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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토선 원문보기 글쓴이: 선용스님
나무아미타불
강윤철 거사님은 가장 많은시간 동안
관정큰스님을 모시고 통역을 하셨던
거사님으로 큰스님을 모시고 함께
수행했던 우리 스님들은 당시 강거사님을
통거사(통역거사)라고 불렀다.
능인선원 법회에서부터 끈스님과 인연을
맺게된 강거사님은 큰스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신 마지막 3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큰스님과 함께
하였다.
전국 순회 법회당시 큰스님을 모시고
다닌 우리 제자스님들은 통거사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옆에서
큰스님을 수행했던 우리들은 지극한
존경심과 신심으로 큰스님을 모시고
다녔지만
통거사는 통역비를 벌기 위해 큰스님과
함께 다녔으며, 큰스님께서 무릎 관절이
아픈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실태
중국 공신당원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곀으신 일을 얘기하시면서 공산당들을
원망하시는 말씀을 하시면
옆에있던 통거사가 큰스님을 향해
아주 큰소리로 큰스님을 나무라면서
함부로 대했던 장면을 여러차례 보았기
때문에 우리 제자스님들은 대놓고
말할수는 없었지만 통거사를
'막되먹은 놈.. 무식한 인간' 딱
그정도로 여겼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통거사가 나중에
머리깍고 스님이 됐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나이도 한참 많아 아마 행자생활을
거치지 않고 타종단에서 그냥 승려증만
발급받아 머리깍고 승복입고 생활하지..
싶다.
관정 큰스님께서는 강거사와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음을 능인선원에서
처음 만났을때 바로 알아보시고 계속
강거사에게 연락을 취해 결국 통역을
맡기신 것 같다.
큰스님의 복건성 사투리는 어지간히
중국말을 잘한다는 사람들도 큰스님
앞에 나가 직접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했다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는데, 강거사와는
소통이 잘되어 특별히 더 강거사에게
의지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내가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다닐적에 큰스님께서 강거사에게
"내가 너는 반드시 극락왕생 시킨다. "
라는 말씀을 여러차례 반복하셨던
기억이 난다.
큰스님께서 강거사에게 느끼신 감정은
단순한 통역사를 넘어 아마도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던 가족같은 느낌이셨던것
같았다.
아래 이야기는 [극락간 사람들]에서
강윤철 거사님이 쓴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저자 보정거사님이 취재녹취한
내용을 강윤철 거사가 쓴것처럼 책에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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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철 아버지를 천도시키시고 극락에서
찾아내신 관정 큰스님
글 강윤철.
1)관정스님 통역을 맡게 된 이야기.
나는 길림성 연변에서 태어나 농업대학을
나와 용정시 농업국에서 근무하고있었다.
1983년부터 KBS텔레비젼에서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프로그램으로 대대적인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가족도 그속에
들어있었다.
내 아내의 친삼촌이 한국에 계셔
서로 알게 되었고 연락이 시작
되었던것이다.
1989년 그 삼촌 되시는 분이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한달간 머물다 간 뒤 우리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하였다.
당시 한국으로 직접 오는 비행기가 없기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왔는데 삼촌이 잘
아시는 분이 일본에 계셔 일본구경까지
하였다. 그뒤 나와 처형은 평창동에 있는
그 삼촌집에서 가사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관정스님을 알게 된것은 바로
아내의 숙모이신 조상락(범명 상락선)
보살 때문이었다.
상락선보살은 불교를 열심히 믿어 많은
스님과 친분이 있어 집에 찾아왔으나
나는 불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있던 나는 종교적
믿음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 사회주의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97년 3월 9일, 상락선보살이 말씀하셨다
"강서방, 능인선원에서 중국에서 오신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한다는데 함께 가서 들어보자."
나는 불교 자체가 좋아서기라보다는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좋고, 또 오랜만에 중국에서
오신 분이 법문을 하신다니 따라 나섰다.
능인선원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왔는데
들어갈 모든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었다.
강한 복건 사투리로 법문을 하시는데
통역을 맡은 여자분이 차트를 넘기며
주로 차트에 적힌 내용위주로 통역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나자 많은 대중이 두 편으로
나누어 가운데 길을 내어드리자,
관정스님이 나오시고 그곳에 참석하셨던
7명의 스님이 뒤따라 나왔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법문을 들었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상락선 보살옆에 서 있었다.
나는 두번째 줄에 서 있었는데,
우리 앞을 지나가시던 관정스님이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보고 또
보고 하시더니 중국말로 물었다.
"너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속으로
"웃기는 일이다.나를 언제 보았다고
아는척을 하지?"
라고 한국말로 두런두런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 구룡사에서 전법하는데 꼭 오너라."
사실 연변에서 관정 스님이 계시는
복건성까지 가려면 기차를 여러번
바꾸어타면서 일주일은 가야 하는
먼 거리이다. 그러므로 관정스님이
나를 알아보고 내일 법회에 오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상락선
보살에게 말씀드렸다.
"큰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가봐야지. 유기사, 내일 강서방
구룡사까지 모셔드려라."
그래서 다음날 유기사와 함께 구룡사에
갔다. 내용은 이미 어제 들었던 것이고,
크게 흥미도 없어서 유기사와 뒤에서
놀다가 법회가 끝나 관정 큰스님이
나오실때 뒤에 서있었더니 미국, 중국,
싱가포르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써주시며
내 연락처를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일하고있는 상락선보살 집
전화번호를 적어드렸다.
다음날 "부석사로 간다 "고 전화를 하셨고
옮기실 때마다 전화를 주시더니, 중국으로
떠난다고 하시며 또 전화를 하셨다.
상락선보살이 공항에 나가보라고 했으나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가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98년 8월,정원에서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해서 받아보니 관정 큰스님이었다.
"군위 압곡사 자해 스님이 나를 초청했는데,
네가 가서 몇개 절에서 초청하고 준비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아라.
이틀 뒤에 한국에 도착할 것이다."
상락선보살에게 말씀드렸더니 스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라고 하셨다.
8월 15일 당시는 흔하지 않은 외제차를
가지고 상락선보살과 함께 김포공항에
가서 모시고 평창동으로 와 공양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상락선보살과 함께
스님을 압곡사에 모셔다드렸다.
우리가 서울로 떠나려 하자 관정 큰스님이
"강거사는 안가면 안되니?"
하고 나를 붙잡으셨다.
상락선보살이
"스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라."고 하여
이때부터 큰스님을 모시고 통역을 하게
되었다.
2)나는 지금 극락을 보고있다.
몇년동안 사부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늘 한방을 썼기 때문에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다 볼수가 있었다.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시면 먼저 나에
이불을 개라고 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시거나 다른 일은
일체 안하시고 결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약간 앞으로 숙이고 앉으셔서 꼼짝을
하시지 않는다.
단둘이만 있으면 나는 너무 심심하므로
말씀이라도 나누려고 흔들어 깨워본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드리지 마라.
나 지금 극락 모습을 보고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실제로 조금전에
보았던 극락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셨다.
3)한국에서 만난 도인들.
철원 심원사에서 법회가 있을때 북한산
용암사 (은평구 진관동)주지스님이
찾아오셔 관정스님에게 보시금을 주시고
법문을 들으셨다.
법회가 끝난뒤 나에게 지시하셨다.
"저 스님의 이름과 전화를 써놓아라.
저 스님에게 후광이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법문을 하러 다니시며
만난 스님가운데 수행이 깊은 스님들을
말씀해주셨는데 한마음선원의 대행스님,
송광사 방장스님을 드셨는데, 다른 한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번 겨뤄보자.]
대구의 한 호텔에서 그 지역 원로 스님들과
모임을 했다.
관정스님이 극락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정토선 수행법을 설명하자 대부분 화두선을
하는 스님들은 이에 아주 비판적인 공격들이
쏟아져나왔다.
"극락이란 다녀올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염불이란 근기가 낮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다."
처음에는 공격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답해
나갔으나 참석자들의 공격이 그치지를 않고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 관정 스님께서
결심하고 참석한 스님들께 말씀하셨다.
"그러면 좋습니다.
나도 허운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 수행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논란만 벌일 것이 아니라
서로 어느정도 경계를 가졌는지 확인
해보기로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선정에 들어가
7일동안 꼼짝하지 않고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저보다 우월한 수행력을
보이실 분은 나서보십시오."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관정 스님의
사자후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 관정스님이 법회하러 가는 곳에는
이처럼 선승들이 나타나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았다.
강원도 철원 심원사에서 법회를 할 때에도
어떤 선승이 똑같은 공격을 하자 이번에는
2일을 줄여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둘이 함께 5일동안 선정에
들어가서 누가 경계가 더 높은가 보자!"
이렇게 선언하자 그 스님은 결국 법회에
참석하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만일 큰스님 자신이 7일간 자신이 없는데
엄포를 놓았고 한국의 선승이 일주일간
선정에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스님이
있었다고 관정 스님의 한국 전법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주일 선정에 드는 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4) 트릭을 쓴다고?
앞에서 잠깐 보았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하는것은 2000년부터이다.
그리고 이때까지 가장 열심히 스님을
모시고 도왔던 절이 군위 압곡사이다.
당시 압곡사의 자해 慈海 스님은 누구보다
구도정신이 강해 극락 다녀온 관정스님을
정말 스승으로 모시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압곡사 총무가 관정 스님의
도력이 완전히 가짜라고 들고나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언제부터인가 관정 스님이 한국에 와서
법회를 할 때는 천도재와 마정수기라는
두가지 행사를 하게 된다.
문제는 천도재에서 생겼다.
천도재를 마치고 참석한 가족과 신도들에게
영가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를 이야기
해주는 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이 영가는 하늘나라 도리천에 태어났다."
"이 영가는 하늘나라 도솔천에 태어났다."
하는 식으로 발표를 하면 참석자들이
환희심을 거지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탑 다라니를 불에 그슬리면 거기에
글자가 쓰여있는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피라핀으로 글씨를 쓰면 보이지 않다가
불기운(火气)에 닿으면 글씨가 나타나는
아주 초보적인 수법으로 이것이 사기라는
것이다.
그뒤 압곡사 총무는 지금까지의 태도와
완전히 달라져 관정 스님을 초청하는
절에 하나하나 전화해서
"이런 사기수법으로 신도들을 속여 인기를
얻으려 했다."라며, 법회를 취소하도록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고 한다.
찾아가는 스님들에게 그 글씨와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보여주면서 온 힘을
다해 "관정 스님은 도력이 없고 오로지
돈만 벌러 다닌다."라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가 터졌을때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전하러 다니느냐?
돈을 모으러 다니느냐?
책에도 있지 않느냐?
내가 만일 돈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법을 전하기 위해
왔고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그런 짓을
한다면 뒷수습은 누가 하느냐?
잘 생각해보아라.
내가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관정 스님은 초를 가지고 글씨를 쓰고
그 초 위에 재를 뿌리고 흔들면 글씨에
재가 묻어나면서 글씨가 나타나는 방법을
안다고 하셨다.
그러나 천도재에서 그런 잔재주 가지고
몇번이나 하겠느냐고 되물으셨다.
나는 그동안 관정 스님과 늘 함께 하면서
큰스님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기
때문에 굳이 구차스럽게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것을 굳건하게 믿는다.
또 관정 큰스님이 그런 짓을 하려면
천도재를 하기전 미리 준비해야 하고
그러려면 반드시 나에게는 말씀하셔
함께 해야 하지만 그런것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를 극락으로 천도해 주신 관정 스님
솔직히 처음에 나는 관정 스님의 도력에
대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관정 스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천도재 때문이다.
1999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한국에 불법체류를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멀리서라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49제를 준비하였다.
그래서 미국에 계시는 관정스님에게
전화해서 여쭈어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49제를 지내야
하겠는데 어느 절에서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러자 관정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너의 아버지 49제는 내가 직접 해줄
터이니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관정 큰스님은 내가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는 것도 잘 아시고 또 내가 벌어서
중국에 돈을 보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레서 늘 나에 대해 신경을 써 주셨고
큰스님이 직접 2번이나 우리 집으로
돈을 송금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정을 고려하여 직접
천도제를 해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정 스님을 모신 덕분에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자식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반년 뒤 관정 스님이 오셨다.
저녁에는 늘 아무 말씀 안하시고 참선만
하시기 때문에 심심해진 나는 아버지
천도재에 대해서 여쭈어보았다.
"아버지 천도재를 하셨다면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극락에 가셨다."
너무 간단히 대답하여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극락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 여쭈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관정 스님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압곡사
천도재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루라고
하셨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스님에게 말씀드려 오전 천도재를
오후로 미루었다.
그날 저녁 공양하시고 잠깐 주무신 뒤
12시에 일어나서 세수하시고
앙치질을 하신 뒤 결가부좌를 하시고
앉아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내가 '읽어라' 라고 하면
' 중국 길림성 용정시 △△번지
강윤철이 아버지 강○○를 찾고 있습니다'
- 라고 중국말과 한국말로 읽어라."
12시 40분쯤 ' 읽어라 ' 라고 하셔서
-' 중국 길림성... -' 이라고 중국어와
한국어로 읽었다.
10분 뒤 " 또 읽어라 "라고 하셔서
-' 중국 길림성...-' 이라고 중국어와
한국어로 읽었다.
20~30분뒤 " 또 읽어라 " 라고 하셔서
-' 중국 길림성... -' 이리고 중국어와
한국어로 읽었다.
계속해서 "읽어라" 하시면 읽고.
또 " 읽어라" 라고 하면 또 읽었다
이렇게 해서 무려 4시간을 계속한 뒤
새벽 4시 반이 되어서야 말씀하셨다
" 찾았다."
"너 원래 나를 믿지 않았지? 종이
가져 오너라. "
종이를 가져다 드렸더니 아버지의
화상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다 그리신 뒤 물었다.
"너의 어버지 맞나? 천도한 것 틀림없지? "
" 예, 맞습니다."
종이에 그려진 모습은 정확하게 아버지
모습이었고, 심지어는 금 이빨이 몇
개인지까지 정확하게 그리셨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여쭈었다.
"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극락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천도한 사람들은 모두 업을
가지고 왕생 (帶業往生) 했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가도 자식이 아버지를
간절하게 부르면 망상이 뜨고 옛날
모습 (眞面目 ) 이 나타난다
그래서 상품상생부터 너에게 ' 읽어라 '
하고 망상이 뜬 모습을 찾기 시작하여
9품을 다 훑느라고 시간이 걸린 것이다."
"너의 어버지는 하품하생에서 찾았다."
나는 이 말씀을 듣자마자 관정 큰스님에게
큰 절을 올리면서 말씀드렸다.
" 이제부터 저는 사부님께서 소를 보고
돼지라고 하면 돼지라고 하고
팥을 보고 옥수수라고 하면 옥수수라고
하겠습니다."
다음날 오전에는 쉬셨다.
이제야 오전 천도제를 오후로 미루라는
큰스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 내 9품을 다 다니시느라 힘들어
천도재를 할 수 없어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루셨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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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곡사에서 있었던 천도재 관련 이야기는
당시 나도 함께 있었을때 발생했던 사건
입니다.
관정 큰스님께서는 수많은 사찰에서
초청을 받아 법회를 다니면서 오로지
마정수기를 통해 불자님들이 올린
보시만 받으셨을 뿐 단 한차례도
천도재 보시를 따로 받으신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큰스님을 존경하는 일부
스님을 제외한 많은 사찰 주지들은
큰스님을 이용하여 합동천도재를
올렸고 천도재수입은 사찰 주지들
챙겼던 것이기에 큰스님께서 굳이
천도재를 지내면서 사기행각을 벌여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업장이 두터운
불자들과 스님들이 스님을 오해하고
비난했었습니다
또 위에서 열거한 압곡사 주지스님
자해慈海스님의 경우는 일타큰스님
상좌로 도道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과
신심으로 큰스님께 많은 보시를 하여
중국 가람복원 불사에도 큰 후원을
하셨던 스님이셨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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