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토대로 공증기관인 국학진흥원의 연구발표회를 기획한다(남들은 바래미를 보고 불천위한 분으로 몇대를 써먹는데
그런식이라면 해저는 불천위가 10분은 나왔을 것이라하네요 우리선조의 대단함을 너무 몰라)
목적 바래미는 의성 김문의 휼륭한 배경을 바탕으로 바래미의 시초를 연 개암에서 팔오헌으로 이어진 바래미의
시작과 바래미인들의 역사적인 역활과 삶을 재조명함으로서 중소지주계층이자 선비문화의 요람으로 잘 보전었으며
국가로부터 받은 은덕을 나라가 위기에 쳐했을 때 충으로 결사보국한 바라미인들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서 후대인들의
귀감이 되고자 한다
바래미 역사서들을 번역을 통해서 조선후대의 선비문화와 정신의 요람인 바래미정신과 생활상등의 문화를
복원하여 바래미 인들의 긍지를 되살리고 휼륭한 역사를 계승 발전 시키고자한다
봉화는 안동의 역사와 일치하며(실제 예전에는 안동소속이였음) 풍습과 교류면에서 또한 잘 보전된 정자와 가옥(춘양목으로 지어진 전통가옥) 전통음식들과 의복의 복원에도 힘을 기울이고자한다(의식주와 문화 전반에 대한 복원)
봉화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가 보존된 곳(약130개)
학록서당은 다시 그 기능을 복원해야한다(한자교육 선비사상교육과 고택디자인 강의외....)
단사공이 서책10000권을 돌파중이라고 암행어사 박문수가 보고한 단사정 또한 그기능에 충실해야한다
조선조 약200년(위대의 기록도 말할 필요없으며 입향조부터로 치더라도 조선200년의 역사는 조그마한 마을에 많은 명가와
가장 잛은 시기에 가장 많은 벼슬과 선행과 덕행 독립운동사의 거문적인 참여등으로 나타나
벼슬로도 따져볼까요?
이조시대면 이조 고려시대면 고려 신라시대면 신라
그냥 희삼부터 친다는데 개암부터라고 치고 위로는 말할필요없는 명문이며
희삼부터도 육계십련 아마 해저 때문에 나온말이 아닌가합니다
진사가 아닌 집이 없어서 진사란 말이 없는 마을 워낙 머리가 좋아서 윷판없는 윷놀이로 사위들을 놀래키게 만들었다는
바래미 해저 거문적인 독립운동이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집들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실 탄생된 명가만도 매우 많은데 일제의 모진 핍박에다 이승만의 핍박까지 모든 감내한 마을 해저
조선 200년의 가장 짧은 시간에 대과19 생진사 48장 음직18 아마 단기간 최고기록일것(경북은 200년을 감안할 때 당연 1등이며 전국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임)최고의 명문가들이 500년간 이룬 역사를 200년만에 써내려간 바래미
게다가 명망을 나타내는 안동좌수 역임13분 별감9분(내압은 해저가 5개 모인마을) 안동좌수는 명망과 학덕으로 뽑으며 그당시 안동좌수만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여겨짐(우리의 모든 역사는 200년을 기준함)
독립운동가 공식인정만 15분이다(외에도 교림 한식 진림 우림 창희 만기 진림 중욱 독서회도 2분이 빠져) 파리장서에도 홍기 경능창백등... 거문적인 참여함 단지 서명만 3분일 뿐 민족의식을 나타내었던 민립대학과 신간회등은 제외한 것임
현재 공식적으로도 14분외 순흥 이거 화영(국민훈장) 개암자손으로 등록된 분만15명 심산포함16명 1분 추가 확실
우리것을 끝까지 지키고 유지하고자 했으며 1000편이상의 시가 쓰여졌던 명월루(일제 당시에만) 또한 그 기능을
복원해야할 것입니다(물론 죄다 분실입니다만 각문중서고에서 보관된 자취를 통해서 다시 찿아 볼것입니다)
또는 문집등을 통해서(해저에서 쓰여진 모든 시와 유관시를 통째로 모아야)시의 디엔에이는 가사 또한 마찬가지다
김철진의 시편도 김희선의 시도 우리에겐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선조들이 열심히 읊어대던 시편은 말할 것도 없다
닭실로간 고모의 가사(예전에는 주로 가사를 쓰고 읊었는데) 우리 심산할배다
심산의 생가 큰집이었던 명월루가의 지원과 독립운동사
바래미 많은 역사적인 문집과 역사서들이 그간 수없는 도둑으로 흩어져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는 주로 각가정에 일부와 국학진흥원 국립 ,,,,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이라도 정리할 필요
독립운동가 한분이 나도 집안이 망한다는 어려움에도 그간 나라로 부터 받았던 음덕을 나라가 어려움에 쳐했을 때 너나 가리지않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헌신한 바래미 봉화 해저 바래미의 역사
이부분은 독립운동사 이전 부분을 쓰는 것으로 우리조상의 행적을 조명하고 주로 희삼부터로 치는 해저의 역사와 입향조의 스토리와 개암 팔오헌과 각집안 명가의 내력을 정리하고 문집의 정리(200년간 문집 유집만도 70분이상이 문집을 남겨)물론 희삼위대도 한국최고수준의 명문 반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 비밀경찰요사를 보면 해저 바래미 의성인은 86가구 뿐이다 19대과 63사마시 어떻게 가능했던가라는 것도 연구할 필요있지 않을까(기준은 개암부터이며 희삼을 기준할 때는 늘어난다 사마시부분도 이러한 기준차이로 차이가 있어서 이번 기회에 기준을 명확히 함도 필요할 듯
거문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심산도 마찬가지 우연이었을까
만인소와 서원훼철 상소등 목숨을 건사건에서도 주도함을 보여
옳바름에 굽히지 않고 상소함 비리에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정신
욕심없이 살라는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모시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불꼿처럼 타오르던 해저 바래미
나라로 부터 받은 음덕을 나라가 어려울 때 거문적으로 나셨던 해저 바래미
대산 이상정 무실 정제등이 많이 거론되는데 이런 불꽃 투쟁의 시작과 배경은 어떻게 흘러왔는가등의 연구 작업이 필요하지
김희택(金熙澤)은 자가 세칙(世則), 호는 해와(海窩)이다. 정조16년 영남만인소를 주도했다.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청하현감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안동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정조16년 5월에 일어난 영남 만인소는 교리로 있던 와은 김한동(52세,대사간)이 족질이자 친구인 해은 김희성(51세,당시 삼계서원 원장, 전 지평,바래미),해와 김희택(50세,바래미),갈천 김희주(병조참판,와은공의 20세 연하,바래미)등에게 의논하면서 와은공이ꡐ벼슬하는 사람들은 내가 책임을 지는 데 벼슬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가 책임을 지게 하나?ꡑ라고 하니 족질인 해와공이ꡐ벼슬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책임지겠다.ꡑ하여 만인소를 삼계서원에서 처음 발의하고 해와공이 사람을 모으고 수결을 받고 하는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면암 이우(대산 이상정의 조카, 안동 소호리,한산이씨)를 소두로 추대하여 바래미를 중심으로 주도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와공의 三子 김재진(아래 참봉댁)이 쓴 임자일록에 실려있다>
*김희택의 증손인 성환 김조영도 고종17년(1880년)에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대한 영남만인소의 1차 소두 이만손이 유배를 당하자 2차 소두를 하였다.
◇김희택의 아들 김재연(金在淵)은 자는 원백(元伯)이다. 배위는 고성이씨, 후 배위는 전주유씨이다. 김재연의 아들은 김중수(金中銖)이다. 자는 군평(君平), 통덕랑을 지냈다. 배위는 진성이씨이다.
김중수의 아들은 김효영(金孝永, 1809~1852)이다. 김효영은 자가 덕원(德源)인데, 유학적 행실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대산 이상정의 둘째 손자인 이병진의 딸인 한산이씨를 배위로 맞았다. 고종17년 영남만인소의 소수인 돈와 이만손의 아들인 이중연이가 사위이다.
◇ 해저마을은 14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곳이다. 이 마을 독립 운동의 중심에는 심산 김창숙이 있다. 김창숙은 1919년 스승인 곽종석을 대표로 하는 유림단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 위해 해저마을에 들어와 명월루에서 여러 뜻있는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갔다. 이 때 독립청원에 서명한 사실이 탄로 나서 김건영(金建永), 김순영(金順永), 김창우(金昌禹) 등이 왜경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것이 1차 유림단 사건, 이른바 파리장서 사건이다.
6년이 지난 후인 1925년, 김창숙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해저를 찾는다. 이 때 100여 가구 주민들이 황소 30여 마리와 논밭을 팔아 황소 50마리 값인 5000여 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 일로 김뢰식, 김헌식, 김창백, 김창근, 김창희, 김홍기 등 8인은 징역 징역형을 받았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구금 고문을 당하였다. 이것이 2차 유림단 사건이다.
◇ 남호구택으로 불리는 것은 남호 김뢰식(1877~1935)이 이 집을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시킨 사람이기도 하고, 또 이 집에서 자랑삼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김뢰식은 의성김씨 세계(世系)상 제32대이다. 그의 자는 은필(殷弼), 호는 南湖이다. 김뢰식은 전 재산을 저당 잡혀 대부를 받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 공이 인정되어 1977년 국가로부터 건국공로 표창을 받았다. 배위는 안동 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해저마을 의성김씨 남호구택은 그 윗대인 김난영 때부터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김난영는 김뢰식의 부친으로, 자가 택형(宅馨), 호가 농산(聾山)이다. 1838년에 태어나 1870년에 해저로 들어오고, 1911년에 타계한 것을 김난영의 일생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김난영은 행위와 학문으로 명망을 얻은 사람이다.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김난영-김뢰식에 의해 의성김씨 남호구택은 고대광실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김뢰식의 아들 김창희(金昌禧)의 자는 목원(穆元), 호는 우석(友石)이며, 배위는 진주 강씨이다. 김창희-김중환을 거쳐서 현 주손인 김호철에로 이어지는 것이 의성김씨 남호구택의 가계이다. 김호철은 1945년생으로, 배위는 광산김씨, 후조당 김부필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은 김용규(金溶奎)이다.
◇김난영의 증조부인 寔軒 김희락은 정조16년 도산별시에서 7,700명 중 장원급제 하였으며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서 사헌부 지평,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정조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김난영의 父인 魯園 金喆銖도 성균관진사일 때 서원철폐를 반대하여 유건을 벗어 던지고 낙향하였다.
(1) 원만하고 화해로운 성품의 선비, 김희주 김희주(金熙周, 1760∼1830)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공목(公穆), 뒤에 왕명에 의하여 성사(聖思)로 고쳤으며, 호는 갈천(葛川)이다.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현손이다. 옛 안동부의 속현인 내성현 망도리(乃城縣 望道里)에서 후덕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 증 이조 참판 김시동(金始東)과 어머니 반남박씨 박효술(朴孝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처사 전필현(全必鉉)과 송오(松塢)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대산 이상정은 돌아갈 즈음 사람들에게 김희주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2년(정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강제문관(奎章閣講製文官)이 되었다. 그 뒤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고, 1819년(순조 19) 대사간(大司諫)에서 병조 참판을 거쳐 영흥 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또한 영해 부사·안주 목사·우승지·형조 참판·한성 좌윤·사간원 대사간·함길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정조 22) 홍문관 교리 때에는 당시 현실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정조가 칭찬을 하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1800년(순조 1)에는 교리에 실록 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 그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치와 교화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 수백 냥을 투자하여 배움터[講所]를 마련하였다. 안악군 내의 뛰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효제의 도리 등을 교육하고 생업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 성과가 매우 뛰어나서 주변 고을도 모두 본받았다고 한다.
김희주는 만년에 귀향하여 소수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화공을 불러 낡은 선성(先聖 : 공자)의 영정을 모사하고, 회헌 안향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도 새롭게 손보았다. 영정들을 봉안하는 날, 그 자리에 모인 천여 명의 사람들이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김희주는 당대 사림의 지도자로 여강서원의 배향문제(이른바 병호시비)의 규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의견들이 달라서 오래도록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정을 해가며 수십 년 동안 사림의 영수노릇을 하였다. 그의 성품이 퍽 너그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벼슬살이도 잘하였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뒤에는 풍기의 소수서원, 안동의 여강서원의 원장이 되어 사문을 흥기시키는데 힘을 썼고 사림들을 이끌었다.
김희주는 타고난 천성이 신중하면서 느긋하였고, 기상은 원만하면서 원대하였다. 평소에는 어리석은 듯하고 말을 할 때는 회의적인 듯하였으나, 생각이 깊어 잘 드러내지 않고, 실력은 쌓을 뿐 자랑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뜻을 잘 맞추어 편안하게 해드렸고,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너그러우면서도 법도가 있어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였다.
친족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가난함을 아파하여 가난한 친척들을 위해 땅을 떼어 주거나 고아가 된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기도 하였다.
(2)임금의 은총을 입음 조정에 있어서는 임금의 은총을 남달리 입었으나,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판으로 인한 은혜라 생각하고 항상 경계하고 신중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입직(入直)하는 날이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글을 읽곤 하였는데, 임금이 보고는 ‘이는 필시 김아무개일 것’이라고 했다.
어린 임금(순조)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교리(校理)의 신분으로 임금께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어떤 일도 스스로 다짐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사옵니다. 스스로 다짐하였다면 마땅히 온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준칙을 삼아야 하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오직 전하께서 어떻게 뜻을 세우시고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달려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3) 능력 있는 목민관 외직에 있을 때는 백성들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가르치고, 학교를 보수하여 교육을 진작시켰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제거해 주고, 형벌은 최소한으로 시행하였다. 그러자 누락되었던 세금도 오래지 않아 모두 걷히게 되었다.
(4)불의에 대한 과단한 비판 한 번은 의금부(義禁府) 관원이 액정서(掖庭署) 하급관리의 불법을 논하다 오히려 죄를 입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액정서의 하급관리들이 언제 한번이라도 법의 무서움을 느껴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관리를 선발하는 법은 친분이 얼마나 두터우냐의 여부와 뇌물의 많고 적음에 의해 상실되고, 옥사를 판결하는 법은 세력이 얼마나 무거우냐의 여부와 청탁의 빈도수에 의해 무너졌사옵니다.
관리들에게는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법이 있지만 아첨만을 일삼고, 과거는 인재를 선발하는 법이지만 청렴하고 정직한 인재들은 하나도 선발하지 못하옵니다. 액정서 하급관리의 무엄함은 아무래도 이러한 현상에 익숙한 결과일 것이옵니다.”
(5)학문이야기 1. 학문의 길에 들다 6세에 처음으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9세에는 영주의 전필현(全必鉉)에게 나아가 배웠고, 12세에는 권사민(權思敏)에게 나아가 배웠다. 스승인 권사민이 대단히 엄격해서 일일이 법도에 맞게 하기를 요구했는데 그대로 따랐다. 배운 지 7, 8년 만에 학문이 크게 성장하였으며, 16세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 온 후 아버지 참판공이 밤낮으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점검하고 시간을 한가하게 허비하지 않도록 했다.
2.대산 이상정 문하에 들어감 일찍이 풍기에서 살고 있을 때, 대산 이상정이 풍기에 들렀다가 병으로 인해 며칠을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김희주가 날마다 가서 시중을 들었는데 물러나면서 사람들에 말하기를, “20년 동안 노력한 공부가 모두 선생의 문하에 들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오. 오늘에서 선생의 도가 여기에 있음을 알았다오.”라고 했다.
그해 겨울 마침내 집지하여 문하에 들어 배우기를 청했다. 이에 대산 이상정은 “그대는 타고난 품성이 삼가고 돈후하며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묻는 것이 정미하며, 또한 독서에도 부지런하다니 이 공부에 충분히 뜻을 둘만하다. 내가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네.”라고 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후생들 중에서 김공목(金公穆)과 남자호(南子皜) 등이 대단히 장래가 촉망된다.”고 말했다.
(6)저작이야기 문집으로는 『갈천집』 10권이 있다. 문집의 시 가운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그의 산뜻한 정감과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글이라 평가되고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주와 감성을 잘 볼 수 있는 글이다.)
서(書)는 학우들과 친지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이황·이상정의 학문에 관한 것이 있다.
疏 중에 1811년에 올린 「논혜경궁복제소(論惠慶宮服制疏)」는 당시 禮設에 관한 소신을 밝힌 것으로 여러 전거와 중국의 사례를 들어 14년 동안 왕권을 대행한 혜경궁에 대한 상례(喪禮)가 소홀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1824년(순조 24)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소가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한 「사서추잉진육폐소(辭西樞仍陳六弊疏)」이다. 당시 여섯 가지의 폐단을 일소하는 방법으로 궁성학(躬聖學)·입기강(立紀綱)·광인재(廣人才)·휼민은(恤民隱)·정사추(正士趨)·숭도술(崇道術)등 6조목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성인의 학문을 궁구함[躬聖學], 기강을 세움[立紀綱], 널리 인재를 모음[廣人才], 백성을 돌봄[恤民隱], 선비의 길을 바로 세움[正士趨], 유학의 도를 높임[崇道術] 등의 6가지 당시의 현실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왕에게 맹자의 왕도정치 구현을 주장한 「경연강의」가 있다.
公은 1820년(순조 20) 한 달여 금강산을 유람한 뒤 돌아와 「금강산유록(金剛山遊錄)」이란 기행문을 짓기도 하였다.
28세(정조 13년)-司馬試에 乙科6위로 급제하여 成均생원 31세(정조16년)-到記三試에 수석하여 事變假注書,규장각 講製文官인 초계문신이 되었다. 정조21년-수찬에서 홍문관교리가 됨 정조22년-丹楓亭親試(단풍정친시)에 수석 홍문록에 등제 된 후에 지평,장령,헌납,사간,사성역임. 순조5년-통정대부에 올라 우승지가 됨 순조15년-한성부좌윤,형조참판 순조19년(1819년)-대사간, 병조참판,영흥부사가 된 후에 사임하였다.
※德峯精舍(덕봉정사) 봉화읍 석평리 망도 덕봉산하(望道 德峯山下)에 소재하였으며 갈천공(김희주)가 건립하여 많은 유생이 찾아 와 강학을 받아온 서재였었다.
하나는 36번 도로를 타고 현동 태백 쪽으로 가다가 918번 지방도로를 따라 우회전하여 봉성·명호를 거쳐 재산 쪽으로 간다. 가다가 933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933번 도로 쪽으로 좌회전 하여 1.2km 쯤 가면 왼쪽으로 갈천정이 보인다. 갈천정은 바로 길가 냇가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띤다.
다른 하나는 36번 도로를 타고 법전·춘양을 지난다. 노루재 터널 직전에서 영양으로 가는 31번 도로를 따라 우회전 하여 7, 8km 남짓 가다가 918번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 하여 5, 6km 남짓 가면 오른쪽으로 갈천정이 보인다.
정자의 재목은 아주 좋은 편이다. 기둥을 받친 초석은 잘 다듬은 돌이고, 마루를 고인 돌 조차도 잘 손질된 돌인 것으로 보아 이 정자는 엄청난 물력을 들여 공들여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퇴락하였다.
갈천정 주변은 호박덩굴이 무성하고 고추밭으로 일구어져 어지럽고, 정자 왼쪽 측면에는 예전에 누가 살았던 흔적으로 시멘트 블록으로 보일러실 같은 것을 덧붙여 놓았다. 그나마 아직도 애써 옛 모습으로 위엄을 지니고 있는 것은 낡은 현판들뿐이다.
갈천정 뒷집에 사는 동네 사람의 말에 의하면, 현 갈천정 옆에는 46칸의 큰 집이 있었다고 한다. 1957년 홍수에 그 집이 무너졌는데, 무너진 들보에서 ‘도광 8년(1828년)’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집은 아마도 덕봉 아래에 있던 집을 옮겨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2.건축 배경 갈천정(葛川亭)은 갈천 김희주가 지은 정자이다. 살림이 넉넉하였던 그는 봉성 북쪽, 땅이 그윽하고 넓은 쌍송정이란 곳[지금의 물야면 북지리이다.]을 보고 주인에게 많은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비용을 들여 수리하고 전 가족을 옮겼다. 못을 파 연꽃을 심고 날마다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노년을 보낼 계획으로 1808년(순조 8) 당시 안동부 재산현 갈산리 선영 아래에 이 정자를 지었다. 산이 깊고 물이 돌아나가며, 아래에는 폭포가 있고 돌이 파여 그윽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위에 집을 짓고 재(齋)를 족한(足閒)이라 하고, 헌(軒)을 수월(水月)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를 갈천정이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만년에 한가롭게 몸과 마음을 정양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몇 년 후 옛 주인이 갑자기 반환을 청하자 바로 포기하고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매년 봄 가을 좋은 때를 만나면 혹 벗과 함께, 혹 홀로 갈천정에 가서 머무르며 노닐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잠깐은 몰라도 늘 있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갈천정에 가 있는 동안 여러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덕봉 남쪽에 수 칸의 집을 지어 동쪽 방은 양정(養正)이라 이름 붙이고, 서쪽 방은 입교(立敎)라 이름 붙였다. 집은 덕봉정사(德峯精舍)라고 이름을 걸어 집안 아이들을 강학하도록 하였다.
3.건축 구성 갈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왼쪽 대청 칸 위에는 수월헌(水月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오른쪽 온돌방 칸 위에는 족한재(足閒齋)란 현판이 붙어 있으며, 가운데 방 위에 갈천정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정자가 있는 갈산리는 정자마(정자마을)라 불리는데, 이는 갈천정 건립 이후부터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4.현판:
1)갈천정(葛川亭): 갈천정은 김희주가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선영이 있는 갈산리의 칡 갈(葛)자를 따고, 갈산리에 냇물이 맑게 흐르므로 내 천(川)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삼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정자의 이름을 붙인 것 같다.
2)수월헌(水月軒): 수월헌은 정자 앞 물에 달이 밝게 비치는 형상을 딴 듯하다.
3)족한재(足閒齋): 족한재는 만년에 한가롭게 노닐기에 족하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5.재산면의 젖줄, 갈산리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는 재산면 중에서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갈산리의 서쪽은 미림산 영역이고, 북쪽은 낙동강, 동북쪽은 제비산·장군봉 영역, 동남쪽은 조산봉 영역이다. 남쪽은 재산의 현동마을과 동면마을이 확정하여 준다. 이 마을은 남면리 쪽에서 시작되어 재산면소재지를 거쳐 북행하여 온 재산천 주변과 장군봉 산록을 훑고 한골·아랫공이 쪽으로 서행하여온 현동천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다.
임기에서 영양으로 나가는 31번 국도는 현동천을 따라 나가며 이 마을의 북쪽 영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며, 재산면사무소 쪽에서 아랫공이 쪽으로 나와 31번 국도와 만나는 933번 지방도는 이 마을의 서쪽 영역을 서로 원활하게 연결시켜 준다.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북행하는 재산천 영역에 펼쳐져 있는 것은 큰마을·잿마·요골·학다리·새골·머너부·골내골·합강 등의 고을들이다. 큰마을은 갈산·갈산리이다. 갈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곳이다. 잿마는 재산천의 서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촌이라고도 하는데,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잿마의 북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학다리·학교이다. 근처에 학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주변의 재산천 영역이 절벽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 머너무·골내골 등도 재산천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으며, 합강은 재산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31번 도로의 영양 쪽 끝으로는 우련전이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연화부수형의 명당이라 한다. 갈산리의 동쪽 끝부분에 있으며, 영양 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우련전의 북쪽으로는 한골·가내골이 있다. 한골은 대곡이라고도 하는데, 장군봉 남쪽 산록에서는 비교적 넓은 들을 포함하고 있는 곳이다. 한골의 위쪽으로는 가내골이 있는데, 시냇가 경치가 아름다워서 가내골이라고 한다.
우련전 서쪽으로 나오면 한골·대곡·신타리·산막 등이 있다. 이들 마을은 장군봉의 서남쪽 산록에 펼쳐져 있다. 산막은 우련전에 가깝게 자리 잡고 있고, 한골은 우련전에서 가장 멀리 위치하는 마을이다. 산막은 아연광이 폐광되기 전에는 번성하였던 마을이다. 한골과 대곡은 이 부근에서는 비교적 넓은 들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마을들은 현동천의 원류를 이루는 시내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다.
현동천의 하류 부분으로 가면 용구·오미골·공리골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공리골은 공이골이라고도 하는데, 큰 공이재 북쪽으로 웃공이·아랫공이로 나뉘어져 있다. 현동천과 재산천 사이에는 공이재·쇄실·염주골·잣밭골·까이골 등이 펼쳐져 있다.
女;삼산 류정원주손<문집: 만록(漫錄):학봉 김성일이 통신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와 복명한 내용으로 인하여 물의를 빚은 데 대한 해명한 내용이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34세 金學基 35세 김상순 36세 김익성
八吾軒 金聲久
1) 해저의 소나무 밭, 여씨에서 김씨로 전통시대에는 오늘날의 우리와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다. 오늘날은 봉화 영주 사이의 36번 도로와 태백선 철도 때문에 잘려져 나갔지만, 전에는 해저마을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에서 서쪽 방향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동쪽 방향을 향해 나가며 길게 소나무 숲이 조형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 숲은 실제의 목적이 방수림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내성천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곳으로, 홍수 때 범람의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로 가설되었을 소나무 숲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해저마을이 의성김씨 일문의 세거지로 확장되어 나갔던 역사와 맞물려서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로 변환되기에 이른다.
원래 이곳은 의령여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기지였다. 그들이 이 지역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해저와 봉화읍 사이의 개따밭골 입구에서 호평들을 향하여 펼쳐진 산수의 모습이 한자로 여씨의 ‘여(余)’라는 글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야기는 전제한다. 그 ‘여’자의 끝에 일선으로 소나무 숲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一자의 한 획이 더해져 ‘금(金)’자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고, 그것이 지력에 영향을 끼쳐 여씨 성의 퇴조, 김씨 성의 약진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전국 구석구석에서 산견되지만, 여기 해저 마을에서도 우리는 그 사례 중 하나를 만날 수 있다.
2) 안분지족 하는 마음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을 처음 지은 사람은 의성김씨 팔오헌 김성구이다. 김성구(金聲久)는 의성김씨 개암공파가 해저마을에 자리 잡게 한 입향조인 셈이다. 의성김문의 중시조는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이다. 김용비는 4남을 두었는데 3남이 김영(金英)이다. 김영의 아들은 김지예(金之銳)이고, 김지예의 2남은 김용초(金用超)이다.
김용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개국원종공신이다. 김용초의 시대에 이들, 의성김문의 한 갈래는 경기도 용인에서 낙남하여 성주로 옮겨 앉았다. 김용초는 의성김씨 세계상 13대에 속한다. 이 계열은 19대 김희삼이 4남을 둠으로써, 본격적인 번성의 길로 들어선다. 해저의 개암공파의 파조가 되는 것은 2남 김우굉이다.
개암공 김우굉은 성주를 떠나 상주 개구암(開口巖)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호 개암은 이것으로부터 기인된다. 개암공 김우굉이 상주로 이거하는 것은 배위인 남양홍씨의 친정 부근을 찾아든 탓이라 할 수 있다. 김우굉의 아들은 주봉 김득가(金得可)이고, 김득가의 아들은 천유당 김율(金瑮)이다.
김율은 임진왜란 때 모친을 등에 업고 피난을 다니다가 봉화의 호평(범들이) 마을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호평은 지금 해저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 너머에 있는 너른 들이다. 김율의 2남은 학정 김추길(金秋吉)이다. 김추길은 우복 정경세의 문인이다. 김추길의 2남이 의성김씨 팔오헌종택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자가 덕휴(德休), 호가 팔오헌이다. 팔오헌이란 앞의 기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내 밭을 일구어 먹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산에서 나물을 뜯고, 내 시내에서 고기를 낚고, 내 책을 펼쳐 보며 공부를 하고, 내 거문고를 뜯으며 즐기고, 내 그윽한 마음의 평정을 지키고, 내 수명을 다하리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안분지족하는 마음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명문이라 하겠다.
그는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에까지 이른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권씨로,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손들이 오래 머물러 살만한 땅을 구하였는데, 그의 눈에 든 곳이 바로 해저마을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세계상 24대에 속한다.
김성구의 아들은 김여건(金汝鍵, 1660-1697)으로, 그의 자는 천개(天開)였다. 문과 출신으로 수찬에 이르렀다. 조덕린이 지은 행장이 있고, 이광정이 쓴 묘갈명이 있다.
그로부터 10대를 내려오면 김호충(金鎬忠)이 있다. 김호충의 자는 서백(恕伯), 1927년생이다. 부인은 진성이씨인데, 선산부사 이정의 주손인 이용순(李容純/두루종가)의 딸이다. 현 종손은 김흥원(金興源)으로, 1949년생이다.
3)평정을 잃지 않는 성품 김성구는 어려서부터 차분하고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대여섯 살 때 또래 아이들과 집 근처 바위 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마침 벼락이 바위에 떨어졌다. 집안 식구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다른 아이들은 혼이 반쯤 나갔는데, 김성구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또 정의 현감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였다.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그만 단정하게 앉은 채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같이 있던 임홍망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지, 내가 놀라서 허둥댄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승지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숙직을 설 때 술이 과하여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임금이 급하게 찾았다. 옆에 있던 이들이 부축하고 조복(朝服)을 입혀주자 그가 문부를 지니고 들어갔다. 임금을 대할 때 매우 삼가는 태도로 대했으며, 글을 옮겨 쓰는데 글자가 매우 반듯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바로 취하여 쓰러졌다.
이처럼 그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당황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취해 있었어도 똑바른 자세가 필요로 할 때면 고도의 정신력을 발휘하여 평정을 유지하였다.
* 강직한 성품,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다 김성구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공평무사하고 청렴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때문에 이항(李沆)은 “관직자들은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관직에 오른 자가 많지만, 김성구만은 누구의 후원 없이 청현(淸顯)에 이르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가사를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호를 팔오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팔오라는 것은, “내 밭을 갈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채마밭에서 나물을 먹고, 내 강에서 낚시질 하며, 내 거문고와 책을 뜯고 읽으면서, 분수에 맞춰 생을 마친다.[耕吾田 飮吾泉 採吾전(艹 +顚) 釣吾川 撫吾絃 披吾編 守吾玄 終吾年]”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그는 철저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삼찬오보(三竄五補)의 불운을 당하다 그는 언관으로 근무할 때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수찬 재직 시에는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 언의 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 시에는 당시 형조 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런데 1679년(숙종 5) 장령(掌令) 재직 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탁남의 견제를 받아 정의 현감의 외직으로 쫓겨남을 당했다. 이때 이봉징·이옥(이관징의 아들,연안이씨,식산 이만부의 父) 등 3명은 유배당했고, 그와 이석관 등 5명은 외직으로 쫓겨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삼찬오보’라고 하였다.
4)가 족 김성구의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5대주손이고, 영릉 참봉(英陵參奉) 권목(權霂)의 딸이다. 그녀는 19세에 시집와서 시부모 봉양과 남편 내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부귀영화를 구하지 말고 자신을 수양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자식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의 이름은 김여건(金汝鍵,문과,수찬)·망도 김여용(金汝鎔,생원)·졸암 김여당(金汝鏜,진사,증 이조참의)·김여병(金汝鈵,통덕랑,배 여헌 장현광 주손)이다. 딸들은 사인(士人) 조해(趙瀣,풍양조씨,상주 오작당,검간 조정주손), 생원(生員) 홍서귀(洪瑞龜)와 혼인하였다.
5)학 문 향사:안동 백록사(柏麓祠) 학파:퇴계 학파
교유인물:손만웅(孫萬雄)
6) 많은 후학을 양성하다 김성구는 원래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암기한 것은 평생토록 잊지 않았는데, 한 번도 학문을 닦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연 학문의 성취가 남달랐는데, 간혹 동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의 교육 방법은 재주와 능력에 따라 진도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과거에 오른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는 후손들에게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말도록 엄하게 단속하였다. 집안의 어린 아이들 중에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말하는 아이가 있으면, 늘 “아이들은 공손함과 근신함이 중요하다. 그렇게 남을 흉보는 것을 보니 경박하고 상서롭지 못하다. 한갓 글재주가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나무라곤 하였다. 그 자신도 아무리 취해도 남의 말을 하지 않았고, 옆에서 누군가 남의 흉을 보면 묵묵부답 대꾸하지 않거나 혹은 못들은 척 하였다.
7) 남의 흉을 보지 말아라 그는 늘 자손들에게 잘못된 습속을 따르지 말고 형제간의 우애를 잃지 말도록 가르쳤다. 그 자신 역시 남다른 우애를 보였는데, 아이였을 때도 늘 동생을 데리고 놀다가 혹 동생이 넘어져 다치면 그를 얼싸안고 엉엉 울기까지 하였고, 동생이 일찍 죽자 그 자식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형님하고는 50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그 뜻을 어기지 않았고, 해저로 이사한 이후에는 늘 지팡이를 짚고 형님을 찾아뵈었다.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르다 안동 내성으로 이거 후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다
김성구는 김우굉의 후손으로 원래 성주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그의 조부인 김율이 처음 안동부 내성현으로 이거하였고, 그와 그 아들인 김추길이 계속 진사에 올라 집안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김성구까지 진사를 거쳐 문과에 올라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김성구의 집안은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김성구는 부승지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집을 봉화읍 석평리의 호평에서 해저로 옮기고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창건하여 후진 양성에 생애를 바쳤다.
◇ 19세 칠봉 김희삼(문과,삼척부사)
20세 개암 김우굉(문과,강원도 관찰사,대사성)
21세 주봉 김득가(진사,창녕현감,증 사복시정,퇴계 이황 문인)
22세 천유당 김율(진사,안동좌수,수첨추,증 좌승지)
23세 학정 김추길(생원,수첨추,증 이조참판,정경세 문인)
24세 팔오헌 김성구(문과,강원도 관찰사,대사성)
25세 김여건(문과,홍문관 수찬):갈암 이현일문인
26세 송학 김경찬(생원)
27세 나계 김필동(참봉,외증손:정재 류치명,배:목재 홍여하 증손녀)
28세 김희경(통덕랑,배:참의 이세태 女)
29세 김재화→ 30세 김면수→ 31세 金駿永→ 32세 金濟林
33세 김창도→ 34세 金重嘩→ 35세 金鎬忠
36세 김흥원
1.개암공파 종계와 의성김문(水山 김홍길,퍼옴)
신라 경순왕의 4남 김석(金錫)이 시조이고, 중시조인 9대 김용비(金龍庇)의 3자 김영(金英) 계열에 속한다. 이 계열의 가계는 김영-김지예(金之銳)-김수덕(金修德 : 2남)-김용초(金用超 : 3남, 조선 개국 원종공신)-김화(金和)-김종사(金宗師)-김계손(金季孫 : 4자)-김종혁(金從革)-김치정(金致精)-김희삼(金希參, 1508~1560)으로 이어진다.
김희삼은 호는 칠봉(七峯)이다. 성주 사월리 출생인데, 집 뒤 칠봉산을 좋아하여 호를 칠봉산인(七峯山人)으로 하였다.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벼슬은 삼척 부사·통정 대부에 이르렀으며, 1559년(명종 14) 눈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1560년(명종 15)에 5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중간에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하고 있을 때, 나라로부터 칠봉산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김희삼은 배위인 청주곽씨와의 사이에서 김우홍(金宇弘: 伊溪公派 파조), 김우굉(金宇宏), 김우용(金宇容: 沙溪公派 파조), 김우옹(金宇顒: 東岡公派 파조) 등을 낳았다.
김우굉(1524~1590)은 해저의 의성김문인 개암공파(開巖公派)의 파조이다. 김우굉은 칠봉 김희삼의 2남인데,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이다. 성주 사월리에서 출생하였다.
1552년(명종 7)에 장원 급제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형조 참의·광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562년(명종 17)에는 성주 동쪽, 낙동강 상의 개구암(開口巖)에 집을 짓고 주변 산수를 즐기며 노닌 적도 있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영남 학단의 흐름을 이었다. 1589년(선조 22) 전라도 광주 목사를 끝으로 귀향하였으며, 1590년(선조 21)에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홍씨이다.
2. 해저마을의 개암공파 종계 김홍재(金弘載)는 자가 성용(聖庸), 호가 창호(蒼湖)이다. 김연대의 부친이다. 배위는 안동권씨 권중인(權重寅)의 딸이다. 김홍재는 행동이 바르고 아름답다고 추천되어 통덕랑을 제수 받았다. 그의 배위인 안동권씨의 묘소가 회진(會津) 광대산(廣大山)에 있는 것으로 보아 회진과 일정한 관계가 있는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의성김씨 개암종택을 처음 매입하여 들어와 살기 시작한 김연대는 자가 일보(一輔)이다. 파조인 개암 김우굉으로부터는 10대 후손, 전체 의성김문의 시조 김석으로부터 보면 30대에 해당된다. 김연대의 묘는 응동(鷹洞) 뒷산 골짜기에 있다. 배위는 진성이씨 퇴계 이황(李滉)의 후손인 현감 이세택(李世澤)의 딸이고, 후배위는 함양박씨 박성철(朴成徹)의 딸이다. 배위인 진성이씨의 묘는 광대의 고갯마루에 있다.
김연대는 삶터를 해저마을로 옮겨 왔다. 김연대가 해저 의성김씨 개암공파의 최초 입향자는 아니다. 개암공의 후손인 의성김씨 일문 중에서 해저에 처음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은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이다. 개암공 종계는 후에 김연대 시대에 일문의 사람들에 의해 모셔져서 이 마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4. 시대를 잘못 만나 자연을 노래하다 그와 그의 부친은 권신이 농단하는 세상, 사림이 동서로 갈려 서로 대립하던 시기를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닌 능력을 제대로 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의 부친인 김희삼은 당시의 권력자인 이기(李芑)의 미움을 받아 자원해서 삼척 부사로 7년간 재임하였다. 그때 김우굉은 주변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아울러 43세 때에는 동생인 사계(沙溪) 김우용(金宇容),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사암(徙庵) 노관(盧祼),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송암(松庵) 강익(姜翼) 등과 함께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아울러 함안(咸安)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지었는데, 탈속(脫俗)한 듯한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아울러 60세 이후에는 동서의 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잇달아 외직을 구했고, 날마다 자연과 벗 삼아 기심(機心)을 잊으려는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4.불의에 과감히 맞서다 42세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요승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경상도 내의 선비들에게 통문을 돌려 상소를 올리도록 주도하였고, 한 달 동안 22번 상소를 올렸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 곧은 명성을 세상에 떨쳐 사림들의 존중을 받았다.
형조 참의로 재직 중이던 60세 때 서얼인 곽사원과 사노가 교하에 있는 언답(堰畓)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붙었다. 곽사원은 권력자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형조에서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고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곽사원이 제출한 증거가 위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형조 정랑과 형조 판서는 권력에 빌붙어 곽사원을 두둔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형조 참의를 사직하였고,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게끔 하였다.
5.가 족 남양홍씨와 혼인하여 3남 5녀를 낳다. 김우굉의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김득가(金得可)·김달가(金達可)이다. 딸은 유성귀(柳成龜)와 혼인하였다.
*남다른 우애, 세상을 감동시키다 김우굉은 동생 김우옹과의 17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학덕을 쌓고 유교의 고전을 비롯한 성리서(性理書)를 공부하며 지행(知行)의 정실(精實)을 추구하는데 매진하는 한편, 홍문관에서 같이 근무하며 충언직설로 시폐를 극론하다 탄핵대상이 되는 등 정치적 행보에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그들 형제의 정의는 김우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떠날 때 김우굉이 병중임에도 상주에서 영주까지 도보로 달려와 통곡하며 애틋한 정을 나누기도 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김우옹은 귀양지에서 지은 제문에서 형제가 외로운 자취로 갈 곳을 모르고 서로 의지하였다고 회고하며, 자신의 성품이 우둔한데다 어리석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선행의 방도를 알지 못해 항상 형의 근심거리가 되었을 뿐이라며 그의 인생역정에 끼친 형의 영향을 술회하기도 하였다.
특히 현손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의 후손들 가운데 현달한 이들이 많이 나왔다. 지금도 해저(속명 바래미)에 세거하는 의성김씨는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중 하나이다.
*조식, 이황의 학문을 전수받다 김우굉은 일찍부터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대인군자의 덕목을 습득하였다. 그 스스로 퇴계 이황(李滉)보다는 조식의 학통에 가깝다고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동생 김우옹과 함께 이황에게 예제(禮制)에 관한 서신을 교환하며 감화를 받았다.
1560년(명종 15) 그가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합격할 때 출제관(出題官)으로서 그의 책문(策文)을 보고 감탄한 바가 있었던 이황은 그와 서신을 교환하는 가운데 “진정 그 명성이 헛됨이 없다.”라며 그의 박식함에 칭찬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에 서로 만나지 못했어도 그의 풍의를 생각하여 잊지 않았다.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이취(理趣)와 사채(詞彩)가 모두 뛰어나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했을 만큼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를 보면 그의 사승관계는 일찍이 남명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 급제 후 아우 동강과 함께 도산에 급문했다는 시간적인 전후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류성룡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다 그는 교유 관계가 상당히 넓었다. 노관(盧祼)·정복현(鄭復顯)·강익(姜翼)·류성룡(柳成龍)·노수신(盧守愼)·강사상(姜士尙)·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 당대 경상도의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류성룡은 안동 하회에서 배를 타고 그가 살고 있던 낙동강변의 개암까지 와서 이틀을 묵으며, 학문하는 요체와 세상을 구제할 원대한 포부를 서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 강직한 선비로서의 기품이 드러나는 『서행일기』
『서행일기(西行日記)』는 그의 강직한 선비로서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자료이다. 그는 당시 상소를 통해 사림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상소문의 상주과정에 있어서 그 명분과 찬술, 및 사림의 의견 수렴, 조정 관리들과의 연계와 규합과정, 체류 경비 조달과정, 전체 일정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일기 속에는 특히 서울에 있을 때 당시 좌랑이던 율곡 이이가 두 번이나 격려 차 그를 방문했다는 내용도 있다.
첨부파일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족실록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을 김여건선조님에 대한 것을 발췌해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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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의성김씨 종보 사원1집(1991년)에 실린 내용을 올려봅니다.
바래미(海底)篇 嶺南儒林의 搖籃 哲鎭 삼가씀(八吾軒公 12世)
영주에서 울진으로 달리는 국도를 따라 12km쯤 가다 보면 봉화읍사무소 ․2km쯤 못미쳐 도로 왼편에 고색 창연한 기와집 200여 호가 東西船構型(동서선구형)으로 길게 뻗어 동남향으로 앉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이 바로 영남 유림의 요람이며 항일 독립 운동의 산실로서 의성김씨 300여 년 세거의 땅인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속칭 바래미다.
바래미는 바다 밑이란 뜻의 옛말인 바라믿에서 나온 것으로써, 한자어로는 海底(해저)가 된다.
바래미는 뒤로 태백산맥의 지류인 해발592m의 응방산, 속칭 매뱅산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영동선 철길 너머 낙동강 상류인 내성천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산수 좋고 풍광 좋은 班村(반촌)이다.
이 바래미의 입향조는 八吾軒公(팔오헌공) 휘 聲久(성구)선조로써, 팔오헌공은 바래미에 터를 잡기 전에 먼저 경기도 여주와 경상도 풍기 등지도 둘러 보셨다고 한다.
그런데 여주는 한양이 가까워 다시 나랏님의 부르심을 받아 벼슬자리로 나아가야 할까 염려돼 꺼렸고, 풍기는 땅과 물이 모두 좋지 않아 택리를 포기하고, 山紫水明(산자수명)하고 환난을 피하기에 적합한 지세를 가진 바래미를 택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팔오헌공은 高麗金紫光錄大夫太子詹事公(고려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공) 휘 龍庇(용비) 선조의 16세요, 七峯公(칠봉공) 휘 希參(희삼) 선조의 4형제인 伊溪公(이계공) 휘 宇容(우용), 文貞公(문정공) 휘 宇顒(우옹) 선조 중 대사성,부제학,광주목사,충청도관찰사등의 벼슬을 지낸 개암공 휘 우굉 선조의 현손이다.
공은 鶴汀公(학정공) 생원 휘 秋吉(추길) 선조와 貞夫人 (정부인) 전주유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1641년(현종 10)의 식년 문과에서 甲科(갑과)로 장원했다.
공은 지평, 정언, 대사성 등의 벼슬을 거치고, 1693년(숙종 19) 강원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쓴 조선 숙종조의 명신이며, 사림의 추앙을 받은 학덕 높은 선비였다.
공은 바래미에 정착한 뒤인 숙종 말기부터 영․정조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 공의 후손들도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의 부친인 원교 이긍익 쓴 현판이 걸려 있는 鶴麓書堂 (학록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
이것은 한 가문으로써는 영남에서 제일 많은 등과 기록을 세웠고, 또한 대과 38장은 의성김씨 전체 대과 96장의 약 40%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인근은 물론 영남 유림에서는 바래미김씨로 불려질 만큼 유명했는데 그러면서도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분은 별로 없었으니,
그것은 -사람은 욕심없이 살아야 한다.-라는 팔오헌공의 교훈에 따라 벼슬보다 학문에 힘쓰며 참된 선비 정신으로 욕심 없이 청빈한 삶들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분들을 살펴보면 공의 맏 자제인 휘 汝鍵(여건)선조, 셋째 자제인 拙庵(졸암) 휘 汝鏜(여당)선조를 위시하여
휘 여건선조의 셋째 자제인 松庵(송암) 휘 景瀗(경헌)선조,
넷째 자제인 丹砂(단사) 휘 景溫(경온)선조, 경온 선조의 둘째 자제인 素岩(소암) 휘 鎭東(진동)선조와 셋 째 자제인 휘 斗東(두동)선조,
臥隱(와은) 휘 翰東(한동) , 두동 선조의 맏 자제인 文泉(문천) 휘 熙紹(희소) 선조와 둘째 자제인 寔軒(식헌) 휘 熙洛(희락) 선조,
葛川(갈천) 휘 熙周(희주) 선조, 식헌 휘 희락 선조의 둘째 손자인 魯園(노원) 휘 喆銖(철수), 晩悔(만회) 휘 建銖(건수) 선조, 문천 휘 희소 선조의 손자인 鶴浦(학포) 휘 禹銖(우수) 선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분들 가운데 鶴汀公(학정공)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됐으며,
단사 휘 경온 선조는 건원릉참봉을 지내고 통훈대부에 추증됐으며,
휘 두동선조는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됐고 휘 한동 선조는 대사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또 갈천 휘 희주 선조는 영해부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문천 휘 희소 선조는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식헌 휘 희락 선조는 규장각초계문신을 지냈는데, 이 세 분은 영남 대유 였던 大山(대산) 이상정에게서 배우고 교유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입향조 팔오헌공의 충의 정신과 조선 청댓잎 같은 선비 정신은 바래미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일제 때는 수많은 항일 독립 투사들을 배출했다.
그 대표적 인물로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항일 독립 투쟁으로 해방된 조국의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반독재 투쟁으로 삶을 일관한 心山(심산) 휘 昌淑(창숙) 지사를 들 수 있다.
심산 지사는 7세 때 文節公(문절공) 東岡(동강) 宇顒(우옹) 선조의 종가로 양자간 부친 護林公(호림공)을 따라 성주로 이거하여 그 곳에서 성장했지만 실질적인 혈족은 모두 바래미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심산 지사는 스승인 곽종석을 대표로 하여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낼 유림단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려고 바래미를 찿아와 명원루(明月樓)에서 뜻 있는 분들의 서명 날인을 받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그러나 이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사실이 탄로 나서 建永(건영),順永(순영),昌萬(창만) 씨 등이 왜경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이것이 1차 유림단 사건(파리장서사건)이다.
그 6년 뒤인 1925년 상해 등지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심산 지사가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몰래 입국하여 다시 바래미를 찿아 왔다.
이 때 100여 가구 주민들이 똘똘 뭉쳐서 황소 30여 마리와 논밭 등을 팔아 황소 쉰 마리 값인 5000여 원을 심산 지사에게 건네주었는데,
이 사실이 또 발각되어 ꜹ植(뇌식), 憲植(헌식), 漢植(한식),佑林(우림),昌根(창근), 昌禧(창희), 昌百(창백), 鴻基(홍기) 씨 등 주동자 여덟 분이 징역 3년씩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주민들도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것이 2차 유림단사건 이었는데 이 두 차례에 걸친 유림단사건으로 인하여 바래미는 쑥밭이 되었고, 일경으로부터 감시의 눈초리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조상 전래의 충의 정신과 선비 정신은 시들지 않아 이를 바탕으로 한 항일 투쟁의 불꽃은 계속 타올라 1933년 독서회 사건으로 횃불을 들었다.
독서회 사건이란 昌臣(창신), 重文(중문), 重憲(중헌), 重烈(중렬),德基(덕기)씨 등 5명이 항일 비밀 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다가 왜경에게 발각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건이었다.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던 말처럼 絶孫(절손)까지 당하는 3대 수난 속에서도 바래미의 항일 투쟁은 끝없이 이어져 重旭(중욱) 씨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고,
鴻基(홍기) 씨의 아들 正鎭(정진) 씨는 대구상고 학생 중심의 항일 비밀 단체였던 태극단의 주요 멤버로 활약하다가 왜경에 피체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2년 3개월 만에 조국 광복을 맞이 하였다.
그런데도 자료와 증거 유실로 건국 공로 포상자로는 뇌식,홍기,중문,덕기,정진 씨 등 다섯 분만이 선정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바래미의 이 건국 공로 포상자 수는 자연부락 단위로는 전국 최고의 수다.
이렇듯 바래미는 한마디로 추의 정신과 선비 정신이 유림의 귀감이 되는 반촌으로서 그 정신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로 효친, 조상 숭배의 전통도 계승되어 조선 말기부터 일제하의 그 항일 독립 운동으로 인한 수난의 와중에서까지도 조상들의 정신적 유산을 정리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수많은 문집들이 발간 되었다.
이 때 발간된 문집들로는 開巖公(개암공) 휘 宇宏(우굉)선조의 <開巖文集(개암문집)>, 팔오헌공 휘 성구선조의 <八吾軒文集(팔오헌문집)>,
단사 휘 경온 선조의 <丹砂文集(단사문집)>, 소암 휘 진동 선조의<素岩文集(소암문집)>, 갈천 휘 희주 선조의<曷川文集(갈천문집)>, 식헌 휘 희락 선조의 <故寔軒文集(고식헌문집)>,
노원 휘 철수 선조의 <魯園文集(노원문집)>, 만회 휘 건수 선조의 <晩悔軒文集(만회헌문집)>,<聞韶世槁(문소세고)>등이 있다.
이 문집들은 우리 나라의 명저는 물론 중국 고대로부터 당․송 시대의 고서들과 함께 映奎軒(영규헌)에 3,000여 권의 장서로 보관되어 왔으나 6․25동란 이후 이리저리 흩어져 지금은 각 대학의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어 바래미의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나가 있어 고색 창연한 기와지붕 아래의 추녀 끝을 스치는 조선의 바람 소리만 스산하지만 객지로 나가 있는 자손들에게도 바래미의 얼은 살아있어 1986년에도 세 분 선조의 합편 문집인 <七峯開巖八吾軒文集(칠봉개암팔오헌문집)>을 발간하여 조상들의 충의 정신과 선비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1. 절의 의미 절이란 몸을 굽혀 공경(恭敬)을 표시하는 인사방법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켜야할 많은 예 절 가운데서도 상대편에 대한 공경과 반가움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예절이다. 절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공경하는 예로써 행하여지며 공경해야 할 대상을 상징하는 표상에 대해서도하고 의식행사에서도 한다. 이 율곡 선생은 절을 올려야 할 대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무릇 절하는 예(禮)는 가히 미리 정할 수는 없으나 모름지기 아버지뻘 되는 어른은 당연히 절(拜)하고, 동네에서 나이가 15세 위가 되면 당연히 절(拜)하고, 관작(官爵)의 지위가 당상관(堂上官)이며 나보다 연세가 10살 이상이면 절(拜) 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지위와 덕망과 인격이 연세로만 헤아릴수 없기 때문에 다만 이것에 구애 받을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자의 높고 낮음과 존귀하고 천함과의 인격을 판단해서 예의에 위배되지 않도록 정당히 대우를 하는 것이 당연하니라". 절을 올리는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신불(神佛)과 같은 신앙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례는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인 절로 시작해서 절로 끝난다. 우리들의 생활중에 여러 가지의 절이 필요하지만 다례에서는 대개 진례(큰절), 행례(보통절). 초례(작은절)로 구분하여 한다.
2. 절하는 법 절에 대한 원형은 선조 32년(1599년)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963)선생이 저술한 가례집람 (家禮輯覽)에 그림까지 곁들여 설명을 해 놓았다.
(1) 공손한 자세(拱手法)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잡는 것을 공수라 하는데 이는 공손한 자세를 나타내며, 모든 행동의 시작 의 의미이다. 공손한 자세는 어른에게는 공손한 인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에게도 편안한 자세가 되어야 한다. ① 공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서 잡는 것을 말한다. ② 공수는 남자와 여자의 손위치가 다르다. ③ 공수는 평상시(平常時)와 흉사시(凶事時)가 다르다. ④ 공수는 의식행사에 참석했을 때나 어른을 뵐 때 반드시 한다. ⑤ 공수는 배례(拜禮, 절)의 기본동작(基本動作)이다.
·-평상시 남자와 여자의 공수 동작 ① 남자의 공수는 왼손을 위로하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하여 두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포갠다. ② 흉사시 에는 남녀 모두 평상시와 반대로 한다.
공수(남)
공수(여)
(2) 간단한 예의 표시(揖禮法) - 장소관계나 기타 사정으로 절을 해야 할 대상에게 절을 할 수 없을 때에 간단하게 공경을 나타 내는 동작이다. - 간단한 예의 표시일 뿐 절은 아니다.
(3) 절의 종류와 대상 - 작은절(초례, 반절) : 웃어른이 아랫사람의 절에 대한 답배時에 한다. - 보통절(행례, 평절) : 항렬이 같은 사람, 관직의 품계가 같을 경우에 한다. - 큰 절(진례) : 자기가 절을 해도 답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높은 어른에게나 의식행사에서 한다. - 매우큰절(배례) : 관, 혼, 상, 제, 수연, 고희 時에 한다.
(4) 절하는 횟수 ·- 기본횟수 ① 남자는 양이기 때문에 최소양수인 한번을 한다. ② 여자는 음이기 때문에 최소음수인 두번을 한다.
·- 생사의 구별 ① 산사람에게는 기본횟수만 한다. ② 죽은 사람이나, 의식행사에서는 기본횟수의 배를 한다.
- 맞절의 요령 : 정중하게 맞절을 할 경우 아랫사람이 하석(下席)에서 먼저 시작해 늦게 일어나고 웃어른이 상석(上席)에서 늦게 시작해 먼저 일어난다.
·- 답배의 요령 : 아랫사람이 절을 시작해 무릎을 꿇는 것을 본 다음에 시작해서 아랫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끝낸다.
- 절하는 위치 : 혼인례에서의 현구고례 때를 제외하고는 공간이 허용하면 같은 방에서 상하석에 위치해 절한다.
- 절의 재량 : 절의 종류와 횟수는 절을 받을 어른이 시키는 데로 변경하거나 줄일수 있다.
(5) 절하는 방법 지역과 가문에 따라 절하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그래서 한국 다도 협회에서는 여러지방에서 행 해지고 있는 절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답고 다합한 절을 하고 있다.
<절의 기본 5가지> ① 양손을 맞잡는다. (오른손이 위로 가게 해서 왼손을 가볍게 잡는다.) ② 양손을 모아 배 중심에 놓고 바로 모았던 손을 풀어 동작을 취한다. ③ 절의 형태가 다르더라도 팔굽이 구부러지지 않게 한다. ④ 등, 어깨, 고개를 숙일 때 뒷고대가 떨어지지 않게 한다. ⑤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가 들리지 않게 안정감 있게 절을 한다.
(1) 남자의 절 가. 남자가 한복(또는 양복)을 입었을 경우의 작은절(拜禮)의 경우
초례(남)-1
초례(남)-2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발 위로 오게 한다. ③ 두 손을 사진 위치에 왼손이 위에, 오른손이 밑에 오도록 가지런히 놓는다. 그리고, 머리를 조금 숙인다. (15도 정도)
나. 남자가 평절(行禮)의 경우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발 위로 오게 한다. ③ 두 손바닥에 닿는 자세에서 공손히 절을 한다. (30도 정도)
다. 남자의 큰절(眞禮)의 경우
진례(남)-1
진례(남)-2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발 위로 오게 한다. ③두 손바닥이 완전히 바닥에 닿도록 깊이 숙여서 정중히 절을 한다. (45도 정도)
라. 남자의 매우 큰절(拜禮)의 경우
배례(남)-1
배례(남)-2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발 위로 오게 한다. ③ 두 손을 큰절과 같이하나 몸자세(상체)를 가장 깊게 굽혀서 하는 절.
(2) 여자의 절
① 한복 가. 여자가 한복을 입었을 경우의 작은절(草隷)
한복초례(여)-1
한복초례(여)-2
① 오른쪽 무릎을 세워서 앉는다. ②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옆에 놓으며 머리를 조금 숙인다. (15도 정도)
나. 여자가 한복을 입었을 경우의 평절(行禮)
한복행례(여)-1
한복행례(여)-2
① 오른쪽 무릎을 세워서 앉는다. ②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옆에 놓으며 머리를 좀더 깊이 숙이고 절을 한다. (30도 정도)
다. 여자가 한복을 입었을 경우의 큰절(眞禮)
한복진례(여)-1
한복진례(여)-2
① 오른쪽 무릎을 세워서 앉는다. ②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옆에 놓으며 머리를 깊이 숙이고 정중히 절을 한다. (45도 정도)
라. 여자가 한복을 입었을 경우의 매우 큰절(拜禮)
한복배례(여)-1
한복배례(여)-2
① 평자세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얹고 두 발바닥을 모으고 매우 깊게 절을 한다. (단, 상례 때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얹고 매우 깊게 절을 한다.)
② 양장 가. 여자가 한복이외의 옷을 입었을 경우의 작은절(草隷)
양장초례(여)-1
양장초례(여)-2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 발위로 오게 한다. ③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쪽에 모으고 가볍게 머리를 숙인다. (15도 정도)
나. 여자가 한복이외의 옷을 입었을 경우의 평절(行禮)
양장행례(여)-1
양장행례(여)-2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 발위로 오게 한다. ③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쪽에 모으고 머리를 좀더 깊숙이 숙여 절한다. (30도 정도)
다. 여자가 한복이외의 옷을 입었을 경우의 큰절(眞禮)
양장진례(여)-1
양장진례(여)-2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 발위로 오게 한다. ③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옆에 놓으며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정중한 절을 한다. (45도 정도)
라. 여자가 한복이외의 옷을 입었을 경우의 큰절(拜禮) ①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앉았을 때는 오른쪽 발이 왼쪽 발위로 오게 한다. ③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쪽에 모으고 머리를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의 깊숙한 절을 한다. (5)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행례(평절) 및 진례(큰절)의 형태 4가지 ① 一膝屈而拜(일슬굴이배) : 女人의 경우 한쪽 무릎을 굽히고(꿇고) 절함. ② 兩膝皆屈而拜(양슬개굴이배) : 두 무릎을 다 꿇고 절함. ③ 二膝皆屈疊而半坐向拜(이슬개굴첩이반좌향배) : 女人의 경우 한쪽 다리를 겹쳐서 반쯤 坐向 하여 꿇어 앉아서 하는 절. ④ 平坐開兩脚而拜(평좌개양각이배) : 平坐하면서 두 무릎을 벌려 공수(空水)하는 절
聞韶儒脈 八吾軒 金聲久 公 충언직간(忠言直諫)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애친경장(愛親敬長)하는 윤리(倫理), 도덕(道德)을 생명처럼 지키면서 살아온 우리 義城金門의 조상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드물게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심오(深奧)하며 충효(忠孝)사상(思想)이 우뚝한 명현이 있으니 바로 팔오헌(八吾軒)공이다. 공의 휘(諱)는 성구(聲久)이고 자(字)는 덕휴(德休)이며 팔오헌은 호(號)이다. 시조(始祖)는 신라경순왕(敬順王)의 제4자 휘(諱) 석(錫)이고 9세를 내려와 고려 태자첨사(太子詹事) 휘(諱) 용비(龍庇)는 중시조(中始祖)이니 고려조에 많은 공덕을 쌓아 추성보절공신(推誠保節功臣)으로 義城君에 봉해졌다. 첨사공의 현손(玄孫)인 문절공(文節公: 諱用超)이 11대조로서 조선조 개국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문과(文科)에도 급제하여 전라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문절공의 6대손인 칠봉공(七峯公)이 공의 5대조인데 휘(諱)는 희삼(希參)이고 자(字)는 사로(師魯)이며 호(號)가 칠봉(七峯)이다. 칠봉공은 中宗 35년(1540)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明宗 8年(1553)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6년간 재임한 뒤 庚午年(1560)에 향년(享年)54세로 卒하였다. 후일 중자(仲子)개암공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계자(季子) 동강공(東岡公)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어 가자(加資)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경연 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추증(追贈)되었다. 高祖父는 칠봉공의 차자인 개암공(開巖公: 諱宇宏)이니 字는 경부(敬夫)이고 호가 개암으로 中宗 19년(1524) 성주(星州)사월(沙月: 思道室)에서 출생하여 19세에 향시(鄕試)에 세 번 합격하고 壬子年(1552)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壬寅年(1542)에 상주의 남양홍씨(南陽洪氏)와 혼인한 뒤 壬戌年(1562) 낙동강 기슭 개구암(開口巖)곁에 별서(別墅)를 짓고 성주로부터 이거 하였다. 明宗 20年(1565) 유생(儒生)들이 요승(妖僧) 보우(普雨) 참소(斬疏)를 스물 두 번 올렸는데 공이 항상 앞장섰으며 그 중에서 다섯 번을 직접 작소(作疏)하였다. 丙寅年(1566)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한 후 대표적인 관직으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병조참의(兵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등을 역임하였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溟 曹植)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써 한 세대(世代)의 사표(師表)로 추앙(推仰)되었다. 증조부(曾祖父)는 퇴계 문인으로 현감(縣監)을 지낸 주봉공(柱峯公: 諱 得可)이고 祖父는 진사(進士)로 수 첨추(壽 僉樞)증 좌승지(贈 左承旨)인 천유당공(天有堂公: 諱 瑮)이다. 父親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門人이며 仁祖 庚午에 生員으로 수첨추(壽僉樞)와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인 학정공(鶴汀公: 諱 秋吉)이다. 八吾軒 공은 학정공과 정부인 전주류씨(貞夫人全州柳氏) 사이에서 仁祖 19년 辛巳(1641)에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단중(端重)하여 잡기(雜技)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글을 배울 나이에 이르러서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굳이 공부하라고 번거로위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면려(勉勵)하였다. 열살 남짓하여 이미 글 짓는 법을 알고 부자현어요순론(夫子賢於堯舜論)을 지어 주위에서 모두 감탄하며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후로 문사(文詞)가 날로 진보하여 약관(弱冠: 20세)때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스물 두살 때 태학(太學:성균관)에 나아갔으며 29歲 때인 己酉年(1669)에 대과(大科)인 명경과(明經科) 제3인으로 급제하여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이 되고 금오랑(金吾郞: 義禁府都事)으로 전임되었다가 국자(國子:성균관) 전적(典籍)에 올랐다. 이 보다 2년 전인 顯宗8년(1667)에 종장(宗丈)인 갈천공(葛川公: 諱 빈)과 불구당공(不求堂公:諱 迬) 지촌공(芝村公: 諱 邦杰) 금옹(錦翁: 諱 學培)등 제공(諸公)과 문소김씨 족계(聞韶金氏族稧)를 조직하여 일가간 친목을 도모하는 일에도 열성을 쏟았다. 이때 계원 명단과 계헌(稧憲)도 제정하였고 미수 허목(眉叟 許穆)과 불구당공(不求堂公), 팔오헌공(八吾軒公)의 족계서문(序文)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우리 義城金氏 宗親會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숭조돈목(崇祖敦睦)의 도리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현종(顯宗) 12年(1671) 서른 한 살 때 내직(內職)에서 외직(外職)인 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전임되어 현민들을 어루만지고 아전들을 다스림에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었다. 고을에 간사한 아전이 있어 그의 잘못을 바로 잡은 일이 있었는데 마침 어사(御使)가 고을을 지나다가 그 아전의 말만 듣고 그대로 장계(狀啓)를 올려 公이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다. 늦게서야 어사가 그 아전에게 속은 것을 알고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현종 14년 癸丑(1673)에 형조원외랑(刑曹員外郞)으로 서용(敍用:파면후 복직) 되었으며 춘추관(春秋館)에서의 여러 관직도 거쳤다. 그 이듬해 정랑(正郞)이 되어 문서를 상세하고 신속하게 기록하고 결재를 정밀하고 마땅하게 올리니 당상관들이 진심으로 믿고 인정하였다. 현종임금이 승하(昇遐)하자 야로소(冶爐所) 랑청(郞廳)으로 건원릉(建元陵: 太祖陵)에서 일을 보았고 조정으로 돌아와 국자직강(國子直講)이 되었다. 숙종 元年 乙卯(1675)에 기성원외랑(騎省員外郞: 兵曹佐郞)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배명(拜命)받았다. 다음해 거창현감(居昌縣監)이 되어서도 그 치적이 무안(務安)에서와 같았으며 정사(政事)를 보는 틈틈이 학정(學政)에도 뜻을 두고 면학(勉學)을 진작(振作)시키는 일에도 매진(邁進)하였다. 그후 1년이나 지나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곧 사의(辭意)를 표(表)하고 물러났다. 숙종 4년 戊午(1678)에 다시 수찬(修撰)으로 부임하였는데 가뭄이 극심한 때였다. 主上께서 가뭄대책을 하문(下問)하심에 차(箚)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재앙을 만나 수양하고 반성함이 지극하며 또한 시행하고 조치하심에 큰 잘못이 없는데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에 없던 가뭄이 계속되는 것은 혹 소격(昭格:詩經에 나오는 말로 원래 신령이 밝게 강림한다는 뜻인데 나아가 神의 강림을 비는 제사까지 뜻하는 말)의 도(道)가 천심(天心)에 부응하지 못 하여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하고 先人들이 이르기를 “天心에 부응하는 것은 실상으로 하고 꾸밈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제사를 올리고 죄인을 풀어주며 거처를 옮기고 음식을 줄이는 것은 꾸밈이요, 공경하고 삼가 두려워하여 몸소 정성을 다해 행실을 닦는 것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늘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조심하여 본원(本源)의 바탕을 맑고 밝게 하시어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돌리고 스스로를 꾸짖기를 성탕(成湯:殷나라 湯王)과 같이 하시고 근심하여 애통해 하시기를 周나라 선왕(宣王)같이 하신다면 하늘이 감동하여 노여움을 풀고 재앙을 없게 하여 상서(祥瑞)로움이 있게 할 것입니다.”하였다. 또한 “궁궐내의 경비절약과 장리(贓吏:도둑질하는 관리)를 엄벌하고 수령(守令)을 잘 가려서 뽑고 각 고을에서 올라오는 백성들의 공납을 줄여 주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편당(偏黨)의 제거와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실정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라는 요즈음 우리들에게도 절실하게 와 닿는 간곡(懇曲)한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하여 主上이 극찬(極讚)하면서 내린 비답(批答)이 “정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정(情)이 넘쳐난다. 내가 가상히 생각하고 유념하여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한편 미수(眉叟)공이 오랫동안 연천(璉川)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정으로 들어오라는 교지(敎旨)는 내리지 않고 녹봉만 내려보내라는 하교(下敎)만 있어 공이 주강(晝講)에서 “어진이를 쓰는데는 마땅히 정성과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이지 헛된 꾸밈만 숭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고 아뢰니 주상께서 기꺼이 받아들여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해 여름 主上께 글을 올려 부모님을 찾아 뵐 수 있는 윤허를 받고 떠나기에 앞서 임금의 덕과 시속의 폐습에 대하여 간청(諫請)하기를 “王道는 사사로운 마음을 없애는데 있으니 서경(書經)에서 무편무당(無偏無黨)이면 왕도탕탕(王道湯湯)이라고 하였으며 大學에서는 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고 하였으니 그 말의 뜻을 깊이 유념하시기 바라며 또한 전하께서는 先王들의 고사(古事)를 본받아 신하들과 자주경사(經史)를 토론하시고 치도(治道)를 강론하신다면 총명하심이 날로 넓어지고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 태평성세의 바탕이 갖추어질 것입니다.”......(中略)하였다. 이에 主上께서는 비답(批答)을 내려 크게 칭찬하시고 가을에 부수찬(副修撰)과 정언(正言)에 잇따라 배명(拜命)하였으며 이어 수찬(修撰)과 장령(掌令)에 배명하였으나 부임치는 않았다. 己未年 (숙종5년 1679)에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정에 들어 갔는데 임금께서 先王의 유지를 따라 기해예론(己亥禮論)을 바로 잡으려 하므로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 반포를 주청하였으나 윤허치 않으므로 公이 동료들과 차(箚)를 올려 공론(公論)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하였으나 임금께서는 끝내 윤허(允許)치 아니 하였다. 기해 예론이란 효종(孝宗)10년(1659) 孝宗의 비(妣) 인선왕후(仁宣王后) 상고(喪故)에 따른 仁祖의 비(妣) 자의대비(玆懿大妣)의 복제(服制)문제에 대하여 남인(南人)인 허목(許穆), 윤선도 등은 당연히 3년제가 옳다고 주장하고 서인(西人)의 영수(領袖)인 송시열(宋時烈)은 서자(庶子)의 예에 따라 기년제(朞年制)가 옳다고 주장하는 시비(是非)가 일어났는데 서인의 주장대로 기년제가 채택되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게된 사건을 말한다. 또한 “백성이 잘 살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못 살것이며 백성이 못살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잘 살것입니까?”하고 “王政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한 정사(政事)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충간(忠諫)은 선인들에 의하여 중간에서 왜곡되어 오히려 정의(㫌義:제주도) 현감으로 좌천(左遷)되었다. 2년 후인 辛酉年(1681)에 임기를 마치고 귀가(歸家)하였는데 정의 현민들이 선정(善政)을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오래 오래 칭송하였다. 계해년(癸亥年1683)에 모친상, 병인년(丙寅年1686)에 부친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侍墓)를 하였고 다음해인 己巳年(1689)에 국자사성(國子司成)에 배명(拜命)되었으나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지금까지 벼슬을 한 것은 연로(年老)한 어버이가 계셨기 때문인데 지금 두분 어버이가 다 돌아가셨으니 아무리 많은 봉록(俸祿)을 받은들 누구를 봉양할 것인가?”하고 칭병(稱病)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헌납(獻納)과 집의(執義)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집의(執義)의 부름을 받았는데 주위에서 모두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므로 드디어 나아가 사은(謝恩)하였고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전임(轉任)되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가 다시 집의(執義)로 돌아왔다. 다시 헌납(獻納),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옮겨지고,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승진 전임되었으나 사임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교리(校理), 집의(執義)를 거쳐 품계가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여주목사를 차례로 지냈다. 숙종16년 庚午(1690) 승정원(承政院)에서 갈천공(葛川公 諱 빈)이 도승지(都承旨)로 있을 때 지촌공(芝村公 諱 邦杰)과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로 함께 재임할 때 “義金三承旨”로 이름을 떨쳤다. 壬申年(1692) 향리로 돌아왔는데 이듬해 홍주목사(洪州牧使),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숙종20年(甲戌 1694)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전임되었으나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閔氏)의 복위(復位)와 관련하여 남인과 서인의 주장이 맞서는 과정에서 남인이 축출되는 갑술옥사(甲戌獄事)사건이 일어나고 뜻 밖에 계자(季子:汝0)의 상(喪)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해촌도인(海村道人)이라 하고 관직에 재임(在任)할 때와 같이 항상 청빈(淸貧)과 진실(眞實)을 생애(生涯)의 지표(指標)로 삼고 여덟가지의 생활수칙(生活守則)을 지어 그것을 자호(自號)로 삼았으니 곧 팔오헌(八吾軒)이다. 즉 경오전(耕吾田: 내 밭을 갈고), 음오천(飮吾泉: 내 샘물을 마시고), 채오령(採吾嶺: 내 산에서 나물을 캐고), 조오천(釣吾川: 내 냇가에서 고기를 낚고), 피오편(披吾編: 내 책을 펴고), 무오현(撫吾絃:내 거문고를 뜯고) 수오현(守吾玄: 내 현묘함을 지키고), 종오년(終吾年: 내 생애를 마치겠노라)이다. 돌아가시기 전 14년간 강호(江湖)에 머무는 동안에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은 한결 같았다. 丁亥年(숙종33년 1707) 2월 침소(寢所)에서 卒하시니 향년(享年)이 67세이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弔問)하였으며 한양과 지방의 연고 있던 관청에서도 조문의 줄이 이어졌다. 4월에 영주(榮州) 영지산(靈之山)아래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11월에 평은(平恩) 고을 뒷산 을좌원(乙坐原)에 정부인 안동권씨(貞夫人安東權氏)와 합폄(合窆)으로 모셨다. 貞夫人安東權氏는 충재(冲齋) 벌(橃)의 현손(玄孫)인 영릉참봉(英陵參奉) 목(霂)의 따님인데 公보다 5년 앞서 향년 63세로 卒하였다. 개암공이 壬戌年(1562)星州沙月에서 尙州로 이거하여 주봉공(柱峯公: 諱得可)대 까지 30여 년 동안 살아오다가 1592년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개암공의 손자인 천유당공(天有堂公: 諱 瑮)이 편모(偏母)를 업고 피난중 우거(寓居)한 곳이 지금의 해저 앞 내성천 건너편 호평(虎坪:범들이)이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난 후 八吾軒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력을 기울이며 자손들을 위한 세거지(世居地)를 물색하던중 숙종 庚辰年(1700) 현재의 海底(바래미)에 자리를 잡게 되니 公이 곧 해저 입향조(海底 入鄕祖)이다. 입향후 구한말(舊韓末)까지 200여 년간 후손들은 公의 유지를 따라 충효정신을 숭상(崇尙)하며 학록서당을 구심점으로 하여 학문연마(學問硏磨)에 전념하였으며 문중(門中)에서는 한양의 성균관 옆에 서숙(書塾)을 마련해 놓고 유망(有望)한 인재들을 유학(遊學)시킨 결과 문과 급제자(文科及第者) 17인, 생진과(生進科) 63인을 배출 시킬 수 있었다. 짧은 기간동안 많은 대소과(大小科) 급제자가 나와 영남사림(嶺南士林)에서도 당당한 명문(名門)으로 알려져 있지만 높은 벼슬이나 재물을 모으는데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참된 선비정신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 지긋지긋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희생자(犧牲者)없이 일문(一門)을 지켜 올 수 있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에는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비록 14분만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敍勳)되지 못했지만 心山先生의 영향을 받아 많은 일가들이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자연부락 단위로는 가장 많은 항일투사를 낳은 마을이다. 公은 卒 후에 부조위(不祧位)로 모셔지고 奉化松內의 백록사(栢麓祠)에서 제향(祭享)하였다. 문집(文集) 7卷이 발간되었는데 5,6권에 남천록이 실려있다. 남천록은 숙종5년 己未(1679)에 지난 1659년에 있었던 기해예론에 대하여 재론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남인과 노론(老論)일파가 대립하다가 공이 정의(㫌義)현감으로 좌천되기까지 조정에서 있었던 사실관계와 정의로 가는 해로(海路), 전설(傳說), 언어(言語), 민속(民俗), 특산물(特産物), 신화(神話), 지리(地理), 지형(地形), 그 외 다양한 사항들을 기행체(紀行体)형식으로 쓴 일기인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자료라 생각되어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參考: 八吾軒行狀 墓碣銘, 朝鮮王朝實錄 從 11代孫 鎭春 삼가 엮음
바래미전통마을의 역사와 개암공파 선조들
(1)해저입향
開巖 金宇(덧말:우)宏(덧말:굉)(1524-1590)은 바래미에서 世居(덧말:세거)하는 의성김씨의 開巖公派 派祖이다. 동생인 文貞公 東岡 金宇顒(1540-1603)과함께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영남학파를 이어 받은 대학자이다.
1566년 문과 급제 후 선조 때 대사성,충청도관찰사등을 지낸 명신이다. 말년에 상주의 낙동강 위쪽 별장을 짓고 開口巖 산수 좋은 경치에 심취하여 읊은 開巖十二曲은 임진왜란 전의 몇 안돼는 한글시로 전해오고 있다.상주의 속수서원에 配享되었다.
손자대인 天有堂 瑮(덧말:율)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모친을 엎고 피난간 곳이 범들이다. 천유당공은 장남인 畏捿庵 秋任과 함께 父子가 안동좌수를 하면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인격자로서 개암공파가 안동지역에 뿌리를 내리도록 기틀을 마련하였다. 長子인 외서암공은 상주로 이주하여 우복 정경세의 문인으로 활동하였고, 二子인 鶴汀 秋吉 또한 우복 문인으로서 안동-봉화지역에서 뿌리를 내렸다. 학정공의 장남인 聲厚는 증 사복시정이며 현손인 豹林 熙稷은 문과 수찬, 葛川 熙周(1760-1830)는 정조 1795년에 문과 후 抄啓文臣으로서 교리 재임시 「영조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형조참판,대사간,병조참판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서 명망이 높았다.갈천공은 만년에 재산의 갈산리에 갈천정을 짓고 후학들의 교육에 힘썻다. 또한 증손인 海觀 建永은 莊祖 典禮時爲 만인소 소수를 하였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건국유공포장을 받았다. 학정공의 二子인 八吾軒 聲久(1641-1707)가 바래미마을의 입향조이다.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였으며 수찬 재임 시 숙종에게 宮家折受의 폐혜와 경비절약 및 贓吏를 엄벌하고 군왕이 성덕을 닦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는등 좌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등을 역임한 명신이다.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의 득세 시 장남인 汝鍵이 명천에 유배를 당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스스로 海村道人이라 하고 학문과 덕행을 닦으며 후손을 위하여 바래미마을로 이거하여 英正時代를 거치는 동안에 바래미金門이 전성기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팔오헌공의 맏인 汝鍵은 갈암 이현일의 문인으로 문과 수찬으로 정언 재직 시 세자책봉 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영돈영부사 조사석을 탄핵하여 귀향 보냈다. 둘째 望道 汝鎔은 생원, 셋째 拙庵 汝鏜은 진사 증 이조참의, 넷째는 汝鈵이다. 팔오헌공은 후에 봉화 송내의 백록리사에 祭享되었다.
학정공의 三子인 聲裕는 진사로 퇴계의 심경질의에 대한 송시열을 비판하는 상소, 아들인 汝凌은 생원으로 김장생을 비판하는 상소로 父子가 소두를 하였다.
(2)서원훼철과 영남만인소 및 독립운동
松窩 景沈은 문과 후 정자를 지냈으며 1728년에 이인좌 난이 일어났을 때 의병대장 류승현을 도와 의병 활동을 하였다. 영조14년(1738년)에 노론이 영남 남인을 제압하기 위하여 영남인을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안동에 이율곡,김상헌등을 제향하는 학동서원을 건립할 때 松庵 景瀗은 많은 선비들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손수 밧줄을 걸어 서원을 훼철하여 바래미金門의 기개를 크게 떨쳤다. 노론 세력이 대부분인 조정은 송암공을 역적으로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암행어사로 유명한 소론 영수 병조판서 박문수가 구제하여 전라도 무안으로 귀향을 갔다.
丹砂 景溫은 건원능참봉이고 외손자가 퇴계 이황의 정통학맥을 이어온 손재 남한조이며 학덕이 높아 후손들이 단사정을 지어 추모하고 있다. 臥隱 翰東은 문과 후 좌승지,대사간,전라도관찰사등을 지냈고 정조가 당시 영의정이던 번암 채제공에게「지금 영남인물로서 누가 제일이냐?」고 하문했을 때 번암공이 와은공을 지목하였다. 와은공은 海隱 熙成(문과,지평,삼계서원 원장),海窩 熙澤(청하현감),葛川 熙周등과 함께 교리 재임시 정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회복을 위한 10,057명이 서명한 영남만인소(1792년,5월)를 올리는데 삼계서원에서 발의를 하고 소를 올리는데 주도하였다.
이때가 바래미金門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영남지역의 명문가 반열로 당당히 올려놓았다.
해와공의 증손인 惺寰 祖永도 1881년 고종18년에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대한 영남만인소(10,432명이 서명)로 1차 소수 이만손이 귀향을 가자 2차 소수로 활동하였고 안변부에 유배를 당하였다. 1792년(정조16년,3월)에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별시문과에서 유생 7,200여명 중 바래미의 寔軒 熙洛이 장원급제하였다. 식헌공은 참판공 熙周와 함께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抄啓文臣으로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정조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식헌공의 종손자인 鶴浦 禹銖도 문과 후 예조참의를 지냈다.
晩海 建銖는 문과급제 후 김해부사, 우부승지등을 역임했으며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등을 상주하였다. 魯園 喆銖도 성균관진사일 때 서원철폐를 반대하여 유건을 벗어 던지고 낙향하였다.
下岡 護林은 성주의 동강공의 宗家로 출계하였다. 하강공의 아들 心山 昌淑은 성주에서 성장했지만 실질적인 혈족인 바래미를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활동 하였다.심산공은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성균관대 창립초대총장등을 지냈으며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바래미金門은 숙종시대부터 해방전후까지 격변기마다 무수한 시련을 겪으면서 조상의 학문적 전통을 꾸준히 계승하면서 올바른 선비의 풍토를 잃지 않고 영남사림의 유력가문으로서 일제강점기때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자연부락단위로 볼 때 숫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문과17장,생진과 70여장,안동좌수 13명,壽職ㆍ蔭職ㆍ贈職 23장,독립유공자 14명등 다수의 관직을 배출한「바래미는 일산대 그늘에 우캐를 못 말린다」라는 신화를 낳은 곳이기도 하며 忠孝로 傳家한 정신과 욕심 없이 살아야 한다는 참된 선비정신으로 후손들 모두가 청빈한 삶을 살았다.
개암공과 팔오헌공을 不祧位로,개암공의 장자 주봉공, 손자 천유당공, 증손자 학정공의 위패를 해저 追遠祠에 모시고 개암공 자손들이 매 년 양력 4월 셋째 일요일을 祭享日로 정하여 받들고 있다.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고귀한 정신을 배워서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후손들의 무거운 책무가 아닐까 한다.
◆ 八吾軒銘
耕吾田 내 밭을 갈고 飮吾泉 내 샘물을 마시고 採吾顚 내 산에서 나물 캐고 釣吾川 내에서 고기를 낚고 披吾編 내 책을 펴내고 撫吾絃 내 거문고를 뜯고 守吾玄 내 현묘함을 지키고 終吾年 내 생애를 마치겠노라
◆ 海底八景
鶴頂歸雲(학정귀운) 학정봉으로 돌아가는 구름모양 乙江漁火(을강어화) 을자강(앞내)에서 고기잡이 하는 불 松郊露月(송교노월) 솔거리에서 이슬 머금은 달 延壽暮雨(연수모우) 연수봉에서 저녁 무렵의 비 鰲峰樵笛(오봉초적) 오봉에서 나무하는 목동의 피리소리 龍虎秋水(용호추수) 용호동천의 가을 물 鰲巖垂釣(오암수조) 자라바위에서의 낚시 놀이 霽村落照(제촌낙조) 개다박골의 저녁노을
송암공과 암행어사 박문수
박문수(1691~1756) 암행어사
송암 김경헌 (1690~1744) 사마시(진사)합격, 성균관에서 수학
1727년 9월에 송암공이 범들이에서 하인들과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솔밭(해저솔밭)에서 거지행색의 범상치 않은 사람이 속세 오제기를 베고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수상히 여겨 발로 속세 오제기를 탁하고 차니 거기에서 쇠 조각이 튀어나와 예사물건이 아닌 듯 싶어서 보니 마패가 나왔다.
송암공은 큰도둑놈 인 줄 알고 마패를 주머니에 넣고 하인에게 거지를 광에다 가두라고 하였다. 광에 갇힌 거지가 소리를 지르면서 “이놈들 내가 어사다.” “박문수 어사다.”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를 쳤다. 하인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하였다. 하인이 송암공의 중형께 사뢰었다. “거지가 어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하여서 광에 가서 너는 누구냐고 물으니 “내가 어사박문수입니다.”라고 하였다.
중형께서 나라 국(國) 문자를 써서 던지니
박문수가 노론의 계보 및 나라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이에 중형이 하인들을 시켜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혀 대청으로 들게 하고
주안상을 차려놓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박문수가 마패를 잃어 버렸으니 찾아 주시면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했다.
중형이 하인을 시켜 50리 안팎의 20살~48살 사람들을 전부 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마패는 찾을 수 없었고, 송암공이 여러 차례 주변을 왔다 갔다 하니
중형께서 송암공을 불러 이렇게 생긴 물건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니 “주머니에 든 마패를 꺼내 들며 아 이거요”하니 박어사가 버선발로 쫒아 뛰어 내려와 ”예 맞습니다.마패가 맞습니다“하며 손을 내 미니 송암공이 준엄하게 꾸짖으며 ”네 이놈 성상의 명을 받고 온 놈이 누추한 곳에서 자다가 마패를 잃어 버렸으니 대역죄를 지은 죄인 아니냐?”하면서 마패를 오줌 분지에 던져버렸다.
이에 박문수가 백배사죄를 하고 “앞으로 백년지기 할 좋은 인연이니 잊지 않겠다 하고.
그리고 박문수는 중형에게 올 가을에 과거가 있으니 한양으로 보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봉성에 있는 역촌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 후에 서울 과거에는 보복이 두려워 응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 박문수와 송암공이 조부 팔오헌에 대한 얘기와 부친 수찬공이 조사석의 탄핵으로 인하여 명천으로 귀향 갔다 돌아 가셨다는 얘기를 소상히 하였다고 함)
박문수가 조정에서 영조임금과 대화 도중에 안동부 해저에 암행을 갔을 때 송암공과의 일화를 얘기를 하니 영조가 앞으로 나라에 크게 쓸 인재라고 이야기를 하였다고 전함.
많은 일화 중에서 송암공이 덕우에서 오다가 도깨비를 만났는데 도깨비가 “어디를 가느냐” 묻자 송암공이 “네 이놈”하고 눈을 부릅뜨자 도깨비가 퉁하고 넘어져 도깨비를 들고 집에 돌아오니 방아고 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며느리가 처음 시집와서 송암공에게 아버님은 왜 항상 눈을 감으시고 계시냐고 하니 공께서 눈을 뜨면 큰일 난다고 하여 며느리가 아버님 눈을 한번 떠 보세요 하여서 눈을 뜨니 며느리가 그 눈을 보고 기절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어느 날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호랑이와 눈을 마주 쳤는데
송암공이 눈을 부라리며 “네 이놈” 한마디에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동 학동 서원 훼철을 한후 안동부 감옥에서 부사 어유룡에게 내 아들을 불러다오 해서
삼형제중 맏아들(서동)에게는 너는 집을 보전하고 둘째 아들(호동)에게는 대구에 가서 경상감사 유척기 어미의 간을 꺼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셋째아들 (범동)에게는 이의 뒷수습을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겁을 먹은 안동부사 어유룡은 한양에 알렸으나 중신회의에서 임금이 유척기와 어유룡을 파직시켰다.
이때 병조판서 박문수가 송암공을 변호 하였고 본인도 풍덕군수로 좌천되었다.
(승정원 일기, 영조실록, 동덕여대 교수 정만조 논문 참고)
안동 학동서원 철폐 사건이 끝나고 (영조 17년) 영조가 왕권의 위협을 느껴 잠을 자지 못하던 어느 날 영조의 꿈에 송암공이 나타나 눈을 부릅뜨며 “이놈 네가 진짜 임금이냐 너의 성은 김가가 아니냐.”라고 호통을 치니 영조가 생똥을 쌌다고 하며 이로 인하여 석달동안 아팠다고 박문수가 전해 주었다.
이는 서파공 경철이 송암공이 안동부에 붙들려 갔을 때 구명 운동을 하면서 박문수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송암공 집안에서의 비밀히 전해 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학동서원사건 이후 영조가 박문수를 불러 노론과 남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여 영조 17년 탕평책이 공포되었다. (이때에 탕평채라는 이름은 박어사가 해저에 왔을때 먹었던 음식이 돼지고기, 메밀묵 또는 녹두묵으로 만든 음식이 나와 명명되었다.)
송암공 10대손인 용하씨는 송암공 이야기는 집안에 벼슬이 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어 위와 같은 많은 일화들이 묻혀버렸다고 한다.
영조의 특명으로 송암공을 감시하기 위하여 해저 봉우리 마다 기찰포교를 배치하고 돌아가신 후에 철수 하였다고 함.(이때부터 해저에서는 윳말,윳판이 없는 윳놀이가 전래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조 17년에 전국의 서원 170여곳을 철폐령을 내렸다.
松庵公 사업제안서
1. 사업 개요 및 목적
우리는 왜 松庵公을 조명해야 하는가?
어사 박문수를 아는가? 그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나 어사 박문수를 벌벌 떨게 했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
어사 박문수를 비롯하여 현재 알려진 유명 인물들의 숨은 조력자이자 사실상
공로자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단지 한 문중의 어르신
정도로만 알려진 인물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그리고 훗날
후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이러한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여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고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 수 있다.
향후 테마파크 조성이나 국가 문화적 자산으로 승화시키는 것 을 목적으로 한다.
2. 인물 소개
공의 휘는 경헌(景瀗)이고 자는 유징(幼澄)이며 호는 송암(松庵)이다.
공은 평생 유학을 근본으로 중하게 여겨 의기와 어조가 격앙되고 정기가 충만하니
동료선배들이 모두 크게 경모 하였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을 부도의 고장으로 여기고 장차 이를 강압할 목적으로
청음 김상헌을 제향하는 서원(학동서원)을 영남에 세우자, 영남의 수많은 선비들이 분개하였으나 화를 입을까 하여 어찌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때 향교의 교임으로 있으면서 그 부당함을 임금에게 상주하고 명이 있기 전에 앞장서서 서원을 훼철하였다.
이로 인해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영성부원군 박문수가 힘껏 구하여
평안도 양덕으로 유배되었다.
3. 사업 구상 방안 제시
송암공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하나의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사례는 국내를 비롯한 해외의 여러 나라에서 이미 많이 시행하고 있으며
좋은 수입과 홍보로 이어져 지역 사회는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육성되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의 경우 영국에서는 해리포터와 관련한 이야기를 테마로 테마파크 조성.
한 해에 수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고 있으며, 국내의 경우 각 지역에서
그 지역의 인물의 생가나 문학작품의 태생지를 조사하고 발굴하여 하나의 관광
사업 또는 상품으로 개발, 육성한 사례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가수 김광석 거리 조성(대구시), 박정희 생가(구미시)등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송암공과 관련된
1)향교설립과 서당교육
2)향사와 도록 및 해저전통제사에 대한 교육
3)登科선조에대한 솟대等의 전통문화 재현
4)탕평채와 같은 봉화음식을 재현한 전통음식시장조성
5)해저전통윷놀이(無윷판)등 놀이문화조성
6)마패와 암행어사와 관련된 조형물과 놀이마당
7)松庵公과 관련된 이야기로 역사서적출판,만화사업을 통한 문화관광산업유치.
8)드라마 제작등의 미디어 산업 개발(松庵公과 박어사사건,-법성일기,무오일기)
9)해저-닭실-워낭소리-수목원-청량산연계 theme관광
10)디딜방아 재현
*1700년경 바래미 입향후 200년 동안 대과16장과 진사19분 생원44분의 소과63장 나와 그때마다 세운 솟대가 솔거리에 빼곡하여 바래미에는 솟대그늘에 우케를 못 말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고 또 안동좌수13분 독립유공수훈자 14분이 나왔다.
외 바래미의 문소세고등 이미 정리된부분은 많으나 해석되거나 하는 부분들이 추가됨이 필요함
외에도 가사를 읊조리던 안으로의 역사도 정리하고
선행과 행적들을 제대로 정리하여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워낙에 많은 서책들을 분실했으나 우리가 보유한 것들이라도 간찰이라도 한군데로 모아서
중요한 것들은 중요한 콘텐츠인데 국학진흥원에 맏기더라도 중요한 부분들은 복사를 해서도 갖추어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합니다
그리고 우리집고서적은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으나 새로운 서책 각문중이 발간한 서책 대산집10권등 집에서 150000원에 매입한 서적등
이러한 것이 약1000권인데 이와 조화를 이루면서 (사실 공부하고 연구하기에는 더 좋지 않을까함
안동 국학진흥원에 가서 일반인들이 열람하고 공부하는 것은 어럽지요
(바래미와 독립운동사 연구자료와 연구소공간을 만들어야 할듯) 복사자료와 고서가 아닌 새로이 발간된 책들
봉화에 있는 것들을 기증의 형태로 한군데로 모아서 도서관 역활
(봉화군청도 이제 협소하니 유관부서를 해저에 유치해서 유관서적을 기증해서 관리토록함)
그리고 각문중에 나타난 해저인들의 시와 행적들을 가져와서 살려야할 것입니다
사례 소수서원지에 노원과 김홍기의 벗들(주로 항일운동이 많아)이 읊은 시 이런 것도 찿아야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글들입니다 우리는 남의 것만 좋은 줄 알지 자기가 가진 보물들을 알아보지 못해 그냥 묻혀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발굴하여 책으로만 발간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한번 읊어보고 지어보고하는 것들이 의미있지 않을까
소수서원지에 노원철수
p544
백운동
소백산 한가한 구름 중천엔 갠달
무릉선생 애당초 만산앞에 열었네
녹음 짙어지고 꽃은져 봄이 또 지나가도
백운동은 천년세월 변함이 없에
이수응(명춘) 김순도(창순) 김홍기(순우) 벗들과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백운동에 머무름
p557
물과 달 시원하고 원우 우뚝한 곳
십년만에 찿으니 감회 새롭네
백운동 구름 속에 경자바위 여전하고
뜰안 풀에는 문 밖의 향기 들려오네
세상은 짓밟혀서 풍우속에 어둡고***소백산27명 권명섭에게 소수서원에 맞겨둠(권명섭은 닭실 독립운동
유자는 쇠잔하여 백발만 성성한데
죽계 마르지 앟고 연화봉 고고하여
p562 강순오 김순도(바래미 독립운동가) 중두순우 홍기와 더불어 운자내에 읊음
죽계 시원한 물소리 서원에 가득하고 초목 돌아보니 참된 빛을 입었네
현가는 갑짜기 천년의 가락이 끊어졌어도
변두는 여전히 백세의 향기 품어오네
옛날분 보이지 않고 구름만 아득하여
홀로 밝은 달빛 아래서 슬퍼하였에
지금 세상 비바람 몰아치는 때***************홍자기자 교우들의 간찰과 시는 이런 구절들이 많아
백발에 서로만나니 뜻이 깊어라
587퇴계선생 시에 차운(노원 철수
연화봉푸르고 흰구름 이는 곳
주계구곡 찬시내 층층깊이 들어가네
옛날부터 동방은 예악을 숭상하여
지금까지 영남선비 안자.증자를 배운다네
거울 같은 연못에는 물고기 활발하게 놀고
절벽 높은 산등성이에는 봉황 날아 오르네
천년 갠달은 끝없이 밝아
봉래산 그바닥까지 훤히 비추네
경자바위 김철수
당시에 불교숭상 실로 비통한 일
유언비어 일으켜 세상을 속였는데 경자 한 글자 씀에 만고를 깨우치니
푸른 하늘 밝은 태양 아래 돌은 의심할 것이 없네
퇴계시에 차운함
취한대
죽계구곡 머리에 암벽 가파르고
퇴도옹 만든데 옛모습 그대로네
고운 나무 봄 풍광 속 저녁비 걷히고
경렴정 달빛찬 이내 씻어가네
동방의 예악 지금 어디에 있던가
남국의 현가 홀로 보전하였네
경자 하나로 만세를 일깨워
사람마다 성인과 현인을 희구하네
814 추사가 권이제 돈인에게 명월루 현판의 주인인 영상을 한 이제 권돈인은 닭실인으로 서출신이라서 닭실에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함 영삼임에도
노원 철자 수자(남호고택)소수서원 무실 명월루와 제문 시문외에도 많은 곳에서 등장함
많은 활동이 이루어진듯(제문에도 알아주는 ) 노원의 시는 그냥 밝고 경쾌하고 물흘러가듯이다 한데 홍기와벗27분들의 시는 풍진과 어두운 그림자를 한구절씩 섞어서 그시대의 한들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바래미가의 젊은이들의 투쟁과 고문으로 원혼등의 표현이 많이나와
현재 역사쓰기는 이미 많은 자료들이 수집되었기에(인터넷등으로 이를 활용하면서 남은 간찰과 문서들을 한테 모아서 국학진흥원으로 보내서 해석 받고
보내서 해석받고 역사 쓰기 자료로도 활용하고 우리문중의 서책들을 통합나여 누구나 볼수있게 해저 코너를 만드는 것 의미
있지 않을까합니다
일차 독립운동사 조명이며 이차로 우리역사 쓰기이다 그리고 삼차로는 문화의 복원이다
일이차가 독립운동 이차가 역사만들기 등의 스토리 만들기라면 삼차는 문화복원과 계승 발전이다
유향은 유향소의 약칭으로 흔히 鄕廳으로 불리며, 좌수는 留鄕所의 首長을 말한다.
안동(유향)좌수:유향소는 토착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는 곳이다.
안동유림의 원로격인 안동좌수가 되기 위해서는 鄕中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고 학식이 높은 집안이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온 고을을 감화시킬 수 있는 인격자라야 했다.
즉 안동에는 골짜기마다 양반들이 즐비한데 유향좌수는 그 양반들의 대표로 뽑히는 것이어서 벼슬보다 더한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또한 행실이 바른 사람을 座首를 도와 일을 보는 座首 다음가는 별감(別監) 三人을 뽑았다 한다.
1)바래미의 탄생을 주로 선거사등으로 얘기하는데 팔오헌 상주에서 범두리로 전란을 피해온 시기
닭실에서는 사위를 얻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전해짐
( 닭실 권벌 집에 나이가차서 시집 못간 딸이 있었다 나이가차도 못가니 안방마님 성화가 대단해서 성화에 못이겨서 그러면 사위를 구해오리다고
나갔답니다 그리고 범두리를 지나다가 터부룩한 지게를 지고오는 허수룩한 차림의 총각을 보았는데 눈이 빛났답니다
그당시 권벌가는 대단한 위세를 자랑함
그래서 낙점하고 집에 들렸더니 노파(팔오헌공의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서 아무 죄지은 것 없다고 했답니다
집안으로 들어가 방문한 목적을 얘기하고 사위로 달라하여
중략(닭실에서는 안방마님 그런데를 사위로 골랐다며 난리법석)
사위가 당도하고
마침내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권벌께서 팔오헌공을 보면서 재물을 제안했다고합니다
그당시 팔오헌공께서 정색을 하면서 처가덕을 보려 결혼하는가 그러면 하지 않겠노라 했답니다
이얘기를 듣고 권벌은 크게될 인물임을 느끼고
정식으로 미안함을 표했다고 합니다(굻어않으면서 사과했다고한 듯함)
그후에 나중에 권벌이 팔오헌 고택을 하루만에 지었다고 해서 팔오헌 종택을 일와가라고도 했답니다
순흥 김자인 댁이라면 조선후기<말기에 가까운>에서 왜정 시절 까지엔 만석 부자로
영남에서 알아주는 거부 였다. 그집은 재산으로도 그럴뿐더러 몇 대에 걸쳐
진사 문과에 벼슬이 끊이지 않았고,인심이 또한 후덕하여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순조 무렵엔가 자인현감을 지낸 이가 있어 김자인댁이다.
그 집은 큰 부자인데다가 인심이 또한 푸근하여 항상 손님 대접에 후했기로, 이고장 순흥.
풍기.영주,봉화. 등지의 사람들은 재채기만 나면 <앳췌! 저-순흥 김자인 댁으로 가거라- >
고 했으니 이는 고뿔(감기)귀신을 쫓는 뜻이었는데, 김자인집에를 가야만 가장 푸짐한
대접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자인현감 지낸 김두명이 벼슬에서 물러와 향리 순흥에 있을 무렵이다.
어느날 김자인은 일이 있어 풍기장에를 갔던 길이었다. 늦은 점심때쯤 국수집에 들렀더니
자뭇 험상궃게 생긴 구척장신의 장년 사나이가 앉아 있는데, 구렛나루에 입언저리가 온통
무성한 털숲으로 뒤덮여, 입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나그네는 매우 시장한 기색이
기도 했다.
<저렇게 입이 온통 털 속에 묻혔으니, 저사람은 대체 음식을 어떻게 먹을까. 어디 한번 구경
이나 해봐야지....>. 이래서, 김자인은 <여보슈 나그네, 초면이지만 점심때도 늦었고 하니
내가 국수 한그릇 대접해도 괜찮겠소?> 하고, 특별히 시켜서 널찍한 양재기에다가 대여섯
그릇이나 될 만큼 무둑히 담은 국수상이 들어왔다.
상을 당겨놓은 나그네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또아리를 내어 입언저리에 대어, 수염털을 모두 걷
어 붙이고는 젓가락을 들자, 소담스레 빨아들여, 그 큰 그릇을 비우는데 게눈 감추듯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몇 해 지나서다. 어느날 밤 김자인 집에는 큰 도둑떼가 들었다. 주인 식구들을 모두
행랑방에다 몰아넣고, 문간에 졸개를 세워 지키게 하고, 떼거지들은 장롱이며, 벽장-고방을
샅샅이 뒤져, 짭짤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추려서 자루에 넣어 여러 뭉치로 집을 묶었다.
짐을 진 졸개들을 앞세우고 대문을 나서던 도둑 두목이 우연히 행랑방에 앉아 있는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두목은 잠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방문 앞에 펄썩 엎드렸다.
<나리, 죽을 죄로 잘못되었습니다요!>하고 용서를 빌었다. 주인이 어리둥절하여, 다시 유심
히 본즉 도둑 두목은 여러 해 전 언젠가, 풍기장에서 국수로 알게 되었던 구렛나루의 거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목은 황급히 졸개를 시켜, 저만치 가고 있는 짐꾼 졸개들을 모두 되돌려 세우게 했다.
두목은 짐들을 모두 풀어 고스라니 두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김자인 집에는 큰 도둑은 물론
작은 도둑까지도 얼씬하지 않았다 한다.
도둑사회에도 그만한 인간스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유불문화의 향기가 유구하게 흐르는 순흥2)에는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전통적인 향촌제도가 있었다.3)향촌제도(鄕村制度)는 순흥사회를 보다 밝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였고, 또한 자치조직(自治組織)으로서 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향촌제도(鄕村制度)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 기능이 상실 된지 이미 오래 이고, 지금은 그 형태만이 존속되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향촌제도(鄕村制度)는 우리의 선인(先人)들이 지녔던 생활의 슬기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일면이기도 하다. 비록 그 기능은 상실되었다 하여도 향촌제도(鄕村制度)가 오늘날까지 그 형태나마 있는 것만이라도 전통의 고장 순흥 다운 모습이라 생각된다. 향촌제도(鄕村制度)에는 경로소(敬老所), 향장제도(鄕長制度), 초군청(樵軍廳) 등이 있었다고 한다.4)
경로소(敬老所)5)는 노인정(老人亭)이라 하며,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노인 모임과는 달리, 순흥 특유의 유서 깊은 향촌제도(鄕村制度)이다. 경로소의 장(長)이 소장(所長)이 아니고 국장(局長)이라고 하였는데, 그럴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경로소(敬老所)에는 의료시설인 의국(醫局)이 설치되어 있어, 순흥의 노인들에게 무료로 의약을 베풀어 왔기에 경로소(敬老所)가 그대로 의국(醫局)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향장제도(鄕長制度)는 풍속을 바로 잡고, 향리를 규찰하고, 민정을 대표하는 자치조직으로서 향소(鄕所)라는 기관이 어느 고을에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흥의 향장제도인 향장(鄕長)은 순흥 최고의 원로(元老)로 순흥향교(順興鄕校) 유림에서 추대하였다고 한다. 향장(鄕長)의 자격은 순흥에서 가장 덕망 높은 원로(元老)로서, 순흥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하는 유림단체(儒林團體)7)의 장(長)을 모두 역임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인품과 덕망을 갖추었다 하여도, 유림단체(儒林團體)의 장(長)을 역임한 경력이 없으면 향장후보 물망에도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향장단(鄕長團)8)은 덕망 높은 순흥의 원로(元老)로 향중에서 추앙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순흥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재판권(裁判權)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중대한 범죄는 관(官)에서 처리하였고, 가문의 다툼, 이웃끼리의 분쟁, 고장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윤상(倫常)관계, 재물관계의 시비사건 같은 것은 향장조직에서 조용히 다스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각하여 보면 순흥의 향장제도는 순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자치적으로 처결하는 지방자치조직(地方自治組織)으로 보여 진다.9)
순흥에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초군청(樵軍廳)’이라는 농민자치기구가 있었다. 초군(樵軍)이라 함은 나무꾼, 즉 농가의 막일꾼을 뜻한다. 순흥은 예로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요충지대 이고, 역사적 사건과 명승고적이 많은 지방이며, 순흥도호부(順興都護符)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관아(官衙)의 관원들과 관직(官職)을 마치고 돌아 온 전관(轉官)을 비롯하여 생활이 부유한 세도가(勢道家)들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이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순흥도호부(順興都護符)내의 농민, 서민, 일꾼들까지 인근지역인 안정, 단산 등지의 사람들이 순흥 장(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횡포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이들은 소백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도 산 밑에 있는 주막에서 종일 술 마시고 놀다가 해질 무렵 주인의 승낙도 없이 남의 나뭇가리를 헐어지고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여도 세도(勢道)가 초군(樵軍)의 행패는 순흥부의 부사(府使)도 처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고 한다. 농군(農軍)이라 하더라도 관아(官衙)에서 일하는 관원의 친족이거나 구관, 혹은 세도가들의 일꾼이니 무조건 잡아들이기도 난처하고, 안 잡아들이자니 일반 주민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관가에서는 송사(訟事)가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무렵, 이런 사정을 늘 걱정하고 선도하려고 애쓰던 순흥 토호(土豪) 출신인 김교림(金敎林, 1865∼1938)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학문과 인품이 타의 모범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런 초군(樵軍)들의 뿌리 깊은 악폐(惡弊)를 근절시키고자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초군들의 자치기구인 초군청(樵軍廳)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후 초군(樵軍)들의 악폐(惡弊)는 그들 스스로에 의해 근절되었고, 그들은 산림보호, 도로보수, 수해대책 등에 참여함으로써 고장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실천을 통해 모범을 보였다. 초군청(樵軍廳)은 다른 지방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최초의 농민자치기구(農民自治機構)가 되었다.10)
본 연구에서는 경로소(敬老所), 향장제도(鄕長制度), 초군청(樵軍廳) 등의 향촌제도 중에서 초군청(樵軍廳)과 지방자치(地方自治)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주로 문헌조사에 의존하였다. 문헌의 경우도 매우 희소하여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논의 순서는 머리말에 이어서 초군청의 의의, 초군청의 활동, 초군청과 지방자치의 순서로 하고자 한다.
Ⅱ. 초군청의 의의
1. 초군청의 의미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초군(樵軍)이란 나무꾼을 의미한다.11)생계를 위해 산에 올라가 목재 땔감을 채취하는 나무꾼을 의미하는 것이다.12)즉 농가의 막일꾼을 뜻한다. 초군청(樵軍廳)이란 농사짓고 땔감을 마련하던 민초(民草)들이 자체 질서회복과 권익신장(權益伸張)을 목적으로 결성된 순수한 농민자치의결기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초군청(樵軍廳)은 순흥도호부의 관(官) 조직에 상응하는 직제(職制)를 갖추었다고 한다.13)이들의 임무는 초군들의 잘잘못을 권선징악(勸善懲惡)하여 흥주향약을 실천하였고,14)또한 초군들의 권익보호(權益保護)와 위상정립(位相定立)에 있었다고 한다.15)주요한 행사로는 성하(城下)‧성북(城北) 줄다리기, 초군청 농악풍물놀이, 대동행사16)및 두레17), 두레골(상당) 및 비봉산(본당) 대동성황제 등을 주관하였다고 하였다고 한다.
2. 초군청의 설립배경
초군청(樵軍廳)의 설립배경에 관하여는 두개의 설(說)이 있다.18)조선후기 산림의 사유화로 인한 폐단(弊端)을 시정하기 위하여 초군청(樵軍廳)이 설립되었다는 설(說)과 금성단의 제사를 관(官)에서 민간(民間)으로 넘기기 위하여 초군청(樵軍廳)을 설립하였다는 설(說)이다.
먼저 조선후기 산림의 사유화로 인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초군청(樵軍廳)이 설립되었다는 설(說)에 의하면, 초군(樵軍)은 자가소비 또는 판매를 목적으로 땔감을 마련하는 나무꾼들의 모임으로 조선중기 이후 왕실과 권문세가(權門勢家)에 의한 산림의 사유화(私有化)에 의해서 나타났다. 산림의 사유화는 조선후기 목재의 소비증가에 의하여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사대부(士大夫)와 토호(土豪)에 이르기까지 산지기나 초군(樵軍)을 사유화하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순흥의 초군청(樵軍廳)은 조선후기 산림의 사유화와 그로 인한 폐단(弊端)이 발생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직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순흥은 관할구역의 면적으로 볼 때 소군현(小郡縣)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고려 충렬왕(1236-1308) 이후 충목왕(1337-1348)까지 임금의 태(胎)를 간직함으로써 순흥부로 승격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순흥으로 하여금 지방의 토호세력(土豪勢力)이 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좁은 지역에서 안동 권(權)씨를 비롯한 20여 씨족이 세거(世居)하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 역시 배가 되었다.
토호족(土豪族)들의 하인배나 행랑살이들의 악행(惡行)이 더욱 기승을 부려, 이들은 닷새마다 열리는 순흥 장날이면 장 골목에 어정거리다가, 촌동네 사람들이 곡식이나 닭이라도 파는 것을 알면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 털어 먹기를 예사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 억울함을 겪으면서도 촌마을 사람들에겐 반항할 기력도,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혹 심한 피해로 억울하고 통분함을 참을 길 없어, 관(官)에 고발이나 진정을 하여도, 전혀 시원한 반응이란 없었으니, 토호의 울타리 안은 관(官)의 힘으로도 간여하기가 힘겨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순흥의 억울한 농민들이 아무리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였기에 그저 숙명인양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농민들의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순흥의 토호출신인 김교림(金敎林, 1865∼1938)19)에 의하여 초군청(樵軍廳)을 설치함으로서, 드디어 그 뿌리 깊은 악폐(惡弊)가 시정되었던 것이다.20)
다음으로 금성단의 제사를 관(官)에서 민간(民間)으로 넘기기 위하여 초군청(樵軍廳)을 설립하였다는 설(說)에 의하면, 옛날에 금성단 제사를 관(官)에서 주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일이 잘 안되고 거북해서 민간(民間)에 넘기기 위해서좌상을 뽑고 초군청(樵軍廳)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초군청(樵軍廳)은 두레골 금성대군의 향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립하였다는 것이다. 부 사또 재직하고 있을 때에는 관(官)에서 제사를 올렸는데 두레골이라고 단산면 소백산 밑에 있는 초군청(樵軍廳)을 설립하여 좌상을 세웠다. 김교림(金敎林, 1865∼1938)이 좌상을 선출하여 두레골 성황님을 모시라고 위임을 한 것이다.21)
이 설(說)에 의하면 금성단 제사와 두레골 성황제의 제의주체를 분명히 하고, 제의를 담당하도록 규정하기 위해서 초군청(樵軍廳)을 결성했다는 것으로 풀이 된다. 이는 초군청(樵軍廳)이 단순히 농민들의 권익만을 신장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위상을 제고하는 한편, 지역의 역사‧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조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양 설(說)을 종합하여 보면, 초군청의 설립은 김교림(金敎林)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할 수 있고, 초군청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조선후기 산림의 사유화(私有化)와 그로 인한 폐단(弊端)을 시정하고, 금성단 제사와 두레골 성황제의 제의주체(祭儀主體)를 분명히 하고, 제의(祭儀)를 담당하도록 규정하기 위해서 1900년을 전후하여 초군청(樵軍廳)을 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22)
초군청(樵軍廳)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총독부 산하 관변단체인 계통농회(소농조합)에 흡수된다. 소농조합23)의 성원은 곧 초군청(樵軍廳)의 성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군청(樵軍廳)의 대표였던 좌상(座上)은 초군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역할로 전락하였다. 또한 성황제는 관의 절대적인 지원이 없이는 수행이 어려울 정도로 관에 대한 경제적 예속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24)
Ⅲ. 초군청의 활동
초군청(樵軍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활동에는 농민의 권익신장(權益伸張)과 항일운동(抗日運動)의 흔적을 들 수 있다.25)
1. 농민의 권익신장
먼저 초군청(樵軍廳)은 근대적 지역 농민회(農民會)의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지주계급이나 양반들이 횡포를 부렸는데, 그러한 횡포를 막기 위하여 풋굿 행사를 할 때 절도 있게 하였다고 한다. 풋굿 행사가 발전을 하니 농민들의 단결이 잘 되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두레골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그 중에서 알 만한 사람들이 바른 소리를 하고,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심어주는 이야기를 하여 일본의 입장에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으로 보여 오물을 퍼붓고 모임을 방해하였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김교림(金敎林)은 초군청(樵軍廳)에서 풋굿 행사를 할 때 비용일체를 부담하는 등의 농민활동이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고 한다. 초군청(樵軍廳)의 활동내용은 놀음하지 말고, 치산치수하고, 나무를 할 때도 생나무는 베지 말고, 마른나무를 하게하고, 품값은 얼마로 하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골목청소도 하는 등의 일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농민회 활동을 하는 데 기본지침(基本指針)이 되었다고 사료된다.
다음으로 초군청(樵軍廳)은 양반이나 지주층들의 횡포를 막아줌으로써 농민들의 권익신장(權益伸張)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초군청(樵軍廳)은 조선 말 고종임금 때 토호의 하인과 머슴이 상전의 세력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아 김교림(金敎林)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만든 주민자치·자위조직이다. 민초들이 직접 초군청(樵軍廳)을 운영하며 행패를 부린 머슴에게 태형을 가하고 하인관리를 잘못한 상전에게 벌금형을 내리는 등 악폐(惡弊)를 바로 잡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악폐(惡弊)를 바로잡으니 농민들의 권익이 보호되고 신장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2. 항일운동의 흔적
만석부자로 알려진 김교림가(金敎林家)의 재산이 탕진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심산 김창숙 선생을 통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일제가 고의적으로 파산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창숙 선생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지원된 군자금(軍資金)이 2만원이었다고 한다. 26)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지원된 군자금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동의 학봉종가 종손 김용환이 파락호(破落戶)27)로 위장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한 것이 밝혀진 것이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이런 선례(先例)로 본다면 김교림(金敎林) 또한 음성적으로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한 금액이 상당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다음으로 일제가 고의적으로 파산시키려고 하였던 흔적은 김교림(金敎林)28)의 손자 고(故) 서기의 이야기로 전하여 오고 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교림(金敎林)의 아들 창휘는 기울어지는 가세를 복구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여러 사업을 하였고, 사업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덕에 있는 우금치 금광사업에서는 약간의 이익을 보았지만 창휘의 동생인 창덕이 관리하였기 때문에 창휘에게는 수입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해방 전에 50몇 만원의 재산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창휘가 죽촌식 소화탄 사업에서 실패하였을 당시 5만원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그 5만원을 갑기 위해서 영주에 살고 있던 고리대금업자 김모씨에게 전 재산을 저당하고 사채를 빌렸다고 한다. 그 돈을 갚을 날이 되어서 계동에 살고 있는 고리대금업자 김모씨를 찾아가니, 그날 아침에 급한 볼일이 있어서 내려갔다고 해서 급히 뒤따라 내려가서 그 집을 찾아가니 그날 아침에 서울에 갔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계동을 찾아가니 기일이 지났다고 하였다. 그 후 사채업자는 저당권이 설정된 집을 등기 이전하여 살던 집을 비롯한 모든 재산이 사채업자에게 넘어 갔다고 한다.
사기(詐欺)라고 해서 소송을 내었는데 재판을 맡은 판사가 고리대금업자의 외사촌이어서 패소했다고 한다. 다시 영주경찰서에 고소를 해서 입건되어 고리대금업자가 안동형무소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저당권(抵當權)을 설정했더라도 등기이전을 하자면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하고, 전소유자의 도장도 찍어야 하기 때문에 공문서 위조와 사기(詐欺)로 입건이 되었다 한다. 반을 주겠으니 고소를 취하래 달라, 8할을 주겠으니 취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남의 재산을 가지고 흥정을 하고 있으니 안 된다, 모두 돌려줘야 된다고 싸우던 와중에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정부수립 기념 대사면령을 내리는 바람에 다 된 일이 틀어져 고리대금업자가 안동형무소에서 풀려났다고 한다.29)
위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는 지역민의 구술(口述)에 따르면 일제와 깊이 관여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제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해준 김교림(金敎林) 가문을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교림(金敎林) 가문이 이렇게 파산당하고 말았다면, 김교림(金敎林)이 결성한 초군청(樵軍廳) 또한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가지고 활동했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물론 구체적인 증거(證據)는 더 수집되어야 할 것이지만, 초군들이 바로 일제의 각종 공출, 징용, 관솔따기 등의 노역(勞役)에 동원된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더구난 초군청(樵軍廳)을 결성한 김교림(金敎林)의 아버지가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헌병에 의해 피살된 기억을 하고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초군청(樵軍廳)에서 성황제를 지내려고 할 때 일제가 오물을 퍼부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Ⅳ. 초군청과 지방자치
현대적 의미에서 지방자치(地方自治)란 일정한 지역(地域) 또는 구역(區域)을 바탕으로 한 지방자치단체가 법률에 따라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성(自律性)을 가지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스스로 자치기관(自治機關)을 통하여 자치사무(自治事務)를 자치재원(自治財源)으로써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활동과정이라 할 수 있다.30)지방자치(地方自治)의 개념요소와 초군청(樵軍廳)을 연결하면 초군청이 현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을 구현한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리적 요소인 지역(地域) 또는 구역(區域), 인적 요소인 주민, 법적 요소인 자치권(自治權), 자치기관(自治機關), 자치사무(自治事務), 자치재원(自治財源)을 포함하여 지방자치의 6요소라 한다. 지방자치의 6요소로 초군청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지역 또는 구역
지역(地域) 또는 구역(區域)이란 국가와 그 지배 수단인 정부의 주권 또는 권력이 영토의 모든 범위에 미치는 것처럼, 지방자치단체와 그 지배 수단인 지방정부의 힘이 미치는 지리적 범위를 구역(區域)이라 한다.
초군청(樵軍廳)이 영향력이 미친 범위는 성하(城下)·성북(城北) 줄다리기 행사에서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이기태에 의하면 줄다리기 행사는 위로는 서울까지, 아래로는 안동까지 전부 소달구지에 줄을 싣고 왔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것은 관아(官衙)의 앞에서 줄을 드리고 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시행하였다고 한다.
위와 밑의 구분은 관아(官衙)가 있던 현재 읍내리 중앙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성하(城下)·성북(城北)으로 구분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말하는 성하(城下)는 순흥 남부, 풍기 남부, 안정, 은풍, 노좌를 말하며, 서울까지의 성북(城北)은 단산, 물야, 부석, 봉화, 화전, 문단 지역을 말한다.31)이와 같은 근거에서 초군청(樵軍廳)의 영향력이 미친 범위는 순흥 남부, 풍기 남부, 안정, 은풍, 노좌, 단산, 물야, 부석, 봉화, 화전, 문단지역까지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영주시 보다 더 넓은 행정구역(行政區域)을 관할하였다 사료된다.
2.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주민(住民)과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이다. 주민은 대개 지방자치단체의 구역(區域) 안에 터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란 구역(區域)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지역과 인간의 두 가지 요소를 결합시켜서 영주시와 같이 이름을 정하여 이것에 일정한 법률적 권한(權限)을 부여한 사회적 실체이다. 1789년경에 나온 호구총수의 자료에 의하면 순흥도호부(順興都護符)의 인구는 13개면, 91개 리에 11,597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순흥도호부(順興都護符)의 복설이후 100여년이 지나서는 10,000 여명이 살았다고 한다.32)초군청은 농민자치단체이다.
3. 자치권
자치권(自治權)이란 어떤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일정한 범위의 권한(權限)을 가리킨다. 초군청(樵軍廳)이란 조직의 기구·기능이며 그 인적 구성이 어떠했던가는 알 길이 없으나, 「초군청 좌상○○○」라는 서명에 그 도장이 찍힌 문서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였고, 초군청 좌상의 직인은 순흥 고을 안에서는 거의 순흥부사의 직인에 맞먹을 만한 효력이 인정되었고, 적어도 그들 세계에 있어서 초군청(樵軍廳)의 좌상은 순흥부사와 대등한 위세(威勢)를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33)
권력(權力)이란 속성은 견제되지 않으면 부패(腐敗)된다는 것은 정치학에서 기초적인 이론이다. 초군청(樵軍廳)이 설립되기 전에 토호족(土豪族)과 노비들의 악폐(惡弊)를 근절할 수 없었던 것도 그들을 견제할 제도가 없었던 것에 있다고 사료된다. 초군청(樵軍廳)이 설립되고 초군청(樵軍廳)의 좌상이 순흥부사와 대등한 위세(威勢)를 가졌다는 것은 초군청의 좌상(座上)이 순흥부와 토호족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순흥부사와 토호족의 독선과 부정부패를 예방하였다 사료된다.
4. 자치기관
자치기관(自治機關)이란 지역주민들이 독자적으로 그들이 바라는 일을 하려고 할지라도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기 힘들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이 바라는 바를 표현하고 실현할 수단을 필요로 하는 바, 이것이 자치기관(自治機關)이다.
초군청에는 초군(樵軍)들이 항상 모여서 일할 수 있는 청사(廳事)도 마련되었다고 한다.34)초군청의 조직은 우두머리를 좌상(座上)이라 하고, 농군들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자격은 규정이 없으나 인격과 덕망이 있어야 하고, 연령적으로도 많은 경륜이 있어야 한다. 좌상(座上)의 선출은 음력 정월 16일이 정일이며, 여기에 당선되면 농군(農軍)으로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였다.35)임기는 1년이고 유임도 가능하다. 초군청 인장과 초군청 관계문서를 인수인계하며, 좌수의 권한은 그들 세계에 있어서는 부사와 똑같은 권한과 행사를 집행한다.
지금도 순흥에서는 좌상(座上)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순흥 초군청 인장과 관계문서를 보관하고 좌상의 명의로 문서를 발송할 때는 순흥초군청좌상 OOO하고 청인(廳印)을 찍고 있다. 좌상 밑에 이방(吏房)을 위시한 육방(六房)이 있고, 늙은 총각으로서 귀땅머리를 따는 총각대방, 좌수를 수행하는 비장(裨將)등 지방행정관청(地方行政官廳)과 똑같은 제도이다. 농군들 중에 잘못된 자가 있으면 출두명령서에서 좌상인장을 찍어 초군청(樵軍廳)에 불러 형방(刑房)이 문초하고 형의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순흥 장날 장똘뱅이들이 농민의 물건을 강압적으로 빼앗거나 시세(市勢)를 약하게 놓아서 고발되면 엄중한 벌을 받는다. 그들의 세계에서 부여 받은 권한으로서 불문율이다. 무서운 조직체였다. 초군청(樵軍廳)의 조직과 기구도 민주적이기도 하지만 하는 일도 상당히 근대화되어 있다 사료된다.
5. 자치사무
자치사무(自治事務)란 지방자치를 통하여 주민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일들을 의미한다. 초군청(樵軍廳)에서 시행하였던 일들은 자치사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초군청(樵軍廳)에서 시행하였던 일들을 살펴보면, 좌상의 선출 및 임원의 임무수행, 초군(농군)의 행동억제, 민폐근절, 두래골 성황당 고사(주신 금성대군), 집행, 유사선출 음력 정월 15일 밤, 소백산 풀깎기, 길보수(도로보수), 초연(超宴) 개최 및 초군놀이, 산림관리, 도벌방지, 난벌방지, 머슴꾼들의 임금 및 농사철 임금 결정, 흉사(凶事)와 길사(吉事) 등에 필요한 인원배치36), 순흥부 관내 좌수를 선출, 후손이 없는 무연고 분묘 1년 1회 벌초 대행, 무의무탁 행사자(行死者) 장례식, 화재·수해 예방 및 방재 활동, 한발이 심할 때 부락 전체의 실정을 조사하여 능동적으로 초군배치37)등의 일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산림보호, 도로보수, 치산치수, 한수해 대책 등 지역사회 개발사업에 이바지했다고 하지만, 지금에는 그 존재마저 유야무야로 초군청의 구실이란 해마다 정월 보름날 두레골 신당의 제사를 주관하는 일이 중요한 몫이라 하겠고, 농사일의 품삯을 조정하거나 8월에 펼치는 풋굿 날짜를 정하여 각 마을에 알리는 일이 고작이라 한다.
6. 자치재원
자치재원(自治財源)이란 자치사무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경비(經費)를 의미한다. 초군청(樵軍廳)의 재원(財源)은 우두머리 세금 징수, 소 한 마리당 5푼, 각 면부에서는 순흥 본부에 한 마리당 1푼씩 납부하였고, 재산수입, 초군청 소유 가옥세 징수, 흉사(凶事) 또는 각종 행사에서 받은 임시 수입38)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지방자치에서 재정자립(財政自立) 정도는 매우 중요하다. 초군청(樵軍廳)의 재정자립 정도에 관하여는 자료의 부재(不在)로 파악하기 어려우나, 초군청(樵軍廳) 좌상(座上)의 위세(威勢)를 볼 때 어느 정도 재정자립(財政自立)이 이루어졌다고 사료된다. 초군청(樵軍廳)의 좌상(座上)에게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 하더라도 재정자립(財政自立)이 없었다면, 초군청에서 수행하였던 여러 사무를 원만하게 집행할 수 없었을 것이고, 초군청 좌상(座上)의 위세도 높지 않았을 것이다. 좌상(座上)의 위세(威勢)도 재정자립 정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료된다.
Ⅴ. 맺음말
1. 요약
유불문화의 향기가 유구하게 흐르는 순흥에는 향촌제도(鄕村制度)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 기능이 상실 된지 이미 오래 이고, 지금은 그 형태만이 존속되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향촌제도(鄕村制度)는 우리의 선인(先人)들이 지녔던 생활의 슬기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일면이기도 하다. 비록 그 기능은 상실되었다 하여도 향촌제도(鄕村制度)가 오늘날까지 그 형태나마 있는 것만이라도 전통의 고장 순흥 다운 모습이라 생각된다. 향촌제도(鄕村制度)에는 경로소(敬老所), 향장제도(鄕長制度), 초군청(樵軍廳) 등이 있었다고 한다. 향촌제도 중에서 초군청(樵軍廳)과 지방자치(地方自治)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순흥에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초군청(樵軍廳)’이라는 농민자치기구가 있었다. 초군(樵軍)이라 함은 나무꾼, 즉 농가의 막일꾼을 뜻한다. 초군청의 설립은 김교림(金敎林)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할 수 있고, 초군청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조선후기 산림의 사유화(私有化)와 그로 인한 폐단(弊端)을 시정하고, 금성단 제사와 두레골 성황제의 제의주체(祭儀主體)를 분명히 하고, 제의(祭儀)를 담당하도록 규정하기 위해서 1900년을 전후하여 초군청(樵軍廳)을 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군청(樵軍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활동에는 농민의 권익신장(權益伸張)과 항일운동(抗日運動)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초군청(樵軍廳)의 활동내용은 놀음하지 말고, 치산치수하고, 나무를 할 때도 생나무는 베지 말고, 마른나무를 하게하고, 품값은 얼마로 하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골목청소도 하는 등의 일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농민회 활동을 하는 데 기본지침(基本指針)이 되었다고 사료된다. 다음으로 초군청(樵軍廳)은 양반이나 지주층들의 횡포를 막아줌으로써 농민들의 권익신장(權益伸張)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만석부자로 알려진 김교림가(金敎林家)의 재산이 탕진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심산 김창숙 선생을 통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일제가 고의적으로 파산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지방자치(地方自治)란 일정한 지역(地域) 또는 구역(區域)을 바탕으로 한 지방자치단체가 법률에 따라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성(自律性)을 가지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스스로 자치기관(自治機關)을 통하여 자치사무(自治事務)를 자치재원(自治財源)으로써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활동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방자치(地方自治)의 개념요소와 초군청(樵軍廳)을 연결하면 초군청이 현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을 잘 구현한 제도임을 알 수 있다.
2. 건의사항
유불문화의 향기가 유구하게 흐르는 순흥에는 예로부터 특유의 제도인 초군청(樵軍廳)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초군청(樵軍廳)은 현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초군청(樵軍廳)의 여러 모습은 잊혀 졌지만 발굴하여 복원하다면 순흥 만의 특유한 문화관광자원(文化觀光資源)이 될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발굴 복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사료된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다는 데 있고, 다른 하나는 김자인댁(金慈仁宅)이 해체되면서 나온 유물(遺物)과 고서(古書)가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김자인댁(金慈仁宅)이 해체 될 때 많은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필자의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 유물과 고서(古書)들이 골동품 수집가에게 넘겨져 팔려 나갔다고 한다. 많은 유물과 고서들은 분명히 대한민국 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유물과 고서(古書)를 찾아내는 것이 초군청(樵軍廳)의 원형을 복원하는 길이라 사료된다.
앞으로 이 일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고, 많은 지원을 하여주기를 영주시에 바란다. 아울러 초군청(樵軍廳)의 설립자인 김자인댁(金慈仁宅)의 복원을 허락하여 준 영주시에 감사를 드린다. 건물의 복원과 더불어 초군청(樵軍廳)과 김자인댁(金慈仁宅)의 정신을 찾아서 원형을 복원하는 데에도 많은 지원을 바란다. 이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어 복원 된다면 영주시의 훌륭한 문화관광자원(文化觀光資源)이 될 것이라 사료된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일찍이 굴뚝 없는 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말은 산업사회가 굴뚝이 있는 사회라면 미래사회는 굴뚝 없는 산업이 각광을 받을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굴뚝 없는 산업이 바로 문화관광산업을 들 수 있다. 영주시는 순흥 특유의 문화를 발굴하고 보전 전승하여 세계인이 찾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參考文獻
김보현·김용래(1982), 『지방행정의 이론과 실제』, 서울 : 법문사.
배영동 외 3인,『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
이기태, 지역문화사의 민속학적 인식, 민속원.
이기태, 『읍치 성황제 주제 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논문, 1996.
2) 순흥은 특별한 역사적 경험을 지닌 곳이다. 지역민의 역사적 경험은 조선 초기 금성대군이 주도한 단종 복위운동으로 인해 순흥도호부가 혁파된 비극적 사건을 겪은 곳이며, 영조임금 때 이인좌의 난에서 남부 인사의 총책임자였던 정희량이 거주하였던 곳이며, 동학란 때에는 북부지역의 중심지로서 피해가 컸던 곳이다. 지역민은 이러한 특성을 “은행나무에 다래덤불이 세 번 덮혔다.”고 기억한다. 또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정치∙경제∙사회적 중심지에서부터 주변지역으로 밀려난 곳이다. 이기태, 지역문화의 민속학적 인식, 민속원, p. 325.
3) 향청은 조선시대의 지방자치기관으로 148년(성종 20)에 설치되어 지방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향청의 장을 향장 또는 좌수라 하여, 그 지방의 덕망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여 풍속교정, 향리규찰, 정령시달, 민정대표 등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향청은 가끔 권한을 남용하여 지방민들에게 형벌을 가하여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홍식 편저, 한국사 대사전, 교육도서(1992).
5) 홍무(홍무)년대(고려말에서 조선초)로 기록된 입안(立案 : 규약)과 임안(任案 : 역대 임원록) 등 경로소에 보존되었던 문서들이 일제 말기에 분실되어, 경로소의 조직의 성격이나 기능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경로소 조직의 형태는 연면히 이어오고 있다. 順興面, 順興鄕立誌, 圖書出版 書林, 1994, pp. 441∾442.
7) 향장은 수향장(首鄕長), 아향장(亞鄕長), 말향장(末鄕長)이 있었고, 향장은 일단 추대되면 종신제로서, 부모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사임하게 되어 있다. 順興鄕土誌, 書林(1994. 12), p. 442.
8)順興面, 順興鄕立誌, 圖書出版 書林,, 1994, p. 443. 일제 강점기 초기 무렵까지도 순흥 내에서 용서 못할 불륜(不倫)과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이 있으면, 향장단(鄕長團)을 배심으로 유림당회(儒林堂會)에서 심판하여, 향적(鄕籍)에서 제적하고 패자(牌子)6)를 놓았다고 하는 데, 일단 패자(牌子)를 받게 되면 그것으로 비인간이라 낙인찍히고, 그 일가(一家)는 순흥에서 살아 갈수 없을 정도로 극한적인 엄벌이었다고 한다.
9) 패지(牌旨)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된 글발을 의미한다.
12) 초군을 하나의 집단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들 간에 일정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진주의 경우 초군청(樵軍廳)이라는 기구가 있고 그 안에 3소임(三所任)이라는 직위가 있었다. 그리고 읍저초군·읍오리초군·가서초군 등으로 불렸던 점에서 각 동리별 공동노동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는 좌상(坐上)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수본(手本)·회문(回文)·통문(通文)·방목(榜目) 등을 작성하여 위로부터의 지시·연락에 이용했으며 때로는 집회를 개최하는 등 일정한 틀을 가지고 활동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목재가 상품으로서 활발히 거래되고 있었으므로 산림을 둘러싼 갈등이 극심했다. 이와 함께 토지의 사적소유에 대응하여 산림도 부분적으로 사점화되는 추세였다. 이에 사대부들은 산지기나 초군조직을 사유화하고 산림에서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했다. 그러자 초군들의 생계는 크게 위협받게 되어 사대부와 초군 사이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초군들은 사대부들의 사점화 추세에 맞서 집단적으로 반발했으며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개인이 소유한 산에 들어가 함부로 벌목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862년 임술농민항쟁시 경상도 진주·함양·거창·남해, 충청도 공주·회덕·회인·문의·진잠·연산, 전라도 능주·동북 지역에서 초군들이 대거 참여했다.
18)배영동 외 3인, 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 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2007. 12. 31), pp. 26-29에서 재정리 함.
19) 金敎林은 그의 아버지는 우영(羽永)으로 進士-文科로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조부 진수(震銖)가 進士로 도정을 지냈고, 증조 두명(斗明)은 純祖때 進士-文科로 사헌부장령에 자인현감(慈仁縣監)을 지냈으며, 재산으로도 인근 몇 고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만석부자로, 그 집은 세칭 김자인댁(金慈仁宅)으로 불리던, 이 고장 호족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지체였다. 金敎林은 기걸하고 헌출한 풍모와 호협한 기상으로 고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고, 토호세력을 업고 무법의 행패로 약한 촌민을 울리는 악폐를 시급히 잡아야 할 것을 통감하여 무법의 무리를 거세시킬 방략을 안출하였다.
20)順興鄕立誌에 의하면 초군청(樵軍廳)의 설치과정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상고할 데가 없으나, 구전(口傳)되는 바에 의하면, 토호의 머슴꾼들은 나무를 한답시고 산기슭에서 지게를 눕혀놓고 낮잠을 자거나 푼돈내기 투전판을 벌이는 등 빈들빈들 놀다가 해가 기울어 산에서 나무꾼들이 힘들여 나무를 해지고 내려올만하면 길목을 지키다가 남의 나뭇짐들을 마음대로 뺏는다는 것이다. 심하면 산 밑 마을 아무 집 나뭇더미에서든 마치 제집 물건인 것처럼 짊어지고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토호족들의 하인배나 행랑살이들은 더욱 기승스러워 이들은 닷새마다 열리는 순흥 장날이면 장 골목에 어정거리다가, 촌동네 사람들이 곡식 됫박이나 닭마리라도 파는 것을 알면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 털어먹기를 예사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 억울함을 늘 겪으면서도 촌마을 사람들에겐 반항할 기력도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혹심한 피해로 억울하고 통분함을 참을 길 없어 관가에 고발이나 진정을 해본다 해도 전혀 시원한 반응이란 없었으니, 토호의 울타리 안은 관의 힘으로도 간여하기가 버거웠던 때문이다. 여기에 그저 숙명인 양 체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순흥의 토호출신인 김교림(金敎林)에 의하여 초군청이 설치됨으로 하여 드디어, 그 뿌리 깊은 악폐가 씻기게 된 것이다. 順興面, 順興鄕立誌, 圖書出版 書林, 1994, p. 443.
22) 초군청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해방 이전의 기록을 담은 문서가 소실됨으로서 현재까지 언제 조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모연문(募緣文)이 190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905년 이전에 초군청이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이전에 초군청이 조직된 것으로 볼 때 김교림이 초대좌상에게 집과 논을 제공할 수 있는 시기는 부모가 사망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재산을 관리하게 된 1896년 이후로 판단된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일본군에 피살되고 나서 3년 상을 마친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버지의 생시에는 재산관리와 대외적 공신력의 측면에서 아버지가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3년 상을 마친 이후라야 사회적 활동을 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초군청의 결성 시기는 김교림이 부친상을 끝내고 나서 지역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효릉참봉에 제수된 1900년 1월에 지역사회에서 그의 위상이 제고된 시점부터 1905년 모연문이 작성된 시점 사이로 보는 것이 가장합당하다는 판단이 든다. 배영동 외 3인,『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 2007. p. 28.
24) 소농조합에 흡수된 초군청(樵軍廳)은 해방과 더불어서 지역민 자치조직으로 그 성격이 전환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성황제는 초군청(樵軍廳) 임원들이 중심이 된 걸립행위(乞粒行爲)를 통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여야만 하였다. 그 경제적 어려움은 1951년을 기점으로 하여 초동적인 성황제가 마을 단위로 축소하게 되면서 인근 마을의 찬조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는 경제적 사정이 악화되어 성황제의 희생물인 소를 준비하기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1960년대에 이르러 지역민 조직은 성황제의 지속적 수행을 위한 경제적 기반과 제당의 법적 기반을 확립한다. 즉 동답을 마련하여 26인을 연명으로 한 등기를 하면서 동답에서 나오는 곡식을 지역민에게 장미라는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제당의 영역도 연명으로 등기하였다. 또한 지역민은 이 물적 기반에 “성황님의 것”이라는 신선성을 부여함으로써 제의의 지속을 위한 안전장치를 확보하였다. 즉 마을 단위의 성황제가 행해질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현재 지역민이 성황제를 수행하기 위해 소요되는 경비는 자체가 적립한 재산, 매년 들어오는 찬조금(외부인의 찬조와 제당을 이용하는 무격의 찬조)으로 해결한다. 이기태, 지역문화의 민속학적 인식, 민속원, p. 329-330.
25) 배영동 외 3인,『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 2007. pp. 44-46에서 재정리함.
26)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한 쓰라린 경험도 있고, 심산 김창숙 선생의 활동과도 연관되어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그리하여 영주지역의 최대부호로서 많은 재원을 음으로, 양으로 독립군에 지원하였던 것이다. 군자금사건에 연루되어 수차례 체포되었으며 이때에 쓴 신문조서가 여러 편이 남아있다. 특히 심산 김창숙 선생을 통해 독립자금을 댔다. 심산 선생이 김교림의 집에 머무르면서 숱하게 군자금을 가져갔고, 심산선생이 다녀간 후에 집을 대구은행에 저당을 잡혀가지고 2만원이나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배영동 외 3인,『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 2007. p. 25.
27)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
29)고리대금업자에게 집까지 빼앗기게 되었고, 빼앗은 산에서 나무를 벌채해서 재건사업에 목재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순흥 사람들이 모두 저 놈이 남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재산을 사기해 먹어서 벌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사람이 트럭 짐 위에 올라타고 상동광산 가는 길 어디쯤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30) 김보현·김용래(1982), 『지방행정의 이론과 실제』, 서울 : 법문사,, p. 70.
31) 이기태, 『읍치 성황제 주제 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논문, 1996, p. 16. 順興鄕立誌에 의하면 옛날의 순흥고을의 경역(境域)은 13개 면(面)에서, 1914년 고을이 폐지되면서 옛 읍치(邑治)를 포함, 부근 9개 면(面)은 영주군에 속하고, 그 동편 4개 면(面)은 봉화군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순흥고을이 폐지되기 전의 경역(境域) 다음과 같다. 옛 읍치권(邑治圈)에는 지금의 순흥지역으로 대평면, 내죽면이고, 단산권(丹山圈)은 지금의 단산면 지역으로 옛 일부석면, 동원면이고, 부석권(浮石圈)은 지금의 부석면 지역으로 옛 도강면,, 2부석면, 3부석면이고, 대룡산권(大龍山圈)에는 지금의 안정면으로 용산리, 여륵리 지역이다. 물야권(物野圈)에는 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수식, 오록지역으로이고, 문단∙도촌권(文丹∙都村圈)으로는 지금의 봉화읍이다. 와란권(臥丹圈)에는 지금의 봉화 법전면∙봉성면 동양리 지역이다. 順興面, 順興鄕立誌, 圖書出版 書林, 1994, pp. 501-502.
32) 배영동 외 3인,『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 2007. p. 99.
34) 구전(口傳)되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청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전에는 사랑방이 큰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는 청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초군청의 청사가 교회 옆에 있었는데,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청사가 있기 전에는 흥주관(興州館)이라는 역관(驛館)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후 초군청에서 청사를 팔아서 땅을 샀다고 한다. 본래 역관이었던 건물을 청사로 사용한 듯하며, 지금도 기단석 같은 것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배영동 외 3인,『순흥초군청 농민문화 기초조사연구』안동대학교 박물관‧‧영주문화원, 2007. p. 42.
35) 이날은 큰 잔치를 열어서 동민이 모여서 먹고 마시며 풍악을 울리며 축하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36)흉사 시에는 좌수가 모든 상황을 참작하여 인원배정, 물자동원 등 현재도 철저히 하고 있음은 아름다운 풍습이고 좋은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