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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이 서울에 당도하자마자 체포됩니다. 그 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로의 대신들의 도움으로 포도청에 갇히어 포도대장 한규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길준은 사대부 신분으로 포도청이 아니라 의금부에 송치되어야 했었지만, 포도대장 한규설로 하여금 보호하게끔 그렇게 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유길준은 포도청 구치장에서 한 달 여 감금되었다가,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으로 옮겨 1년 반, 그리고 다시 1887년 민영익의 별장인 취운정(翠雲亭: 서울 가회동에 위치)으로 옮겨 거처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종의 가택연금의 상태에서 유길준은 저술 작업을 진행하였고, 또 국정의 중요 문제들에 대한 자문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유길준 저술의 대표작 <서유견문>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조선의 외교정책에 관한 논설과 문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길준이 연금상태에서 최초로 작성한 중요한 문건은 <중립론>입니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영세중립의 이론이고, 당시 조선 대내외 위태로운 정국에서 민족의 활로를 위한 방책이기도 하였습니다.
먼저 당시 한반도의 복잡다단한 정세에 대하여 다시 주의를 돌려 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속방(屬邦)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 종주권에 대하여 언급해 보겠습니다. 청과 조선의 관계, 속방의 의미, 종주권의 범위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중국의 지배권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고,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중국은 조선의 국왕에 대한 책봉(冊封)권을 행사했고, 조선은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대내 통치와 대외 교섭에서는 자주적인 권능을 행사해 왔습니다. 따라서 당시 청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완전한 독립국은 아니지만, 자주적인 국가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조약에서 일본과 조약 체결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조약은 청의 허가 하에 체결된 것이지만, 청은 조선이 외국과 자주적으로 조약을 체결할 권능을 인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길준도 깊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절체제(兩截體制)"라는 어려운 해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대중 관계에서 조공 책봉의 예는 긍정하면서 다른 대외 관계에서는 평등하고 자주적인 권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즉 대중 관계와 다른 대외 관계를 서로 끊어서(兩截)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대중 사대질서를 완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근대 주권 평등의 국제법 질서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은 전통적인 사대 질서, 즉 종속(宗屬)관계를 전면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였고, 일본 등 조선의 진출을 꾀하던 열강들은 근대적인 국제법질서만을 공식 인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정세는 청의 종주권과 열강들의 조선 진출 그리고 조선의 독립의 의지가 경합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고, 조선의 상황은 격랑에 휩싸입니다. 조선의 구세력이 조선에 진출한 일본을 타격하자 일본은 군사적 개입을 시도하였고, 이에 대하여 청은 더 강력한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종주권을 과시하였습니다. 일본은 청과 대적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러시아 등 열강의 개입을 우려하여, 다만 일본군 주둔을 보장하는 제물포 조약에 만족하였습니다. 청도 러시아 등 열강들의 개입을 경계하며 한반도의 병합 시도까지는 나가지 않고, 다만 청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을 조종하는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일본은 조선의 중립화를 통해 청의 종주권을 약화시키면서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과 조선 조정은 그러한 일본의 방안에 반대하였습니다.
드디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일찍이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여 한반도와 국경을 마주하였지만, 영국 등 열강들에 대한 자극을 우려하며 조선 진출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조선 정세가 동요하면서 러시아도 조선에 대한 지분을 차지하고자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러시아의 움직임에 반색하였습니다. 임오군란에 청의 도움으로 왕권을 유지하였지만, 고종은 청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고종은 원래 미국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미국 초대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내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그에 대한 답례로서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증진을 위하여 보빙사를 파견합니다. 앞서 보았듯이 정권의 핵심 민영익이 정사였고, 유길준도 수행원으로 함께 갔었습니다. 고종은 이른바 ’영토 야심이 없는‘ 제국 미국에 커다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미국 초대 공사 푸트도 조선의 문호개방과 미국과의 무역 증진을 기대하였습니다. 푸트는 고종에게 사절단 파견을 제안하였고, 항해 배편도 제공하였습니다. 보빙사 민영익은 미 국무장관을 예방한 자리에서 조선의 군사 외교 분야에 대한 고문관 초빙도 요청하였습니다. 바로 조미 수교의 주역이었으며, 청의 속방조장 삽입을 막아 낸 슈펠트 제독이 거명되었습니다.(손정숙, “한국 최초 미국외교사절 보빙사의 견문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학, 제29권, 한국사상사학회, 2007, 263쪽)
정권의 핵심 민영익은 귀국 후에 푸트 공사에게 ’나는 광명의 세계를 보고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영익은 결국 개화의 길을 걷지 못하였습니다. 민영익을 수행하였던 해군 소위 포크(George Clayton Foulk)는 민영익을 소심한 사람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결국 민영익은 그의 가문 민씨 수구당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미국도 조선 정국에 깊게 연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교역의 이익은 크지 않았고,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연루의 위험은 컸던 것입니다. 슈펠트 제독의 파견은 이루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러시아와 신속하게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며 <조선책략>을 가져오는 등 조선 내에는 이른바 ‘공러(恐露: 러시아를 혐오하고 두려워함, Russophobia)의식’이 퍼졌습니다. 이는 특히 러시아를 경계하는 청과 일본에 의하여 주입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임오군란 후 1883년 일본에 사죄 사신으로 파견된 김옥균에 명하여 러시아 공사를 만나 수교교섭을 시도하였고, 1884년에는 고종이 직접 김관선을 러시아 노브키예브스코(Novokievskoe)에 파견하여 수교를 타진하기도 하였습니다(허동현, “고종의 인아보국(引俄保國) 정책과 궁정파 관료 이범진의 보국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9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11쪽).
러시아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러시아는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음을 예의 주시하며, 같은 해 7월 청 텐진 주재 러시아 영사 베베르(Carl Waeber)에게 조선에 수교 교섭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리훙장은 러시아의 조선 진출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84년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과 프랑스가 공식 전쟁에 돌입하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전격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청불전쟁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조선 진출을 서둘렀고, 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러시아를 상대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1884년 러시아는 베베르를 서울에 급파하여 입국 2주 지나 조러수호통상조약(1884년 7월 7일)이 체결되었습니다.
조러 조약의 신속한 체결에는 묄렌도르프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묄렌도르프는 임오군란 후 청이 조선을 보호 감독하기 위해 파견하여 외교와 세관을 담당한 조선의 관리이자 청의 고문이었습니다. 조러수호통상조약으로 러시아는 조선 조정의 간섭 없이 상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함이 개항장만이아 조선 모든 항구에 자유롭게 입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단번에 청과 일본과 대등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조러 조약은 청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외교 쿠데타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청의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소환하여 경고하였지만, 묄렌도르프는 그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귀국 도중 러시아 군대 인사들을 만나 러시아가 참여하는 조선 보호 방안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습니다(전홍찬/한성무, “구한말 묄렌도르프의 친러 정책: 독일 외교 정책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국제정치연구 제23집 3호, 2020, 218쪽).
1884년 7월 14일 청은 프랑스에게 최후 통첩을 하고 청불 전쟁이 발발합니다. 청은 조선 주둔 3000의 병력 가운데 절반을 본국으로 재배치합니다. 앞서 보았듯이 김옥균 등 조선의 개화파는 정부 내 소수였으며, 수구파에 의해 언제 숙청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1883년 이미 보았듯이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로 좌천되었습니다. 개화파와 고종은 애초 미국의 군사교관을 기대하였지만, 미국은 푸트 공사를 파견하였지만, 조선 정국에 관여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개화파가 기대를 걸었던 민영익도 수구로 돌아섰습니다. 청에 군사 교관을 요청할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김옥균이 일본에 보내 훈련시킨 서재필 등14인의 사관생도들은 임용 기회를 박탈당할 것이었습니다. 김옥균이 일본에 기대하였던 대규모 차관도입도 실패하였습니다. 김옥균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심정이었습니다. 마침 청불 전쟁이 발발하고 청군의 반은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김옥균은 이를 다시없는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도 이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본국 정부는 지원을 거부하였습니다. 김옥균은 개화파가 장악한 일부 군인과 일본 공사관 배치 군대만으로 거사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서울 민중들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반일감정을 오히려 자극하였습니다. 결국 청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본군 33인을 포함 쌍방에서 백 수십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처음에 조선 주둔 청의 군대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칫 청일전쟁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일부는 본국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으나, 위안 스카이는 자체 판단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군과 일본군을 진압하였습니다. 위안 스카이가 청의 영웅이자 조선의 실권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위안 스카이는 갑신정변을 진압한 후 귀국 복명하여 조선에 공식 감국(監國: 보호국) 통치를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리훙장은 열강들의 간섭을 우려하여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와 간섭은 강화되었고, 청과 일본의 군사적 각축은 격화될 것이었습니다.
갑신정변의 위기를 겨우 넘긴 고종은 청도 일본도 아닌 러시아에 의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고종은 갑신정변 직후 묄렌도르프를 통하여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였습니다. 묄렌도르프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제물포로 수척의 러시아 전함과 200명의 해군을 서울로 파병하고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설정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한동훈, “거문도 사건을 둘러싼 영러의 대립 양상과 러시아의 대응”, 군사연구 제154집, 육군군사연구소, 2022, 175쪽). 러시아는 자칫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청일 사이에 엄정 중립을 지키면서 조선의 보호국 요청을 수용하지 않고, 다만 만일을 위해 조선에 군함을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1885년 3월 갑신정변의 수습을 위해 전권대신 서상우를 수행하여 일본에 간 묄렌도르프는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를 만나 러시아의 조선 보호의 방법으로 첫째, 러시아 중재 하의 청, 일, 러 3국의 조선 중립화 보장, 둘째, 러시아 단독으로 군사적 보호를 하는 방법, 셋째, 조선을 러시아의 일반적 보호통치 하에 두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철수하는 경우 훈련 교관으로 장교 4명과 부사관 16명 파견을 요청했고, 영흥만 조차(租借) 가능성에 대해도 언급했습니다.(김용구, 러시아의 만주 한반도 정책사, 17~19세기, 푸른 역사, 2018, 132-133쪽)
영국 역시 조선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주지하듯이 19세기 세계는 영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대결(이른바 ‘Great Game’)의 시기였습니다. 갑신정변이 발발하면서 청 주재 영국 공사이면서 조선 공사도 겸하였던 파크스(Harry Smith Parkes)는 청일의 군사적 충돌과 러시아의 개입 가능성을 경계하며 한반도 남해의 요충 거문도 순찰을 건의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군함 파견 소문이 퍼지면서 영국은 더욱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1885년 3-4월 중앙 아시아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영국은 러시아와 다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의 펜제(Panjdeh,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남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영국군의 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영국은 바로 전시 모드로 들어갔고, 1885년 4월 15일 거문도를 무단히 군사 점령하였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마침내 한반도에서 세계 열강들의 군사적 각축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 제국주의의 폭풍은 청일 전쟁 그리고 러일 전쟁을 낳았고, 조선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은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 그리고 식민지로 병합하게 될 것입니다.
임오군란에 이은 갑신정변 그리고 영국의 거문도 점령까지 발발하여 조선에서의 열강들의 각축이 본격화되면서 한반도 안전보장의 문제가 국제적 화두가 됩니다. 조선의 중립화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길준은 귀국 직후 연금된 상태에서 바로 <중립론>을 저술케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