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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조도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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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조도에도 산성(山城)이 있었다.
조도사랑회 추천 0 조회 46 09.05.18 16:2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조도에도 산성(山城)이 있었다.

 

위치: 조도면 동구부락 뒷산.

 

 島嶼文化 (제2집 목포대학 도서문화연구소 1984.11 발행) 鳥島의 遺蹟 遺物 5, 기타 유적에

「한편 城址(성지)는 여미리 동구부락 뒷산에 있는데 조선 肅宗(숙종)32년(1707)에 土城을 쌓고 일부는 石壘(석루)로 270㎝ 정도 쌓은 성으로 西海守備(서해수비) 要衝(요충)이었으나 조선말에 廢墟(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도에 鎭(진)을 설치했다는 근거가 된다. (조도관방, 맹성관방)  현 상태는 石築이 일부 남아 上部幅(상부폭)이 60㎝ 높이가 80~95㎝로 산 주변 300m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현 주민은 지금도 이 산을 “성(城)재” 혹은 “성고개“라 부르고 있으며 이 ”성재“에서 동남쪽 아래는 동구 부락이고, 서남쪽아래는 율목 부락이며 북쪽으로는 해안이 있는데 ”防直기미“라 부르니 兵船(병선)이 정박한곳이 아닌지?

 또 동구에서 여미로 가다가 돈되봉(통신공사)으로 올라다 보면 빈대기(가파른 언덕)가 있는데 이를”성안 빈대기“ 라 한다.  여기에도 성을 쌓은 흔적이 있고, 통신공사가 있는 돈되봉에는 봉수대가 있었으니 이곳에 진을 설치한 흔적들로 보인다.

 

  동구리 사는 박철주씨(76세)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 어렸을 때는 성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높았는데 해방 후 소(牛) 보는 목동들이 올라가서 돌을 허물어 버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한다.

 

  이분이 옛날 어르신들에게서 듣는바에 의하면 해적이 들어오면 산에서 돌을 구르고 방직기미의 모래를 가져다가 고춧가루와 석어서 동풍을 이용하여 날리면 눈을 못 뜨고 도망 갔다한다. 또 방직기미 장불(풍치림)에서 人骨이 많이 나왔다는데(동구 박철주, 박신옥, 김장주 證言) 이는 외침이 많았던 것이 아닌지 앞으로 연구할 자료이다 그리고 서거차 이장의 면지 자료에 의하면 서거차도도 이런 산성이 있는데 외침이 오면 산성으로 도망쳤다 하니 .옛날에는 섬섬마다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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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7년 조도에 맹성관방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인지 의문(이곳과 아떠한 관계가 있는 지)이다.

  2003. 2. 17. 조도면 사무소 총무계장 박종득씨와 대한노인회 조도분회장 박종휴씨와 나 새사람이 동구부락 경로당회장 박철주씨(1928년생)를 모시고 이 城을 확인 차 동구리 뒷산을 올랐다.

 

  현재는 산에 나무가 많이 자라서 그 전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城 일부만 보였다. 박철주씨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 어렸을 때는 성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높았는데 해방 후 소(牛) 보는 목동들이 올라가서 돌을 허무러 버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한다.

  이분이 옛날 어르신들에게서 듣는바에 의하면 해적이 들어오면 산에서 돌을 구르고 방직기미의 모래를 가져다가 고춧가루와 석어서 동풍을 이용하여 날이면 눈을 못 뜨고 도망 갔다한다.

  여기에서 네 사람은 그때 성을 쌓을 당시 상도주민은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하고 전 면민이 동원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또 동구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2004. 7. 20. 제주 관광 여행 중 뻐스 내에서) 방죽기미 (방직기미) 모래사장에서 人骨(사람의 뼈)가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모래가 어떤 영문인지 바다로 나가고 없으나 옛날에는 위 풀밭까지도 덮어 있었는데 여기에서 사람의 뼈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인골과 산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떤 싸움이 많이 있어서?

 또는 해적 혹은 倭寇가 침범하여 주민을 虐殺 하였던가? 등 의문이 많이 생긴다.

제보자 김 장 주(71세) 허 안 당 (80세) 박 신 옥(71세)

 

  2004. 7. 27. 화요일. 11;30 조도면사무소 앞에서 동구 박철주씨를 만나서 위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人骨이 나온 곳을 불등이라 하는데 자기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 인데 옛날에 왜구가 처 들어오면 왜놈은 총 칼로 싸우고 조선사람은 활과 돌을 구르고 고춧가루를 모래를 섞어 뿌리고 싸?는데 왜놈이 고춧가루에 눈을 못 뜨고 도망을 첬다 한다,

 이 人骨은 그때 죽은 왜구의 屍體와 조선사람의 屍體라 한다. 지금 동구부락 여자들도 들어서 알고 있다.

 

 고려말 왜구의 창궐로 진도가 40년간 관아를 영암 시종면으로 옮길정도라면 우리조도는 어떠했겠는가.

 이런 연유로 산성까지 샀지 않았는지?

 

 

 요즘 듣는 바에 의하면 돈대봉에 주차장을 만들고 돈대봉 오르는 길을 확장한다 하니 이산성도 잘 보일 수 있도록하고 산성을 복원하였으면 한다.

조사자   장 호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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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2.13 11:55

    첫댓글 우리동구리 사람들은 성재라고 부른다, 어릴적에 많이 가보았는데 성의 밑부분은 지금의 서울의 성곽처럼 네모로 잘 다듬어진 큰돌로 잘되어 있어서 어떻게 공사를 하였을까 그랬었다, 그때는 나무가 없어서 누가 금방 보아도 큰 성터임을 알수 있었다 40년 전이다 그리고 70년대에 성터 가운데다 헬기장을 H자로 크게 만들었다 , 이성터에 관심을 갖고 관광명소로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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