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詩 속의 음식 이야기]
순대국밥 그 행복감 박 봉 준
대형마트 식품코너에서 요리조리 집요하게 저울질하는 아내. 그 등 뒤에서는 늘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는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이 시대에는 음식 만드는 재간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나 독신자들이 살아가기 참 편리한 세상임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형형색색 맛깔스럽게 진열된 인스턴트식품이나 식재료들에서는 어딘가 깊은 맛이 우러나지 않을 듯싶다. 영리를 우선으로 하는 경영과 과장광고, 대량생산 등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성과 손맛이 든 음식과 비교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일 것이다.
지금은 눈여겨보아도 잘 보이지 않지만, 전에는 오일장이 열리는 저잣거리에 가면 늘 펄펄 끓는 무쇠솥이 있었다. 김 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그 뜨거운 국물에 뚝딱 말아주는 순대국밥 한 그릇과 손바닥만 한 무김치를 한 입 베어 물면 왠지 나는 곧잘 서러움이나 고독함을 느끼곤 한다. 아련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그런 그리움을 배경으로 감상에 빠져드는 순대국밥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순대국밥 집에는 여느 식당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유구한 우리 민초들의 가난함과 뚝심과 같은 체취가 배어 있는 듯하다. 아내가 며칠 집에 없는 날은 순대국밥을 사와 집에서 홀로 소주 마시기를 즐기기도 한다. 순대국밥은 뚝배기에다 소주를 곁들어야 궁합이 잘 맞다. 술을 마시기 위해 순대국밥을 먹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주가 빠진 순대국밥은 어딘가 모르게 오소리감투가 빠진 순대국밥 같다는 생각이다.
순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 먹던 음식이고 순대라는 말의 어원은 몽골의 셍지(피, 선지) 두하(창자), 순타이(피를 담는 창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시장에 순댓집 골목이 즐비하고 떡볶이집에는 으레 순대를 팔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나 집안에 큰일이 있어야 만들던 귀한 음식이었다. 지역마다 재료가 조금씩 다른 아바이순대, 병천순대, 백암순대 등 유명 순대가 있고 당면순대는 70년대 수출할 수 없는 돼지 부산물에 당면을 넣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맛있고 영양소가 풍부하고 값이 저렴한 음식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
그리움이 울컥 목울대로 올라오면
누이야,
순대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닷새장이 열리는 그곳으로 가자
뚝배기 가득 넘치는 구수한 냄새
시큼한 무김치 입에 물고
머리 고기 몇 점 선선히 덤으로 앉으면
난장으로 지나가던 바람
그리움도 한 잔술에 취하여
눈시울 뜨거워지고
너저분한 세상 이야기 후후 불며 삼키는
누이야,
순대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리움이 울컥 목울대로 올라오는
그런 날이면
-「누이야, 순대국밥이나 먹으러 가자」전문
장모님이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 내 처가의 고향은 ‘북청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이다. 육이오 때 월남하여 고향 가까이들 정착하여 집단을 이룬 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실향민 촌으로 회자하는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이다. 한때는 텔레비전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로도 이름을 떨치던 마을이다. [아바이]란 ‘아버지의 방언’이라는 사전적 뜻도 있지만, ‘늙은이’나 ‘할아버지’의 뜻이 더 가깝다. 마찬가지로 늙은 여자나 할머니는 [아마이]라고 부른다. ‘아바이마을’에 처가를 둔 내가 판단하기에는 기실 ‘아바이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움직이는 것은 아마이들이다. 대외적인 이름이야 ‘아바이마을’이지만 실상 그 속은 아마이들의 억척스러움과 고단함 그리고 결단력과 현명함이 오늘의 ‘아바이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장모님 역시 ‘아바이마을’ 여전사인 아마이답게 가자미식해며 명태아가미식해, 해뜨기식해와 명란젓 그리고 오징어순대, 명태순대 등을 잘 만드셨다. 그중에서도 명태순대는 명품이다. 명태순대는 통 명태순대를 솥에 쪄서 여느 순대처럼 썰어서 먹거나, 양념 고추장을 발라서 구워 먹는데 이북 음식이지만 쉽게 맛볼 음식은 아니다.
늘 맏사위인 이, 아 애비가 잘 먹는다고 명태순대를 만들어 보내시곤 하셨는데, 그 만드시는 과정을 잘 알기 때문에 먹을 때마다 목이 메었다.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내 아내도 명태순대 만큼은 배우지 않겠다고 하였다, 어깨너머로야 대충 알겠지만, 대충 만든 솜씨가 그 분야의 장인이신 장모님 솜씨만 하겠는가. 오징어순대는 내장을 꺼내고 속을 채우기가 쉽지만, 명태는 명태 속의 큰 가시를 파내기가 만만치 않다. 명태를 할복하여 속을 채우면 간단할 일이겠지만, 배를 가르면 순대가 되지 않기에 일일이 가시를 제거해야 하는데 어떤 날에는 장모님 손끝이 다 상하신 걸 보면 넙죽넙죽 받아먹기가 참, 염치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아내는 장모님을 꼬드겨 가끔 만들곤 하셨는데 언제부턴 가는 기력이 달리시는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단서를 자주 달곤 하셨다. 이제는 장모님 얼굴도 뵐 수 없지만, 명태순대 맛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장모님이 명태순대 만드신 걸 보니
아직은 기력이 짱짱하시다
오징어순대도 잘 만들지만
팔뚝만 한 놈 뱃속에 함경도 비법을 꽉 채운
명태순대는 명품이다
언제부터인가
마지막이라고 만드시는 명태순대
아내는 전수받을 생각이 없는 눈치다
배 가르지 않고
아가리로 내장을 몽땅 끄집어내어
손끝마다 가시가 박힌들
자식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즐거움을 생각하면 무슨 대수겠는가
여보시요
아, 아 애비인가
전화가 오면
이, 아 애비가 좋아해서
명태순대를 만드신다는 장모님
명태순대 못 만드실까 봐
해가 갈수록 걱정이다
-「나도 명품을 먹는다」전문
[고다]의 명사형이 [곰]이다. [고다]는 ‘고기나 뼈를 푹 삶아 끓여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곰국]은 ‘고기나 뼈를 푹 우려낸 국’이란 뜻이다. 이런 사전적 뜻을 어린 내가 알 수 있었겠는가. 곰국이면 그냥 곰(雄)고기를 넣고 끓인 국인 줄 알았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그때에는 강원도에는 포수가 많았다. 우리 당숙 한 분도 포수였는데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가끔 찾아오시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뵙지를 못했다. 진부령 기슭의 흘리라는 동네에 사신다고 하였는데 어머님 돌아가실 때에 안 오신 걸 보면 먼저 작고하신 듯하다. 그때는 곰도 많았는지 어느 해 겨울인가 눈이 내리는 신작로 정거장에 커다란 흑 곰이 죽은 채로 화물차를 기다리고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는 아이들이 잔뜩 겁을 먹고 있던 기억도 아직 선하다.
요즘도 심심치 않게 곰국을 끓이다 불을 냈다는 뉴스를 볼 때가 있다. 우리 아내도 가스 불에 곰국을 끓이다 화들짝 택시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간 적도 있으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부들이 곰국을 끓이다 가슴을 쓸어내는 일들이 다반사인 듯하다. 곰국은 그만큼 정성이 있어야 한다. 마트에 가면 유명 회사마다 사골국이니 곰국을 화려하게 출시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곰국은 장시간 여인의 속살처럼 뽀얗게 국물을 우려내야 효험이 있다고 하니 여자들 입장에서는 몇 날 며칠이고 가스비나 기름값이 펑펑 나가도 할 수 없는 노릇이겠다.
대부분 남편은 맛있는 음식에 대해 ‘맛있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다고들 한다. 나 또한, 집사람 앞에서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예외일 수 없다. ‘맛있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날부터 아내의 극진한 사랑이 넘치고 넘쳐 다시는 그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게 되는 자충수를 두어 화를 자초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내들 입장에서는 오로지 ‘남편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철없고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아무리 곰이나 황소같이 힘이 넘친다고 하여도 주야장천 먹어대면 물리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래도 남자들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먹어야 한다. 가정의 건강과 평화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곰국 한 그릇 먹이지 못하고 있는 아내들의 속 깊은 사랑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곰국을 끓인다는 말, 그러니까 나는 처음엔 그게 곰熊 고기를 삶는 줄 알았다
그해 겨울, 눈 쌓인 신작로 정거장에 쓰러져있던 집채만 한 곰이 아직도 내 어린 기억 속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털가죽을 두른 강원도 포수 흘리* 당숙이 꿈에 보였는데, 어머니 장례식에 오시지 않은 걸 보면 진부령 산속에서 그만 곰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외양간으로 쏟아지는 햇볕에 앉아 끔벅끔벅 우울증을 견디거나 일상을 되새김질하던 황소, 가끔 들판을 향해 여물 같은 울음을 토해내며 멍에를 메던 우직한 뼈가, 오늘 한 솥 가득 진한 눈물을 쏟는다
뼈마디 마디에 각인된 척박한 일생, 그 영혼까지 고스란히 녹아내려 이제 내가 곰같이 미련하고 힘센 황소가 되는
아내는 가스 불을 켜놓고 종일 외출 중이다
* 진부령 기슭에 자리 잡은 산촌
-「곰과 곰국에 대한 연상」전문 -
[2013년 두레문학 제14호]
첫댓글 글이 참 좋습니다.
다울문학집에도 자신의 글을 화평하는 부분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을 읽는 밤이 흐뭇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