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운남성 곤명지방 기행<10>
곤명/석림/구향동굴
2010. 12. 25 ~ 12. 30
곤명(8)
2010. 12. 29(수)
운남육군강무학교
雲南陸軍講武學校
마지막 날 일정으로 곤명 시내에 있는
관광지를 찾아보는 일정이 시작된다.
날씨도 청명하고 일정에 여우가 있어 느긋하게
즐기며 중국인들의 일상을 보는 하루가 되었다.
첫 일정으로 육군강무학교를 찾았다.
여행 첫날 찾았다가 영화 촬영 관계로 보지 못했던 곳이다.
이곳은 항일 독립투사로 잘 알려진
이범석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어서
우리 관광객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 첫날 아침 찾았을 때는
마침 영화 촬영 중이어서 들어가질 못하고 마지막날
다시 찾아갔다.
운남 육군 군관 학교는
곤명시 취호공원 서쪽에 위치하여 있고
1909년에 창설하여 1928년까지 19기를 배출하였다.
운남육군강무당역사박물관 입구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졸업생 수는 4000여명에 달하고
보병, 기병 ,포병, 공병 4개 병과로 나뉘었다.
교관(군관)의 대다수는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한 유학생들이고
중국에서 유명한 군사학교 중의 하나였다.
운남육군강무학교 정문
1988년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 하였다.
백년군교장수요람
百年軍校將帥搖籃
운남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신해혁명과 호국운동, 항일전쟁, 해방전쟁에
큰 기여를 하였고 전국 인민들의 관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해방 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고
현재 1층과 2층에는 당시 자료들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堅忍刻苦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제대로 찍지 못했고
관리자의 눈을 피해 몇 장 찍은 것을
소개하니 양해 바랍니다.
침실 모습
식당
이범석 장군 관계 자료 전시물
이 학교 출신으로 명성을 날린
몇 안되는 인물 전시장에서…… .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이 선생은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육군군관학교 기병과를 나와 김좌진 장군의 지휘 하에
중대장으로 있으면서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끄신 분이다.
운남 곤명의 육군군관학교는 한국의 역사와
항일투쟁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범석 장군은 1900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15년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 건해자 기병연대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돌아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1920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되었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북로군정서 제2제대장으로서
김좌진 총사령관을 도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23년 고려 혁명군 기병연대장으로 시베리아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백계 러시아군과 싸웠다.
1934년 김구 임정수석을 만나 낙양중앙군관학교 안에
한적군관학교를 설치하고 한전군관대장이 되어 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했을 때 참모장에 취임했으며
1945년 8월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서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6년 환국하여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하여
그 단장이 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 했다.
그후 주중국대사, 내무부장관, 국토통일원
특별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1972년 5월 별세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회고록 '우둥불', 논설집 '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강무학교 연병장
지금은 주민들의 휴식 장소로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의 모습이
옛 군관학교의 역사를 말해 주는 느낌이 든다.
첫댓글 철기장군이 기병대를 졸업했던 운남강무학교를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이제 곤명 지역 여행 답사지에 포함되어 있군요.
중국인 입장에서 보면 철기장군은 외국인일텐데... 이렇게 역사자료를 만들어 전시해 놓으니 고맙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