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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 장일순 선생님과의 이야기
최 - 한두번 지나치기는 했지만 원주의 어느 곳을 이렇게 와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원주가 살기는 어떻습니까?
장 - 예. 그 뭐 옛날에는 왜정 때만 해도 인심이 많이 좋은 동네라고 그랬었어요. 한국 전반적인 농촌이라든가, 또 농촌 일을 하는 소인들이 대개 뭐 인심이 좋잖았겠어요? 그런데 지금 6.25 난리 이후에 팔도 강산 사람들이 모이고 또 상업의 중심지가 되다시피 하니까.
최 - 다른 데서 많이 왔군요.
장 -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들도 있고 또 뭐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와서.
최 - 더군다나 군대가 들어왔죠?
장 - 예. 도시건설을 이렇게 하다 보니까. 미약하다고 할까? 상행위가 주가되는 도시가 돼놓으니까 잇속에서만 노는 그런 풍토를 면치 못하게 되고 있는 형편이죠. 또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무신 토(土)의 맥이라든가 그런 것도 없고. 관이 아주 주도를 하는 그러한 타 도시에 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이름컸던 이조 때의 큰 개인문벌들이 지냈던 곳도 아니고. 물론 감영이니 소위 도청소재지다시피한 그런 지역으로서 5백년 이상 내려오고 있긴 했던 도시지만. 그런 거, 저런 거 지금은 없으니까. 그저 저 각자가 그저 옆옆이 살면서 지내나가기 그저 적당한 그러한 도시로서 생각들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역시 좀 시간이 가면서 그 세대교체가, 진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회를 새롭게 이끌어가고 하는, 그런 바탕이 이제 서서히 구축이 돼야 되지 않을까, 인제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 - 글쎄요. 그런 면에서 도시가 반드시 물질 이런 것보다도 사람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많죠. 어떤 도시도, 세(勢)같은 게 있는 거 같은데 말이죠. 원주는 하여간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젊은이들도 좀 모여 있으니까.
장 - 글쎄 올시다.
최 - 그래도 원주가 어두운 시절에는 민주화의 주요한 한 거점으로 떠올랐던 지역이지요.
장 - 예. 선생님이 짐작하시는 게 그럴른지 모르지만, 60년대 중반이 좀 넘어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까 군사정권에 대한 횡포를 상대해서, 그것을 대적할 만한 힘을 구축을 해내야 할까를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불교는 회중이 자주 모이지 못하고 천주교나 개신교나 이런 예수를 믿는 교파들은 1주일에 한 번씩을 모이니까, 예수의 건전한 말씀의 뜻에 따라서 생활유도를 허면 삶의 에너지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이 삶 자체나 믿음의 기초도 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있어서의 처처에 그 뜻에 의해서 새겨진다고 헐 것 같으면 이것이 힘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서 마침 그 무렵에 천주교가 원주에 교구가 설정되더군요. 그래서 지학순주교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는데 마침 내가 천주교 다니는 사람이고 본인이 사람을 물색하고 물색하다가 나를 만나게 된거죠. 그래서 교회를 제 모습대로 이끌어가야 할 텐데 어떡하심이 좋겄냐고 그러데요. 가톨릭교회만 하더라도 1950년까지는 토지지주로서 땅에서 나는 소득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했는데 그 이후는 전란국가라는 것 때문에 가톨릭 바티칸에서 원조가 다소 있었고, 또 미국 등지의 원조같은 것에 의존해서 운영이 됐는데 그것만 가지고 앞으로 되게 돼 있지를 않거든. 그래 어떡하면 이 교회를 제대로 이끌어 갔음 좋겄냐고 그래서 우선 교회를 이끈 신부님은 주교의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교회가 하느님을 믿는, 예수를 믿는 사람 모두의 교회가 되어야 되야 되지 않겠냐고. 그러면 그런 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 내부 자체가 자치의 틀로서 질서가 바꿔져야 될 것이라고. 또 그것은 뭐냐하면 바로 사회 전체에 있어서의 능력에 있어 교회가 뭐 때문에 이 사회에 존재하느냐 하는데 대한 자세를 먼저 구축하는 기초가 되는 거니까 그렇게 해보시자고. 인자 그렇게 돼서 5, 6년 그렇게 하다보니까 그것이 자연히 뭐냐면 그 소위 박정희씨 정권의 옳지 못한 거를 자꾸 신자들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자각된 그 일각이 거기에 대해서 이래선 안되겠다고 해서 세상에 경고를 주는 얘기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71년도 시월에 사회주의 저항을 갖다가 하게 됐던 거죠. 그러면서 자연히 그 사회를 바로 하자고 생각했던 그런 학생들도 원주를 찾아오게 되고, 그게 계기가 되서 원주에 와서 뭐냐면 말씀들도 나누게 되고 그러자 그런 면면의 과정 속에서 73년에는 그 사건(민청학련)이 났었을 때도 주교님은 서게 됐던 거고. 또 그것이 뭐냐면 원주의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남한 전체의 반독재로서의 서야 하는 기준이 되어가지고.
최 - 예. 그렇게 됐습니다.
장 - 그렇게 된 겁니다마는 그에 따라서 개신교 쪽에서는 박형규목사 같은 분이 앞장서서 또 일을 하시던 관계 속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서 연대를 하게 되시고, 그렇게 해서 원주의 운동이 아니라 이것이 남한의 대한민국 전체운동으로서 자연히 전 국토의 강한 뜻있는 천주교, 주교, 신부, 신자들, 또 개신교의 뜻 있는 목사, 신자들 이렇게 해서 반독재운동이 전개되면서 정치권에서 그제서부터 이제 그 숨을 조금씩 쉬게 되면서 일이 전개가 되갔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로 박정권하 내지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10여년 이상 20년을 농민운동이라든가, 노동자들의 억울한 사정을 서 준다든가. 그런 일들을 주로 많은 형제들이 참여해서 심으려고 애들을 썼죠.
최 - 저는 우리나라도 지방의 한 도시가, 도시 그 자체로 서야만이 전국적인 자립적인 기반이 형성되지 않겠나, 제가 있는 전주도 전주 자체로서 그런 자립과 자율적인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라는 이런 면에서 각자가 살고 있는 그런 도시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여 나가느냐에 관심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주는 그런 어떤 정신이나 기(氣)같은 것들이, 어떻든지 간에 모여 있었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장 - 한 시기 한 시기는 중요시하는 상황이 또 달라지는 건데, 적어도 모여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바탕이 어디까지 가 있었느냐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거죠. 사실은 80년이 되니까 주변에 있는 많은 뜻있는, 같이 일했던 친구들 내지는 교회계통의 많은 신부들 그런 사람들은 현실 사회에 나가서 정치 속에서 일을 좀 해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갖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해서 되게 돼 있지를 않더라구요. 이미 김영삼씨나 김대중씨나 그때 당시 정치적인 행태가 이것은 정상적이 아니야.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이미 민주적으로 사회를 이끌어 가겠다고 하는 그 내용에 있어서 누구든지 연령이 몇 살 이상이 되거나 당을 맹글어가지고 출마하면 되는 거고, 그게 민주주의다. 그걸 말리는 것은 독재고. 그런 어법으로써 얘기를 한다면 할 얘기는 없는 것이고, 그러나 주어진 내외 모든 정세상활 속에서 적어도 민력을 갖다가 힘을 모으고 또 그 힘이 뭐냐면, 뜻에 어긋나지 않게끔 하자면 지도자는 경륜이 있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경륜은 저리 가라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내지는 서책에서 배우는 그런 정도의 민주주의 논리 가지고 얘기를 헌다고 했을 적에는 매일같이 싸우고, 악순환 밖에 안된다 이말이여. 그거를 뭐냐면 80년에 어떻게들 했어요. 그러니까 광주항쟁같은 것도 나게 되고 뭐 그런 꼬라지가 되어 돌아갈 적에 있어서는 문제를 다시 보고 은인자중하는 수밖에 없더라 이말야. 또 한가지는 한반도 내부의 그 동안의 역사적인 환경 내지는 조건 속에서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은 이 한반도는 세계 속에 있어서의 한반도고 전 우주 속에 있어서의 한반도다 이말야. 그럼 이제는 문명에 대한 반성과 문명이 우리에게 갖다준 결과가 뭐를 가져오고 있느냐. 그것 속에서 우리 삶에 대해서 땅바닥서부터 다시 정착시켜가는 그런 시기여야 된단 말이여. 그래서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구나. 일차적으로는 공해문제, 또 나아가서는 그러저러한 것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자면 생명문제 이런 문제가 제기돼서 돌아가지 않아 가지고는 않된다. 비록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얘기가 들어 먹혀지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는 그걸 깔고 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80년도부터 그 최열군한테는 너는 환경문제 해라 운동권에서 그러지 말고. 노동운동하는 일각에 환경운동하라고 촉구를 했고 또 한가지는 생명에 대한 운동을 갖다 전개해야 된다 얘기를 했을 때 이해가되는 분들이 별로 없더군요. 그때 당시는. 그러나 머지 않아서 환경문제는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 가지고는 생태계에 대한 전체적인 지혜가 없어가지고는 안되는 얘기거든.
최 - 사실은 그것이 상당히 앞선 정확한 파악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에 따라서 중요성이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어느 때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를 잡아내야 되는 것인데 맹목적인 것이 있었지요.
장 - 예 그렇죠. 김지하 시인이 출옥한 이후에, 재옥 중에 보니까 선생님이 방향을 바꾸셨더군요. 그래서 바꿀 수밖에 없더라. 재옥 중에 있는 너희들 전부 끄집어 낸다는 것도 초미의 문제지만, 여지껏 가톨릭농민회를 통해서 농민운동을 했던 문제라든가 노동자 문제라든가 하는 것이 방법의 문제는 한계가 노출되더라. 방향을 바꿔야 되겄다. 일체 생태계가 바뀌어 농민 스스로가 자꾸 농약 때문에 쓰러져가고 농토가 죽어가고, 이래 가지고는 끝나는 거 아니냐. 그런 방향에서 글을 써야 될끼다. 헌데 안먹을 텐데. 안 먹어도 뿌려놔. 그것이 소위 김지하의 밥이니, 남녁땅 뱃노래니.
최 - 생명사상이 그때 얘기가 되죠. 그렇게 시작돼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거죠. 핍박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민족이라는 문제는 결코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이 생각의 중심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 지역이기주의라든지, 파벌주의라든지, 집단이기주의라든지가 도처에 팽배해 있어요. 민족도 너무 민족만 부르짖다보면 민족이기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요.
장 - 예. 그래서 엊그제도 김지하군이 찾아와서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지방자치에 대한 그 동안의 모든 법, 이것을 다시 재검토해서 지방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철저한 생활운동을 전개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해서 좋은 얘긴데 그건 바로 통일 운동과 직결되는 걸세, 통일이 국가 이익 내지는 국민국가 형태의 이익만 가지고 밀어 붙이고 그 협상이 된다고 했을 적에는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이 상황 속에서 그건 효과가 없게 될걸세. 문제는 진정한 이 땅과 그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어떻게 제대로 처리해 가는 것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 지방자치제의 핵이 돼야 하는데. 그렇게 처리가 되면서 남북의 통일문제도 그 생명에 대한 생각을 구축하는 속에서 얘기가 돼야지. 이것을 국민국가의 어떤 힘만 가지고 힘의 조정만 가지고 이건 되게 돼 있지를 않는 거니까 앞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자네는 그거를 깔게. 그런 얘기를 나눴습니다만, 지금 솔직한 얘기가 아무리 작은 한 마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전세계의 일이요, 전 우주의 일 아닙니까. 그거에 대해서 이해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지금 인제 최선생님이 하시는 남민 같은 이 일이 전북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운동이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전 흐뭇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전북이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거니까 일반 사람들이 작게 보려든다 이 말야. 근데 그게 천만의 말씀이다. 그 자체가 전세계적인 것이요, 전우주적인 것이다. 거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주의 모든 질서와 올바르게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 이게 전제되면 되는 거다 이 말여.
최 - 그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이죠. 저는 그래서 지방에서 하더라도 꼭 지방적일 건 아니다. 우리가 우리 문제를 제대로만 집어내면 이게 우리나라 전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장 - 거기에 대해서 아주 공감입니다. 네, 아주 동의해요.
죄 - 저 개인으로는 한 몇 년 전부터 말하자면 관계의 위기 같은 것을 느껴왔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경험인데, 저 자신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장 근본적인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는가, 가령 통일문제도 끊임없이 듣습니다만 통일 이전에, 저는 전주에 있으니까 예민할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동서의 문제가 있단 말이죠. 동서도 제대로 얘기가 안되는데 어떻게 민주화고 통일을 싸잡아 가지고 그 쪽으로만 넘나드는지 어떤 때는 이해가 안될 때가 있고 그래요. 근본적으로 우리자체의 내부 문제를 동시에 숙고하는 것,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사소한 일이라도 그런 것이 통일에도 관계가 되는 그런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장 - 예. 지금 최선생님 말씀하신 거 전폭적으로 수긍해요. 지금 더러들 통일운동하는 사람들이 온단 말씀이야. 그래서 내가 그래 자네들 통일운동을 북쪽하고 하는 건가 그러니까, 그렇다 이거야. 그러면 국민하고도 통일운동을 제대로 못하면서 무얼 북쪽하고 통일운동을 해, 또 나아가서 남한 내부가 이 모냥 지역감정으로 갈갈이 찢어져 있는데 그 이해관계도 감정적으로 골이 깊은데 그 통일운동도 못하면서 뭐 어디하고 뭐냐면 통일운동을 해? 나는 이해가 안돼. 야권에서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이북의 김일성이를 가서 만나고 왔는데 간다고 할 적에는 뭐냐면 나 갔다 올라요 하고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냐.
최 - 그러면 더 떳떳하죠. 떳떳한 게 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장 - 제 얘기가 뭐냐하면 통일운동은 안에서부터 먼저 시작해라 이거야. 그렇게 해서 경우가 옳음에도 불구하고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됐을 적엔 말이지, 장관이면 장관이 통일에 대해서 잘못된 거다, 이렇게 얘기될 거 아니냐 이말여. 그렇게 됐을 때 자네들이 하고 있는 통일 단체는 말이지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되는거 아닌가? 이것은 반공이다 친공이다의 차원을 넘어서 통일한다고 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결여 돼 있다 이말여. 통일을 통해서 어떤 개인의 명예라든지, 기선을 잡는다든지 그런 따위의 망상은 버려야 된다 이 말여. 근래 몇 해동안에 겪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 또는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해 보면 대개 다 그 지경이라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내면 속에서 자기의 생활이 제대로 돼 있느냐, 거기서부터 풀어서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 있잖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고도 중요한 하나의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 - 제가 지금 생각하기로는 한 개인이 한 개인으로 서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부가 찢겨져 있어요. 저는 마음이나 정신이나 심리가 분열이 되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을 스스로 치유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안되고 어떤 집단과도 괴리될 수밖에 없는 이것이 제일 커다란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건 아마도 문명사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 - 예. 그럴겝니다.
최 - 선생님이 살아오신 자세나 생각들이 저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지금 어떤 면에서는 한 시대가 끝난 셈이죠. 박정희시대부터 노태우까지, 1960년에서 1990까지. 그 시대를 한 가운데서 걸어오셨으니까 선생님도 어떤 감회랄까 그런 것이 있으실 텐데요. 그것은 선생님 개인의 일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의 일이기도 하고 또한 전체적인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선생님같은 경우는 전체와 개인이 중복이 되니까 말이죠.
장 - 글쎄 올씨다. 뭐, 벽돌 한 장 나르는 사람 입장밖에 안된다 그저 그렇게 생각을 평소에 노상하고 있죠. 성실하게 뛰는 사람들이 계속 성실하게 정진하기 바라고 또 잘못가는 사람하고는 문제가 그렇게 되면 안될 텐데 하고 말씀도 건네고, 그렇게 해서 30년을 지내온 걸로 알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나 개인의 몫이 뭐냐 하는 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뭐 지금도 이렇게 시골사람으로 앉아서도 마음이 나 나름대로 편안합니다. 그래서 밖에 계신 분들이 각별히 대접을 하고 얘기를 하고 이렇게 됐을 적에는 도리어 마음이 부끄럽고 그렇죠.
최 - 선생님이 어떤 자세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이겠지요.
장 - 그리고 이거는 우습게 하는 얘깁니다. 그 한참 유신체제가 탄압이 심하고 그랬을 적에는 어떻게 알고래도 외신기자들이 간헐적으로 찾아와요. 찾아오면 박정권에 대한 비정을 얘기해 주심 좋겠다고 그렇게 됐을 적에 거의 참 돌려 보냈죠. 첫째 뭐냐하면 벅정권의 비정에 대해서 자네가 소속하고 있는 신문사에서 제대로 뭐냐허면, 쓴 적이 있느냐? 바로 그 정부가 박정권 갖다가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 거에 대해서 써 본 적이 있는가? 그거 신문낼 때 가져와, 그때는 내가 박에 대한 비정을 얘기해 줄 수 있지만 그러기 전에는 너희한테 그런 얘기할 생각이 없어, 기냥 가주기 바란다고. 아, 지금 탄압을 받고 있지 않느냐 이거야. 내가 탄압을 받고 있는 거 너하고 무신 상관이 있어? 바로 느 나라에서 뒷바라지 해주기 때문에 이게 유지가 되는데 느 잘못되는 거에 대해서 기사 써 놓고 내한테 와서 얘기를 해야지. 그래야 내가 박정희 잘못되었다는 얘기하지, 느 잘못된 건 말도 안하고 말이지, 박정희나 나는 뭐냐면 느 장사거리야? 얘기 안돼. 그것이 뭐냐면 내 기본적인 자세예요.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어떤 때는 목사들이 와서 뭐 지가 인권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저렇게 하는데. 고만 얘기해, 시시한 것까지 인권문제라고 해 가지고 전부 내 걸어서 따불류씨씨(WCC)에 내 가지고 온 세계에 전부 얘기해 가지고 뭐냐면 내부의 치부를 갖다가 밖에다 전해 가지고 사무실을 유지하고 느 밥 먹으면 말이지, 다 인가. 난 그런 거 원치 않아. 차라리 느들이 느 교단에서 박정희 인권문제 탄압에 대해서 정면으로 WCC에 거론하기 이전에 내부에서 먼저 일해. 그러면 WCC에서 양코배기들이 와 가지고 뭐냐면야. 그 어떻게 된거냐고 애기할 적에는 마지못해 얘기 하더래도 일일이 고아 바쳐 가지고 말이지. 생활해 가는 건 말이지 나보기 싫어. 느들 생활을 갖다 우리 겨레의 인권문제를 얘기한다고 하면 말이지 뭐 교회에서 이해를 해가지고 교회형제들, 자매들이 느들 밥먹으라고 돈 주면 말야, 그거는 좋은 일인데 일일이 그렇게 해 가지고 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러니까 일을 처리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뭐냐면 순서가 있단 말씀야. 박정희가 아무리 무서워도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상대거든. 근데 자기 탄압한다고 해서 말이지 그냥 기대는 모습같은 거 있잖아 외국얘들한테. 전부 저놈 좀 죽여달라고 하고 말이지. 이건 백날 가야 자주적인 역량을 뿌리채서부텀 뽑아버리는 거거든, 내 얘기를 하다보니까 좀 지나친 것 같은데.
최 - 아닙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죠. 실은 선생님이 지내오신 그런 경험을 듣는 게 도움이 됩니다. 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 걸어왔냐라는 것은 뒤에 오는 사람들한테는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쉽게 알 수는 없는 거라하더라도. 더구나 일관된 그런 길을 간 분이 어떻게 했느냐 이런 거는 충분히 저희들이 보고, 생각 할 그런 것이 되겠죠. 대학에서는 미학과를 다니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장 - 예
최 - 미학과라면 철학이나 이런 데 관심이 좀 있으셨던 것인가요?
장 - 조금 있었죠. 사실은 뭐냐면 국대안 반대를 했어요. 원래는 서울대 공대 전신인 공업전문대에 들어갔는데 해방되면서 서울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서울대학 초대 총장에 아인슈테라는 미국인을 세우는 바람에 아무리 미군점령하지만은 미군 대령을 갖다 이 조선 땅의, 그때는 한국소리는 아직 안 쓸때니, 이 땅의 총장을 그런 자를 세울 수가 있느냐. 그래가지고 반대를 했죠. 소위 민족진영에서 반대를 했어요. 나중에는 남로당의 젊은이들도 반대를 했지만은 그러다 보니까 제적이 되더군요. 그래 집에 가서 한 일년 있게 되다보니까 친구 분들이 그렇게 들어 앉아있으믄 어떡허느냐, 그래 다시 올라가서 시험친 게 뭐냐면 미학과가 됐죠, 같은 학교는 갈 수가 없잖아요. 그때는 서울대학이라고 해도 갈갈이 다 노나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무정리가 제대로 되서 누군 여기서 제적된 놈이니까 안된다든가 그런게 잘 정립이 안됐을 시대니까. 그런데 그때 이 박사가 권력을 잡기 위해 친일파들과 야합을 하고 더더군다나 일제하에서 독립투사들을 전부 잡아다 가두고 죽이려 했던 고등계 출신들하고 일들은 하고 또 김일성이가 내부에 있어서 벌써 공산당의 누구 죽여버리고, 소련 야합이 되가지고 소련이 조국이니 이따우 소리나 하면서 몰고가고, 물론 남한의 남로당도 거기서는 예외가 아닙니다만. 그러니까 공산당도 그 어떤 그 인도주의적인 어떤 그런 것에 입각해서 얘기되는 그런 것을 살필 수가 없더라고요. 이렇게 되다보니까 어디 뭐냐면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더라고, 그렇다는 것이 나이 어린 사람이 뭐 정치를 할 바도 아니지만 태도는 정해야 할 때거든. 그걸 요구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디 태도를 정할 수가 없더라 이말여. 그거를 오늘까지 겪고 가는 거야요. 오늘 해방된지 48년이 됐다고 얘길 하는데.
최 - 그러나 나름대로는 태도를 정해 오시긴 하셨지 않습니까?
장 - 물론 그건 그랬죠.
최 - 그러면서 그러지 못했단 말씀은 어떤 분명하고 전체적인 태도를 못 정했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장 - 그러니까 뭐냐면 외세에 등대고 한반도의 분단과 한반도 내부에 있어서의 횡포를 자행하던 세력들 그거하고 함께 못했다는 얘기죠. 현실적인 활동과 현실적인 힘은 전부 그 사람들에게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인제 근 50년 가까이를 말이지 만날 그늘에서만 일하는 꼴이 되었지.
최 - 내가 적극적인 그런 일을 못하고 그늘에서 한다 할 때 그런 심경같은 것도 그렇게 밝을 수는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게 좀 더 어렵지 않으셨나 모르겠어요.
장 - 밝지 못했던 시대가 많았죠.
최 - 역대 정권이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장 - 그러니까 저한테는 결정적으로 회색분자, 또 용공분자 이런 식으로 점철되어오는 거야요.
최 - 그런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굴레 속에 있었던 셈입니다.
장 - 이해관계에 있어서 말 잘듣는 사람하고 손잡고 가게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또 그렇게 해야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또 권력을 주시하고.
최 - 사람이 살면서 나름대로 지니는 어떤 기본적인 생각이 있을 텐테요. 생각이 아니면 느낌이나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살아오시면서 지녔던 생각의 중심축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장 - 제게 욕심이 많을 거예요. 한 과정 속에서는 그게 필요해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그게 아니다 하면 그때는 놓고 또 다시 새롭게 가죠. 그렇게 되니까 언제나 소학생 기분이에요. 예. 숙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다 풀지 못한 또 다 해내지 못한 그 학생있잖아요? 그러한 마음가짐이라고 그럴까요. 물론 사람이 자기 한 행위에 대해서 폄하하고 나쁘다고 욕을 하면 기분 좋아 할 사람은 별로 없겠죠.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지금은 누가 뭐 저에 대해서 욕을 해도 조끔도 미동을 안하니까, 그러나 어떤 일을 쭉하다가 아무리 그것이 사회적으로 칭송을 받는 일이라고 하더래도 계속 일을 끌고가는데 있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할 적에는 그 자리에서 놔 버리죠. 언제나 제자리에 서야 한다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 제자리라는 건 뭐냐, 잘못된 자리가 아닌 자리라야 되지 않겄어요? 잘못된 거라면 그 자리에서 놓고 새로 해 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죠.
최 - 지금까지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오신 것도 그렇지만 다시 시작한다는 이런 태도는 어느 한 구석에 상당히 낙관적인 바탕이 자리잡고 있지 않느냐 하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장 - 예. 그렇게 보셔도 좋죠.
최 - 얼마 전에 백낙청선생님께 ‘어려움을 겪어오셨는데도 상당히 낙관적인 것이 있으신 것 같다’고 그랬더니 낙관이라기보다 동물적 낙천성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좀 의외스럽기도 했지만 듣고 보니 좋은 말 같아 보였습니다. 동물적인 그런 것이 생명의 본능같은 것이기도 하구요. 우리의 어떤 의지나 의도를 넘어서서 좋든 싫든 솟아오르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장 - 예. 그렇습니다.
최 - 우리가 상당히 지난한 세월을 보내왔잖습니까? 그런 중에서 기억이 남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저희들이 지나오면서 뼈저렸던 것 중의 하나는 고개를 돌려 쳐다볼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런 인물에 대한 모형이 없을까요.
장 - 글쎄올시다.
최 - 좀 어려운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장 - 지금, 인간이라는게 장점도 단점의 그늘이 있게 되고 또 단점 속에서도 장점이 있기도 하는건데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한 종교인으로서는 그 유신 독재하에서 지학순 주교같은 분도 아주 귀한 분이라고 생각을 하죠. 개인으로 봐서는 굉장히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옳은 거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하고 잘못된 거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분명히 얘길하고, 그러한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한 시기에 두려움을 모르고 그래도 자기 소신을 말씀을 하고 쓰시고, 그 30년 동안의 독재과정 속에서 독재에 대해서 크게 항거하는 힘이 되준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을 하죠.
그분이 안 계셨다면 그 버거웠던 상황 속에서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됐던 많은 분들이 희생이 됐겠죠. 그런 것이 뚫리기 시작을 함으로써 유신체제의 허구가 날이 가면 갈수록 드러나게 됐죠. 그 많은 힘의 저항 속에서 희생된 그런 것을 현장 속에서 보게 되니까. 한 시기 대단히 놀라운 역할을 해주셨다 하는 생각을 하죠. 또 하나는 민청학련사건 자체라든가 그 동안의 많은 사건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때 그 때에 제대로 많이 섰습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일일이 매거하기가 어렵습니다만은 많은 훌륭한 젊은 분들을 겪게 된 것을, 그러니까 주어진 상황에 대항하고 거기서 싸우는 과정 속에 있어서는 아름답고 훌륭한 많은 분들이 있었다하는 것을 얘기하게 되네요. 그래 지금 최선생 말씀대로,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뭐라고 느꼈느냐 그렇게 얘기를 한다면 그 얘기는 한 인물로 해서 집약하기는 참 어려운 얘긴데, 아주 많은 사람을 보게 되죠.
최 - 어떤 정신이나 기가 한 군데로 모인 거 아니겠습니까? 원주라는 도시를 말하는 것도 그런 면에서이구요. 그때는 오히려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명백한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굳굳하게 설 수가 있었죠.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면서 오히려 분열이 되고 중심이 흐트러지는 역설적인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방향의 설정이나 힘을 모아 가는 일에 문제가 일게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말이요.
장 - 적어도 한 시대를 주름잡고 가자면 거기는 경륜이 있어야 돼요. 뭐 일반적으로 얘기하기는 철학, 철학하는데 철학보다 더 높은, 깊게 겪은 삶 속에서의 도리가 있어야 한 단 말야. 그런데 무대정치를 한 사람들이 경륜이 없기 때문에 저 꼬라지를 맹글어 놓는 거거든. 80년도에도 그 얘기고 지금 87년도 얘기가 도로 그겁니다마는 적어도 어떤 개인의 호불호라든가 또 뭐냐면 누가 장악하느냐, 안하느냐라든가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이 시기 속에서는 누가 제대로 서서 일을 하느냐 일을 이렇게 풀어갈 사람이 누구냐? 그 당위에 대해서 사람을 맞춰가야지, 그 당위는 제쳐놓고 사람에다 맞춰서 일을 처리 할라고 할 적에는.
최 - 그런 식으로 되어 왔습니다.
장 - 응,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거지. 바로 그거 때문에 결국은 남한 내부가 지역은 지역대로 갈라지고, 곳곳마다 이거냐 저거냐로 전부 갈라지게 되는 거지. 근데 이것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염치도 없는 거라. 적어도 남의 웃자리에 앉아서 그 시대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말이지, 만인이 자기보고 같이 가 줘야 된다고 얘기를 해도 말이지, 길이 아니면 말야 가질 말아야 되는 용단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자기하고 수십년동안 같이 해 왔던 동지들이 그러지 않으면 너 죽인다고 하면 말야. 그래 느들이 날 죽여도 난 갈 수가 없다 하는 용단이 있어야 된다고. 박정희씨가 얼마나 국민을 속였습니까? 안한다, 안한다 해놓고 말이지, 근데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국민을 속여왔느냐 이말야, 단일화한다고 하면서 말이지, 말도 안되는 얘기지. 경륜이 없는 거라.
최 - 그러니까 그것은 아주 근본적으로 인물의 크기를 얘기하는 거겠지요. 어쨌든 공과가 있기는 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민주화가 상당히 진척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어떤 하나에 매여 골몰하던 그런 긴박한 사정에서 벗어나 시야를 다른 것에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만큼 발전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구요. 이제 90년대에 들어 우리가 한 단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된 것은 사실이지요.
장 - 지금 뭐 이러니 저러니 얘기를 하고 잘못했던 낡은 관행을 갖다가 전부 척결해 가고 그러는 노력을 뵈이기는 하지만 그거로 다 해결되게 돼있지를 않거든.
최 - 새롭다는 면에서 기대를 지니게 하지만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 자체도 민주화나 통일은 여전히 현안의 문제이지만 그런 대명제에 가려져 있던 문제들이 새로이 돌출되고 있구요. 그런 것들이 뒤엉키고 나아갈 방향 같은 것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해나 생태계의 문제는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 - 지금 봐서는 문명자체가 막을 내려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 같은 데 그렇다고 무대의 막이 단시일내에 딱 끝나고 다른 막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렇지는 않지만 산업문명의 기술이라든지 그 속에서의 이윤추구래든지 이런 것에서 맴돌다가는 결정적으로 인류생존의 파국을 가져온다고 봐요.
최 - 이런 것은 이제 어느 한 나라의 일만은 아니게 되었지요.
장 - 현단계의 공동적인 산업문명 속에서 서구라파에서 많이 개발했던 하나의 모범과 경험은 굉장히 허무하게 돌아갈 겁니다. 자연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소모, 소위 성장을 주안으로 하는 산업문제는 그 만큼 지구 자연의 문제라든지, 생태계 파괴라든가 이런 것이 그 만큼 가속화되는 거니까 얼마나 더 견뎌 낼거냐. 수많은 생태계의 종들이 거의 이제는 반수 이상 파괴되고 멸종된 것이 많지 않습니까? 다양한 종들이 존재했을 때 지구는 살아남게 되고 거기에 사는 자연의 하나인 인간도 살아나게 되는데. 그러저러한 파국에 가는데도 불구하고 문명의 하나의 관성은 자꾸 더 성장정책을 갖다가 유지를 해나간다고 했을 적엔 날로 인간이 삶을 의거하는 토대를 지금 망가뜨리고 있으니까. 여지껀 뭐 잘했네, 못했네, 뭐 어쨌네, 싸우고 돌아갔던 그 모든 것은 자연의 생태계에다 축을 두고서 보면 하나의 웃음거리배끼 안되는 거라. 지금 지구 전체가 살아 남느냐, 죽느냐 하는 그런 엄청난 시점에 놓여 도저히 이거는 아니로구나 허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 이야기 나누지 않을 수가 없더라 이 말씀여. 근원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축이 인간끼리의 공생이 아니라 자연생태계하고도 공생하지 않아 가지고는 살아 남지 못한다는 이런 과제에 당면해서 엄청난 자기 반성이 요구되죠. 이러한 일을 어떻게 점차적으로 슬기롭게 풀어갈 것이냐가 요새 제가 일상적으로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최 - 현실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문제이지요.
장 - 예. 그래서 그러한 자연에 축을 두고 살아가는 다양한 움직임들하고 연대를 하고 나아가서, 우리나라 안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연대를 하면서 최소한도 이러이러한 면에서는 더는 자연을 파괴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운동이 가장 중요한 주장이 안되겠는가 합니다.
최 - 현실적인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국가의 예를 들어 대통령이라든가 정책담당자의 환경에 대한 인식이 전체의 틀을 바꾸는데 주요한 요소이지만 아직 거기까지 인식이 미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장 - 그거는 쉽지 않겠죠. 그러니까 정부차원보다는 민간차원의 다양한 운동 속에서 뭐냐면 가령 우리 그룹이 매일 서로 좋아하니까 모인다 그럼 모이는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이건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냔 하는 것이 건전하게 다양하게 자꾸 나타났을 때, 그게 백이 생겨도 좋다 이거야. 그러니까 조직의 통일이 아니라 생각의 통일을 형성해가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죠. 그것이 앞으로 매스컴이 해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최 - 어떤 면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현재 자본주의나 산업주의 속에 있고 점점 더 그 속에 깊이 빨려 들어가는 그런 형편이라 사실은 이런 인간중심적인 운동까지도 점점 더 기능적이 되고 말이죠.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도 굉장히 소원해져 앞으로 더욱 고립이 될 것 같은데요. 저는 이런 인간중심적인 운동과, 물질이나 조직이나 기능으로서의 이런 것과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느냐 이런 게 전혀 정립이 안되고 따로 놀지 않냐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어요.
장 - 독일의 예를 보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토양이 달라 통일의 형태를 이루어 놓고 있지만 원만하지 못하고 많은 무리가 오고 있는 거지. 독일 사람들은 우리에게 통일을 서두르지 말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우리의 통일도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끼리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뭐냐. 그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조건이 뭐냐. 이윤 추구의 과제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라고 봐요. 그걸 자꾸 벗어나고 털고 이렇게 가는 만남과 생활이 소그룹부터 경험이 축적이 돼야 될거다 이거야. 그래서 아까도 말씀했듯이 지방자치제라든가 한 지역에 있어서 조그만 진실한 운동이 자연과 상호관계를 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놓은 그것이 볼 적에 아주 소그룹이지만, 그것이 전 우주와 함께 한다고 하는, 우주와 통일한다고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한 안목에서 문제를 다시 정립시키고 확대해 가야 하지 않겠느냐. 뭐냐면 소그룹들이 자기네 한 지역 지역에 있어서 제각기 다양하게 모습을 들어낼 수 있다 이 말이야. 그런 노력이 앞으로 와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최 - 말하자면 어떤 한 민족이나 어떤 한 시대의 에토스를 어떤 거로 잡느냐하는 이런 문제이죠. 어떤 면에서는 지금 정신이나 마음 이런 것들이 사람간의 일이나 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소외시되어 있지요 정신이 있더라도 정신의 중심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혼돈이랄까 방향의 갈피가 잘 안 잡히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장 - 얘기들은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물질적인 추구라든가 명예라든가 내려오는 사회가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한도 내라고 하든 어떻든 그렇게 뛰고 있는 사람의 안목에서는 뵈지를 않죠. 또 하나는 어차피 현단계에 있어서는 그런 것에 덮여서 작은 그룹은 안보이는 거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가다가는 클 수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시 더듬어 봤을 적에는 작은 그룹들이 얘기하고 있는 그것이 이게 엄청난 것이 아니겠느냐? 그냥 이렇게 딱 들여다보았을 적에는 백날 가야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저널리스트들이 맨날 겉도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영향과 힘이 그런 사람들에게 전부 있으니까 맨날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그런 거나 적잖아. 그러니까 진짜 성실하게 살아가는 거에 대해서는 내놓질 못하는거지. 안방에서 몇사람끼리 얘기한 것들은 밑으로 지하수로서 흐르고 마는 거라. 그러니까 없는 것 같죠. 사람들은 그걸 찾고서 얘기하고 떠들고 하는 거라.
최 - 요즘에 보니까 선생님이 노자에 관한 책을 펴내셨던데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가 태도를 정한다라는 것이나 지금 현재의 전세계적 삶의 문제에 대한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과 노자가 관계되지 않습니까?
장 - 작년 여름쯤 이현주 목사님이 노자강의를 좀 해 주었음 좋겄다고 그래요. 아, 노자의 주해서만 해도 이 짚더미만 한데 일일이 그거 다 내가 볼 수 없고 어떡허면 좋을까? 그러면 참 각장마다 글을 보시고선 느낀대로만 말씀해 주세요. 그럼 좋겄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하고 물으면 대답하고 얘길하고 이렇게 한 것을 아마 집에 가서 정리를 해가지고 내 보자고 그래서 인제 출판을 하게 됐어요. 그걸 얘기를 하면서 한가지 바랬던 게 있다면 모든 기존의 도그마 있잖습니까? 그게 전부 담을 내리고 진실이 전부 앞에서 서로 맞대고 만나고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하고 또 한 가지는 공해 환경 해서 얘기를 하는데 근원적인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을 안하고 계속 공해거리,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는 거리를 맹글어 가지고 안방에서 그 씨레기를 담넘어 냉기는(넘기는) 꼴이다. 그래서 안방에서부텀 생활을 제대로 해 들어가면 말이지, 그렇게 되면 자연히 공해가 없어지끔, 그러한데 대한 근원적인 생각만 서로 교감이 된다면 그러면 노자 얘기가 하는 소임은 다 끝나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이목사하고 해봤습니다.
최 - 노자와 직접적인 관계는 어떻습니까? 원래 관심이 있으셨던가요.
장 - 우연히 소시때 책을 들여다보니까, 좋은 말씀이 많이 있고 문제를 보는 그 근원적인 시각이 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유교계통에서 보면은 입신이 축이 되는데
최 - 인간 삶의 관계가 중심이죠.
장 - 예. 그렇게 되는데, 노자의 그것은 뭐냐면 일체 존재의 근원서부터 자연에 축을 두고서 말씀을 하고 있더라 이 말씀이야. 그런 점은 뭐냐면, 지가 보기에 좋더군요.
최 -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살아오시면서 제일 보람있다라고 생각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거겠습니까?
장 -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헛살았다 하는거 있잖아요. 벽돌 한 장 쌓는 거 그런 심정으로 살았는데, 역시 하고 보면 아 이게 또 별것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아까 백 번도 다시 갔다고 그랬잖습니까? 그것이 어떤 명리를 추구해서 백 번 다시 간게 아니라 일 처리가 이렇게 돼서는 안되겠는데, 이렇게 가야 될 텐데 하게 되면 어제까지 잘못된 것은 놔야죠.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은 그동안 맨날 그렇게 되니까, 그런게 누적이 되니까 헛살은 게 되는 거라. 지난 날 옛날에 큰 선생님이 하신 말씀 같은 거 반추를 해보면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그날 저날 이런 일 저런 일에 매이다 보니까 딴 게 되버린다 말이야. 그럼 또 넘어진단 말이야. 그럼 또 다시 일어나서 가게 되고 아까도 말씀했지만, 지금도 소학생, 중학생기분이에요. 마음은.
최 - 그러니까 그 말은 끊임없이 근본은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장 - 글쎄요. 뭐라고 얘기를 할까요. 나 스스로가 모자르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자꾸하게 되네요.
최 - 몸도 안 좋으신데 너무 오래 앉아 있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이나 뵈려고 왔다가 그만 제 욕심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앉아 있기도 괴로우실텐데 이렇게 하나 하나 진지하게 말씀해 주셔서 뭐라고 고마움을 표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남민 제5호(1995)에 실린 인터뷰 기사 - 실제 인터뷰는 1993년도에 이루어졌음
- 전북대학교 영어영문과 최준석 교수님께서 1993년 무위당 선생님의 자택에서 대담하신 글이 실린 [남민5]호(1995년 발행, 편집인 최준석)를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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