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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예언에 놀란 고려 서둘러 한양 오얏나무베어 王氣를 다스리고자 했으나 오백년의 오얏조선이 일어났으니 |
오얏나무 또는 자두나무라고 하는 이 나무는 성씨(姓氏)중에 이씨(李氏)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을 갖고 있다. 자두라고 부르게 된 연유를 알려면 우선 이씨(李氏)의 성씨(姓氏)가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오얏나무의 원산지가 중국이듯이 성씨 이씨(李氏)의 유래는 중국 노자로 부터 비롯되고 있다. 노자는 잘아시다시피 중국 고대의 철학자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본명은 이이(李耳). 자는 담(聃). 그래서 노담(老聃)이라고 보통 기록되어 있다. 노자는 오얏나무밑에서 태어났으므로 오얏나무를 나타내는 나무 목(木)자와 사내아이(子)를 가르키는 아들 자(子)자를 합하여 오얏 이씨(李氏)라는 성(姓)을 만들었고 귀가 매우 커서 귀 이(耳)자를 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하여 온다.(담(聃)이라는 글자도 사전을 찾아보면 '귀가 넓어 축 처져서 귓바퀴가 없음, 사람(老子의) 이름'으로 나와 있다) 일설에는 노자(老子)라고 부르는 이유도 노자(老子)가 태어난 곳의 나무가 늙은 오얏나무였으므로 늙을 노(老)자에 아들 자(子)자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이후 학식이 높고 학문에 으뜸인 분들에게 끝에 자(子)라고 붙여 존경하는 풍습도 이때부터 생겨 났다고 전한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에서 출생하였고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고 한다. 학식이 매우 높아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글자가 오얏 리(李)이고 열매가 진한 보라색으로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자도(紫桃)라 하다가 자두가 된 것이다. 순수 우리말 이름은 오얏이고 한자명은 이(李)이다.자두는 자도(紫桃)의 현실적인 발음이 자두로 굳어져, 변형된 형태를 표준어로 삼았다. 표준어 규정 제20항에는 고유어 계열의 단어가 생명력을 잃고 그에 대응되는 한자어 계열의 단어가 널리 쓰이면, 한자어 계열의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고 나와 있다. 중국이 원산지로 대추, 밤, 감, 배와 함께 다섯 과일(五果) 중 하나로 무척이나 중히 여겼다. 《예기(禮記)》에 이미 “복숭아와 오얏, 살구, 매실을 임금께 진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옛 사람들은 복숭아와 함께 봄에는 오얏 꽃을 감상하면서 시 한수 읊조리고, 여름에 들면서 익은 열매를 따먹는 과일나무로서 모두의 사랑을 받아왔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史書)에는 꽃피는 시기로 이상기후를 나타내는 기록이 여러번 있으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 총 53권 13책)에 시가(詩歌)로 실린 것만도 20여회나 된다. 자두나무는 본래 우리나라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고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수입나무이다. 시경(詩經)에 보면 중국에서도 주나라 시대에는 꽃나무로서 매화와 오얏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옛말에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을 쓴다. 즉 오얏의 열매가 달린 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얏 밭은 우리 주변에 흔하였으며 남에게 조금도 의심 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꼿꼿한 마음가짐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신라 말 풍수의 대가이며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는 그의 예언서 도선비기(道詵秘記)에, “고려 왕(王)씨에 이어 이(李)씨가 한양에 도읍 한다 (繼王者李而都於漢陽)”고 예언했다. 즉, 500년 뒤 오얏 성씨(李)를 가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예민한 반응을 보여 고려 중엽부터 한양에 벌리목사(伐李牧使)를 두어 왕기(王氣)를 다스리기 위하여 백악(白岳 지금의 북한산)에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무성할 때면 반드시 모두 찍어서 이씨의 기운을 누르려 갖은 애를 다 썼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의 보람도 없이 이성계가 이룬 조선왕조는 500년의 영화를 누리게 된다. 지난 1970년대까지 바로 벌리를 하던 서울 자하문 밖은 오얏나무 명산지였다. 고려 가요 〈동동(動動)중의 3월달〉에는 사랑하는 님을 보름달 아래 활짝 핀 오얏나무에 비유했다. 오얏나무가 풍요와 위엄의 상징이었던 때문이다. 삼월이 되어 활짝 핀 / 보름 달빛이 비친 하얀 오얏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까지 풍요로웠다. 오얏꽃이야말로 한 해의 풍년을 점치기에 아주 좋은 나무였던 까닭이다. 《신선록(神仙錄)》에는, “노자(老子)의 어머니는 노자를 가지고 오얏나무 밑에 있었다.”하고 오얏나무의 기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성을 이(李)씨라 했다고 한다. 고려 고종 때의 학자 쌍명제(雙明齊) 이인로(李仁老)는 오얏나무 시를 남겼다. 일찍이 흰 사슴에 구름 멍에 채워서 고려 명종 때의 학자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는 오얏을 이렇게 노래했다. 꽃을 향한 마음은 은혜로운 바람에 놀라고 조선 황실의 문장은 오얏나무꽃(李花)이다.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은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건물이다. 용마루에는 조선 황실의 문장인 청동제 자두꽃 다섯 송이가 박혀 있다. 넷은 왕을 말함이고 다섯은 황제를 상징한다. 고종황제 대에 와서 비로소 상국의 그늘을 벗어나 대한제국이라는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한 때 인정전의 오얏꽃을 왜인들이 설치한 벚꽃이라 하여 철거해야 한다고 헤프닝을 벌인 적도 있었다. 아직도 조선 황실의 문장을 배꽃(梨花)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발음이 같은 이화(李花)를 이화(梨花)로 착각한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특별히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대접한 적은 없으나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는 오얏 꽃은 왕실을 대표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우정사업은 1905년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54종의 보통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이 보통우표에는 조선왕가(朝鮮王家)의 문장인 오얏과 태극이 주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백동으로 만든 화폐에도 표면의 위쪽에는 오얏꽃, 오른쪽에는 오얏나뭇가지, 왼쪽에는 무궁화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과일나무 가지에 돌을 끼워두면 과일이 많이 달린다. 이를 ‘과일나무 시집보내기(嫁樹)’라 한다. 섣달 그믐날, 설날, 정월 보름 어느 때 해도 좋다.”고 적었다. 오얏, 대추나무 시집보내기에 대한 내용이다. 명나라의 서광계(徐光啓.1562-1633)가 지은 농정전서(農政全書)에는 “오직 오얏나무에만 이 방법을 쓴다.” 고 했는데 그에 의하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오얏나무의 가지 틈에 굵은 돌을 끼워 두면 그 해에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하는 '나무 시집보내기' 풍속이 있었다 한다. 유종본(愈宗本)의 《종과소(種果疏)》에 “오얏나무를 시집보낼 때는 정월 초하루 또는 보름이 좋다.”고 했다. 진호(陳淏)의 《화력신재(花曆新栽)》에도 “섣달 그믐날 장대로 오얏나무 가지를 때리면 결실이 좋으며, 설날 석류나무 가지에 돌을 끼우면 열매가 크다.”고 했다. 원로 식물학자 이창복(李昌福) 박사는 자두와 앵두를 교잡시켜 굵은 앵두를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이렇게 하면 앵두 열매가 훨씬 굵어져 대추알 정도나 된다고 했다. 교잡한 나무의 성장을 좋게 하기 위해 자두나무에 접을 붙여 키우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대추나무를 대상으로 시집보내기를 한다. 인가 부근에 과일나무로 심고 있으며 줄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커다란 낙하산 모양을 이룬다. 잎은 달걀크기로 어긋나기하고 끝이 차츰 좁아지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봄에 새하얀 꽃이 잎보다 먼저 피며 보통 3개씩 달린다. 열매는 둥글고 밑 부분이 약간 들어간 모양으로서 여름에 자주빛으로 익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두는 대부분 개량종이고 진짜 중국원산의 옛 오얏은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오얏나무가 없는가? 그리고 오얏나무와 자도(紫桃), 자두나무는 같은 나무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국어사전과 백과사전 그리고 식물도감, 수목도감에는 같은 나무(同樹)로 기록하고 있다. 1988년 1월 이전에 발행된 국어사전에는 오얏과 오얏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으나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어 규정에 따라 “오얏"과 오얏나무가 사어(死語)로 처리되어 사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자두"와 자두나무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는데, 표준어 사정원칙에 따르면 “오얏"이 고어(古語)로서 현대국어에서는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 오얏나무는 전국 여러 곳에서 생장하고 있다. 자두는 자도(紫桃)의 현실적인 발음이 자두로 굳어져, 변형된 형태를 표준어로 삼았다. 표준어 규정 제20항에는 고유어 계열의 단어가 생명력을 잃고 그에 대응되는 한자어 계열의 단어가 널리 쓰이면, 한자어 계열의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고 나와 있다. 전국 말기의 정치가 여불위(呂不韋 ? ~ BC 235)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 》 중춘기(仲春紀)에는 “2월은 우수절로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피는 때”라며 봄의 대표적인 꽃으로 복사꽃과 오얏을 꼽았다. 계절적으로 중국의 남쪽지방은 음력 2월이 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4월이 되어야만 비로소 오얏꽃을 볼 수 있다. 자두나무는 봄에 꽃을 피우지만 흰 꽃인가 하면 녹색이 섞인 빛깔이다. 꽃이 필 때 어린 싹이 돋아나기 때문에 먼데서 보면 연한 백록색으로 보인다. 원래는 오얏나무로 불려졌던 재래종 자두나무는 알이 작고 맛이 지극히 시기 때문에 오늘날 과일나무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시골에서나 가끔 볼 수 있을 뿐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신 농장에서는 신품종을 심어 재미를 보고 있다. 열매 빛깔이 짙은 자주색인 것, 연초록색 과일이 크고 과즙이 많은 것, 과육이 피처럼 붉은 것도 있다. 이러한 우수 신품종이 심어지면서 우리의 재래종 자두나무는 하나 둘 사라지게 되었다. 열매는 꿀에 재었다 먹기도 하고 말려서 건과를 만든다. 이것을 이건(李乾)이라 했다. 씨를 빼고 말린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의 높이 13m의 300년 된 오얏나무는 봄에 싹트는 모양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해의 농사를 점친다. 자두나무는 학명(學名)으로 Prunus salicina이라고 한다. 영어로 plum tree라고 하고 漢字로 李木(리목)이라고 쓴다. 수입 개량종 자두나무는 높이가 보통 10m에 달한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흰색이며 보통 3개씩 달린다. 열매는 달걀 모양 원형 또는 구형으로서 자연생은 지름 2.2cm이지만 재배종은 길이가 7cm에 달한다. 열매의 밑부분은 들어가고 7월에 노란색 또는 붉은빛을 띤 자주색으로 익으며 과육은 연한 노란색이다. 관상가치가 있으며 날것으로 먹기도 하고 잼이나 파이 등으로도 가공한다. 잎 뒷면에 털이 있고 열매가 타원형이며 벽흑색인 것을 서양자두(P. domestica)라고 한다. 한국에서 재배하는 자두나무는 대부분 유럽종 자두로서 1920년대 이후 재배하였다. 복숭아나무보다 재배가 쉽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한 도시 근교에서 재배한다. 품종에는 동양자두·서양자두·미국자두가 있다. 서양자두와 미국자두는 오래 전에 동양자두가 전파되어 그 곳에 적응한 것들이며 재배종은 거의가 미국 개량종이다. 자두나무의 번식은 주로 눈접이 잘 되나 깎기접도 잘 된다. 자두를 수확할 때는 자두에 열매자루를 붙여서 완숙하기 며칠 전에 따서 나무상자나 골판지 상자에 담아 출하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경북대 임산공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