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불로동 고분군(사적 제262호)
(大邱不老洞 古墳群)
위치:대굿광역시 동구 불로동 산335번지
면적: 298,824 펑방 m
지정일:1978년6월23일
소유자: 국유, 사유
시대 :삼국시대
문화재분류:사적 제262호
발굴된 고분수:214기(앞으로 더 발견될수 있음)
개요: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화재청 자료)
찾아가느길
지하철 아양교역 버스정유소에서 팔공산 또는 갓바위 버스 101-1, 401,팔공1,또는
급행1을 타고 "불로성당" 정유소에 내려 동쪽으로 200m 거리에 있다.
발굴작업 내용
불로동고분군은 다음과 같이 발굴 조사 되었다.
*1938년 일제시대에 발굴했던 18호분(해안면1호)과 22호분(해안면2호)은 봉분만이
남아 있을뿐 부장품(副葬品)등 자료가 없음.
*1963년에 경북대학교에서 발굴한 고분은 발굴 당시 파 해처져 유물 몇점만이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그후 1999년 불로고분군을 새단장을 하면서, 경작으로 흔적이 없어진
2기의 고분(불로갑호와불로을호)을 아래 그림과 같이 대략적인 위치만 추정 가능함(대구대박물관 이희돈조사보고서 참조: 아래)
*2002년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한 석곽묘 91호,93호, 1호~6호,7-1호,7-2호,7-3호와 토광묘(고려묘)1-1호,1-2호,총14기는 체계적으로 발굴해, 당시 상황을 사진 또는 도안 으로 작성 보고(경상북도문화재발굴보고서 2004 인용).
*1999년에 고분군 정비사업시 발견된 212호는 긴 세월동안 유실되어 형태만 있을뿐 내용물은 없었으며 201호고분의 우측(남쪽 30여 m 지점)에 위치하고 .기존 다른 표지석재료와는 다른재질로 표지석을 만들어 놓았음.
*2007년에 발굴된 213호와 214호는 부장품이 모두 파손되어 보관할수 없는형태였으며, 봉분은 201호 고분 앞쪽으로 10여m 거리에 새로 둥글게 만들어 놓았고 표지석은 아직 없음.
고분군의 위치
불로갑,불로을 고분군의 위치(1963년에 경북대에서 발굴)
212호,212호,214호는 발굴당시는 평탄했으나 고분군 공원사업으로 2010년
후반기에 봉분을 만들어 놓았음.
1963년도 불로고분갑, 불로고분을호 발굴 당시 전경
고분군내 표지석이 있는것은 고분군에 속하나 표지석이 없는 고분도 있음.
그러나 표지석이 없는것은 대부분이 민묘(民墓)임.
불로갑호. 불로을호 고분 출토분:경북대학교 소장분(1963년)
굽다리접시(高杯)
그릇받침(鉢形器臺)
굽다리접시,뚜껑(高杯.蓋)
소옹(小甕).뚜껑(蓋)
돌이부처저옹(突耳附尖底甕)
불로동고분 제91호 발굴(2001.11~2002.12.10)
고분 직경20m,높이 5m 이상 91호와 93호, 직경 8m이하의 석곽묘(石槨墓) 10기(1호~6호,
7-1호,7-2호,7-3호,8호)와 토광묘(土壙墓) (고려묘) 2기(1-1호,1-2호) 등 모두 14기 고분의 발굴출토품은 각종도기,태환이식( 太環耳飾),세환이식(細環耳飾)
,팔찌,목걸이,철촉(鐵화살),철모(鐵矛), 철검(鐵劍),철부(鐵斧),재갈,등자(馬具종류),행엽(杏葉),
철정(鐵釘),도자(刀子),닭뼈,잉어뼈,생선뼈,상어뼈등 460여종의 출토품이 발굴되다.
*태환이식( 太環耳飾): 큰 둥근 귀고리
*세환이식(細環耳飾): 가늘고 둥근 귀고리
* 등자:말에 오를 때나 타고 있을 때 기수의 발을 받쳐주는 역할
* 행엽(杏葉):말띠드리개
* 철모(鐵矛):철로된 긴 창
* 철정(鐵釘): 철로 된 못
* 도자(刀子): 작은 칼
91호고분 사진자료중 일부
상우:1곽 상좌 :2-1,2-2곽 하좌:3곽 하우:4곽
주요출토품
1곽 부장품
2-1곽 부장품1 2-1부장품2
2-1부장품3
3곽부장품1 3곽부장품2
3곽: 생선뼈 3곽: 닭뼈
3곽:생선뼈(상) 생선뼈(하)
3곽: 잉어뼈 3곽:잉어뼈 확대
4곽:상어뼈
4곽부장품
각곽에서는 기타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음.
불로동고분 제93호분 발굴(2001.11~2002.12.10)
93호분 사진자료중 일부
제93호 고분발굴 입체도
제93호분 평면도
제93호 고분 부장품
불로동 고분군 개요(대구대 박물관 이희돈 보고서 인용)
1. 解顔面 1號墳 (18호고분)
봉분의 크기는 남북 28m, 동서 62m, 높이 7m인데 서쪽에 다른 봉분과 접해있어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8.05m, 폭 1.2m, 높이 2.2m 이며, 석실의 중앙에 폭 40cm의 간벽(間壁)을 만들어 2실로 이루어져 있다. 벽면의 축조에는 길이 44cm, 폭 12cm 내외의 산석(山石)을 이용하였는데 석재의 짧은 면이 벽면이 되도록 쌓았다. 석실은 전실의 경우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으나, 후실은 위로 갈수록 내경(內傾)하고 있다. 천장에는 5매의 큰 개석을 덮었다. 유물은 후실에서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토기 중에는 사행상(蛇行狀)문양의 고배도 있다. 그리고 금동제 운주(雲珠)편도 출토되었다.
2. 解顔面 2號墳 (22호 고분)
1호분에서 동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21m, 높이 4m 정도인데, 산석의 쇄편(碎片)으로 쌓아 올려서 적석분(積石墳)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석실의 구조는 1호분과 마찬가지로 전후실의 형태이며, 크기는 길이 5.5m, 폭 1.2m, 높이 1.9m 이다. 천장에는 6매의 개석(蓋石)을 덮었다. 4벽을 폭 34cm, 두께 8cm 가량의 산석을 이용하여 장방형으로 쌓았으며 중간에는 폭 40cm의 간벽(間壁)을 쌓았다. 전실은 붕괴되었으며, 후실에서만 유물이 출토되었다.
3. 不老洞 甲號墳 (현존 봉분이 없음)
해안면(解顔面) 1호분에서 서쪽 30m 지점에 위치한다. 봉토는 완전히 잃어버려 평탄하게 되어 있다. 외형상의 규모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고 잔존하는 개석(蓋石)은 지표 아래 30㎝ 정도에 묻혀 있었다.
개석은 현지 암반에서 채취할 수 있는 점판암(粘板岩)을 사용했으나 편평한 판석이 아니고 모두 길쭉한 부정형의 괴석 따위를 횡가(橫架)시켜 천장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석실 측벽은 사면이 모두 조잡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실내 또한 반듯한 규격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현 잔존 부분을 통해서 석실 내의 규격을 추측해 보면 높이가 1m 내외, 길이가 4.5m, 폭이 70㎝ 내외가 되었다. 바닥은 원 토광(土壙)을 그대로 아무런 시설 없이 사용하였다. 장축의 방향은 정 동서 선상에 놓여있다. 부정형의 천장석, 측벽 석재, 거기에다 조잡한 축조로 말미암아 실내는 토사가 유입 충만하여 천장 가까이 까지 메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완전한 구조파악은 할 수 없으나 잔존한 유구를 통해 추측한다면 장방형의 토광을 파서 사면에 할석을 쌓아올려 그 위에다 개석을 횡가한 소위 수혈식계(竪穴式系)의 석실고분이다. 석실 동편 바닥에 있었던 유물은 이미 개간당시 반출되어 버렸고, 현존유물에 있어서도 개석 벽석의 낙하로 모두 파편화 되어 버렸다. 거기에다 교란 당하여 개별적 정 위치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대략적인 배열을 보면 석실 중앙부의 양 측벽 아래에 고배(高杯)류가 산재하고 석실 서편 일대에 고배류와 더불어 호류(壺類)들이 집합되어 있었다. 중앙부 한가운데와 동편은 교란 또는 반출한 뒤라 원 상태는 알 수 없다. 당시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로서는 동편 일대에서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석실의 전체적인 부장상태는 동서 양단(兩端)에 토기류를 대량 집중시켜 부장하고 장 측벽에 접해서 고배류를 길게 놓아 둔 것으로 본다. 피장자의 위치는 중앙인 듯 하나 방향은 전혀 알 길이 없다.
4. 不老洞 乙號墳 (현존 봉붕이 없음)
이 고분은 해안면 1호분에서 서북방향으로 3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경작에 의해 사방에서 깎여 방형의 나지막한 봉분만 남아있었다. 잔존 봉토 내부는 잡석 등이 전혀 없는 양질의 적갈색 점토로 석실을 덮고 있다.
석실 개석은 현 봉토 정상에서 2.9m 아래에 거의 수평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개석은 5매로 구성되어 있었고, 석재는 갑(甲)호분처럼 가까이 에서 구할 수 있는 점판암(粘板岩)이었다. 형태는 부정형이며, 비교적 큰 판석을 사용했다.
석실의 사면 측벽은 조잡한 방형 괴석류를 사용했다. 석실 바닥면의 장축은 동북으로 향하고, 그 길이는 4.8m, 폭은 중앙이 95㎝이고 양단이 각각 85㎝로서 좁아져 있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을 가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피장자는 직접 원토광(原土壙)의 바닥을 이용해서 안치한 것으로 본다. 석실구조는 갑호분과 마찬가지로 수혈식 장방형 석실고분이다.
-푸른화원/허상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