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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산님이 모아 주신 자료집을 조금 보충한 것 입니다.
보충할만한 자료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해저(海底)리]
해저리(바래미)는 ‘바다밑’의 고어인‘바랄믿’에서 나온 마을이름이다.
본디 여(余)씨들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동강 김우옹 선생의 중형으로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개암공(開巖公) 김우굉 선생의 현손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선생이 들어와 살면서부터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성촌이 된 마을이다.
의성 김씨 가문에서 정조(재위 1776~1800)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이 시기 영남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14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하였다.
▶개암종택
새로 단장된 건물로 마을 서쪽에 위치한다. 목재·기와·담장을 제외하고 모든 벽은 백회로 하얗게 칠했다. 종택의 대문은 좌우로 행랑채를 거느린 3칸의 솟을대문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현판 ‘개암정 (開巖亭)’은 김우굉(宇宏)(1524-1590)의 호로부터 오는 이름이다. 이 종택은 소유자의 증조부인 33세(世) 창우(昌禹)(1854-1937)가 이 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한일합방 후에는 국운을 근심하고 구국운동도 이 집에서 논의한바 있으며, 김창숙 지사(金昌淑志士)가 주도한 유림단독립청원의거(儒林團獨立請願義擧) 및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때 서명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한 내력을 가진 집으로 독립운동정신을 기념할 가치가 있다
사랑채는 여막이 차려져있다. 산소에서 여묘살이 대신 집에다가 여막을 친다고 한다.
▶南湖舊宅 남호구택(문화재자료 제18호)
농산(聾山) 김난영(金蘭永)이 조선 고종(高宗) 13년(1876)에 건립하였으며 그의 아들 남호(南湖) 김뢰식(金賚植)(1877~1935)이 살던 곳이다. 남호(南湖)는 경상도의 명망(名望) 높은 부호이었는데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군자금(軍資金) 모집시 전재산을 저당하고 대부를 받아 제공(提供)하여 그 공(功)으로 1977년 건국공로 표창을 받았다.
남호구택은 2채의 집으로 이루어진다. 행랑채와 본채이다. 본채는 커다란 口자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행랑채는 그 앞에 일직선으로 지어져 있다. 행랑채는 상당히 크고 높다. 행랑채는 중앙에 높은 솟을대문을 두고 좌·우 3칸씩의 행랑건물을 가설하였다.
▶해저 김건영가옥(海底 金建永家屋. 시도기념물 제117호)
독립운동가인 해관 김진영(海觀 金建永. 1848∼1924)이 지은 집이다.
1919년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전개할 때 사랑채가 지역 유림(儒林)들의 연명장소(聯名場所)로 이용되었다. 규모는 앞면 6칸·옆면 6칸 규모로 비교적 큰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으로 안방 2칸은 마당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1919년 3·1만세운동에 유림계 대표가 빠진 것을 탄식한 유교 지식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문제를 해결하고자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할 계획을 세웠다. 면우 곽종석(郭鍾錫) 등 영남유림과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등 호서유림과 함께 학파를 초월한 파리장서운동을 하였다. 국제 사회에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유림대표로써 면우가 작성하고,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 연서했다. 김창숙 선생이 주동하여 서울과 영남각지와 호남 동서부까지 연락하면서 경비를 마련하자 장서를 휴대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중국어, 영어, 불어로 번역하여 김규식 편에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한편 중국 언론기관과 일본에도 발송하였다.
[삼계서원三溪書院, 경북문화재자료 제417호]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정공 권벌의 충절과 학덕을 경모하기 위해 유림에서 1588년(선조 21)에 건립. 1660년(현종 1)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당과 정문, 문루 등이 훼철되었다가 1951년 다시 세워졌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정구(鄭逑)가 선조 때 삼계서원의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堂號)를 정일당(精一堂), 동재(東齋)를 사무사(思無邪), 서재(西齋)를 모불경(毋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고 이름지었다.
삼계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랐다.
서원 출입은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중층의 관물루 아래에 설치된 환성문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이 자리잡고 전면 좌우에 동재·서재가 있다.
강당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사당인 충정공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재 전면 오른쪽에는 1906년 사림에서 세웠다는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강당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기단을 높게 축조하고 전면 4칸, 측면 2칸으로 세웠다. 외진기둥은 모두 원형이며 평면은 왼쪽 전후 2칸 온돌방을 두고 오른쪽 6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왼쪽 온돌방은 전면 기단 쪽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방의 천장은 고미반자를 설치하였다.
마루는 전면 쪽에 4분합들 문을 설치하였으며, 배면부분과 측면은 판벽과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고 하부에는 머름을 두었다.
사당인 충정공사는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퇴를 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앞쪽으로 4자폭의 툇간을 두고 그 뒤로 장마루를 깐 3칸을 통칸으로 하여 권벌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동재는 홑처마 박공지붕 건물로 전툇간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왼쪽으로부터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전면에 쌍여닫이 판문이 설치된 폐쇄형 마루방을 설치하고, 오른쪽으로 2칸통 온돌방을 두었다.
서재의 규모와 형식은 동재와 동일하나 전면 창호구성법이 다르다.
관물루는 근년에 복원된 중층건물로 2층 기둥까지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며 주상부는 목구조를 얹은 일종의 절충식 구조법을 지닌다.
[닭실마을]
풍수지리학상으로 볼 때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금계포란 형이다. 마을 동쪽의 옥적봉이 수닭, 서쪽의 백운령이 암닭을 닮은 지형이기 때문에 닭실이 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봉화군 봉화읍 유곡1리에 자리잡고 있는 닭실마을은 봉화지역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충재 권벌이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파직 당하여 물러나와 1521년 파평(坡平) 윤씨(尹氏)의 터전이었던 내성(柰城) 유곡에 입향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춘양의 한수정(寒水亭)은 권벌이 춘양(春陽) 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정자다. 권벌이 이 지역에 입향한 이후에 이 지역의 농장을 개설하고 국가에서 받은 토지를 바탕으로 내성과 춘양현 일대에 안동 권씨의 일족이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닭실마을 가는 길
보통 닭실마을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닭실마을 옆을 통해 들어가는 길, 철도 건널목 아래로 진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닭실마을의 왼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닭실마을의 공간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길이 아니다. 내성천 지류가 되는 계곡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석천정사를 지나 수구를 통과하면서 가는 길을 택해야 닭실마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 진입로이다. 마치 별천지로 가는 길 같고, 고즈넉한 사찰을 찾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길이다. 계곡으로 가면서 계곡물을 감상하고, 발이라도 한번 담그고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천천히 찾아가는 코스를 택하기를 바란다.
석천정사에 이르면, 걸린 문고리를 살짝 열어 조용히 들어가 정자 뒤편의 암벽에 새겨진 "석천정(石泉亭)"이라 쓰인 글자를 감상하고, 정자의 누대에 올라 계곡물이 흘러가는 것을 조용히 감상해보라. 옛 사람들이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고, 시문(詩文)을 짓던 여유, 그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석천정사에서 나와 계속 계곡을 구비 구비 돌아들면서 물 속의 수려한 바위들을 감상하다보면 어느새 동구에 이르게 된다. 갑자기 나타나는 마을의 전경은 마치 별천지, 신선의 세계를 방불케 한다. 수구 부분에서 두 물이 모이고, 두 물이 모인 평지에는 앞으로 논을 끼고 백설령이란 나즈막한산에 기대어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 구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왼편에서 흐르는 물길이 마을을 안아서 감고 흐르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물길의 흐름을 활이 굽어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궁수(弓水)라 한다. 또 명당을 감아 도는 물을 환포수(環抱水)라고 해서 이런 것을 풍수에서는 아주 좋은 물길로 평가한다.
문수산(文殊山)에서 뻗어내린 주맥(主脈)이 마을의 주산이 되고, 왼쪽의 청룡 줄기가 길게 마을을 휘감아 수구 부분에서 그친다. 청룡이 길게 뻗어 안산(案山)을 겸하고 있다. 마을의 오른쪽에서 나온 줄기는 백호가 되는데, 안산 바깥으로 길게 안고 뻗어나간다. 안산과 백호가 만난 곳이 수구가 되는 것이다. 수구가 마치 빗장을 걸어 놓은 듯이 잘 여며져 있다. 이를 풍수에서는 수구관쇄(水口關鎖)라 하는데, 이런 수구를 하고 있으면 명당 안의 생기(生氣)가 흩어지지 않고 잘 갈무리된다. 그래서 수구가 여며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청룡과 백호, 안산 등의 산줄기와 함께, 그 사이를 지나는 물길의 흐름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논을 가로질러 닭실마을의 중심이 되는 충재 권벌의 종택에 이르면 솟을대문 앞에서 마을의 안산과 청룡, 백호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명당을 다정하게 포근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수구 방향이 어떤 식으로 짜여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종택
안채는 현재 주인이 살림을 하고 있고, 사랑채와 사당. 사랑채를 건너 쪽문을 지나면 그 유명한 청암정이 보인다. 충재박물관에는 충재 18대 종손 권종목씨와 차종손 권용철가 늘 내방객을 맞이한다.
▶ 청암정
충재 권벌이 자리잡아 15년간 은거 하여 장자 권동보와 함께 구암(거북바위)위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으로 건축한 정자다. 거북 암반 주위는 연못으로 둘러져 있고, 바로 옆의 종택 뜰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더욱 운치를 더해준다. 주위에 심은 노송과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 고목은 수백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찬란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 퇴계 이황, 백담(栢潭) 구봉령, 관원(灌園) 박계현, 번암(樊庵) 채제공, 눌은(訥隱) 이광정 등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거북은 물 속에서 사는 동물이라 하여 불천위 충재선생 기일이 되면 바깥에서 들어오는 수로를 통해 연못에 물을 넣는다.
처음에는 구들을 두어 불을 지폈으나 거북 등에 불 피우면 해롭다하여 마루로 개조하였다 한다. - 위는 불에 의해 달고 아래는 물에 의해 차가워 바위가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
오백년 전통의 한과: 가문의 수준을 가늠할 잣대로 삼은 만큼 미지근한 기름에 천천히 튀기는 정성이 비결이란다.
충재 권벌(沖齋 權橃)
권벌은 1478년(성종 9년) 戊戌(무술) 11월 초 6일 안동군 도촌리에서 아버지 士彬(사빈)과 어머니 파평 윤씨(塘의 딸) 사이에서 4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동부 도촌리에서 10년간 살던 충재는 10세에 작은 아버지 士秀(사수)를 따라 봉화로 옮겼다. 그리고 19세인 1496년(연산 2)년에 진사시에 15명 중 2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30세인 1507년(중종 2)년에 丁卯(정묘) 별시 문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소과와 문과에 급제하던 사이의 22세에 直長(직장) 화순 최씨 世演(세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급제 후 바로 승문원의 副正字 權知(부정자 권지)에 입사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검열에 제수되어 다음해 11월 대교로 승진하는 12월 26일까지 1년여를 예문관의 전임관으로 史官(사관)직을 역임하였다. 곧바로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어 동왕 5년 3월 30일까지 지냈으며, 주서직 수행중이던 왕 4년 9월에 연산일기 수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등과 후 바로 전임 사관직을 수행하면서 실록청(일기청)의 기사관으로 실록 편찬 사업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정언·예조와 병조좌랑·지평·이조와 호조 정랑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다가 37세때인 중종 9년 9월에 ‘爲親求外(위친구외)’한다는 명분을 들어 외직을 구하여 영천군수에 제수되어 지방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외직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곧 이어 京職(경직)에 제수되어 장령을 거처 사인, 사성,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정국흐름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보여 진다.
41세(중종 13년 9월)인 좌승지 역임 시에는 왕이 사정전에서 유생들을 강독 시험하는 자리에서, 입시했던 재상 鄭光弼(정광필)에게 『대학』을 강론하게 하고, 그리고 ‘仁’에 대해서 논의할 때, 그는 노산과 연산의 후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지금 좌우의 신하에게 ‘仁道’를 강론하게 하니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이는 인정을 행한다는 소문 뿐입니다. …연산군은 후사가 없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同宗人(동종인)으로 후사를 삼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 함이 있겠습니까?….”
위 기사 외에 문집에도 노산 및 연산의 후사를 주장하였던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후주장은 정광필 ·申用漑(신용개) ·安塘(안당) 등 삼공 및 李繼孟(이계맹) 등이 반대하였고, 왕마저 선왕 때 행하지 않은 일이라 하여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볼 때, 비록 무도하여 폐위되기는 하였지만 명분상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는 반드시 관철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자세를 근거로 볼 때, 그는 사림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즉 영남에 근거를 둔 인물이면서 개혁성향의 기호 사림과 연결되어 개혁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42세 때 조정의 정국이 급박하게 전개됨을 염려하여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자제할 것을 말했으나, 듣지 않자 또다시 외직을 요구하여 삼척부사에 제수되어 나가기도 하였다. 외직을 구하여 나가는 바람에 그는 기묘사화 당시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연루되어 파직되면서 15년간 향리에서 지내다가, 56세(왕 28년)에 수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 다시 불리어 용양위 부호군과 밀양부사를 거쳐, 한성좌윤 ·경상감사겸병마수군절도사 ·동지중추부사 ·형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고, 이어서 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 ·한성좌윤겸지춘추관사 ·좌참찬겸세자좌빈객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리고 67세 때인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자 빈전도감의 일을 맡았으며, 인종 즉위년에는 좌참찬겸지경연의금부사를, 명종 즉위년에는 삼공과 더불어 우찬성으로서 원상이 되어 機務(기무)를 결정하는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 해 8월 21일 尹任(윤임) 일당의 大尹(대윤)을 제거하는 논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나, 같은 달 26일에 피해자인 3사람(윤임 · 柳灌류관 · 柳仁叔류인숙)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도리어 護逆(호역)했다는 죄목에 몰려 체직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8월 21일 사화 때에 책봉된 공신 훈작은 9월에 삭훈되고, 10월에는 낙향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듬해에 대간이 상소문제를 재론하는 과정에서 다시 추죄되어 奪告身(탈고신)되었고, 70세 때인 1547년(명종 2년)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죄가 추가되면서 삭주로 유배되었고, 다음해 3월에 배소에서 사망하여 11월에는 고향인 봉화현 유곡산에 옮겨 안장되었다. 사화에 연루되어 삭탈되고 유배되었던 그는 선조 즉위년 10월에 삼공의 啓(계)에 의해 관위가 회복되었고, 12월에는 경상감사 朴啓賢(박계현)의 계로 李彦迪(이언적)과 함께 추증되고 좌의정에 증직되어 을사시의 화를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 3년 5월에는 ‘忠定公(충정공)’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출처]안동의 인물 - 충재 권벌 |작성자청록]
충재의 묘소는 봉화 유곡리 중마을(내유곡) 큰재궁골에 있다. 단분(單墳)으로 정경부인 화순 최씨와 합장이다. 묘갈에는 ‘충정공충재권선생지묘(忠定公충齋權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부친인 의정공 권사빈(權士彬)과 모친인 파평 윤씨, 숙부인 교수공 권사수와 부인 봉화 금씨, 아들 권동보와 권동미 등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의 신도비명은 특이하게도 두 기가 서 있다. 원래는 사후 20년이 되던 1568년(선조1)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사암 박순이 지었으나, 1591년(선조24)에 재차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영의정으로 증직되자 우복 정경세가 다시 지은 때문이다.
서동리 탑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이 곳은 신라의 옛 사찰인 남화사(南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는데, 신라 문무왕 16년(675)에 원효대사가 여기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서동리삼층석탑(보물 52호)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이곳은 신라의 옛 사찰인 남화사(南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는데, 신라 문무왕 16년(675)에 원효대사가 여기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 모두 같은 양식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규모가 줄어들어 뚜렷한 체감율을 보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서쪽 탑에만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있을 뿐이며, 동쪽 탑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년 10월에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 때 서탑에서는 사리함을 넣었던 공간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土塔)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비례와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각화사(覺華寺)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석현리(石峴里)에 있다. 태백산 능선의 해발 1천1백77m의 각화산 아래에 있으며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다. 지금의 춘양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남화사’라는 절이 없어지고 그를 대신해 새로 지으면서 옛 절인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의미로 각화사라고 했다.
각화사는 단촐하다. 종루인 월영루(月影樓)를 오르면 대웅전과 산령각 그리고 태백선원과 요사. 그래도 이 절에 보이는 것은 간단해도 숨어 흐르는 정신은 만만치 않다. 수행하기에 더없이 좋아 선승(禪僧)들이 즐겨 찾는 곳. 특히 이곳은 불교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길지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의 각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원으로 등록하여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 공부하는 도량으로 이름이 나있다. 유난히 강한 기운이 넘쳐 오래 정진을 해도 몸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정신이 맑아 전국에서 발심한 납자 스님들이 안거에 들기 위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다른 선방의 결재기간이 3개월인데 비해 이곳 각화사만은 오래 정진을 해도 지치지 않아 결재 기간이 무려 9개월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각화사는 조선시대 때는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1606년 (선조39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왔다. 현재 태백산 사고는 불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부서진 기왓장과 축대만이 들풀 속에 흩어져 있다. 사고에 보관되어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계서당(물야면 가령리)
계서 성이성(1595~1664)의 아버지인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공부를 했고, 이후 과거에 급제한 뒤 암행어사로 4번이나 출두, 암행어사의 표본이 됐다는 것 이후 성이성은 출사를 여러번 거절한 뒤 봉화에서 계서당을 짓고 살았다.
성이성의 암행과 권선징악의 본을 실천한 점 등에 미뤄 아버지 성안의의 친구가 춘향전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춘향전 집필 당시 양반의 실명을 바로 거론하기에는 시대 상황과 맞지 않아 성을 이씨로 바꾸었고, 대신 춘향의 이름에 '성'씨를 붙였다는 것이다.
춘향전 등장인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봉화군은 계서당 입구에 '춘향전의 실존 인물 이몽룡 생가'라는 안내판을 세우고, 봉화를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현보(李賢輔)
1467(세조 13)∼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靈翁). 예안 출신.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농암종택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정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입니다.
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14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안동문화의 절정의 한 장소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등의 명소를 감싸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자리한 600여년 전통의 농암종택과 유적들은 선생의 '강호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공동공간입니다. 저는 선생의 주손으로써 이 유적들을 이제 개방하고자 합니다. '江湖之樂'과 '江湖之美'를 추구한 농암선생의 생애와 문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사색의 강을 제공할 것입니다.
첫댓글 너무 고택 종택만 보지 말고 산수 유람도 해야지요~ ??
그럴겁니다. 정자에 올라 시조도 한 수 읊고 ...
공지로 이동함이 어떨런지요?
어째 이동하지요? 교통편은? 좀 해주소!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