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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特別市 校長團 제14회 鬱陵島, 獨島 海上 巡禮記>
동해의 외로운 섬,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
조 용 휘
한국해양소년단 서울연맹이 주최하고, 서울특별시교육청과 해군 제1함대 사령부의 협조로, 서울특별시 초, 중, 고 교장단 128명은 제14회 울릉도 및 독도 해상순례를 2008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2박 3일간 다녀왔다.
첫째 날(2008. 5. 23. 금)
5시에 기상하여 어제 밤에 챙겨 놓았던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사당 역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는 동해 행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2호선 전철에 올랐다. 이른 아침인데도 전철 안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어 깜짝 놀랐다.
대학 선배인 박 교장님과 함께 버스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잠깐 동안 졸다가 차창밖을 보니, 고속도로에는 많은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버스가 3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동해 시 해군 제1함대 사령부였다. 해군 군악대와 장교들이 도열하여 우리 울릉도․독도 순례단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제1함대 사령관인 윤재식 소장의 환영사에 이어, 해양단 고문인 최영섭 예비역 소장이 답사를 하였다. 최고문은 82세의 고령임에도 6년 전 백령도 탐방 때와 같이 정정한 모습과, 우렁찬 목소리가 변함이 없었다. 최고문은 동해의 중요성과 해군의 중요성을 연설 내내 강조하였다. 특히 교원은 ‘영혼과 인성의 조각가이므로, 학생교육에 있어 티끌만큼의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현재 초․중․고생이 6.25 전쟁에 대한 내용을 잘못알고 있다며, 특정 교원단체의 왜곡된 교육의 영향 때문이라고 성토하였다.
환영식을 마치고, 제1함대 군악대의 주악을 들으며 군함인 광개토대왕함에 승선하였다. 제1함대 사령관은 우리 일행과 악수를 나누며 환송해 주었고, 광개토대왕함 함장인 이종석 대령은 함상에서 일일이 한 명씩 악수로 맞이해 주었다.
광개토대왕함은 순수한 우리 기술로 만든 해군 최초의 군함으로 4,000 톤 급이며, 약 250 여명의 해군이 승선하고 있으며, 주요 임무는 동해를 수호하는 파수꾼 역할을 한단다. 광개토대왕함이 동해항을 떠나 울릉도에 도착하기까지 약 4시간 30분 동안의 항해 중에, 고속정 2척이 좌우에서 환영 퍼레이드를 펼치며, 힘차게 ‘뚜우뚜우’ 뱃고동을울렸다. 우리는 두 손을 높이 흔들며 환호를 보냈다.
고속정은 수년 전에 북한군과의 서해 교전 시 출동하여 북한군을 물리친 전투함이라고 한다. 전방 50 여m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로 인해 오색 연막을 내뿜는 전투 비행기의 퍼레이드는 생략되었다. 함상에서는 군함 내부 둘러보기, 해군복 입어보기, 건빵 먹기 등 해군의 함상 병영생활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광개토대왕함은 4시간 30분 간 동해의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였다. 울릉도는 15년 전, 여름방학에 동 학년 선생님들과 2박 3일간 해변주변과 성인봉을 종주하여 나리분지에서 민박을 한 경험이 있던 곳이다. 도동항은 그 사이 건물이 높아지고 도로가 넓혀져 있었으며, 차량이 많아진 것이 눈에 띄었다.
울릉도의 위치는 동경 130° 54‘, 북위 37° 29’에 위치한 동해 유일의 도서군(島嶼郡)으로 면적은 72.82㎢로 경상북도의 0.4%로, 동서 직경 10㎞, 남북 직경 9.5㎞ 섬 둘레 56.5㎞이다. 해발 984m의 성인봉을 분수령으로 한 5각형의 화산도로서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에 속해 있다. 울릉도 역사는 상고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예로부터 지명은 우산국(于山國), 우릉도(羽陵島), 울릉도(鬱陵島)로 불리어 왔다. 지증왕 13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고 한다. 1979년에는 1읍 2면 체계로 2000년에 독도리를 신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둑, 공해, 뱀이 없는 3無와 향나무, 바람, 미인, 물, 돌이 많은 5多의 섬이기도 하다.
울릉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케이블카로 울릉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동해의 비치 빛 바닷물과 파란 하늘이 조화를 이루고, 항구에 배들이 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독도 박물관에 들렸다. 독도 박물관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울릉군이 대지를 제공하고, 삼성 문화재단이 건축한 건물에 故 이종학 초대 관장이 30 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수집, 기증한 자료를 근간으로 하고, 故 홍순칠 대장의 유품 및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와 ‘푸른독도가꾸기모임’ 등의 자료를 첨가하여 1997년 8월 8일 국내 유일의 영토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고 한다.
삼봉도를 형상화한 박물관 건물은 연면적 1,600㎡(484평)의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지상 1층의 3개 전시실(제1․2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중앙 홀, 2층의 1개 전시실(제3상설 전시실)․자연생태영상실․도동시가지 전망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 1998년 8월 8일 ‘박물관 개관 1주년’ 및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며 제막된 독도 박물관 표석을 시작으로 ‘야외독도박물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독도박물관은 독도 및 조선해(朝鮮海)를 둘러싼 관련 자료를 발굴․수집․연구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전시․교육․홍보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및 일본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와 이론을 토대로 구축하는 동시에 국민의 영토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건립 목적을 두고 있다.
제1상설 전시실에는 독도가 우리의 고유 영토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자료는 일본의 것으로서 한국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지도 속의 독도는 1530년(중종 25)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도인 동람도에 수록된 팔도총도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명령으로 구끼(九愧喜隆) 등이 제작한 지도「조선국 지리도 소재 팔도 총도」와 1785년 일본의 지도 제작 대가인 하야시(林子平)가 그린「삼국접양지도」가 전시되어 있다.
제2상설 전시실에는 일본의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과일본해주장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다. 일본은 1905년 당시 독도가 어느 국가도 이를 점유하고 있었던 행적이 없는 땅(無主地)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국제법적 요건을 충족시켜 합법적으로 영토를 편입한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한반도의 동쪽(일본 열도의 서쪽) 바다 이름을일본해(日本海)로 정착시키려 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1900년「칙령 제41호」, 1905년「시마네현 고시 제40호」, 1853년 「지구만방도」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3상설 전시실에는 ‘독도 의용 수비대’가 독도를 사수한 활약상과 ‘푸른 울릉 독도가꾸기 모임’의 활동상, 그리고 일본의 독도 관련 연구서들과 망언을 담은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어,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집요한 침략 근성과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과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독도에 다시 상륙하였고, 울릉도의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독도의용수비대」는 전쟁으로 인한 행정․군사적 공백을 메웠으며,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약 3년 8개월 간 일본과 전투를 치루면서 독도를 사수하였다고 한다.
자연생태 영상실에는 독도의 식물과 조류, 어류 등 독도의 생태를 사진으로 볼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대형 화면을 통하여 독도의 자연환경을 보여 주는 영상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데, 독도에 서식하는 주요 동․식물인 매, 동박새, 괭이갈매기, 파랑돔, 개볼락, 섬장대, 해국, 날개하늘나리 등을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울릉 군민회관에서 최영섭 해양단 고문의『김일성의 남침전쟁과 대한해협 해전』이란 주제의 안보 강연이 있었다. 강연요지는 ‘남북의 분단에서부터 6.25 전쟁과정, 작금의 한국전쟁을 보는 왜곡된 시각, 전 국민이 죽음으로 지켜낸 대한민국, 처절한 민족의 대 재앙, 대한 해협해전과 그 의의,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켜 일으켜 세우자라는 참전용사인 노장군의 피 맺힌 절규였다.
군민회관 안을 가득 메운 우리 해상 호국 순례 단원들은 老장군인 최 고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현실을 직시한 정곡을 찌르는 연설이었기에 박수 소리가 더 크지 않았나 싶었다.
좌파 10년의 정권에서 민족을 앞세우며 남침이니, 반미니 하고 날뛰는 친북 좌파세력이 횡행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어떻게 지켜 온 대한민국인데......
둘째 날(2008. 5. 24. 토)
6시에 눈을 떴다. 호텔 창밖을 보니 구름이 산허리를 휘 감고 있었다. 오늘은 독도 탐방 날이기 때문에 제발 날씨가 좋아야 상륙할 것인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독도 가까이 갔다가도 높은 파도 때문에 입도하지 못하고, 섬 주위만 빙빙 돌다가 돌아온 팀이 많았다고 하였다. 바람이 세지 않으니 입도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소식이 들렸다.
6시 30분부터 아침식사를 하고 7시 30분 독도행 유람선을 승선하기 위해 도동항으로 향하였다. 2시간 동안 항해하여 독도 입도시간은 30분, 선착장에서 사진촬영만 하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200 여명을 태운 유람선은 우리 일행들이 갑판에서 삼삼오오 모여 사진촬영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 항해 2시간 만에 동해의 검푸른 바다를 헤치고 독도에 입항하였다.
갑판에서 해양단의 새 고문으로 위촉된 우리 대방초등학교 4회 졸업생인 예비역 노진덕 해군제독을 만났다. 이번에 울릉도, 독도 탐사 명단에서 모교 교장이 참가한 것을 알고 어제부터 나를 찾았다고 하였다. 노 고문은 해사 23기로 10 년 전에 우리 학구에 있었던 해군 복지단장(준장)으로 예편하였고, 재임 시에는 ‘삽교함상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내가 재임하는 학교의 훌륭한 졸업생을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다. 노고문은 아직도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당당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독도에 입도하다니 꿈만 같았다.
독도는 예로부터 삼봉도, 우산도, 가지도, 요도 등으로 불려 왔으며,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독도가 주목받는 것은 우리나라 동해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전략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한․일 양국간의 영유권 분쟁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세기 말 이후 울릉도와 독도에는 일본인들이 잠입, 남획을 일삼아 주민들과 분규가 잦았다. 이에 대한제국은 1900년 우용정(愚用鼎)을 내부시찰관으로 울릉도에 파견하여 분규를 수습한 뒤, 그 해에 칙령 제41호로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을 제정, 반포하였다.
울도군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전군(鬱陵全郡), 죽도와 함께 석도(石島)를 규정하고 있는데, 죽도는 울릉도와 이에 딸린 작은 섬과 바위의 통칭이며,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석도를 훈독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독도는 신생기 3기인 4백 60만 년 전에 화산폭발로 생긴 34개의 바위섬이다. 기후는 난류의 영향으로 온난다습하며, 연중 비가 내려 연평균 강수량이 1천 3백㎜ 정도이며, 5종의 나무와 36종의 풀과 쥐, 지렁이, 갈매기 등이 서식하고 있다. 독도는 1982년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되었으며, 독도에 서식하는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등 3종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독도가 우리 영토에 편입된 것은 서기 512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한 시점이라고 한다. 또한 ‘만기요람’ (1809년 편찬)은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라고 기록, 우산국 안에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돼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 독도를 송도로 불렀다고 한다.
세종실록(1432년)은 ‘우산과 울릉의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 고 기록하여 두 섬이 조선왕조의 영유권 안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은주시청합기(1667년) 등 일본측 역사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으며,조선국교시말내탐서(1896년, 일본 외무성 작성 보고서)에서도 독도를 조선 부속령으로 밝히고 있다.고려사,조선실록,세종실록등 각종 고문헌을 통해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입증하고 있다. 1900년에는고종칙령 41호를 통해 울릉도 도감을 군수로 개칭하고, 관할 지역을 본도(울릉도 및 석도(독도)로 했으며, 1952년에는이승만 라인을 발표하였다.
1953년부터 56년 3년 8개월간 홍순칠 대장과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이 실제로 거주했고, 현재 이곳 주민은 1991년 주민등록을 옮긴 김성도씨(59) 부부 등 2세대 4명이라고 한다. 독도로 본적지로 옮긴 가구도 2007년 7월 31일 현재 623세대 2,102명이다. 이 중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정광태 씨도 포함되어 있다.
독도에는 조류, 식물 및 곤충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해양생물 또한 풍부하다. 조류로는 가장 많은 괭이갈매기를 비롯하여 바다제비, 슴새, 물수리, 노랑지빠귀 등 22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황로, 황조롱이, 흰줄박이오리, 노랑발도요와 같은 철새들도 쉬어가는 섬이다. 곤충도 잠자리를 비롯하여 나비, 집게벌레, 독도장님노린내, 어미무당벌레 및 섬땅방아 벌레 등 약 53종이 있다. 이중에서 독도장님노린내, 어미무당벌레 및 섬땅방아 벌레는 81년도에 국내에서는 처음 발견된 ‘한국미기록종’이다.
식물은 목본식물(나무)과 초본식물(풀)로 나눌 수가 있는데, 독도의 경우 토양층이 얕고 경사가 심해 나무가 서식하기에는 힘들다. 그래서 목본 식물은 극히 적고, 초본식물이 주(主)를 이루고 있다. 술패랭이, 쇠비름, 번행초, 와호장근, 깨가치수영 섬시호, 큰두리꽃 등 약 69종 6변종의 식물이 있다.
해양생물로는 오징어, 명태, 대구, 상어 및 송어와 연체동물인 전복, 밤고동, 소라 등 19종, 절지동물인 바위게 등 17종, 부채게, 불가사리, 성게 등 극피동물 5종이 있다.
포유류로는 우리의 삽살개 동돌이와 서순이 그리고 새끼 7마리가 있다.
동해의 쪽빛 바다와 하얀 파도에 씻겨 만들어진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는 15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평균 수심은 10m로 2개의 큰 섬과 작은 섬으로 나뉘어져 있다.
동도의 높이는 해발 98.6m이며 정상이 비교적 평탄한 편이라 독도 경비초소와 헬기장, 등대 등의 시설물들이 있다. 면적은 73,297㎡이며, 둘레는 2.8㎞로서 중앙부는 원형상태로 해수면까지 함몰와지가 특징이다. 동도의 주요 지명으로는 천장굴, 얼굴 바위, 숫돌 바위, 부채 바위, 독립문 바위가 있다. 이런 신기한 바위를 보노라면 460만 년 전 검푸른 바다 위에 솟아올라 대한민국의 동해를 지켜낸 독도의 아름다운 바위섬은 신의 예술 작품인 듯하다.
서도는 해발 168.5m로 뾰족한 원뿔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동도보다 조금 크다. 서도는 면적 88,740㎡, 둘레 2.6㎞이다. 경사가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어 정상으로의 접근이 어려우며, 수많은 괭이갈매기와 함께 사람의 흔적이 묻지 않은 태고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편, 서도의 북서쪽 해안의 물골 바위틈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지표수는 하루에 1,000ℓ 정도로 귀중한 식수원으로 쓰인다. 주요 지명으로는 어업인 숙소, 코끼리바위, 탕건봉, 물골이 있다.
독도에는 한자로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바위에 쓰여 있었다. 동도 선착장에 도착한 일행은 동도와 서도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 후, 전원이 모여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했다. 독도에서 애국가를 합창하니 마치 내 자신이 애국자라도 된 양 감개무량하였다. 공연이 눈물이 나오려고 하고 목소리가 메이기도 하였다. 유람선 출발시간 때문에 30 분간의 짧은 독도 체류 시간이 아쉽기 짝이 없었다.
유람선은 2시간 여 항해 끝에 우리 일행을 도동항에 내려놓았다. 오후에는 일행을 A 팀과 B 팀으로 나누어 성인봉 등반과 봉래폭포 등 해안 일주를 하였다. 나는 성인봉 등반 팀으로 희망하였다. 15 년 전 동 학년 선생님들과 어렵게 성인봉을 넘어 나리분지까지 등반한 기억이 났지만, 이번에는 봉고차가 성인봉 3분의 1지점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니 좀 쉬운 등반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인지 지원자가 많은 편이었다.
성인봉은 해발 984m이지만 바다에서 거의 수직으로 솟은 봉우리이기 때문에 등반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로 중간에는 울릉도 특산물인 산나물을 산비탈 밭에 재배하는 것이 많이 눈에 뜨였다. 성인봉은 성스러운 모습의 산이라 성인봉(聖人峰)이라 부르며, 안개와 구름이 덮이면 신비로움이 더한 산이라고 한다. 삼피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희귀수목이 자생하는 정상부근은 천연기념물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성인봉 정상을 향하여 오르다, 지치고 힘들면 물 한 모금으로 입속을 행구고, 눈을 들어 아래쪽을 바라보면 동해의 푸른 물이 멀리까지 펼쳐진 수평선이 한 눈에 보였다. 육지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이름 모를 식물도 간혹 눈에 뜨였다.
2시간 동안 비지땀을 흘리며 정상 가까이 오르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과 함께 냉장고를 열었을 때 나오는 뿌연 운무가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조금 후에는 후드득 후드득 빗소리가 한 두 방울 떨어지다가 본격적으로 비바람이 치기 시작하였다. 구름 한점 없이 파랗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덮였다. 성인봉의 높이가 달라짐에 따라 서식하는 생물과 기후까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한라산 등반 시에 경험하였던 고도에 따라 서식하는 생물과 날씨가 달라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봉 정상에는 붉은 글씨로 ‘聖人峰’이라고 선명하게 씌어진 바위 비를 세워 놓았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비가 많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하산 하였다. 저녁 식사 후에는 울릉도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 우리 대방초등학교를 졸업한 노 고문과, 선배 교장 등 4명이 함께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밝힌 해안 절벽 길을 산책하였다. 울릉도 바닷가의 야경은 주간(晝間)과는 또 다른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셋째 날(2008. 5. 25. 일)
오늘이 울릉도․독도 탐사 마지막 날이다.
아침식사 후에 호텔 체크아웃과 승선준비를 하고, 버스로 성인봉을 가로 질러 뚫린 터널을 통과하여 나리분지를 둘러보았다. 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 지대로 면적 1.5㎢, 동서 약 1.5㎞, 남북 약 2㎞의 약초 주 생산지이다. 이곳에는 야영장과 시물원이 있고, 울릉국화, 천연기념물 제52호인 섬백리향 군락과 제48호인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 원시림,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너와집을 비롯하여 조상들이 살았던 투막 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리분지의 기후는 가을 날씨처럼 선선하였다.
도동항에서 11시 30분에 동해호를 선승하여, 약 30분간 이동하여 넓은 바다에 떠 있는 광개토대왕함으로 바꿔 탔다. 광개토대왕함의 이종석 함장의 특별 배려로 선상에서는 약 1시간 동안 우리 일행과 광개토대왕함 대원이 함께하는 ‘노래자랑’을 열었다. 해군 하사관의 사회로 진행된 노래자랑은 병사들의 끼가 넘치는 장기와 초, 중, 고 교장 대표의 열창으로 함상에는 박수와 웃음이 가득하였다.
광개토대왕함은4시간 30분 동안 항해 끝에 동해항으로 귀항하여, 우리 일행은 버스로 동해 1군 해군사령부회관으로 이동하였다. 해군회관 중앙에는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게시되어 있었고, 원탁 테이블에 10 여 명 씩 둘러 앉아 만찬을 하였다. 1군 사령관의 환영사와 답사에 이어 광개토대왕함 함장에게 감사패 전달, 건배 순으로 진행되었다. 해군회관 전면 대형 스크린에는 2박 3일간의 일정을 촬영한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 주어, 2박 3일 간의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역시 군인들이라 신속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탐사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일은 첫째 날 함상에서 신반포중학교 교장과 광개토대왕함의 병사인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만남과, 마지막 날 이화미디어고 교장과 제자인 광개토대왕함 함장 부인과의 만남이었다. 우리 일행 모두는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큰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우리 교원들은 언제, 어디서 제자들과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일본이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표기하면서, 독도가 한․일 양국의 첨예한 외교 문제로 제기되어 우리 사천 만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은 과거부터 우리 정부가 바뀔 때 마다 의도적으로 독도 문제를 제기하여 우리 정부를 시험대에 들게 하고 있다. 일본의 교활함과 치밀함은 장구한 로드 맵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하여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자기 네 땅으로 기정사실화 한다는 고도의 전략이다.
우리 정부는 역대 정권마다 안일하게 대처하여 왔기 때문에 오늘 날과 같은 사태를 자초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김대중 정부에서 체결한 ‘신 한․일 어업협정’ 은 한․일 공동어로수역을 한․일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하여, 공동어로수역 중간에 있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빌미를 주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독도가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문제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시네마현의 고시도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냄비 근성인 우리 국민은 반일데모를 하고, 일본제품 불매 운동을 벌인다고 떠들썩하다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 네 영토로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근거자료를 축적해 나가고 있다. 독도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집착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바위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독도를 영토화 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배타적 경제수역(EEZ)이라는 국제해양법 신질서에 대처하고, 망간과 코발트, 니켈 등의 광물자원도 상당량 매장되어 막대한 경제적 이익도 크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정부와 국민 모두는 지혜를 모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독도문제에 대해 냉정한 자세로 실천할 수 있는 쉬운 일부터 하나하나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이라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불러보아도 가슴이 답답한 까닭은 무엇일까?
< 광개토대왕함과 울릉도, 독도 해상 순례에 참가한 서울시 초,중,고 교장단 >
< 독도 선착장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 독도, 해상 순례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