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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구조
우리는 항상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마시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계획한 무엇을 해 내어서 그 결과를 보고 기쁨을 얻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의식(意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로써, 숨을 쉬는 것을 매순간마다 의식하게 된다면 아마 인간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체의 심장(心臟)이 박동(博動)하고 폐(肺)에서 공기를 흡수하고 내뱉고, 위장(胃腸)이 각종 음식물들을 끊임없이 잘게 부수어서 에너지로 흡수시키면서 찌꺼기들은 항문(肛門)을 향하여 밀어 보내고, 총길이가 95,000 km가 되어 지구의 두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길이를 가진 혈관(血管) 속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피의 흐름(血流)이 있고, 5조(兆)개나 되는 세포(細胞)들이 소멸(消滅)과 생성(生成)을 거듭하는 것, 머리카락과 솜털들이 성장하는 것 등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당연시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계획한 무엇인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당연한 현상(現象)들의 궤도(軌道)에 이상(異常)이 생기면, 그때에는 그 부분을 강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예로써, 부패한 음식을 먹고서 식중독(食中毒)에 걸려서 위(胃)가 아프게 되거나, 에어컨의 냉풍(冷風)을 지나치게 쐬어서 추위를 느끼고 두통을 겪게 되거나, 가시가 몸에 박혀서 통증(痛症)이 있게 되면, 우리는 모든 의식을 총동원하여서 그 부분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아! 위가 있었지!’, ‘아! 피부가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픈 것이 치유(治癒)되고 나면 다시 ‘우리 자신(自身)’을 망각하고 외부를 향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힘(思考力)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 생각! 무한한 지평(地平)을 갖는 생각이 있기에 인간은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경험을 통하여 획득(獲得)된 긍정적(肯定的) 또는 부정적(否定的)인 생각들이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는 ‘무의식(無意識)의 세계’, ‘잠재의식(潛在意識)’라고 부릅니다. 의식하는 부분 저 깊은 곳, 우리 마음의 저 아래 부분에 거대한 무의식의 큰 덩어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00년 전에 이 생각의 힘을 새삼 강조한 인물이 바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입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사색(思索)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해 본다는 것입니다. <감각(感覺)은 때로 틀리는 것이므로 믿을 수 없고 내가 지금 여기서 윗도리를 입고 화롯가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보증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의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스럽다고 해서 멀리 할 수는 있으나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하는 근본원리가 확립되고 이 확실성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이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심하고 있으므로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힘과 능력을 갖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能力)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존재계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요 미세(微細) 영역(領域)입니다. 존재하는 그 자체인 인간 스스로를 미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은 부단히 외부를 향하여 의식(意識)의 방향을 맞추어 왔습니다.
우리가 존재계를 확인할 수 있는 범주는 하나님, 인간, 만물의 세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 만물을 잇는 중개자(仲介者)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과 자연 만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감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일어나기 이전의 중세 천년기간까지 인간은 감히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꿈에도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세 기간 동안에 가톨릭 종교 지도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신본주의(神本主義)를 중심으로 천국 문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마침내 인간은 인간중심주의, 이성을 중심한 합리주의를 주창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을 쌓고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 만세가 아닌 인간 만세를 부르면서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높이 칭찬하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서 공동체의 분열이 생겼습니다. 인간중심주의를 외치지 말라는 이 예언적인 지적이 마침내 근대에 들어서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실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상은 마침내 공산주의를 파생(派生)시켜서 인류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兩分)시키는 비극(悲劇)을 낳게 되었습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계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감각할 수 있는 자연계가 전부인가?”하는 물음 앞에 많은 인간들이 “그렇다”라고 응답합니다. 무식(無識)하면 용감해질 수 있다는 말이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근대 이후로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자연 만물, 이 두 개만이 확실히 존재하므로 하나님이나 영적 진리나 영계(靈界) 및 창조(創造)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쓸 필요도 없다는 주장이 파죽지세(破竹之勢)처럼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게 되었고 공산주의에 희생되거나 비인간화된 삶의 조건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지금도 인류의 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런 사회의 대표적 사례에 속합니다.
2. 하나님의 현현(顯現, Theophany) 방법
하나님은 엄존(儼存)하십니다.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감각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교만하게 말을 합니다. 학교에서도 인본주의나 무신론에 근거한 교육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환경들이 주변에 산재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각 또는 의식은 정확한가?,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는 절대적인가? 아닙니다. 지나치게 덥거나 춥거나, 배가 고프거나, 피곤하거나, 흥분하게 되면 인간의 판단력은 비정상이 되어서 합리적인 존재가 결코 되지 못합니다. 그런 제한적이고 나약한 인간이 함부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판단이요 행동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가지 명사(名辭)를 많이 씁니다. 그들 중에서 ‘사랑’, ‘충성’, ‘애국심’, ‘믿음’, ‘우정’, ‘효’, ‘모성애(母性愛)’, ‘부성애(父性愛)’, ‘정신’ 등의 추상명사(抽象名詞)가 우리네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보통명사(普通名辭)나 물질명사(物質名詞)들에 비하여 훨씬 더 큽니다. 사랑이 없으면 만족감이 없고, 사는 재미가 없고, 외롭습니다. 충성심이나 애국심은 목숨을 바칠 만큼 강한 흡인력을 가집니다. 믿음은 나약한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변신시킵니다. 모성애와 부성애는 부모와 자녀 사이를 그 어떤 힘도 끊을 수 없을만큼 심정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우정과 효도는 아름다운 인간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삶을 예술(藝術)로 승화(昇華)시키는 힘을 가진 이런 추상명사에 해당하는 것들은 만져지거나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성적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 통전적인인 체험을 통하여 감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생존에 절대로 필요한 공기(空氣)나 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잘 감각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공기가 느껴지고, 물 속에 손을 넣거나 샤워를 하면 물이 느껴지지만, 그러나 물을 마음대로 만지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넘어서 대자연에 편만해 있습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미시(微示)의 세계나 공간에도 공기나 물은 존재합니다. 제대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기도 않고 감각하기도 어렵지만 아무도 공기나 물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거나, 물을 마시면서 감각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세계 범주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주 속의 한 모래알 같은 존재인 인간이 저 거대한 우주를 다 껴안을 수 없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이나 의식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네 삶의 영역(領域)을 넘어 서 계신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시는 현현(顯現, Theophany) 방법으로 세 가지를 택하십니다. 그것은 (1)진리 말씀, (2)성자(聖者), 메시아, (2)사랑입니다.
인간 타락으로 무지가 세상을 차지하고 난 뒤, 오랜 옛날부터 하나님은 진리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인류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완수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은 지구로부터 추방을 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무지(無知)에 빠진 인간은 고대 사회에서 신화(神話)를 창조하였고 다양한 종교를 창조하였습니다. 신화나 종교는 태초의 창조본연의 세계로 복귀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노력의 결실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有神論, Theism) 장구한 역사 동안 전승되어오다가, 근대화가 되고 공산주의가 등장하면서 무신론(無神論, Atheism)이 기승(氣勝)을 부렸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이신 참부모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궁극적 진리가 세상에 드러날 것을 안 사탄이 방해를 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유신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 단일신론(單一神論, Henothe- ism), 유일신론(唯一神論, Monotheism) 등입니다.
(1) 다신론은 여러 신들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천신(天神), 지신(地神), 강신(江神), 수신(水神), 바다신(海神), 태양신(太陽神), 달신(月神), 별신(星神, 특히 북두칠성신), 영웅신(英雄神), 조상신(祖上神), 전쟁신(戰爭神), 죽음신(死神), 부엌신(竈王神, 火神), 화장실 신(廁神), 주택신(宅神), 질병신(疾病神)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지한 상태에 있던 인류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신들의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2) 단일신론은 다신론을 전제로 하면서 필요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산에 가서 산신을 섬기고, 강에 가면 강신을 섬기고, 부엌에 가면 조왕신을 섬기고, 무덤에 가면 조상신을 섬기는 등의 종교적 행위가 이에 해당합니다. (3)유일신론은 처음부터 한분의 하나님을 전제로 합니다. 흔히 성경의 인물 중에서 출애굽을 성공시킨 모세(Moses)로부터 유일신론이 정착하게 되었다고 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이 유일신은 창조주이십니다. 모세의 위대성은 하나님을 모시는 신정정치(神政政治)를 구현하기 위한 출발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성경 창세기에는 여러 가지 신명(神命)이 언급됩니다. 여호와(Jehovah), 엘로힘(Elohim), 엘샷다이(Elshaddai), 엘베델(Elbethel), 엘올람(Elolam) 등이 나타납니다. 이에 대해 다신론을 섬긴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한 하나님에 대한 지역적 차이에 따른 이름의 다름으로 해석을 합니다.
3. 거짓 신을 깨뜨려라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요?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행복과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행복한 인생의 토대(土臺)입니다. 토대가 부실한 건축이 오래 가지 못하듯이, 하나님 없는 인생이나 예술이나 기술은 내구성(耐久性)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啓示)하시기 위하여 많은 예언자(豫言者)와 성자(聖者)들을 보내셔서 무지한 인류를 일깨우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진리 말씀으로 교육을 시켜 오셨습니다. 그런 대언자(代言者), 대변자(代辯者)들을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결국 인류 역사는 <참하나님 - 참인간 - 참만물>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인간과 만물이 참인간과 참만물이 되려면 참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 동안 거짓 인간으로서 인류는 거짓 신들을 섬겨왔습니다. 거짓 신과 거짓 인간이 사는 곳은 세상은 거짓 자연계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탄(Satan)은 교묘(巧妙)하게 자신을 하나님인 것처럼 위장(僞裝)하여서 인류를 해방시키지 않게 위하여 ‘그럴 듯한 신’(Pseud god), ‘거짓 신(False god)’을 제시하여서 인류를 미혹(迷惑)시켜 왔고 무지(無知)한 상태에 더 머물도록 재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리의 실체이시고 하나님의 실체로서 강림(降臨)하신 참부모님을 통하여 <참하나님 - 참인간 - 참만물>의 관계가 분명하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면서 인류의 부모로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것은 인류사의 ‘마지막 대혁명’(The Last Great Revolution)이며 ‘영적인 르네상스’(Spiritual Renaissance)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참부모님의 고난의 노정을 통한 승리의 결과입니다. 사탄과의 피나는 투쟁 끝에 얻은 결과로써 참하나님과 참인간과 참만물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모세(Moses)가 하나님을 창조주와 말씀의 주체로 선포하여 30%의 모습을 찾았고, 예수(Jesus)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면서 60% 모습을 찾았다면, 참부모님께서는 100%를 찾으셨습니다.
이제 ‘거짓 신들’(False gods)을 깨뜨려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앞세워서 거짓 신들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어서 인류를 해방(解放), 석방(釋放)시켜 주어야 합니다. 더 이상 거짓 신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방치(放置)해서는 안 됩니다. 존재계의 제1원인자(原因者)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는 것, 이 이상 평화(平和)와 행복(幸福)과 통일(統一)을 향하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참 신(True God), 참창조주, 참부모, 참스승, 참왕이 되시는 하나님을 인류가 함께 모시도록 재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성업(聖業)입니다.
여러 종교들이나 민속에 나타난 다양한 신들은 차후에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입추가 되어서 조석으로 서늘합니다. 마지막 피서를 잘 즐기시고, 풍성한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십시오. |
첫댓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담아갑니다.
퍼가요~
잘 봤습니다. 담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