다. <병암-병풍屛.바위岩>은 ‘병풍처럼 생긴 바위’를 의미한다.
8. 은석동학(隱石洞壑)
은석동학은 <은석골 일대의 경치>를 말한다. <동학-동녁東.골짜기壑>은 ‘산과 내가 둘러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을 뜻하며 동천(洞天)이라고도 한다. 은석골은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에 있다. 정여립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9. 다가비설(多佳飛雪)
다가비설은 <다가산에 휘날리는 눈보라의 모습>이다. <비설-날飛.눈雪>은 ‘눈이 날린다’는 뜻이다. ‘봄날 신록에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봄꽃’을 가리키기도 한다. 다가산은 전주시 중화산동에 있다.
10. 오목요대(梧木瑤臺)
오목요대는 <오목대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요대-아름다울瑤.물건을얹는 臺>라는 말은 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누대를 의미한다. 오목대는 전주시 교동에 있다.
11. 간납자규(諫納子規)
간납자규는 <간납대에서 들려오는 두견이 울음소리>를 말한다. 간납대는 전주시 남노송동 일대를 가리킨다. <자규(子規)>는 두견이를 뜻한다. 간납대는 전주팔현(全州八賢)로 알려진 이운암 형제의 충절을 낳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12. 진북쇄월(鎭北灑月)
진북쇄월은 <진북사에 비치는 달빛의 모습>을 말한다. <쇄월-뿌릴灑.달月>이란 달빛이 비친다는 의미다. 진북사는 전주시 진북동에 있다.
13. 가련청람(可連晴嵐)
가련청람은 <가련산의 아름다운 아지랑이>를 말한다. 가련산은 전주시 덕진동에 있으며 높이는 106미터다. <청람-갤晴.아지랑이嵐>은 ‘아름다운 아지랑이’를 뜻한다.
14. 덕진채련(德津採蓮)
덕진채련은 <덕진 연못의 연꽃>이다. <채련-캘採.연꽃蓮>은 ‘연꽃’을 의미한다. 전주팔경에도 나온다.
15. 건지송뢰(乾止松籟)
건지송뢰는 <건지산에 부는 솔바람>이다. <송뢰-소나무松.소리賴>는 ‘소나무 소리’ 혹은 ‘솔바람’을 뜻한다. 건지산은 덕진동 전북대 인근에 있다.
16. 삼천세우(三川細雨)
삼천세우는 <삼천동에 내리는 가랑비>다. <세우-가늘細.비雨>는 ‘가랑비’를 말한다. 옛 모습은 없어졌지만 옛날 선비들은 이곳 경관을 높이 꼽았다.
17. 단암공영(丹岩空影)
단암공영은 <단암사의 고요한 모습>이다. <공영-빌空.비칠影>은 ‘고요’를 뜻하는 말이다. 단암사는 완주군 상관면 신교리에 있다.
18. 모악요하(母岳繞霞)
모악요하는 <모악산을 휘감고 있는 노을 모습>이다. <요하-두를繞.놀霞>는 ‘휘감고 있는 노을’을 의미한다.
9. 죽림천엽(竹林千葉)
죽림천엽은 <죽림리의 아흔아홉 구비>를 말한다. <천엽-일천千.잎사귀葉>은 ‘여러 겹으로 된 꽃잎’을 뜻하며 여기서 천엽은 ‘아흔아홉 구비’를 비유해서 표현했다. 옛 모습은 없지만 이곳은 명필 창암 이삼만이 붓과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죽림리는 완주군 상관면에 있으며 공기동이라고도 한다.
20. 만마도관(萬馬道關)
만마도관은 <용암리의 난공불락 요새지>를 말한다. 만마관은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에 있었으며 유명한 요새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관 중턱 협곡을 끼고 성을 쌓았다. 만마관과 도관은 모두 용암리의 지명이다.
21.법사장한(法史長恨)
법사장한은 <한 맺힌 법사봉의 모습>을 말한다. <장한-긴長.원통할恨>은 ‘오래도록 한이 되는 일’을 말한다. 법사봉은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에 있다.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바로 바로 윗 형인 이방간의 묘소가 자리 잡으면서 <법사장한>이 생겼다. 회안대군(이방간)은 왕자의 난으로 동생에게 패하고 한을 안고 살다가 풍경 좋은 이곳에 묻혔다.
22. 구진융마(九進戎馬)
구진융마는 <화심리 구진벌의 전쟁터의 모습>을 말한다. <융마-병기戎.말 馬>는 ‘전쟁에 쓰는 군마’ 혹은 ‘전쟁’을 의미한다. 구진벌은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정란 장군이 왜군과 일대 접전을 벌인 현장이 바로 구진벌이다. 구진구퇴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구진벌로 이름이 붙었다.
23. 동포귀범(東浦歸帆)
동포귀범은 <봉동천에 돛단배들이 돌아오는 모습>이다. <귀범-돌아올歸.돛단배帆>은 ‘고기 잡고 돌아오는 돛단배’를 말한다. 전주팔경에도 나온다. 동포는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에 있다.
24. 대아수간(大雅垂竿)
대아수간은 <대아리 저수지의 낚시대 드리운 모습>이다. <수간-드리울垂.장대竿>은 ‘낚시대를 드리운다’는 뜻이다. 대아리 저수지는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있다.
25. 고달귀운(高達歸雲)
고달귀운은 <고달산에 구름이 머문 모습>이다. <귀운-돌아올歸.구름雲>은 ‘구름이 돌아온다’는 말이다. 고달산은 완주군 구이면 평촌에 있으며 높이는 603미터다.
26. 보광유경(普光幽徑)
보광유경은 <보광사의 깊고 그윽한 길>을 말한다. <유경-유그윽할幽.지름길徑>은 ‘깊고 그윽한 길’이라는 의미다. 보광사는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으며 백제 무왕 때 창건됐다.
27. 경각심홍(鯨角深紅)
경각심홍은 <경각산의 짙은 단풍 모습>이다. 경각산은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 있으며 해발 659미터다. <심홍-깊을深.붉을紅>은 ‘짙은 단풍’을 뜻한다.
28. 대천파설(大川波雪)
대천파설은 <대천에 휘날리는 눈발>을 말한다. <파설-물결波.눈雪>은 ‘휘날리는 눈발’을 말한다. 대천은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천이다. 전주팔경의 <비비낙안>에 나오는 비비정 마을과 같은 곳에 있다.
29. 황방폐월(黃尨吠月)
황방폐월은 <황방산을 바라보고 짓는 삽살개의 모습>이다. <폐월-짖을吠.달月>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말이다. 황방산은 전주시 서신동에 있으며 높이는 215미터다.
30. 위봉폭포(威鳳爆布)
위봉폭포는 위봉산성에 있는 폭포다. 전주팔경의 하나로 폭포의 높이는 52미터, 폭은 3미터에 이른다.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다.
31. 운제백련(雲梯白蓮)
운제백련은 <운제골의 흰 연꽃>을 말한다. <백련-흰白.연꽃蓮>은 ‘흰 연꽃’을 뜻한다. 운제골은 완주군 운주면 화산리에 있다.
32. 대둔천잠(大屯千岑)
대둔천잠은 <대둔산의 여러 산봉우리 모습>이다. <천잠-일천千.봉우리岑>은 ‘많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대둔산은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 등에 걸쳐 있으며 높이는 878미터다.
반면 전주팔경은 다음과 같다. 1. 기린토월(麒麟吐月) 2. 한벽청연(寒碧晴烟) 3. 남고모종(南固暮鐘) 4. 다가사후(多佳射侯) 5. 덕진채련(德津採蓮) 6. 비비낙안(飛飛落雁) 7. 위봉폭포(威鳳瀑布) 8. 동포귀범(東浦歸帆)
여기에 남천표모(南川漂母)와 곤지망월(坤止望月)을 합쳐 < 전주10경 > 이라고 한다. 기린토월, 남고모종, 덕진채련, 위봉폭포, 동포귀범 등 5 개는 완산승경과 전주팔경 양쪽에 겹쳐 있다.
이 가운데 < 기린토월 > 은 전주팔경과 완산팔경에서 모두 첫손으로 꼽힌다. 기린토월은 < 기린봉에 달이 떠오르는 모습 > 을 말한다. 토월(토할吐. 달月)은‘달이 떠오른다.’는 뜻이다.
기린봉은 전주시 인후동과 노송동, 우아동 일원에 있으며 높이는 271미터다. 기린봉은 예부터 전주에서 손꼽히는 대표적인 산이다. 전주 시내를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든 산이 바로 기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남쪽으로 칼날같이 우뚝 솟은 능선을 따라 한참을 가면 옛 성터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승암산(僧岩山)에 도착한다. 승암산은 3백여 미터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으로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좁은 냇물을 하나 건너면 남고산이 비스듬히 앉아 있다. 247미터의 낮은 산이다.
다시 발길을 돌려서 남서쪽으로 한참을 지나면 완산칠봉에 이른다. 완산칠봉은 곤지산, 투구봉(완산봉), 다가산을 이으면서 완전히 전주를 감싼다.
전주를 가운데 두고 북쪽으로 이어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펑퍼짐하게 들판을 이룬다.
전주의 정북 쪽에 이르러서야 잠시 금암동에서 머물면서 검암(劒岩)을 이루고 다시 건지산과 가련산을 만들어 북풍을 막아준다. 기린봉은 동남북으로 아름다운 산들을 거느리고 앉아 도도히 흐르는 남대천을 내려다보며 전주시의 수호신처럼 우뚝 솟아있다.
인봉사는 기린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조 말엽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 이곳에는 석계 최명룡과 봉곡 김동준, 백봉 정상룡, 목산 이기경 등을 연벽(聯壁)으로 하여 배향해 왔었다. 한편 기린봉을 휘감고 있는 아중저수지는 전주 근교의 낚시터로 유명하다.
기리봉과 완주군 상관면 일대 고덕산 줄기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여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물이 흘러내려 비옥한 초포들을 몽리하면서 봉동천으로 흘러들어간다.
1961년 완공된 아중저수지는 면적이 26.5헥타아르에 이르며 관개면적은 284헥타아르에 달한다. 전주 쪽에서 물을 건너면 왜막실에 이르고 그 주변이 온갖 경승을 빚고 있어 관광지로서도 큰 구실을 한다. 전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완산승경과 완산칠봉
전주와 완주에는 완산승경이 있다. 승경(勝景)은 ‘뛰어나게 좋은 경치’를 말한다. 전주팔경(全州八景)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완산승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완산승경은 모두 32 곳에 이른다.
완산승경 중에는 전주팔경 5 곳이 포함되어 있다. 전주팔경 중에는 오늘날 ‘동포귀범’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완산승경 중에도 옛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없는 곳이 더러 있다. 앞으로 ‘완산승경’ 32곳을 칼럼난에 무순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완산칠봉(完山七峰)은 전주를 상징한다. 완산칠봉 가운데 가장 높은 완산수봉의 높이는 186미터이며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으로 이루어졌다.
완산칠봉은 1봉에서부터 7봉까지 있다. 이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르려는 듯하다. 용의 머리가 완산동 고개 방면으로 조아리고 있다고 하여 이 고개를 ‘용머리 고개’라고 한다.
완산칠봉은 산자락 자체가 영험하여 이곳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산의 형질을 변경하면 전주에 화가 온다고 전해 왔다.
전주는 남서쪽으로는 모악산이 감싸고, 동남쪽으로는 고덕산의 산줄기가 자리하고 있다. 완산칠봉 정상에 오르면 서남쪽으로 모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평화동 학산 너머의 완주군 구이면 경각산(해발659m)이 보인다.
고덕산의 능선은 보광재, 학산 쪽으로 뻗어나간다. 매봉자락 아래로는 공수천 흑석골의 깊은 V자형 계곡이 다가온다.
완산칠봉의 태동은 고덕산이다. 고덕산에서 남고산 매봉(해발399m)을 솟아올리고 흑석골, 보광재 골의 계곡을 만들어서 공수내로 흐르게 한다.
산줄기 하나는 구이 금성산(해발330m)으로 뻗어 나가고, 또 하나는 평화동 학산으로 뻗은 다음 해발289m인 옥녀봉을 이룬다. 옥녀봉에서 다시 평화동 신성. 짓골. 맏내골의 조그마한 계곡을 형성하고 산줄기는 서서학동 미륵댕이로 계속 뻗는다.
산줄기는 계속 뻗어서 지금의 완산칠봉 상봉(장군봉)을 이루었다. 완산에서 뻗은 산줄기는 용머리를 지나 다가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 나가 지금의 화산공원 산을 만들었다. 어은골 계곡도 지었다.
고덕산에서 뻗은 산줄기는 지금의 새내(삼천)와 전주천이 만나는 고사평에서 가라앉는다.
산줄기는 계속 뻗어갔으나 서신동 일대의 택지개발로 찾아볼 수가 없다. 서신동 마전으로 가는 길에서 끝이 난 것이다.
한편 소양의 만덕산(해발762m)에서 뻗은 산줄기는 완주군 상관면 점치를 지나 우아동 소재 묵방산(해발530m)과 두리봉(해발434.9m)을 이루고 아중천을 만들면서 소양천으로 합류된다.
묵방산 산줄기는 우아동 왜막실의 일출암 부근의 해발 502m봉을 솟은 다음 승암산을 이룬다. 낙수정 계곡과 모래내를 이룬 후 기린봉도 만들었다.
이 산줄기는 인후동 선린사 근방을 지나 능선을 이루며 마당재와 서낭댕이 부근의 능선을 이룬다. 북쪽으로는 건지산. 가련산. 천마산을 만들었다. 산줄기는 결국 송천동 오송저수지 부근에서 가라앉게 된다. 기린봉과 승암산에서 뻗은 산줄기는 금암동 KBS 부근의 거북바위를 만들어 냈다.
전주는 완산의 용(龍)과 건지산의 건(乾), 곤지산의 곤(坤), 서학동의 학(鶴), 금암동 거북바위의 구(龜)가 만나서 이루어진 곳이다.
가련청람
가련청람(可連晴嵐)은 완산승경 32경 가운데 하나다. 가련은 전주시 덕진동 덕진공원 서편에 있는 높이 106미터의 가련산을 말한다. 청람은 갤청(晴), 아지랑이람(嵐)이다. < 멀리 보이는 산의 푸르스름한 기운 > < 화창한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 < 화창하게 갠 날씨 >등을 표현한다. 따라서 가련청람은 ‘가련산의 아름다운 아지랑이’를 가리킨다.
청람은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등장하는 단어다. 소상팔경은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있는 소상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산시청람(山市晴嵐), 어촌석조(漁村夕照), 소상야우(瀟湘夜雨), 원포귀범(遠浦歸帆), 연사만종(煙寺晩鐘), 동정추월(洞庭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모설(江天暮雪)을 이른다.
가련산에는 6.25 때 전사한 학도병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가련산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 산자락에는 하가동과 아랫가르내, 서쪽 자락에는 웃가르내, 남쪽자락에는 사평이 있다.
아랫가르내의 다른 이름은 하가리(下可里)다. 아랫가르내 북쪽으로 가르내에 놓인 다리가 추천교(湫川橋)다. 이전에는 용산다리 혹은 전주교로 불리기도 했다. 이 다리에는 유래가 있다.
가르내(현재의 하가마을) 일대는 전주이씨들의 집성촌이었다. 호가 추탄(楸灘)인 전주이씨 후손 이경동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어느 날 밤 사경을 헤매었다.
이경동은 급히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사는 명의한테 찾아가 처방약을 받아들고 귀가를 서둘렀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주천이 삽시간에 범람했다.
이경동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물을 건너기 위해 전주천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물살이 양쪽으로 쫘악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다. 홍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다급한 이경동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의 부친은 얼마 후 기사회생했다. 물론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 다시 합쳐졌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했다며 칭송이 자자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바로 추탄의 추 자를 딴 추천교(楸川橋)다. 냇물이 갈라진 웃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지금도 부른다.
추탄 이경동은 황방산 아래 마전 마을(지금의 서신동) 출신이다. 추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황강서원에 제향된 황강 이문정의 후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이백유의 손자다.
그는 우승지 벼슬을 지낼 때 왕비 윤씨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이경동은 대사헌, 예조참판, 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등의 벼슬을 역임한 후 낙향하여 추천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팔복동 황방산 밑에는 이경동의 효행을 기린 비가 있다.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추탄선생 조대비(嘉善大夫 兵曹參判兼 知義禁府事 司憲府 大司憲 楸灘先生 釣臺碑)”라고 새겨져 있다.
아랫가르내의 동쪽으로는 호반촌이 있다. 1970년대 택지조성사업 때 만들어진 동네다. 아랫가르내에서 가련산 자락을 따라 나있는 길이 있다. 이곳으로 내려 가다보면, 아랫가르내를 막 벗어나서 조그만 다리가 하나 있었다. 이 다리를 구성다리라고 했다.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다.
구성다리에 당도하기 전에 있는 산모퉁이는 구성다리모팅이라 했다. 가련산에서 구성다리모팅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에는 예전에 소나무가 꽉 들어차서 왕솔백이라고 했다. 구성다리를 지나 얼마쯤 가다보면 학동마을이 있다.
왕솔백이와 학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는 고라실이라고 한다. 제일 아래쪽은 아랫고라실, 가운데는 웃고라실, 제일 뒤쪽은 뒷고라실이라 부른다. 뒷고라실은 전주지방법원 바로 뒤쪽과 덕진중학교 맞은 편 골짜기로, 재경골이라고도 한다.
전주천은 이 지역을 벗어나면서부터 양편에 고사뜰과 사평뜰을 두고 북진하다가 고사뜰 북쪽 꼭지점에서 삼천과 만나 가래여울을 형성한다. 전주천이 건산천의 물길을 받아 삼천과 합류되는 구간이다.
전주천은 이곳에서부터 불리는 이름도 달라진다. 바로 이곳부터 만경강까지 이어지는 물줄기를 추천(楸川) 혹은 가래여울, 가리내(가르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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