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수경이 할머니와 함께 진주에서 고성으로 가는 산등성이를 넘어 천제굴로 아버지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길을 잘못 들어 도중에 날이 저무는 바람에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억지로 따라온 수경은 잠자리가 불편한 데다 화까지 나 잠을 설쳤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바로 옆에 암자가 있었다.
두번째로 아버지를 만났다. 할머니는 성철스님께 준다고 음식을 잔뜩 만들어 머리에 이고 산길을 올라왔다. 그 어려움과 정성을 성철스님은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그 음식 해온 거 전부 산아래 동네 못사는 사람들 주고 와. "
수경이 음식 보따리를 들고 산을 내려가 생면부지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잔뜩 골이 나 다시 암자로 올라왔는데, 할머니가 "스님께 인사드리라" 며 재촉한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성철스님을 바라봤다. 큰스님이 한마디 했다.
"니 참 못됐네. "
수경은 마음속으로 '사람 마음을 참 잘 아는구나' 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에 묻어나는 불만을 결코 떨치지는 않았다. 그런 딸을 향해 성철스님 특유의 문답이 시작됐다.
"그래, 니는 뭐를 위해 사노?"
불만은 불만이고, 아버지의 물음이니 생각을 가다듬어가며 대답했다.
"행복을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
성철스님이 다시 물었다.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거든. 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 거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수경은 속으로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겠다' 는 결심을 했다. 그러자 묘하게도 그때까지 큰스님을 미워했던 생각들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마음의 변화를 느끼며 성철스님께 물었다.
"어떤 것이 영원한 행복이며, 어떤 것이 일시적인 행복입니까?"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안그라고 이 세상에서 오욕락(五欲樂.세속적 욕망과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인 행복이니라. "
수경은 벌써 아버지 성철스님의 말씀에 빠져 있었다.
"도를 깨치는 공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면 되는 거라. "
수경은 그 자리에서 큰스님으로부터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받았다. 큰스님의 선문답 몇 가지가 더 이어졌다. 수경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제서야 성철스님이 웃는다.
"니가 10년 공부한 사람보다 더 낫다. "
수경이 내친 김에 "이제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화두 들고 참선만 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했다. 성철스님의 반응이 의외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끝을 제대로 못맺으면 큰 일에는 성공을 못하는 거라. "
학업을 일단 마치라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빼앗긴 수경이다. 음악이나 체육시간에는 제일 뒷자리에 앉아 혼자 참선에 빠지곤 했다.
달라진 수경을 가장 유심히 본 사람은 할아버지(성철스님의 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몇 번 수경이를 불러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 하루는 마음을 정리한 듯 나들이 계획을 발표했다.
"지가 올리는 없을 거고, 내가 가서 봐야제!"
이미 '철수좌' 로 도명(道名)이 높은 아들을 찾아 먼길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길눈이 밝은 하인을 앞세우고 천제굴로 향했다. 20여 년만에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첫마디는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였다고 한다. 불교에 아들을 뺏기고 동네 유림으로부터 배척당해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농축된 한마디였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성철스님이 아니다. 그날 성철스님은 거듭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짧은 만남을 마감하고 돌아서는 아버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부지를 뵈옵고 옛날과 다름없이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앞으로도 오래 오래 사실 것입니다. "
성철스님의 위로와 인사를 받고 산청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조용히 낫을 찾아 들곤 경호강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동안 석가모니에게 복수하기위해 '물고기 대량살상용' 으로 쳐놓았던 그물을 손수 찢어 거두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62)
62. 그 아버지에 그 딸
아버지 성철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딸 수경(불필스님)이 이후 어떻게 불교에 빠져들었는가를 듣다보면 '그 아버지에 그 딸' 이란 생각이 절로 난다.
당시 경남 일대 영재들만 입학하던 진주사범에 입학한 수경은 틈만 나면 화두(삼서근)를 들었다. 교생 실습을 위해 진주 인근 초등학교로 출근해야 하는데, 학교로 가는 대신 월명암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부산사범을 졸업하고 수행차 머물고 있던 이옥자(백졸스님.부산 옥천사 주지)를 만났다.
성철스님의 출가 이후 20년 만에 다시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재원(才媛)' 이란 소리 들어가며 교사의 길을 잘 걸어가던 처녀가 교사발령을 받고서도 "부임하지 않겠다" "참선 공부하러 절에 가겠다" 고 하니 집안 어른들의 야단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버지 성철스님이 그랬듯이 딸 수경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족회의가 열렸다. 어른들의 설득에 수경이 조건을 내세웠다.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으면 절에 안가겠습니다. "
모두들 긴장하며 수경을 쳐다봤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내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면 절에 가지 않겠습니다. "
어른들이 모두 침묵했다. "출가 않으면 죽을 팔자" 라며 출가했던 아버지 성철스님의 단호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경이 용기를 내 결론을 내렸다.
"부처님은 6년 만에 대도를 깨쳤다 하지만, 나는 더 열심히 해서 3년 만에 공부를 마치고 도를 깨치고 오겠습니다. "
여든을 바라보는 한평생 꼿꼿하고 도도하게 살아온 할아버지가 눈물까지 흘리며 한탄했다.
"우리 집안 다 망한데이. "
이 무렵, 이런 집안의 사정을 알 바 없는 성철스님은 경남 통영 안정사 옆 천제굴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의 산내 암자인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출가를 결심한 수경은 가족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소문 끝에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참선 공부를 하러 가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
딸의 출가결심을 듣던 성철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급할수록 둘러가야 한데이. "
성철스님은 딸의 뜨거운 구도열이 급하게 보였던 듯하다. 그러나 구도의 결심을 굳힌 수경은 아버지의 자상한 조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수경은 친구 옥자와 함께 성철스님의 지시에 따라 해인사 청량사에서 하안거(夏安居.여름 한철 외부출입을 하지 않고 참선에 전념하는 일)를 처음 맞았다. 전쟁과 불교계내부 정화(淨化.비구, 대처스님 간의 정통성 다툼)운동 직후라 사찰은 낡아 볼품이 없었다.
수경과 옥자는 삭발을 하지 않고 '단발머리 행자' 로 열심히 정진했다고 한다. 굳이 묵언(默言.하루 종일 말하지 않고 지냄)을 다짐하지 않았지만 정진에 전념하느라 자연히 묵언의 생활을 했다. "두 번 눕지 말자" 고도 다짐했다.
잠깐 누웠다가 눈을 뜨면 더 이상 자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밤이면 대웅전 앞 마당을 거닐기도 하고, 거닐다가 다리가 아프면 기둥 모퉁이에 기대 잠깐 쉬기도 했다. 불필스님은 지금도 그 시절의 초발심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상식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엄한 생활을 했지. 처음엔 금방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거짓말처럼 온몸이 가뿐해지더군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 절대로 피로나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
그러나 어떤 일이든 쉽기만한 것은 없다. 하물며 깨달음의 길임에랴. 해제(解制.안거를 마치는 것)무렵이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급기야 상기병(上氣病.기가 머리위로 치솟아 생기는 두통)에 걸려버렸다. 두통에 시달리다가 해제를 하자마자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그래서 내가 급할수록 둘러가라 안그랬나. "
성철스님은 상기를 내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좌복에 앉아 기운을 발바닥 가운데로 끌어내리는 수행을 반복하는 식이다. 그대로 열심히 따라하다 보니 열이 내리기 시작하고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나아질 즈음 성철스님이 다음 수행처를 정해줬다.
"태백산 홍제사에 인홍(仁弘.전 석남사 주지)스님을 찾아가거라.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3)
63. 일주일 용맹정진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딸 수경(불필스님)은 태백산으로 향했다. 홍제사 인홍(仁弘)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초가을이었지요. 따가운 햇살이 남아 있었지만 워낙 깊은 산길이라 크게 더운 줄 모르고 쉬다 걷다 했는데, 저녁볕이 서산에 걸릴 즈음 홍제사에 도착했습니다. 멀리서 몇몇 스님들이 걸망에 산초들을 가득 담고 절로 돌아오는 모습이 어쩜 그렇게 편안해 보이는지…. "
수행에의 열정이 높은 수경에게 태백산은 안성맞춤이었다. 산 정상에 오르니 칡넝쿨이 저절로 엉켜 있고,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도솔암도 보였다.
당시 도솔암엔 일타스님(전 원로의원 및 은해사 조실)이 머리를 기른 채 정진하고 있었다. 일타스님은 가끔 홍제사에 내려와 설법을 해주기도 했다. 마침내 동안거(冬安居.겨울철 외부출입을 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가 시작됐다.
홍제사는 인법당(법당이 따로 없고 요사채에 방 한 칸 정도를 법당으로 쓰는 집)에 집 한 채뿐인 작은 절이었다. 그렇지만 수경은 자신만의 방을 하나 가지고 싶었다. 마침 창고 삼아 사용하는 빈 방에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코자 했다.
인홍스님이 허락해주었다. 수경은 깨달음에 대한 갈망에서 '일주일 용맹정진' 에 들어갔다. 7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행만 하는 방식이다. 흔히 잠을 자지않는 정진도 용맹정진이라 하는데, 단식까지 한꺼번에 하는 용맹정진이란 사실상 목숨을 건 도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단단히 마음 먹고 시작했는데, 이틀 만에 끝났죠. 그 일은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안타깝지요. 그 때 정말 일주일 내내 정진했다면 큰 깨달음을 얻었을 텐데…. "
이틀 만에 정진을 그만 둔 것은 용맹정진의 경험이 있던 한 스님이 "저렇게 하다간 큰 병 얻는다" "평생 수행 못하게 된다" 며 주변을 설득해 말렸기 때문이다. 창고 같은 방이라 스님들이 뭘 가져가려 들락거리기도 했다.
수경스님은 할 수 없이 다른 스님들과 함께 큰 방에서 정진했다. 주지 인홍스님을 비롯해 성우.묘경.혜춘.인성.무렴.현각스님 등 다른 비구니스님들의 정진도 대단했다. 겨울만 되면 눈으로 외부와 단절된 깊은 산 속. 스님들은 마주보며 장좌(長坐.밤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지새는 수행)를 했다.
"딱!"
경책(警策) 소리다. 졸음으로 자세가 흐트러지는 스님이 생기면 맞은 편에 앉은 스님이 큰 죽비로 어깻죽지를 내려치는 것이다. 맞는 사람만 아니라, 온 방의 스님들이 모두 그 소리에 정신을 챙긴다.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졸음이 쏟아지면 밖으로 나와 눈 속에서 행선(行禪.걸어다니며 참선함)을 했지요. 달빛 아래 쌓인 흰 눈에 무릎까지 쑥쑥 빠지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거닐다가 배가 고프면 시금치나 생감자를 먹곤 했지요. "
당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수경이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은 옛 스님의 가르침이다.
'추위에 떨며 배고플 때나 망상이 있을 때, 오로지 정진 한 생각으로 하루해가 저물면 또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게 겨울 한 철을 보내고 봄 햇살에 눈이 녹아 길이 드러나면 스님들은 하안거(夏安居.여름 한철 외부출입을 끊고 수행하는 것) 할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수경은 옥자와 함께 경북 문경 사불산에 있는 윤필암으로 갔다. 윤필암은 수행처로 유명한 암자다.
"사불산은 바위산이에요. 그런 바위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도량에 들어서면 마음 속 번거로움이 다 사라지는 듯하지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보살피는 정진도량이 아닌가 싶을 정도지요. "
윤필암에서 조금만 산을 오르다보면 묘적암이 나타난다. 고려말 나옹(懶翁)스님이 정진했던 곳이다. 나옹스님이 정진했던 곳으로 알려진 묘적암 인근 안장바위와 말바위는 천길 낭떠러지 골짜기에 걸려 있는 바위들. 졸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험한 곳이다. 수경은 나옹스님처럼 정진한다는 일념에 곧잘 바위에 오르곤 했다.
하안거가 끝나자마자 수경은 대구 성전암으로 갈 길을 서둘렀다. 아버지 성철스님은 성전암 주위에 가시나무를 둘러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몇년간 정진 중이었다. 그런 성철스님을 뵐 수 있는 날이 안거 끝낸 다음날이다. 그 때만은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았기에 수경 역시 그 날에 맞춰 성전암으로 가야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4)
64. 大信心의 매질
수경(불필스님)은 친구 옥자와 함께 대구에서 성전암까지 50리 길을 걸어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무사히 안거를 마쳤음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공부가 마음처럼 잘 되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철스님이 형형한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건방지게! 니 언제 공부해 봤다고 공부가 되니 안되니 소리를 하노?"
수행정진, 즉 참선공부란 정말 꿈에서까지 화두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정도가 되더라도 제대로 공부한다고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수경은 '공부' 의 경지를 가늠치 못하게 하는 성철스님의 말을 들으며 말문이 턱 막혔다고 한다. 수경도 나름대로 자지 않고 화두 일념이 되도록 노력했는데, 성철스님이 말하는 경지에 이르자면 어림도 없었다.
"공부를 제대로 이루기 전에는 공부란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거라. "
당시 성철스님은 이렇게 참선수행의 어려움을 강조하시면서 자주 하던 말씀을 친필로 써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나눠주곤 했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하루에 적어도 20시간 이상 화두가 한결같이 들려야만 비로소 화두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화두천(話頭天)이라고 한다. 하루 중 아무리 바쁘고 바쁠 때라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꿈 속에서도 맑고 밝아 항시 한결같아, 잠이 아주 깊이 들어 문득 막연하면 다생겁으로 내려오는 생사고(生死苦)를 어떻게 하리오. ' (日間浩浩常作主 夢中明明恒如一 正睡著兮便漠然 塵劫生死苦奈何)
화두를 들고 수행해 본 사람이라면 이같은 성철스님의 글을 보면서 스스로의 수행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수경과 옥자는 당시 '증도가(證道歌)' '십현시(十玄詩)' 같은 문장들을 전부 외웠다. 그런 도인들의 글을 외면 그들의 호호탕탕한 기상과 풍채가 느껴져 정말 신심이 났다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성철스님 앞에만 서면 항상 긴장되기 마련이다. 조금만 대답을 잘못해도 언제 어떻게 벼락이 떨어지고,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랑이 눈같이 불을 뿜는 듯한 큰스님의 눈빛을 보면 화두 공부 이외 다른 아무 말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나 겨울 안거를 마치고 보고를 위해 성전암에 들를 때마다 쫓겨나기 일쑤였다. 옥자와 수경 중 하나가 대답을 잘못해도 같이 쫓겨나야 했다. 언젠가 비오는 날이었는데, 성철스님이 불호령을 내리면서 갑자기 들고 있던 우산으로 내려치는 바람에 꼼짝없이 온몸에 멍이들게 맞은 적도 있었다. 수경은 눈치 빠르게 도망가는데 옥자는 행동이 느린 탓에 자주 맞았다. 비오던 날은 수경이 옥자에게 미안해 함께 서 있다가 사정없이 맞고 같이 쫓겨났다.
여름엔 덜하지만 겨울철엔 쫓겨나면 정말 막막했다고 한다. 동안거를 마치고 보고차 왔던 날이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성철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인자 이것들 절에 놔두서 아무 소용없데이. 속가 집으로 내쫓아 버리야제. "
수경과 옥자는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려 도망쳤다가 다음날 새벽 예불 시간에 암자를 빠져 나왔다. 전날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성전암까지 걸어왔는데 오자마자 "집으로 쫓아 보낸다" 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찌나 배가 고픈지 부엌에 들어가 솔잎 속에 묻어놓은 당근을 몇 뿌리 꺼냈다. 눈(雪)에 몇 번 닦아 먹고서는 힘을 내 새벽에 줄행랑을 친 것이다. 날이 밝아 집에 보내려고 행자(천제스님)가 수경 일행을 찾으니 사람은 간 곳 없고, 눈 위에 뱉어놓은 당근 껍질만 널브러져 있었다.
그후 천제스님은 수경과 옥자를 보면 "산돼지도 큰스님 잡수시라고 먹지 않는데 행자들이 그 귀한 당근을 훔쳐먹었다" 며 놀려대곤 했다.
인정이 메마른 성전암. 수경은 그런 박대를 당할 때마다 "공부 제대로 하지 않고는 여기 다시 오지 않겠다" 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불필스님은 지금도 어려울 때면 그 시절을 되새긴다고 한다.
"천대받고 괄시받는 것이 대단한 기쁨이지.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인정으로 밥을 주고 반겼다면 벼랑 끝에 선 마음으로 지혜의 칼날을 갈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대신심(大信心)으로 정진하라' 고 내리던 자비의 매질이었던 것 같아요.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5)
65. 딸 수경의 출가
수경(불필스님)은 경북 문경 깊은 산속 윤필암으로 다시 가 참선정진 대신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여름이나 겨울철 안거를 마치고 곧장 아버지 성철스님께 찾아가 그간의 공부를 보고하자면 큰스님은 그저 긴 말 없이 야단만 쳐 쫓아내니, 이제는 큰스님에게 의지할 것 없고 혼자 부처님께 의지해 깨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만 간절했지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하루에 4천배씩 절을 했습니다. "
기도법도 모르고 기도하며 익숙지 않은 절을 4천 번이나 반복하니, 절하는 시간이 하루 20시간씩 걸렸다. 수경은 기도하면 인간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느꼈다고 한다. 확실히 느껴지는 '내부의 힘' 을 개발하면 영원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고, 개발하지 못하면 중생계의 고통(苦)이 끝날 날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다른 일체의 잡념 없이 정진에 매진했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속세와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할아버지(성철스님의 아버지)가 꿈 속에 나타났다. 며칠 뒤 어떤 여신도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이야기를 들으니 9일장이라 먼저 가매장을 했는데, 꿈에 할아버지를 뵌 장소가 바로 가매장한 곳이었다. 1959년 8월 28일이다. 할아버지는 출가한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숨져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 소식을 가져온 분이 그러더군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저승사자가 눈에 보이는 듯 '나는 성철스님한테 간다. 이놈들아! 나는 성철스님한테 간다' 고 고함을 쳤다는 겁니다. "
환갑을 넘기는 노인이 드물었던 당시, 할아버지는 79세까지 장수했다.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었는데, 아들의 출가를 그렇게 뼈저리게 아파하시던 분이었는데.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셨다니. 수경은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고마움과 죄스러운 마음이 불덩이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얼마 뒤 성전암에 갔는데, 성철스님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데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더군요.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언급이 없었어요. 큰스님이 가족 일이나 지난 일은 절대 묻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급할수록 돌아가라' 고 큰스님께서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곧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급한 마음에 정진을 거듭하다가 또 상기병이 도졌다. 다시 큰스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온 몸의 기운을 발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니 머리 아픈 것이 나아졌다. 나으면 또 급한 생각이 앞서 다시 상기병이 생기는 상태가 되풀이 됐다. 도저히 참선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다시 성철스님에게 여쭈었다.
"아무리 해도 상기병이 완전히 낫지 않습니다. "
"상기병은 간단히 없어지는 병이 아이다. 할 수 없제. 쉬어가면서 천천히 할 수밖에. 장기전으로 대처해야제. "
수경은 '장기전' 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집을 나올 때 "3년 만에 공부를 마치겠다" 고 큰소리를 쳤고, 또 실제로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장기전이라니. 믿기지 않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참선정진해 가야 합니까?"
"한 길로만 가면 결국은 성불할 수 있는 거다. 병나지 않게 천천히 장기전으로 나갈라카면 머리 깎아야 안되겠나. "
성철스님이 붓과 종이를 꺼냈다. 불필(不必)과 백졸(百拙), 수경과 친구 옥자에게 내린 법명이다. 딸에겐 '필요없다' 는 법명을, 그 친구에겐 '모자란다' 는 법명을 준 것이다. 그 자리에서 두 처자는 출가를 결심했다.
다시 성철스님의 명에 따라 많은 보살핌을 주던 인홍(仁弘)스님을 찾아 경남 울주군 석남사로 갔다. 그해 가을 인홍스님을 은사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머리를 깎고 예비 비구니가 된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
인홍스님이 강조한 철칙이다. 모든 스님들은 밭에 나가 채소 가꾸고, 논에 나가 모를 심어야 했다. 불필스님도 이 때 처음으로 흙을 만지고 해우소(화장실)에서 거름을 퍼 논에 뿌려보았다.
"만일 출가하지 않았다면 내가 언제 이런 일을 해볼 기회를 가질 것인가. "
그저 모든 것이 고맙고 보람된 시간들이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6)
66. 불필스님의 3년 結社
불필스님은 1961년 3월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정식 비구니계를 받았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단(壇)으로 이 곳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 앞에서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비로소 정식으로 비구니계를 받았으니 그 때부터 불필스님은 백졸스님과 함께 본격적인 운수납자(雲水納子.검은 옷을 입고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수도승)의 길로 나섰다. 경북 문경 대승사 묘적암, 경남 합천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등을 두루 돌아 다녔다.
그리고 성철스님의 지시에 따라 1969년 은사 인홍(仁弘)스님이 있던 석남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석남사 심검당에서 3년 결사(結社.3년간 일체 외부로 나가지 않고 선방에서 수행하는 것)를 시작했다. 인홍.장일.성우.혜관 같은 노스님들과 법희.법용.백졸.혜주스님 등 젊은 비구니들이 함께 결사에 참여했다. 69년 동안거 때부터 매일 새벽 3백배를 했다.
"서로 약속을 하고 정진을 하는데, 같이 오래 살다보니 세대간에 조금씩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뭐 심각한 것은 아니고, 예를 들면 절을 빨리 하고 느리게 하는 차이 같은 것이지요. "
3백배를 하는데, 노스님들이 오히려 젊은 스님보다 빨랐다. 노스님들이 몇 번 "맞춰서 빨리 절하라" 고 말했지만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느 날 혜주.법용.불필스님이 짜고서 절을 더 느리게 하는 바람에 예불참회가 5분이나 늦게 끝났다. 어른 스님들이 가만히 두고볼 리가 없다. 불필스님의 은사인 인홍스님이 중간에서 제일 곤란해 했다.
"어느날 인홍스님이 우리 셋을 부르더니 옥류동으로 산책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인홍스님이 먼저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섰지요. 뭔가 어색했지만 별 생각 없이 뒤를 따르는데, 인홍스님이 갑자기 돌아서면서 지팡이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거예요. "
성철스님의 매질로부터 도망다니는데 이골이 나 있던 불필스님은 재빨리 달아났다. 대신 다른 스님들은 대나무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사소한 일상에 갈등하면서도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3년 결사가 끝나갈 무렵이다. 마지막 1백일간 용맹정진(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것)에 들어갔다.
"밤에 졸리면 밖에 나가 산길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전등도 없던 시절이라 사방이 캄캄한데 산길을 혼자 걷다보면 바로 옆에 큰 짐승이 지나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때도 있었지요. "
없는 머리칼이 쭈뼛해질 정도로 무서운 밤길이었지만 졸음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 무서움이 들 때면 "내가 너를 해치지 않았는데, 네가 나를 해칠 까닭이 뭐가 있고, 또 무엇이 그리 무서울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견뎠다.
그렇게 동물적 육감을 다스리다보니 반대로 저쪽 짐승이 놀라 피해 가곤 했다. 성철스님은 수도승으로서의 모진 노력을 늘 강조하시던 분이다. 비속 속세의 인연을 떠났다한들 아버지 성철스님의 가르침은 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되는 기라. 노력 없이는 아무 성공도 없데이. "
72년 가을 3년 결사를 무사히 마쳤다. 결사의 리더격인 인홍스님이 고희(古稀.일흔살)를 맞아 주지 소임을 법희스님에게 넘기고, 본인은 다시 정처 없는 운수납자의 길을 가겠다며 칠불암으로 떠났다.
석남사에 남은 불필스님은 청조스님 등 다른 7명의 스님들과 함께 심검당에서 1백일 장좌불와(長坐不臥.눕지않고 수행하는 것)를 시작했다. 가능한 모든 정진법에 도전하는 치열한 구도의 세월이었다.
당시 심검당에 두 그루의 보리수나무를 심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한 그루가 크게 자라 봄이면 꽃향기를 가득 내뿜고 여름이면 무성한 나뭇가지로 더위를 식혀준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맺힌 열매를 따서 실로 꿰면 아름다운 보리수 염주가 된다. 어린 나무가 크게 자란 것을 볼 때마다 불필스님은 당시 함께 정진하던 스님들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초발심(初發心), 출가할 당시의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고 정진했던 그 시절은 출가승이면 누구나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7)
67. 부인 남산댁의 설움
성철스님이 출가하기전 결혼했던 부인 이덕명 여사, 남산댁은 남편에 이어 딸마저 출가하자 한동안 말을 잊었다고 한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도(道)를 찾겠다' 며 뱃속의 아이까지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어렵사리 얻은 딸은 아버지를 한번 보고 와서는 변해버렸다. 똑똑하단 소리 들으며 공부 잘 하던 딸이 학교에 가도 참선만 한다고 하고, 집에 와서도 참선하니 조용히 하라고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제 한 숨을 돌리나 했더니 "3년만에 득도하겠다" 는 엉뚱한 말만 남기고 집을 떠난지 오래. 복받치는 설움과 외로움을 삭이지 못한 남산댁이 드디어 대구 파계사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당시 성철스님은 성전암 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아무도 허락 없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살았다. 어쩌다 "큰스님을 꼭 뵙겠다" 거나, 아니면 "도를 깨쳤으니 큰스님께 인가를 받겠다" 며 철조망을 뚫고 들어오는 스님이 간혹 있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남산댁 역시 성전암에 도착은 했지만 철조망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 철조망을 덮고 벌리며 뚫고 들어갔다.
성전암에는 성철스님 외에 시자 스님 세 명이 살고 있었다. 당시 같이 살았던 천제스님이 들려준 기억이다.
"인기척이 있어 밖으로 나가와보니 웬 중년 부인이 큰스님 뵙기를 청하는 거예요. 가끔 있어온 일이기에 별 생각 없이 돌려보내려고 타일렀지. '큰스님께서는 지금 아무도 만나주시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시소' 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여인이 아무 대답 없이 그저 '큰스님을 만나야한다' 는 말만 반복하는 거야. 하루 종일 같은 말로 밀고 댕기고 했는데, 해질녘이 돼서 그 분이 어디 갔는지 사라졌어. "
스님들은 당연히 '돌아갔겠거니' 생각하고 저녁 공양을 마쳤다.
저녁 공양이 끝나면 성철스님이 거처에서 시자실로 잠시 건너와 10분 정도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곤 했다. 그날도 저녁 공양을 마친 큰스님이 시자실로 건너와 좌복 위에 앉아 막 말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당탕. "
문이 부서지는지 열리는지 모를 큰 소리를 내는가 했더니 낮의 그 여인이 들이닥쳤다. 큰스님의 고함이 터진 것도 거의 동시였다.
"빨리 저거 쫓아내라. 뭐 하노,빨리 쫓아내. "
여인은 아무 말이 없이 큰스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여인을 쫓아내기위해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밀려나던 여인이 외쳤다.
"스님, 내가 할 말이 있어 왔습니데이. "
시자들도 황당했다. 무슨 여인이 이리 황소고집이기에 하루 종일 어디 숨어 있다가 난데없이 나타났는지, 또 큰스님은 왜 그렇게 노발대발 하는지. 시자들도 화가 났다. 거칠게 끌어냈다.
세 행자가 여인의 손과 발을 잡고 끌다시피 하며 무려 1.5㎞나 되는 길을 내려와 파계사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여인이 단념했는지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자님들, 내 다시 올라가지 않을건께 인자 놓고 올라가소. "
세 행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성전암으로 올라갔다. 체념한 여인은 땅이 꺼지게 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성철스님께 "저 밑에까지 쫓아내고 왔습니다" 고 보고했다.
"성철스님이 아무 얘기도 않더라구. 그러니 그냥 어떤 신도가 찾아왔다가 쫓겨난지 알았지. "
여인이 성철스님의 부인임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나서다. 성철스님의 아버지가 운명했다는 소식이 성전암에 와닿았다. 성철스님은 별 말 없이 천제스님에게 문상을 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경호강을 나룻배로 건너 상가에 도착했지. 문상을 하고 일어서는데, 소복입은 맏며느리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 '본 일이 없을텐데, 어디서 봤나' 하고 한참 생각했지.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 그 때 쫓아낸 그 여인이야. 얼마나 무안하고 참담했던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참 이런 때를 두고 말하는구나 싶더라구.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8)
68. 부인 남산댁의 출가
성철스님의 부인인 남산댁 이덕명 여사가 성전암으로 찾아간 것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부인이 남긴 뒷날의 회고.
"도(道)가 좋으면 혼자 가면 되지, 왜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데려가느냐. 딸은 내가 잘 키워 놓을 테니 딸만은 돌려달라고 담판할라 했는데…. 그런데 담판은 고사하고 쫓겨내려오고 말았던 거지. "
따져보면 남산댁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성철스님에 이어 딸 수경(불필스님)이 출가했을 뿐 아니라, 수경이 집을 떠난 다음해인 1957년 4월 12일 시어머니(성철스님의 어머니) 초연화(超然華)보살도 세상을 떠났다. 수경의 할머니는 "다음 생에는 내 기필코 스님이 되겠다" 는 서원을 세우고는 출가한 사람처럼 삭발하고 장삼을 입고 삶을 마감했다.
기댈 곳이라곤 피붙이 딸뿐이었다. 남산댁은 수경이가 불필이라는 불명을 가지고 이 선방, 저 선방 참선공부하러 다닌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러다 불필스님이 경남 언양 석남사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다. 딸의 얼굴을 10여 년만에 보리라는 기대감에 부푼 발길이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어머니가 찾아 왔다는 전갈을 받은 불필스님은 산으로 도망쳤다. "공부 다 하고 돌아 가겠으니 찾아오지 말라고 전해달라" 는 말만 남기고. 어머니의 섭섭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 남산댁은 "독사보다 더 독하다" 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섰다고 모정(母情)이 끊어질 일은 아니다. 남산댁은 그 뒤에도 두 번이나 석남사를 찾아왔다. 두번째도 못만나고, 세번째 찾았을 때는 석남사 주지였던 인홍(仁弘)스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나섰다.
"성철스님은 이제 저렇게 도명(道名)을 떨치시고, 딸은 또 이렇게 불철주야 참선정진하고 있는데 남산댁도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소□ 세상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니 남산댁도 이제 모든 것 다 버리고 절에 들어와 우리 같이 삽시다. 그러면 그렇게 보고 싶은 딸도 부처님 앞에서 볼 수 있고 말이오. "
불필스님의 은사인 인홍스님의 말씀은 구절구절 남산댁의 마음에 와닿았다. 세속에 연연할 인연도 없다. 그 말을 듣고 며칠 뒤 남산댁도 출가를 결심했다. 67년 봄 석남사에서 출가해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았다. 평생 한숨 속에 지새다가 마침내 출가로 쉼터를 얻었다는 법명이다.
일휴스님은 늦게 출가했지만 그만큼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정진했다. 말년에는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수행에 매진했다. 말년엔 아무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도 손에서 염주를 놓지 않고 24시간 굴렸다. 불필스님의 회고.
"출가해서도 나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해 당신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요. 그러면서 이 세상 모든 어머니상이 어찌 다르겠는가, 가장 어리석은 바보는 어머니구나 싶더라고요. 나는 어머니가 늦게 출가하셨지만 참다운 발심을 하여 정진할 수 있도록 바라며, 될 수 있으면 멀리서 바라만 보았지요. "
83년 여름, 며칠째 비가 계속 내리던 가운데 불필스님은 석남사 심검당에서 사흘간 머물며 정진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어머니 일휴스님의 시자스님이 찾아와 "급히 찾는다" 고 해 "오늘은 내려갈 예정" 이라며 돌려보냈다.
마침 중복날이었다. 중복날이면 스님들은 옥류동 계곡에서 물맞이(목욕)를 하고, 찰떡국이나 감자떡을 먹으며 더위를 식힌다. 다른 스님들이 계곡으로 나간 사이에도 불필스님은 오랜 도반 백졸스님과 함께 일휴스님 곁을 지켰다. 저녁 무렵, 옥류동에서 돌아온 다른 스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잠깐 쉬고 있는데 시자가 달려왔다.
"일휴스님께서 저녁 공양에 찰떡국을 한 술 잡수시고 두 술째 뜨다가 그대로 앉아 숨을 거두셨다고 하더군요. 장작더미에 불이 훨훨 타고,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다시 그 재를 동서남북으로 뿌리니…, 사람의 한 생이 너무나 허무하더군요.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9)
69. 백련암 '院主' 소임
성철스님이 살던 백련암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원주(院主)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은 출가하고 대여섯 해가 지나서였다. 참으로 실패의 연속이었던 행자시절을 마치고, 성철스님의 무염식(無鹽食.소금기 없는 식사)을 책임지던 시찬(侍饌)소임까지 마무리 짓는데 서너 해가 지났다.
행자.시찬의 의무를 마치고서는 몇 년간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데 정진했었다. 그러다가 상기병(上氣病)이 걸려 고생하면서 무진 애를 먹던 무렵. 성철스님이 불렀다.
"니, 절에 들어 온 지도 한 대여섯 해는 됐제. 그런께 아무리 곰새끼 같은 니도 인제는 절 살림살이가 어떤 줄 대강은 눈치챘겠제. 상기병도 치료할 겸 해서 인제부터는 좌복(참선용 방석)에 앉아 있지만 말고 원주 소임 맡아가지고 다니면서 화두해라. 그라믄 한결 머리도 밝아지고 참선 공부도 쉬워질 끼라. "
성철스님이 상기병으로 고생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여러모로 고려한 끝에 내린 명인 듯했다. 미리 준비해둔듯 세심한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육조(六祖)스님께서도 좌복 뒤에 앉아 조는 수좌(首座.수도승)가 있으면 행선(行禪)하라고 일부러 방에서 쫓아내버렸다 아이가. 또 육조스님도 동선(動禪)을 강조하셨고 하니, 니도 앞으로는 움직이면서 화두 공부해봐라. "
'육조' 란 여섯번째 조상이란 말. 중국 선불교의 문을 연 달마대사를 첫번째 조상으로 따졌을 때 그 법통을 이은 여섯번째 스님 혜능(慧能)을 말한다. 중국 당나라 시절 활동했던 혜능스님은 달마대사가 연 선불교 전통을 중흥시킨 인물로 성철스님이 자주 인용하는 고승.
그 혜능스님도 걸어다니면서 하는 참선인 '행선' 과 돌아다니면서 하는 참선인 '동선' 을 강조했듯, 성철스님도 나에게 좌선(坐禪.앉아서 하는 참선) 대신 걷고 돌아다니는 수행을 권한 것이다.
걷고 돌아다니는 일이 가장 많은 소임이 바로 '원주' 다. 큰 절의 주지와 같은 역할인데, 작은 절이나 암자는 대개 주지 대신 원주라고 부른다. 보통은 주지스님이 있고 원주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따로 있어 실질적인 살림살이를 맡기도 한다. 그러니 생각보다는 원주의 역할과 책임이 적지않다.
절집에선 철저히 계절의 흐름에 맞춰 한 해를 설계하고 살아간다. 엄동설한이 지나고 응달의 잔설이 녹을 무렵,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밭을 갈고 봄채소를 심을 준비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감자눈을 따 감자 씨 뿌릴 준비를 해야하고, 그 감자를 7월말이면 캐고 김장갈이를 한 다음 배추.무.갓씨를 뿌린다. 그러다 가을이 깊어지면 김장을 담가야하고, 정월이 되면 메주를 쑤어 장을 담그고 고추장을 만든다.
이 모든 살림살이의 책임자가 원주스님, 바로 나의 소임이 됐다. 행자시절부터 실수연발했던 나에게는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철스님은 나에게 암자살림을 맡겼다.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맡겨진 책임이니 또 실패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겨울이 지나고 원주로서 첫 봄을 맞았다. 다른 스님들과 암자에서 일을 도와주는 일꾼(평신도)을 데리고 밭을 갈러 나갔다. 쑥갓.당근.시금치 등을 심었다. 여전히 서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예전처럼 엉뚱한 실수는 않았기에 신참 스님들에게 제법 일을 가르치며 밭일을 했다.
원주스님에게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암자 바깥으로 장을 보러다니는 것이다. 암자 텃밭에서 농사짓는 것이라고 해야 겨우 김치 담그는 정도에 불과하니 나머지 채소는 모두 백련암에서 2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가야장에서 구해와야 한다.
나같은 스님 입장에서 장보러 다니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주부들처럼 이것 저것 집어보고, 맛도 보면서 장을 보는 것도 아닌 데다 길게 흥정을 하는 것도 어색했다.
장에 나가는 길도 간단치 않았다. 닷새나 열흘에 한번씩 열리는 장날에 맞춰 산속 오솔길과 돌길을 따라 30분 가량 걸어가야 시외버스 정류장이다. 버스로 장터에 도착해 물건을 사고는 다시 그것들을 전부 지고 메고 산을 올라야하니 예삿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수행을 돕는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들락거렸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70)
70. 쉽지않은 원주 노릇
원주 소임을 맡을 당시 백련암에는 스님들이 대여섯명 정도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신도들의 찬거리까지 장만하려면 여기저기 열심히 들러야 한다. 스님이 몇 되지 않아 누굴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사정도 잘 모르면서 혼자서 돌아다니니 제대로 물건을 사지도 못했다.
물론 들르는 곳이야 주로 채소가게뿐이고, 채소가게라야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길바닥에 줄지어 앉아 채소를 늘어놓고 한줌씩 파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느 채소가 싱싱한지 둘러보고 대충 마음 짚이는 곳에 가서 물건을 샀다.
그런데 첫눈에 분명히 제일 좋고 싱싱한 채소를 샀다 싶어 기분이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일어섰는데 다음 모퉁이를 지나다보면 내가 산 물건보다 더 좋은 것이 또 값까지 싸게 부르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속이 상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좀 더 둘러볼걸…" 하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장보기가 별로 즐겁지 않은지라 그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빨리 물건을 살 것이 아니라 둘러보고 남들이 산 뒤에 더 좋은 것을 사자" 고 다짐을 하고 시간을 죽이고 있다보면, 언제 사갔는지 웬만큼 좋은 물건은 남들이 먼저 다 사가버리고 파장에 남은 것만 사오는 꼴을 면치 못했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시장이 서고 처음 한두 시간은 물건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다가 그 시간쯤 되면 여기 저기서 흥정이 시작되고 물건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련암까지 올라와야 하는 나는 마음 느긋하게 맴돌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물건 좋다 싶은 곳에서 흥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다른 아주머니들이 몰려들곤 했다. 물건 구경하던 사람들이 스님인 나를 보고 "무슨 좋은 물건인가" 하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면 흥정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시선들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질 무렵 장을 보고 나오다가 국일암 성원스님과 마주쳤다. 국일암은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비구니 암자. 나이가 많은 성원스님은 국일암 살림을 맡아 장을 보러나오곤 했다.
"스님, 오늘 장 잘 봤소. "
가까이 살기에 평소 안면이 있는 노비구니 스님이라 무심코 "예, 잘 봤심더"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성원스님이 "어디 걸망 한번 봅시다" 며 쓱 다가온다. 이리저리 보더니 묻는다.
"이거 전부 얼마 주고 샀소. "
곧이 곧대로 쓴 돈을 추산해 말했다.
"아이구!
스님요, 내 그럴 줄 알았다. 그 물건 사는 데 그렇게 값을 많이 주면 우짜겠노. "
성원스님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내가 시장 보는 것 한번 구경하고 다음부터는 장을 잘 보소" 하면서 나를 다시 시장으로 데려갔다. 가지를 한 무더기 살 경우, 흥정하면서 서너 개 더 놓고, 또 돈을 주면서 두 개 더 얹는다. 다시 걸망에 챙겨 넣으면서 세 개를 더 넣는 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장 볼 돈의 반만 쓰면서도 더 물건을 많이 사 가는 것이다.
"장은 이렇게 보는 거라요. 스님 알겠소?"
그저 "예, 예" 하고 대답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돌아왔다. 이후부터 장날에 성원스님을 만나 "오늘 장 잘 봤소" 라는 질문을 받으면 걸망을 열어보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에 실제로 내가 지불한 돈의 절반 정도로 샀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제서야 "스님도 이제 장 볼 줄 아네" 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쑥스러워 나중에는 장터거리에서 성원스님을 보면 아예 멀리 돌아서 줄행랑을 놓곤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5일장을 찾아다니며 스님들을 위해 부지런히 사서 날랐는데, 성철스님은 반응이 없다. 나중에 알고보니 열심히 장에 다니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