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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aravan of Dreams-반다 루트키에비치의 꿈
저자: 게르트루드 라이니쉬
출판년도: 2000년 발행
쪽수: 192쪽
출판사: 카레그
『당신이 열망하는 꿈을 이루면서 산다는 것은, 그에 상당한 위험과 어려움 없이 결코 성취되지 않습니다. 단지 꿈을 꾸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댓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어집니다. 자유는 내 삶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는 산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산을 등정하고 무사히 하산해서 돌아 올 수 있는 것은, 산 또는 자연을 정복해서 또는 그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내 안의 약점과 단점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내가 1년 내에 8개의 고산을 등정하겠다는 이 ‘Caravan of Dreams’ 프로젝트는, 내 자신의 꿈 속에서만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로 그 위험 요소들에 대해 도전하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내 자신과 불가능한 대상의 변방에 있는 한계를 넘어 서기 위해 ‘Caravan of Dreams’에 도전할 겁니다.』
히말라야 8000미터급 자이언트 등정의 9번째 대상인 칸첸중가를 등반중이던 반다 루트키에비치는 1992년 5월 12일, 등정 여부가 확인되지 못한 채 실종되었다.
1943년 2월 4일 리투아니아의 플런쟈니에서 출생한 반다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군을 피해 폴란드에서 이주한 그녀의 가족은, 아버지의 연금으로 항상 궁핍했고 근근히 살아갔다. 염소의 우유를 먹고 자란 그녀는 이 염소 우유 때문에 건강 체질이 되었고 억척스런 사람이 되었노라고 훗날 회상했다. 16세 때 과학기술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또래의 친구들이 영화 배우 등에 열광할 때,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수학과 물리, 화학에 관심이 깊었다. 장학금은 가사에 보태고 과외교사를 하며 자신의 용돈을 충당했다.
18세가 되던 1961년, 폴란드 남부의 스콜키라는 암장에서 친구의 소개로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한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진다. 매 주말마다 스콜키를 찾았고 등반가로서의 능력과 내면의 산을 성숙시켜 나갔다.
1962년에 등산학교를 졸업했는데 등산학교 강사들이 보수적이어서 여성 수강생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끔찍한 등반 사고 사진들을 보여 주며 겁주기 일쑤였고, 클라이밍은 남자들의 스포츠이고 여자의 신체 구조에는 적절치 않다며 배타적으로 상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최고 난이도인 ‘R’ 루트를 등반하고 있었고 1964년 처음으로 알프스로 원정등반을 떠났다. 당시는 ‘철의 장막’으로 표현되는 동서냉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해외를 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녀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돈이 없어 스키 리프트나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못하고, 오직 두 발로만 알프스 산군을 섭렵하면서 성공적인 히말라야 등반의 요소인 체력과 인내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1970년 4월 반다는 폴란드 보건부 간부의 아들인 수학학자 보이텍 루트키에비치와 결혼을 하고, 그해 여름에 최초의 원정등반인 폴란드-러시아 레닌봉(7,134m) 합동등반대원으로 선발되었다. 보수적인 남편인 보이텍은 등반에 깊이 빠져드는 그녀를 이해 할 수 없었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못하면서 3년만에 이혼했다.
폴란드 산악연맹에서는 히말라야 등반대 파견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체육부에서는 3년마다 국가 원정대를 위한 대규모 지원을 실시했다. 당시 산악계에서는 여성 대원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참가하는데만 의미를 부여했지만, 반다는 등반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괄목할 만한 경험을 축적했다.
그녀는 자신의 단점인 고산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야간 단독등반을 반복했다. 또한 산에서의 죽음을 많이 목격했지만 자신의 죽음은 상상하지 못하고, 자신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이 오지 않을 것이고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갖게 된다. 산이 죽음을 각오할 만치 중요한 대상은 아니지만, 그 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감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등반의 위험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더 그녀에게 매력적이었다. 바람의 느낌과 바위 냄새, 긴장 후의 휴식, 한 컵의 따뜻한 차는 사소하지만 무한한 시간의 의미와 기쁨을 주었다. 등반은 그녀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고, 등반이 자신에게 선사하는 즐거움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클라이머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반다는 1973년 처음으로 세 명의 여성으로만 구성된 원정대를 이끌고 아이거 북벽 등반에 나섰다. 폴란드에서는 최고의 장비를 준비해 갔지만 아이거의 낙석과 악천후를 막기에는 형편 없었다. 노스 버트레스 루트를 3일만에 오르는데, 이 루트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초등하고 반다 팀이 재등한 루트로 이후 한동안 등정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어려운 루트였다.
반다는 등반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등반중에 수시로 밀려드는 공포와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등정했더라도 만족하지 않았다. 루트를 개척해 나가며 판단하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두려움이, 등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5년 여름 가셔브룸3봉(7,952m) 여성등반대를 조직했다. 10명의 여성 대원으로만 구성된 이 등반은 반다의 리더십이 시험받는 무대였지만, 대원들간의 갈등과 이해부족, 불신이 노출되었다. 동릉에 초등 루트를 만들며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고 고소포터는 고용하지 않았다. 반다는 포터의 지원을 받는 등반을 배제시켰다. 순수한 여성 대원들의 능력만으로 등반이 시작되고 끝나야 하며, 만일 포터가 필요하다면 정식 대원 명단에 기록돼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6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돌아 온 반다는 뇌막염으로 입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산은 끝이 났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1978년 3월, 4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마터호른 북벽 동계 등반대 대장으로 초등(여성등반대)하면서 재기에 성공하고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여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합동등반으로 공동대장인 헤를리코퍼가 반다를 부대장으로 지명하자, 남자 대원들이 반기지 않았다. 대원으로서 그녀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협조를 꺼려했다. 의견 충돌이 있으면 거의 공격적인 분위기가 되기도 했다.
여성대원이라고 등반의 보조 역할로만 대한다면 여성의 능력을 평가할 기회는 없어질 것이다. 반다는 이런 분위기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타협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역할과 목표대로 등반을 진행시켜 나갔다.
10월 16일, 등정 시도에 나서는데 같이 로프를 맬 남자대원이 나서질 않았다. 결국 졸지에 단독등정에 성공하는데, 일본의 준코 타베이와 티베트의 판통에 이어 세 번째 에베레스트 여성 등정자가 되었고, 최초의 유럽 여성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또한 이 날은 폴란드의 캐롤 보이틸라가 교황 바오로 2세로 선출된 날이어서, 반다는 국민적인 대환영을 받았고 이후의 등반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폴란드 국민의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일종의 ‘에베레스트’라는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폴란드에는 3천6백만 인구 중에 5천명의 전문 등반가가 있다. 이들의 반은 등반에 미쳐 있었고 불필요한 위험에 중독된 사람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폴란드 원정대가 히말라야에서 성과를 거두고, 반다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TV방송같은 대중 매체에서 특집으로 다루는 횟수가 빈번해졌고, 축구선수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같은 대중적인 인기도 얻기에 이르렀다.
반다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K2 여성등반대를 준비하고, 훈련등반으로 엘브루스를 향했다. 등정 후 하산하다가 다리 부상을 입은 반다는 오스트리아 의사인 헬무트 샤페터로부터 치료를 받는데, 둘은 이상한 힘에 끌리면서 결혼한다.
반다는 목발에 의지하며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등 서방세계를 돌며 스폰서를 섭외했다. 메스너가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다음 등반에도 쓸만큼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1982년 6월, K2 등반 도중 캠프2에서 대원이 한 명 죽고 날씨가 급변하는 바람에 철수했다.
반다는 두 명의 여성대원과 함께 1984년 봄, 상업등반대에 합류하여 K2에 다시 도전했다. 그러나 또다시 강풍과 폭설로 실패하고 만다. 대원들의 등반능력이 탁월하고 장비가 뛰어나도 등반의 원칙과 규칙은 산이 정한다. 최정예 대원과 최고의 장비가 동원되어도 대자연 앞에서는 종종 무시되곤 한다.
K2에서 돌아 온 반다는 성격 차이로 남편과 이혼하고 바르샤바로 돌아가 강연과 작가일에 몰두한다. 이어 1985년, 네 명으로 구성된 낭가파르바트 여성등반대를 이끌고 무산소와 고소포터 없이 등정에 성공한다. 하지만 산악연맹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녀는 산악영화 제작자로 나선다. ‘Join me on these Rocks’, ‘Aconcagua Tango’는 호평 속에 오스트리아 TV로부터 상당한 금액을 받으며 성공적이었다.
1986년에 반다는 알파인 스타일로 K2에 다시 도전한다. 8000미터 죽음의 지대에서 두 번의 비박을 감행하며 아브루찌 루트를 통해 등정에 성공하는데 여성 최초의 K2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반다는 자주 어려운 목표를 설정한다. 그것이 어려운 루트이든 쉬운 루트이든 예상하지 못하는 위험은 항상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위험의 한계를 벗어나 정상에 오르면 무한한 시간의 환희를 경험했다. 단순히 등정의 기쁨이라기 보다는 神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 선 소중한 기회를 획득하기 때문이었다.
1988년 반다는 칸첸중가를 처음으로 도전하면서 등반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심한 상처를 받았다. 산에서의 생존을 위한 능력은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지만 결코 산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산은 절대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산에서의 용기는 오히려 결점이 될 수도 있다.
반다는 자신의 파트너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밀려오는 고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냉정해지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통제하고, 神 또는 자연과 직접적인 교감을 이루는 것이 더 적절한 해결 방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1990년 5월, 가셔브룸1봉을 오르면서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개 자이언트 완등을 위한 프로젝트 ‘Caravan of Dreams’를 발표한다. 이미 6개의 자이언트를 오른 반다가 나머지 8개를 1년 안에 오르겠다는 계획이다.
사람의 신체가 고소순응이 완벽하게 되었을 때 등반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고 연속으로 오른다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너무 지치고 바빠 훈련할 시간조차 만들지 못했고, 한 시즌에 3개의 등반을 진행시키기에 너무 늙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내면 속에 자리 잡은 ‘에베레스트’를 실현할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 대원들과의 불화와 갈등으로 여성 파트너를 찾아 보지만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초오유와 안나푸르나만 등정한 채 ‘Caravan of Dreams’ 프로젝트는 연기되었다.
1992년 3월, 자신의 9번째 8천미터인 칸첸중가 등반을 위해 카를로스가 이끄는 멕시코팀에 합류했다. 폭풍설과 뇌우로 며칠을 베이스캠프에 갇혀 있다가 5월 7일 마지막 등정시도에 나섰다. 5월 12일, 카를로스가 등정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8,300미터 지점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반다를 만났다. 그러나 이후 누구도 반다를 다시 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1989년 10월,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두 번째 히말라야 14 자이언트 완등자)가 로체 남벽에서 추락사했을 때 반다는 산악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 산악인들이 등반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렸다. 모든 길은 시발점과 종점이 있다. 산악인들이 고산에서 사투를 벌일 때, 현장에 가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왈가왈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 행위의 의미를 캐내려고 부심해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그 행위가 바로 등반가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열정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을 추모하기만 하면 된다.”
50세의 반다가 칸첸중가로 떠나기 전에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방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산에서 죽고 싶지 않다. 산에서 죽는 것, 그것은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경험하게 되고 곧 익숙해 질 것 같다. 나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첫댓글 냉전시대에 폴란드는 철의 장막에 갇혀있었지만 등반가들의 자유 의지는 국경을 넘어 산으로 또 산으로 고고씽~ 반다가 실종된 지 20년이 되었군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