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2024년 1월 30일날 학교로 발송된 아직 미발표된 나의 2015년 박사논문의 심화버전입니다.
Cette thèse est une version approfondie de ma thèse (Yinkoo LEE) de doctorat non publiée de l'année 2015, et envoyée à l'univ le 30 janvier 2024.
이 서론은 2009년ㅡ2015년 박사논문을 다 쓴후 [미발표, 불어완성], 2016년에 다시 한국어로 작성되었다 [심화버전].
그리고 그후 이 서론은 2021년 12월에 불어전자글로 작성되었다. 이때, 해킹을 통해 서론이 유출된 것 같습니다.
Cette introduction est rédigée à nouveau en coréen (version approfondie) en 2016 après la réalisation de la thèse en 2009 - 2015 [ inédite: réalisée en français, mais sans corriger]. Et puis cette introduction (2016) a été rédigée en français électronique en décembre 2021. A cette époque, Il semble que l’introduction ait été divulguée suite à un piratage.
Le français est en dessous
주제 : 내면풍경 -육화된 소외-
Sujet : Paysage intérieur - Aliénation incarnée -
[서론계속...]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사물의 실상을 은폐하는 현대의 언어, 즉 ''바벨의 언어''가 아니라, 잃어버린 근원언어 아담의 언어를 다시 찾아내는 것이다. 일찌기 연금술사들은 상징적인 도상으로 '말없는 이미지''인 아담의 언어를 보여주려했다. 그리고 랭보는 이러한 침묵의 언어를 글로 표현했다.
'' 나는 침묵과 밤들을 썼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기술했네. 나는 각종 현기증을 고정시켰네'' [랭보]
여기서 랭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것을 기술했다는것은 직관에 의한 '즉각성''직접성''내재성'을 한번에 표현하는 시의 작용을 의미한다. 말없는 근원 언어를 직관적인 '시'로 드러내는 것, 말없는 말씀, 침묵의 언어는 직관을 드러낸 시같은 ''예술의 창작''과 직결된다.
예술의 창작이란 사물의 외양을 모방하는 재현이 아니라 사물속에서 보이지않는 본질을 회화의 언어로 옮겨놓는것이다. 범람하는 모든 바벨의 말에서 쏟아지는 현기증을 화면에 고정시켜 사물의 진짜모습을 드러내는것이다. 사물의 본모습 [내면의 중심]을 예술속에 비추어내는것이 ''시의 언어''라면, 이 시의 언어는 숨겨진 본질을 ''빛''으로 현시한다. 이러한 아담의 언어인 사물의 실상을 보여주는 빛 [진리]를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Aletheia]라 했다. 알리테이아란 하이데거가 언급했던 존재의 ''비은폐성'' 즉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을 ''리히퉁''이라 한다.
여기서 진리는 사물과 그림의 일치인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운다. 그리고 현전의 계시기능인 보이지않는 근원적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보이지않는 근원적 진리를 ''현시'' 하는것이 ''알레테이아''로서의 리히퉁이다. 하이데거의 보이지않는 존재를 리히퉁한다는것은 클레의 그 유명한 말을 상기시킨다. [현대회화는 가시적인것을 재현하는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것을 가시화한다] 클레의 문구는 현전의 ''현시''속에 감추어진 사물의 참된 진리가 드러나는 중요성을 상기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항 진리의 실상을 드러내는 예술작품속에서 우리는 은폐되고 망각된 것을 되 찾는다. 그리고 이전의 ''아담의 언어''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예술작품앞에서 사물의 본질인 아담의 언어를 느끼기에, 예술은 모든이에게 감동을 주고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의 창작은 원초적인 아담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눈이 볼 수 없는 외적인 풍경속에 감추어진 내면풍경의 여행으로 인도한다. 예술가에게 내면풍경의 여행이란 현실의 삶 속에서 주변세계와의 관계와 경험들을 통하여 동요된 내면의 살아있는 감각을 끌어올려 외적으로 표현하는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내면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을때 원초적 풍경의 우주로 인도한다고 했다.
[''예술이란 이같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숨겨진 속삭임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의식의 소리로 우리안의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기초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것은 우리는 '존재'와 원초적 풍경안으로 이끌며, 우리가 느끼기에 전 '우주'와 같은 거대한 '장'으로 인도한다.''] [바슐라르]
예술가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건져올려진 내면풍경안에 감추어진 것은 보이지않는 아득한 원초적 풍경, 혼돈으로부터 온 골렘의 평화이다. 그 원초적 그리움은 자연의 외관아래 감추어진 가장 사랑스럽고 꾸밈없는 우리들의 내적인 풍경을 담는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우리의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어 외부의 세계로 드러나는 영혼의 원초적 풍경인 ''내면풍경''을 주제로 삼았다. 필자의 내면풍경은 종교적 수행하에 명상으로 출발한 자아가 주변의 관계와 경험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원초적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원초적 풍경이란 곧 에덴의 정원을 현시하는 것이며, 현시된것은 내면의 영혼을 직관적인 시의 언어로 전달한다. 직관적시란 곧 저자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내면풍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면풍경은 시의 언어로 표현된 우주적 풍경이고, 우주적 풍경은 시인의 무한한 시적심상이다. 이것은 작지만 내밀하고 무한한 '안'의 풍경이 '밖'으로 '리히퉁' 가시화되는 것이다.
시적심상화인 필자의 내면풍경은 종교적 수행과 예술의 하나되기이자, 일상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 '일상속의 도'를 실현하는것을 목표로 삼는다. 진리는 일상생활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것이 아니기에, 주체와 마주치며 경험하고 교감하는 모든 것이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필자의 그림은 일상과 교감하는 풍경속에서 그녀와 대상이 바라보고 대화하는 창이자 거울과도 같다. 또한 대상과 같이 호흡하며 꿈 꾸는 내밀한 공간이자 심리적 고백이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내면풍경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시도로서, 잃어버렸던 아담의 언어와 파라다이스를 찾아 대상과 존재하는 방식을 하나의 언어로 삼는다.
요컨대 필자의 내면풍경은 일상의 진리를 아담의 언어로 현시하는 것, 진짜같은 허상속에서 잃어버린 시원의 언어, 에덴의 정원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외관이 감추고 있는 신비와 동경이 있는 세계, 진정한 본질울 드러내기위해 스스로의 단절속으로 들어간다. 그 진정한 물음은 꿈꾸는 자의 고독속에서 태어나며, 내면에 대한 깊숙한 탐색과 함께 자아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슐라이어 마허의 [독백] 첫시작 구절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자신의 심연과 자신의 깊은 은신처에서 스스로가 만나는것은 나자신의 내면의 소리이다. 자기내부의 생명을 응시하고 내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때 시인은 표현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또한 예술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밀치고 나가 의미를 발견하고, 내면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아담의 언어인 나자신의 본래면목을 만난다. 이러한 예술과 나와의 만남속에서 필자는 시인이 된다 그 시인은 최상으로 육화된 정신과의 탐색, 즉 시인의 아름다운 정원을 꿈 꾸는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작품은 내밀한 심리적인 고백으로서 삶으로부터의 경험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원초적세계와 이상향을 찾아 대상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소외된 자아는 시인의 아름다운 정원, 철학적 에덴을 찾기위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 그렇다면 혼돈과 외곽의 존재로 밀려난 소외된 자아가 에덴의 정원에 도달하기위하여 어떤 대상과 서로 결합하고 반향 해야하는가?
* 결합한 대상인 가시화된 내면풍경속에 감추어진 것, 즉 비가시적 본질을 보이게 만드는 내면풍경의 질료와 추동력은 무엇인가?
* 내면풍경은 무엇을 대가로 자기자신의 그림이 되는가?
* 자기자신이 된 육화된 소외의 교차로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구조적 뼈대와 방법론은 무엇인가? 즉 ''어떻게'' 육화된 소외 에 이르는가?
* 내면풍경안에 숨겨진 육화된 소외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귀결되는가?
* 완성이라는 ''하나''에 든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절대 진리를 찾은 주체가 다시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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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ite de l'introduction...]
Donc ce qui est important pour nous, ce n'est pas la langue moderne qui cache l’essentiel des choses, c'est-à-dire la
« langue de Babel », mais la recherche de la langue originelle perdue qui est la langue d'Adam. Autrefois, les alchimistes voulaient montrer la langue d’Adam à travers des « images muettes » à l'icône symbolique. Rimbaud a également représenté cette langue comme le silence.
« J’écrivais des silences, des nuits, je notais l'inexplicable. Je fixais des vertiges » (Rimbaud Arthur)
C'est ici que Rimbaud a décrit l'inexplicable. Il s’agissait de s’exprimer en un instant, exprimer le caractère « immédiat », « direct » et l’« immanence » par l'intuition. Ceci est lié à l'action de révéler la langue source muette comme une « poésie » intuitive. Par conséquent, les paroles sans parler et les langages silencieux sont directement liés à la « création d'art » comme la poésie qui révèle l'intuition.
La création de l'art n'est pas une représentation qui imite l'apparence d’un objet, c'est transférer au langage de la peinture l'essence invisible dans cet objet. Le vertige qui jaillit de toutes les paroles débordantes de Babel se fixe sur l'écran pour révéler le vrai visage des choses. Ce qui est éclairé dans l’art est le centre intérieur, « le langage de la poésie » . Le langage de ce poème révèle à la lumière l'essence cachée.
Telle la langue d’Adam, la vérité (lumière), ce qui montrait le véritable aspect des chose est ce que les Grecs appelaient « Aletheia ». Aletheia signifie la « non-dissimulation » de l'être à laquelle Heidegger faisait référence, c'est-à-dire « le caché est révélé » et ce qu’il appelait « Éclaircie » (Lichtung).
La vérité ici n'est pas la représentation qui est la correspondance entre l’objet et l'image. Elle efface la forme visible et révèle l’« Être » primordial invisible d’Heidegger, qui est la fonction d’ouverture de la présence. Ce qui signifie « apparaître » (présentation), la vérité fondamentale invisible est l’Éclaircie (Lichtung) en tant que « Alethiea ». Lichtung, l'être invisible d’Heidegger me rappelle la célèbre phrase de Klee :
« L’art n’a pas pour but de rendre le visible, mais de rendre visible. »
La phrase de Klee rappelle l'importance de révéler la vraie vérité cachée des choses dans la « présentation » de la présence (Anwesen). Ainsi, nous récupérons ce qui a été dissimulé et oublié dans les œuvres d'art qui révèlent l’essence de la vérité. Et cela revient à la précédente « langue d'Adam ». Étant donné que l’on sent le langage d'Adam, qui est l'essence des choses, devant les œuvres d'art, l'art est donner l’impression et toucher le cœur de tout le monde. Par conséquent, l'art montre la langue d’Adam originale. Et cela conduit à un voyage du paysage intérieur caché dans le paysage extérieur que l'œil ne peut pas voir.
Pour l'artiste, le voyage du paysage intérieur est exprimer extérieurement, relever le sens de vie intérieure qui est agitée à travers des relations et des expériences avec le monde environnant dans la vie réelle. Bachelard a dit que lorsque nous écoutons notre voix intérieure, cela nous conduit dans l’univers de paysages primordiaux.
« L’Art est l’écoute de cette voix intérieure. Il nous apporte le murmure enfoui. Il est la voix de la conscience surnaturelle qui siège en nous sur le fonds inaliénable et perpétuel. Il nous ramène dans le site primordial de notre Être et dans le Lieu immense où nous sommes dans l’Univers entier. » (Bachelard)
Ce qui est caché dans le paysage intérieur extrait des abîmes profonds de l'artiste est le paysage primitif invisible et lointain, la paix du golem du chaos. La nostalgie primordiale contient notre paysage intérieur qui est le plus beau et franc, caché sous l'apparence de la nature. L'auteure a repris le thème du « paysage intérieur », le paysage originel de l'âme, qui se révèle au monde extérieur en creusant profondément dans notre intérieur. Le paysage intérieur de l'auteure est un « paysage primitif d'existence » dans lequel le soi est relevé visiblement par la pratique de la méditation ascétique religieuse, et s’exprime à travers des relations et des expériences qui l'entourent.
Le paysage originel de l'existence est la présentation du Jardin d’Éden. Ce qui est manifesté est communiqué à l'âme intérieure dans le langage de la poésie intuitive. La poésie intuitive est un paysage intérieur né de l’imagination. Le paysage intérieur est le paysage cosmique exprimé dans le langage de la poésie, et le paysage cosmique est en tant qu'image mentale poétique infinie du poète. Il s'agit d'un paysage de l’intérieur, petit, secret et infini qui devient visible à l’ « extérieur ». Paysage intérieur de l’auteure est une image mentale poétique. C’est une pratique religieuse et l'art unis à la fois, une recherche de l'éveil dans la vie quotidienne, et son but est de réaliser le « Tao dans la vie quotidienne ». Puisque la vérité n'existe pas séparément de la vie quotidienne, tout ce que l'auteure rencontre, expérimente et communique avec le sujet apparaît comme un objet. Ses peintures sont des fenêtres et des miroirs à travers lesquels moi et l’objet regardons et faisons la conversation dans la vie quotidienne. Elles sont un aveu psychologique et un espace secret où je rêvais et respirais avec l’objet. Ses œuvres sont une tentative de révéler le paysage intérieur par le paysage ordinaire de la vie quotidienne. Le paysage intérieur de l'auteure considère comme une langue la manière d’exister avec l’objet pour retrouver le langage perdu d'Adam et du Paradis.
En résumé, le paysage intérieur de l’auteure est une présentation en langue d'Adam de la vérité quotidienne. Il s'agit de retrouver la langue perdue de l’origine, le Jardin d’Éden, dans l’illusion qui semble être vraie. Ainsi, afin de révéler la véritable essence du monde avec le mystère et la nostalgie cachés dans l'apparence, auteure se coupe du monde, elle entre dans son refuge. L’authentique question est de naître dans la solitude du rêveur, de s’interroger sur l'origine de soi et d’explorer profondément le monde intérieur. Tout au début de Monologues de Schleiermacher, il y a la phrase suivante :
« Se parler du plus profond de soi est le cadeau le plus précieux qu'un être humain puisse se faire. »
Ce que nous rencontrons dans l’abîme de soi et dans la cachette profonde est la voix intérieure de soi-même. Lorsque nous regardons la vie à l'intérieur de soi et écoutons les sons à l'intérieur, nous pouvons trouver des chemins d’expression. Également, à travers la création de l’art, nous pouvons découvrir le sens pour s’échapper, repousser nos limites, rencontrer le visage originel de nous-mêmes qui est la langue d'Adam. Dans cette rencontre entre l'art et moi-même, l'auteure devient poète. Le poète rêve de la recherche de l'esprit incarné le plus élevé, c'est-à-dire du beau jardin du poète.
Donc, pour auteure, l'œuvre est une révélation de l'expérience et du sentiment de la vie en tant qu’une confession psychologique secrète. Et poursuivre la manière d’exister avec l’objet pour trouver le monde primitif perdu et idéal. Le soi aliéné se pose les questions suivantes afin de retrouver le beau jardin du poète, l'Éden philosophiq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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