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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부인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http://cafe.daum.net/cgsbong/21mv/7177?q=%BF%C0%C3%B5%C3%E6%C3%BB%BC%F6%BF%B5
* 아래의 글은 부족한 제가(충남 성환읍 율금리 도원이화아파트 꿈이있는교회 담임목사이기에, 동기목사님인 빙도 목회자 부부의 농촌 선교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을 받아서 수개월 미인도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여 발표한 내용입니다. 2012년 12월 한국농촌관광학회<장소:한국농촌경제연구원대회의실>에서 발표한 원고임을 밝힙니다. 아무쪼록 목회의 쉼을 위해, 빙도를 찾아주세요(미인도=낙동4리, 이장님이 목사님사모님)
도미부인문화관광코스개발에 따른
『도미부인설화의 역사성, 지정학적 고찰』
발표 : 최종천 박사(전, 성민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Ⅰ. 들어가는 말
본 연구자는 도미부인문화관광코스개발에 따른 도미부인설화의 역사성, 지정학적 검토를 통해 관광산업의 육성과 문화컨텐츠의 경제적 기대에 관심을 가져왔다. 또한 그 동안 도미부인설화에 관한 연구들이 대부분 추정에 불과한 내용이 많은 관계로 정절과 의리에 대한 역사성을 밝힐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이 글은 삼국사기 48권 열전에 실린 김부식의 도미부인설화의 정절에 대한 역사성과 도미부인의 이야기가 펼쳐진 한반도의 지정학적 고찰을 함으로써, 도미부인설화의 배경을 이해하고 도미부부가 만난 ‘천성도’, ‘도미항’을 포함한 도미나루’ 등을 백제시대 당시의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밝힘으로써 한국관광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여기에서 삼국사기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로 설정하고, 비록 왕과 백성의 통치와 삶을 조명하는 식의 역사적인 설화를 그린 도미부부의 설화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지정학적 고찰을 통해 ‘천성도‘가 빙도(미인도)일수 밖에 없는 타당성을 밝히고자 한다.
Ⅱ. 지정학적 고찰
1.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장소 : 도미나루와 도미항
경기대학교박물관. 하남시(하남도미나루유적, 한국사연구휘보, 제122호)는 팔당대교에서 팔당댐간 도로개설 공사 구간내의 지표조사에서 도미나루의 위치를 ‘두미머리’일 것이라고 했다. 물이 흘러서 모이는 곳이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두물머리’라는 설명인데 이는 도미부인이 나룻배를 타고 가는 방향이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서 한강으로 흐르는 곳이다. 두 물이 만나는 머리는 지류가 좁아지고 흘러 내려가는 지역은 넓은 강줄기가 된다. 백제 당시 한성의 위치는 오히려 두물머리 보다 훨씬 아래쪽인 남한산성이나 풍납토성 또는 하남시 일대가 되기 때문이다. 지리적 위치가 맞지 않고 두물머리에 대한 해석으로도 맞지가 않는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도미부인과 남편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 꼴이 되기 때문에 배가 어디선가 내려온 것과 배치되는 것이다. 팔당대교에서 팔당댐 사이를 도미나루로 보는 것 또한 물의 흐름이나 지형적으로 전혀 맞지가 않는다.
다음은 ‘음’이 동일한 ‘도미진을 가지고(그러나 여기서 도미는 도미(都彌)가 아닌 두미진(斗迷津)이다.)’ 도미나루를 추정한 도수희교수의 연구를 살펴보자. 하남문화원에서 열린 ‘도미설화 학술대회’(2009. 10. 31)에서 도수희교수는 ‘도미전설의 발원지를 찾아서’를 통해 백제 전기 시대의 수도에는 북부와 동. 서부를 흐르는 한강이 있었고, 이 강변에는 네 개의 나루(도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가 있었는데 네 나루이름 중에 ‘도미’와 음이 동일한 것은 ‘도미진’ 밖에 없고, 「용비어천가」, 「세종실록지리지」, 「대동여지도」등 여러 사료들을 통해 광주의 동북부인 하남시 북부의 나루를 두미진(斗迷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음’상 두미진을 도미나루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첫째는 도미의 성인 도(都)씨 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둘째, 백제 전기의 수도가 북부와 동. 서부를 흐르는 한강이고 검단산 아래일 것이라는 것은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 아래 지역이기 때문에 도미부인이 개로왕을 피해서 배를 타고 가다가는 지류가 하류로 흐르기 때문에 더 군사들에게 발각되기 쉬운 곳이 된다. 고려사 권 55의 신우 11년 7월 경진조의 광주 검단산 도미사(度迷寺)라는 기록과 태종실록 두미진 해동지도의 광주부 지도에 두미진(斗迷津)이 나온다고 해서 도미(都彌)의 이름과 성을 부정하는 식의 도미나루 주장 또한 전승사적인 역사설화의 성격상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성주도씨 문중의 주장이다. 성주도씨 경모록에서는 한강 하류, 족보에서는 보령시 웅천면이 도미설화에 등장하는 천성도라고 주장했다. 도미부부가 강원도 바닷가를 경유해 가야국인 진해시 일원으로 내려와 도씨의 원조가 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는 고구려로 도망가서 살았다는 설화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이다. 당시 신라와 고구려는 백제가 황해도와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원도를 두고 신라와 고구려가 신경전을 피며 전투를 벌였던 상황과도 일치하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성주도씨는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을 1세조로 밝히고 있다.
도미설화의 전승 양상에 대해 발표한 최운식 교수(1996)가 충남 보령과 경남 진해에서 얻어낸 구전 자료 내용을 비교해 보면, 보령 지역의 구연자들에게서 도미가 목수, 진해 지역의 구연자들은 왕과 가까이 지내는 부자와 정승, 도미 아내가 도망하여 배를 타고 남편을 만난 곳이 보령 자료는 서해 또는 원산도, 진해 자료는 김해 청안동과 가덕도였으며, 남편과 만나 함께 산 지역은 보령 자료는 어느 섬과 원산도, 고구려로, 김해 자료는 청안동과 가덕도라는 채록을 얻어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설화가 이야기의 구조를 가진 서사문학이기에 흥미 본위가 되면서 부담 없이 전설이나 민담 형식으로 교훈을 심어주는 것이 구비문학의 특징이기도 한 이유이다. 그런데 최운식은 도미설화의 내용과 일치되는 전승지역을 구체화시켰다. 김해 보다는 서해안에 위치하고, 당시 고구려와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백제가 도미설화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김헌선 교수(2010)는 “도미 구전설화의 의의와 활용“연구에서 도미 구전설화를 천북면, 오천면, 청소면 거주자에게서 채록을 통해 도미항, 상사봉 등 구비전승의 법칙에 맞는 지명전설과 미인도와 전마뜰 등 도미설화의 이야기 진실성이 선명하게 집약된다고 하면서 전설적인 증거물이 강력한 형편이라고 하였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장소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떠난 장소가 혼란스럽고 떠난 장소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비탄에 빠져 슬피 울면서도 부부가 다시 재회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떠난 나루에 대한 지리적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청소면과 오천. 천북면 일대에 전해지는 구비전승에서도 분명 도미항, 상사봉, 전마뜰 등도 훌륭하게 도미부인설화의 무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강력한 설화의 증거물을 통해 지리적 설명 또한 충분히 보완해야 마땅할 것이다.
더구나 이채로운 사실은 삼국사기의 도미부인설화의 내용은 민담이라거나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보면, 그 내용과 등장인물, 지역이 너무나 명백하게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는 점이다. 특히 삼국사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등장하고 유학이 발전한 삼국시대 당시, 정절을 시험하고 왕의 권력을 행사하였다는 점, 천성도라는 섬과 고구려가 지역으로 명시되었다는 점 등이다.
본 연구자는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두 눈을 뽑혀 떠난 남편과 만난 곳이 도미항으로 전하는 곳이 이곳 오천. 천북 일 가능성이 아주 충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부인의 절행을 굳게 믿고 왕의 보복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눈까지 뽑힌 남편 도미가 배를 타고 아무데나 흘러갔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미와 도미부인이 다시 만나는 장소는 서로가 잘 아는 장소일 것이고, 고구려로 가서 살 상황, 서로가 아는 천성도에서 만나 떠났다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단지 연구자들은 수난을 당한 도미나 왕에게 거짓을 아뢴 도미부인이 탄로가 날까 봐 몰래 떠난 곳을 한성의 어느 섬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어왔다. 오히려 뱃길이라든가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또는 알고 있는 장소의 섬에 대해서 지금까지 연구가 부족한 상태이다.
2. 회이포와 도미항(오천면 교성리)
백제시대 보령현의 수비성(守備城)이었던 이곳은 상사봉을 뒤로 하고 있고, 예전에는 큰 배가 광천포구로 드나들 때 미인도 앞을 거쳐 갔다. 천수만이 만들어 지기 전에는 지금 충청수영성이 있는 오천항과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사봉과 관망대에서 충청수영 원산도 미인도(현, 빙도)를 관망하면 지금도 그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니 해유시화첩, 일성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최고의 명승지라고 극찬했고,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서는 ‘세상에서 호수, 바위, 정자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라고 할 만큼 미적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미인도는 그래서 오늘날 관망대에서 내려다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운데, 천수만을 막아서 수면이 낮아지기 전에는 더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빙도의 도미부부의 사랑과 도미부인의 정절과 아름다움, 의리는 자못 소문이 나고 쉽게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인도(빙도)로 연결된 다리 밑 해안가에서 바라보면 오천항은 말 그대로 큰거북이 또는 자라 오(鰲)에 내천(川)이라는 글자처럼 큰거북이 형상을 지니고 있고 시냇물이 흐르듯 바닷물이 흘러간다. 빙도는 한폭의 수채화를 그려 놓은 모습으로 백제 당시 회이포라는 말처럼 물이 돌아서 홍성 광천포구를 넘나들며 회이포로 모여 나갔으니 자연 그 모습을 보고 도미항이 전승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도미가 배를 타고 남편과 함께 고구려로 갔으니 이곳이야 말로 미인도 설화가 된 것이다. 따라서 미인도는 천성도를 떠나는 도미나루가 되기에 지역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충분한 위치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본 연구자가 17년 전 이곳 미인도(빙도)를 찾아올 때와 13년 전 왔을 때 모두 나룻배를 타고 들어왔는데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번 일어났다. 그러나 그 때도 밀물과 썰물과는 상관없이 도미항 주위 수면의 높낮이가 나룻배가 다니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도 심하고 썰물 때는 바닷물이 서해로 많이 빠져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곳 미인도 주변 도미항과 눈앞에 펼쳐진 충청수영 오천항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오늘날은 천수만 때문에 바닷물을 뺏다가 들여보냈다가 하지만 당시는 바다 바람도 거세게 불어오기도 하고, 나룻배를 타고 있으면 회이포라는 이름처럼 물살이 밀어대고 돌아서 나가는 특이한 현상을 지켜본 기억이 있다.
자연 당시 도미부인이 고구려로 떠나기 전 고향에 대한 이별의 한을 가슴에 담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았을 것이고, 조류의 영향이 별로 없는 이곳 천성도와 도미항에서 바닷물이 흘러가는 것에 몸을 맡기고 원산도와 안면도를 통해 북쪽 해미와 서해 바다를 항해하며 고구려로 갔을 것이다.
3. 천성도(泉城島)
미인도(빙도)가 천성도라는 지리적 위치를 어떻게 확인하느냐가 중요하다. 미인도(빙도) 북쪽 바다에 샘이 솟아 흐르는 곳이 있다. 이곳은 마을주민들이 가뭄이 심할 때나 조개나 게. 맛을 잡고 나올 때 솟아 나오는 큰 샘물에 몸도 씻고 때로는 옷도 빨곤 했는데 지금도 예전 그대로 남아서 여전히 샘이 솟아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은 축이 쌓여져 있던 것이 많이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본 연구자는 1995년 현 빙도마을대표인 김문희이장부부와 함께 이곳을 방문해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맛을 양동이로 잡아 나오면서 솟아 흐르던 바다의 샘물로 씻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 물은 바닷물이 조수간만의 현상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입에 들어가는 그 샘물의 맛은 바닷물처럼 짜지 않고 무척 맛이 있는 물이고 차가운 물이었다. 특이하게 샘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오르며 그 양이 제법 상당했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갈 때 바라본 광경은 그야말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본 연구자가 미인도(빙도)에서 가장 연세가 높은 어른에게 미인도(빙도)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샘에 대해 질의를 하여 몇 가지 채록을 하였다. 어르신이 시집와서 미인도 서북쪽 딴섬 쪽 위치에 있는 이 샘에서 솟아 나오는 샘을 길어다 드시고 빨래도 했다고 하셨다.
두 번째로 샘이 나는 곳은 미인도(빙도)에서 큰산으로 통하는 섬 동쪽의 큰산(59.9m) 중간 높이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빙도녹색농촌체험관에서 동쪽 큰산을 향해 비스듬하게 500미터 걸어올라 가면, 마을을 지켜준다는 신을 모시는 당집 돌축이 보이고, 다시 300미터를 산 중턱길로 걸어가면 그 곳에 샘이 솟아나 흘러내리는 샘이 있다. 높이는 약 해발 30미터 정도 되고, 정상의 고도와는 20미터 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함께 지표조사에 나선 70대 어르신에게 채록을 위해 질의를 하였더니, 어르신이 시집 왔을 당시 마을 주민들 모두(예전에는 미인도 마을에서는 빨래하기 위한 샘 따위를 파서 이용하지 않음) 이곳 산 샘터에서 빨래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샘의 양이 많이 흘러나와 서로 마주보며 빨래를 했다고 하니 참으로 미인도가 샘이 터져 나오는 신기한 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샘이 나는 곳은 두 군데가 더 있었다. 그 중 한 곳은 금광을 캔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금광굴 위쪽에서 흘러내렸고, 나머지 한 곳은 미인도 큰산 동쪽 해안 급경사지역에 있는 곳으로 미인도에서는 이곳을 애난고랑 봐살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샘 역시 산중턱에 위치하였고, 증언하여 채록했더니, 샘의 깊이가 시커먹게 깊고 무서울 정도로 깊어서 혼자 빨래를 하면 겁을 먹었다고 했다. 오늘날은 집집마다 물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서 지금은 이 샘터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인도(빙도)는 두 개의 산이 있다. 섬의 동쪽에 큰 산(59.9m)이 있고 서쪽에 작은 산(49m)이 부부가 마주보듯이 마주하고 있다, 서쪽의 작은 산에는 샘이 나는 곳이 없는데 유독 동북쪽과 동남쪽의 나지막한 큰산 중턱에서 수많은 양의 샘물이 솟아 흐르는 현상이 나타나니 참으로 기이하다. 이러한 현상은 수천년, 아니 수 만년 이상 계속되어 왔을 것이다.
한편, 도미부인이 태어났다는 섬 미인도(빙도)의 기이한 현상은 삼국사기가 쓰여지기 약 700년 전 저자 김부식이 이 섬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후기 문신 이유원이 1871년 총 39권 33책으로 쓴 임하필기(林下筆記) 문헌지장편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보령현 서쪽에 있는 고밀도의 관은 중국의 사행들이 왕래하던 정관이며, 송나라 흠종이 등극하였을 때 김부식이 하사(賀使)가 되어서 배를 탓던 곳에 모두 정관들이 있었는데, 동주의 여러 곳들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경기도 서북부인 개성에서 배를 타고 송나라 수도인 변경(汴京 )으로 사신(使臣)이 되어 등주로 가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황해도를 통해 안흥정 등을 통해 보령현 서쪽에 있는 안면도에 중국의 사행들이 머물던 정관에서 송나라 흠종을 만나러 간 곳이다. 2005년 11월 문화재청이 원산도 인근해역에서 고려시대의 비색청자조각 1,000여 편이 나왔다고 발표한 적도 있을 만큼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안전한 바닷길이었고, 상시 배가 다니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김부식이 여러 차례 중국 송나라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당시 대회이포였던 이곳 오천 앞바다는 그가 드나들던 장소였던 것이다. 사실 김부식은 묘청의 난(1135년)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집현전 대학사에 오르면서 이 때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나라에 갔는데, 그가 곳마다 송나라 예전 담당이 극진히 예우했고 세 번이나 예위를 관장하여 송나라 선비들을 얻었다는 기록도 중국 측 자료들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김부식은 중국 송나라로 임금의 편지를 가지고 사신(使臣)으로 수 없이 다니던 해미-안면도-원산도의 바다여행을 다니면서 당시 샘이 많이 나는 특이한 미인도의 도미부인 정절이야기와 ‘천성도’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막연히 천성도는 고구려 땅일 것이라든가, 한강 동쪽이나 하남시 일대의 어느 지역일 것이라든지 하는 추측은 이야기 구성상이나 지명 인식 상 막연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추청일 뿐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천성도’는 역사적 지명이고 사실에 입각한 섬인 셈이다., 천(泉)은 샘 ‘천’이니 샘이 나오는 섬이 천성도가 되는 것이고, 성(城)은 예전에, 적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담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구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런 지역이나 지형을 보고 이름이 불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쉽게 풀어 설명을 하면, 샘이 나오기로 유명한 섬에 성이 보이는 곳을 ‘천성도’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재 성(城)이란 뜻은 ‘성을 쌓다’라는 의미이고 ‘흙을 쌓아 올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솟아오르며 흐르는 바다 샘이 섬 주민들이 마시는 물로 사용되었으니 자연 샘 주변에 진흙이나 주변 황토로 쌓아 올렸을 것이다. 물론 이 근처의 오천지역에 샘이 나는 곳이 있긴 했어도 지역 자체가 샘이 많지 않고 물이 귀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샘이 나오는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성을 쌓았다가도 물이 나오지 않아 성이 쓸모없게 되자 성을 옮겨 쌓기도 한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도미부부가 살던 백제시대 당시 우물물이 충분하게 나오거나 샘이 고이는 지역이 아니면 사람이 살기 어려웠고 빨래나 목욕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미인도(빙도)는 샘이 산에서도 솟아 흘러 넘쳐 내리고, 바다에서도 솟아 흘러 넘쳐나니 얼마나 사람들에게 귀한 섬이 되었을까를 짐작해 본다. 김부식 당시 소문이 났어도 많이 났을 섬이라고 여겨진다.
이미 그 전에도 이 지역은 백제 개로왕 당시 중국과 무역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수시로 배가 드나들던 곳이었다. 평상시 수심이 12m가 되고 썰물 때도 6m이상이 되어서 무역선이나 감시선 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백제시대 이곳을 회이포(回以浦)라고 불렀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물이 돌아서 나가는 포구를 가리켰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성을 쌓고 띠 대(帶)자를 붙여서 대회이포(帶回以浦)라고 했다. 섬과 육지가 띠를 두르고 물이 돌아나가는 포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소문 또한 쉽게 퍼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육로로는 큰길이 오늘날의 보령-오천(충청수영)-홍성으로 나 있었다. 이 육로로도 도미부인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4. 편호소민(編戶小民)
도미의 신분은 편호소민인데 어떻게 비자를 거느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학자마다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도수희 교수는 ‘조석(朝汐)’으로 대면하는 벼슬자리에 있는 고관(高官), 곧 정승(政丞) 반열에 있었던 신분‘으로 추정했다. 도수희 교수의 추정대로라면 김부식이 도미설화에서 도미를 비자를 거느린 정승이나 고관이라고 했어야 맞는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편호소민이라고 한 것이 김부식 스스로 민담이나 우화에 가까운 자료편집을 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양기석 교수는 도미를 ’비자를 거느린 부농에 가까운 자영농민‘으로 보았다. 이는 당시 농업이 발달하고 상업으로 먹고 노는 호등제에 의한 양빈부(量貧富)’를 통해 세금을 거둬들이는 제도에서 호별 분화가 별 차이가 없어지고, 결국 호등별 재산의 차이를 세재에 반영 못한 당시의 세제를 이해한 견해이다. 이것이 오히려 사기 48권 도미전에 나오는 편호소민의 성격이 분명 비(婢)를 거느린 것이 분명하고 , 도미의 신분은 비록 일반 백성에 편입된 사람이지만 경제적 부를 가진 소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신분상의 모습은 당시의 삼국이 농업발달과 함께 부의 축척에 따른 삼국의 약탈전쟁이 늘어난데 기인하는 것이다.
도미부인의 정절 이야기가 등장한 시기, ‘농업이 보다 중시되고 그 생산력 수준이 점차 향상되어 갔던 것은 삼국과의 전쟁양상에서도 알 수 있다. 대농업지대인 대방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점령과 백제의 이 지역에 대한 병합 시도, 그리도 이어 고구려가 백제의 한강유역 농업지대를 국력을 기울여 점령하는 사태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는 영토확장을 위한 각축전쟁이 치열했던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백제와 치열한 정복전쟁을 하고 영토를 확장하고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유언을 받들어, 남하정책에 의해 475년 한강유역(경기도 하남시 일대, 서울시 강동구 일대)을 빼앗고 개로왕(21대)을 죽인 시대 분위기 전반을 반영하고 있다. 앞서 근초고왕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전지역과 강원도, 황해도 일부까지 영토를 점유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유학을 발전시켜 놓음으로써 공자의 유교사상이 백제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도비부인이 살던 시대 이전에도 이미 백제는 인(仁)과 예(禮)를 근본으로 삼는 유학(儒學文)이 발전되어 일본에 유학과 경전에 소문난 왕인(王仁)박사가 태자 토도추랑자의 스승으로 활동한 예가 있고,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五經)박사와 전문에 관한 박사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는 고등교육의 제(制)가 활발하게 운영된 나라이다.
이러한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통치한 개로왕(455-475년 재위)이 도미부인의 정절을 시험하고 도미가 개로왕에게 아내의 정절을 철저히 신뢰하는 믿음을 답변한 것은 자못 당시 유학사상의 가치관을 둘러싼 시험이며, 왕의 만행 또는 권력행사였고 그에 대한 도미와 도미부인의 응전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삼국이 각종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을 일으키고 특히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한 토지와 사람을 점령하는 시기에 4.5세기는 호(戶)의 분화(分化)가 법제적인 규정이 대상까지 등장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호의 사회경제적 분화에 대한 기사는 ’5세기 초 장수왕 때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의 수묘역 관계기사에는 일반민의 호별 분화가 지배층에 의하여 크게 인식된 상황을 보여준다. 이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수묘인은 지금 이후로 서로 팔 수 없다. 비록 부유한 자(富足之者)라도 역시 함부로 살 수 없다. 명령을 어기고 파는 자가 있을 시는 형(刑)에 처하고 산 자는 수묘(守墓)하도록 한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이 내용은 지금까지 수묘인 중 신분이 천하다고 생각된 간연(看烟)을, 귀족들이나 국연(國烟)이 매매하는 사례가 있어 그것을 금지하는 제(制)라고 보아왔다.
김기홍(2008)도 5세기에 살았던 백제의 도미도 ‘편호소민(編戶小民)’이나 비(婢)를 거느리고 있었던 사례가 있어 참고 된다고 하였다.
위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부족지자(富足之者)’에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백성 가운데 여유 있던 자들도 포함될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들이 수묘역 체계에까지 경제적 힘을 나타나게 된 것은 주목할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와 백제에서 5세기 말과 6세기 초에 각각 ‘유식백성(遊食百姓)’에 대한 귀농정책이 실시되었음에 유의할 바가 있다. 농업의 발달과 백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삼국전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상류계층으로의 신분상승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변동이 있었다.
비록 도미가 편호소민(編戶小民)이나 비(婢)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백성도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되면 경제적인 능력을 가진 백성으로 성장하여 호에 편입되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호민(豪民)의 성격에 가까운 사회적 지위가 있는 편호소민이고 경제 살림 규모가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앞서 밝힌 대로 충남대 도수희 교수가 ‘도미전설의 발원지를 찾아서’라는 발표에서 도미의 신분은 편호소민(編戶小民)이 아니라 정승 반열의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라든가,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1940년)라는 단편소설에서 도미를 백제 서울에서 유명한 솜씨가 있는 목수로 인정받아 대궐을 짓는 목수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 작품화 한 것은 아무래도 민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 구성에 사상적 기반을 두려하지 않았나 싶다. 박종화의 목수이야기는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성이 결여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도미사회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을 한 김윤우 교수(2003) 역시 도미가 죄에 연루되어 평민 신분의 민간인 호적에 편입된 몰락한 가문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추정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5. 정절 시험
우리는 영토확장이 한창이던 삼국시대 당시 시대상황에서 과연 한가로이 삼국사기 기록상 대왕으로 호칭 받던 개로왕이 도미부인의 정절을 시험하기 위해 도미와 내기를 할 수 있나 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고 고병익교수(1976)가 삼국사기 편찬의 책임을 맡은 김부식이 기본적인 논점, 서술 방향 등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음을 지적했다.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년)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는 그의 나이가 70세가 되었을 때이다. 유교경전에 능하고 늘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사고방식으로 저술한 삼국사기는 기이한 일이나 허무맹랑한 예기는 아예 집어넣지를 않고 사실에 가까운 사료만을 정리하여 수록했던 것 같다. 도미의 성씨가 도(都)씨인 점이 그렇고, 지명과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점, 도미의 눈을 빼고 작은 배에 태어 강물에 띄워 보낸 점 등이 이곳 물살과 지형에 의한 회이포를 통해 미인도(빙도)에 배가 당도할 수 있었던 역사적, 지리적 사실성을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1924년 발행된 잡지 개벽, 제46호에서 ‘도미부인, 충남에서 산출하였다.‘라고 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Ⅲ.나가는 말
지금까지 본 연구자는 도미부인설화의 역사성, 지정학적 검토를 통해 도미항을 조명해 보면서 도미나루를 추정하는 선에서 연구를 머무르지 않고, 충청남도 관광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오늘의 빙도(미인도 : 천성도)가 도미나루가 되고 도미항이 되고 도미부인의 상사봉 등의 백제 당시의 역사적. 지정학적, 특히 지리적, 조수현상에 대해서도 밝혔다. 또한 본 연구자의 지정학적 고찰을 통해 충청수영이 자리 잡던 회이포와 바닷길, 무역이 활발하고 중국측 사신과 김부식이 만났던 원산도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이 지역에서 삼국사기 ‘천성도’ 가 막연한 지명이 아닌 지리적으로 미인도(빙도)가 된다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비자(婢子)를 거느렸을 만큼 경제적인 부호였던 도미부부가 경제적 신분상승의 전환기에 편호소민(編戶小民)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살펴보았다. ‘천성도의 위치에 대해 지정학적으로 바다와 산에서 샘이 솟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농업이 발달한 삼국시대 당시 어느 정도 부를 누리며 일정기간 살았던 도미부부의 미인도인 빙도, 미인이 태어났다는 천성도가 오늘날의 빙도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나갈 때 보령시의 도미부인 선양사업을 통한 도미부인관광코스는 하남시와 서울시 강동구, 송파구의 도미문화행사의 열기에 맞추어 훌륭한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
한편, 도미부인의 관광코스를 본 연구자가 몇몇 분들과 관광코스를 개발하면서 이렇게 결론지어 본다. 도미부인의 상사봉-도미항-도미나루-정절사(도미사당)-도미부인의 고향인 빙도(미인도)-천성도 유적지역-오천항(도미부인이 흘러 돌아가서 저절로 원산도와 안면도 뱃길을 통해 고구려로 떠나간 백제시대의 회이포인 충청수영성)이 그것이다. 이제 올해 개발한 도미부인문화컨텐츠 관광코스와 함께 도미부인이 태어났다는 빙도(미인도)와 보령시와 충청남도의 경제적 소득창출은 물론 자라나는 세대에 귀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김부식이 기록한 삼국사기는 왕과 백성의 삶을 역사적으로 다룬 역사기록이고 구비전승의 배경이 분명한 이야기라는 점을 연구자와 모든 독자들이 가슴에 새겨야만 도미부인과 도미의 숭고한 정절과 의리가 농어촌관광산업을 통해 이 시대의 정신이 될 것이라 사려 된다.
『참고문헌』
1. 고병익,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서술원리’-한국의 역사인식(상), 창작과 비평사, 1976.
2. 김기홍, 역비한국학연구총서-전근대편, 역사비평사, 2008.
3. 김윤우, 도미사회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 경기향토사학, 제8집, 문화원경기도지 회, 2003.
4. 김헌선, 서해문화포럼 창립1주년기념 제2회 학술대회 자료집, 2010.
5. 金賢淑,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65, 1987.
6. 도수희, 2009년 도미설화 학술대회자료집, 하남문화원.
7.『三國史記』 卷第四八 列傳
8.『三國史記』 卷三 照知麻立干本紀 “十一年(489) 春 正月 驅遊食百姓歸農”,
9.『三國史記』卷二六 武寧王本紀 “十年(510) 春 正月 下令完固堤防 驅內外遊食者 歸農”
10. 박종화, 단편소설 ‘아랑의 정조’(1940년)
11. 성주도씨종중문서(보물 724호).
12. 양기석, 삼국사기 도미열전소고, 이원순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 교학사, 1986.
13. 趙仁成,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守墓制」, 『韓國史市民講座』3,
1988.
14. 최운식, 도미설화의 전승양상, 고문화, 제49집, P.151-170, 한국대학박물관협 회, 1996.
15. 하남도미나루 유적 : 팔당대교-팔당댐간 도로개설공사 구간내 문화유적 지표조 사보고서, 경기대학교 박물관, 경기대학교, 2003.
16. 武田幸男, 「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 『東洋文化硏究所紀要』 78, 東京大 東洋文化硏究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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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지역의 문화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