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나라’, 우리 삶의 현실! (마태 13:31-33, 44-52)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나라”의 추구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차원을 결정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땅의 나라는 살아가는 이 세상, 하느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별개로 둘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저 세상에 있는 것으로만 여기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건강하지 못하고, 불건전해집니다.
하느님나라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이상세계를 우리가 상상 속에 그려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치기준으로 그려낸 하느님나라는 이름과는 달리 우상의 나라에 불과합니다.
하느님나라는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장소라는 개념에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이 우주와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차원의 문제로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어떻게 경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의 중요한 미스터리 중 하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자체와 같은 분이 되신 일, 곧 처음에는 복음(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그 분이 나중에는 복음 그 자체가 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한 사람(스승, 예언자)으로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는데 어찌하여서 초대교회는 그 예수님을 두고 예언자라 칭하는데 머물지 않고 하느님나라를 이루시는 분, 곧 하느님의 주권적 다스림을 물려받은 분, 나아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즉 하느님의 현존으로 고백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결정적 전환이 십자가 사건, 곧 부활사건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나라는 그에 관하여 정보를 얻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하느님나라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당신의 인격과 영을 통하여 일생 유지하였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생생한 ‘올바른 관계’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세상은 부정하는 그러나 하느님께서 긍정하시는 그 올바른 관계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알려진) 하느님나라는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적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입국비자를 얻듯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입국비자 얻는 일을 대행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나라는 지금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생생한 관계 속에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규정하고 제한한 우리 삶의 범위에 머무는 수준이 아니라 이 세계 현실 가운데 열려진 존재, 소통하는 존재, 초월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가 하는 ‘영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포함한 예수님의 인격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 곧 하느님나라, 영원한 생명, 구원의 내용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이루신 현실이 됩니다.
하느님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시고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영은 하느님의 현존으로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관념적, 추상적,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삶에 침투해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와 능력입니다.
오늘 주님의 비유는 그 하느님 나라의 현실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입신상태에서, 가사상태에서 보고 온 영계의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안에 자라나는 생명력(겨자씨)입니다.(참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마태 17:20)
하느님나라는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력(누룩)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삶의 전부를 걸고 추구할 만한 절대적인 가치(보물과 진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막연하고 덧없는 백일몽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에 대하여 엄연하고 엄중하고 예외 없는 하느님의 심판(그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