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의 삼미[美·味·米] / 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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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한국시단은 기만 명의 시인들이 등단하여 수많은 시들을 생산해 내면서 시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 종의 문예지들과 많은 동인지 그리고 시집들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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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시들을 쓰고 있는가? 시가 경제적인 수익을 올리는 수단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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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를 놓고 짐작해 보건데, 시인이 시에 매달리는 이유는 창작과정을 통해 맛보는 자아도취의 희열과 세상을 향해 쏟고 싶은 발언에 대한 욕구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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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한 작품을 얻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문득 영감이 떠올라 큰 어려움 없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하나의 시상을 놓고 며칠 혹은 수주일 동안 벼르며 구상과 집필 그리고 퇴고를 거쳐 완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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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시상의 잉태와 출산의 과정은 고통이면서 또한 기쁨이다. 어쩌면 시의 탄생 과정은 임산부의 출산 과정에 비유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임산부가 잉태와 출산의 모든 괴로움을 달게 견디는 것은 탄생될 아기가 주는 기쁨으로 보상받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도 한 편의 시를 빚어내면서 겪는 괴로움을 달게 견디는 것은 완성된 작품이 주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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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는 출산 후의 아이를 잘 길러내는 일까지 맡는다. 먹이를 제공하고 건강을 살피며 교육을 시켜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양육하지 않던가? 산모는 출산 후의 아이가 잘 성장하도록 무한 책임을 지고 돌보는 후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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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인의 경우는 출산 후의 작품을 돌보지 않는 것이 산모와 다르다. 자신이 낳은 작품이 세상에 나아가 어떠한 영향을 주고 어떠한 대접을 받든 관여하기 어렵다.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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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자신이 출산한 작품이 세상에 나아가 어떠한 대접을 받든 관심이 없을까?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기왕이면 자신의 작품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할 것이 아닌가? 자신의 작품을 세상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얼마나 적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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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시를 자기만족을 위해 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쓰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는 얘기다. 마치 화가가 그림 그리는 자체를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고, 성악가가 노래하는 자체가 즐거워 노래를 부르고, 무용가가 춤추는 자체가 신명나서 춤을 춘다는 얘기나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화가나 성악가나 무용가가 창작활동 자체만으로 만족하는가? 그렇진 않다. 그들도 관중이나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활동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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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기대하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독자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자기만족만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굳이 세상에 발표할 것도 없으리라. 더욱이 그 작품이 소통불능의 것이어서 독자를 괴롭히거나 혹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순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초연한 시인이라도 세상의 반응에 무관심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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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시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이 장차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창작에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만든 작품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공해물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고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일깨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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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시인은 작품을 창작할 때 자기만족의 욕구를 넘어서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들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감동적인 작품이란 어떤 작품일까? 재미있게 읽힐 뿐만 아니라 읽고 난 뒤에도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 여운이 있는 그런 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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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동적인 작품의 조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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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작품은 아름다워야 한다. 다루는 대상이 아름답든지 아니면 대상을 다루는 표현의 솜씨(형식)가 아름답든지 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의 기본 조건이다. 시가 예술작품이 되려면 ‘아름다움[美]’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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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 소설이 즐겨 읽힌 것은 재미가 있기 때문인데 시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재미[味]’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독자들이 읽어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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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정신적인 영양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독자가 미처 알지 못한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한다든지 혹은 삶에 대한 용기를 북돋아 준다든지…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의 정신적인 ‘영양소[米]’가 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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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하는 주장이지만 좋은 작품은 좋은 과일과 같아야 한다. 우선 보기에 아름답고[美], 먹을 때 맛[味]이 있고, 먹고 난 뒤에 몸에 자양분[米]으로 작용해야 한다. 나는 이를 삼미[美·味·米]라는 말로 표현해 보고 싶다. 빨갛게 잘 익은 아름다운 사과처럼 베어 물면 향기로운 맛이 나고 먹은 뒤엔 우리의 몸에 좋은 영양소로 작용하는― 그런 향기롭고 맛있는 시, 그런 시들이 많이 생산되어 우리의 시단을 아름답고 맑고 풍요롭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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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 권두에세이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