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호동(斗湖洞)>
두호동은 두호(斗湖). 창포(昌浦). 관대(官大). 이진(利津). 설말(雪末)등이 합쳐서 된 동으로 옛이름은 두무치. 창펄리. 관주당. 이너리. 설마리로서,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흥해군 동상면에 속하였으며 일제시대 부.군 통폐합시(1914. 3. 1) 창포와 두호동으로 폐합되어 포항면에 편입되었으며 3년후(1917. 10. 1) 포항. 학산. 두호의 3개동이 포항면에서 지정면이 되었으며,
그후 1961. 3. 27 두호1,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66. 7. 15 두호1, 2동이 다시 두호동으로 통합하고, 1989. 1. 1 창포동일부와 1998. 9. 1 항구동 창포동 일부를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두호동의 명칭은 바다로 통하는 길목으로 바다로 통하니까 또는 특별한 바다라는 뜻으로 통양포(通洋浦), 두모적포(豆毛赤浦), 두모포(豆毛浦), 두모진(豆毛津), 두모진포(豆毛津浦)에서 두모 또는 두무치로 유래되어 오다 두호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고도 함.
일설에 의하면 두호동은 3개의 호수중 하나가 머리모양으로 생기고 커서 두무치라고 하다두호로 불러 졌다고도 함.
두호동에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홍안주진회사를 설립하여 여기에서 검사된 소를 배에 실어 일본으로 빼앗아 간 곳이기도하다(지금의 인천제철포항공장 아파트 자리)
<장량동(長城洞)>
북구 보건소, 장량초등학교, 장성초등학교, 경북케이블TV방송, 장성주공아파트, 장성시장, 장성럭키 아파트, 청구하이츠아파트, 대림골든빌, 장성현대아파트, 포항자동차학원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성동(長城洞)
1914년 3월 1일 침촌동(針村洞), 원촌동(原村洞), 장흥동(長興洞), 성곡동(城谷洞)의 3개 자연부락을 합할 때 장흥과 성곡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동명이다.
•성곡(城谷)
성실이라고도 부르는데 방촛골(방치골) 남쪽의 사안골에 형성된 것으로 고려말 1387년에 두모적포(豆毛赤浦)에 수군만호첨사진(水軍萬戶僉使鎭)을 설치할 때 이곳에 성을 쌓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성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뒷산 밑 덕곡에 포강(浦江)이라는 바가지로 떠먹을 만큼의 물이 나오는 옹달샘이 있었다고 한다.
1975년까지도 논농사와 포도재배를 주로하던 20여호의 작은 부락이었으나, 그후 마을 앞구릉지와 들판 및 현 장량동 사무소 동편 구릉지의 약 30%땅이 주택 단지로 지정되어 아파트와 단독 주택 등 1800여 호가 들어선 신시가지로 변모하였다. 이에 따라 침촌에 있던 장량동 사무소를 1988년 4월 7일 이 곳으로 옮겼다.
•원촌(院村)
옛날 흥해군수가 하루 밤 자고 갔다고, 또는 조선조에 원(院)이 있었다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북과 동서로 2km정도 뻗어있는 골짜기에 30여호의 독가촌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전씨(田氏) 와 차씨(車氏)가 많이 거주해 왔다.
•장흥(長興)
주변 산이 소의 입 또는 소가 누워 있는 형세와 같다 하여 우구리(牛口里) 또는 우구머리(우구몰)라고 불리어지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전라도 장흥 사람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하여 장흥이라 하였다고도 전하며, 평해 황씨가 많이 거주해 왔다.
•침촌(針村)
마을 뒷산 지형이 바늘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방직후 자력갱생운동이 활발했던 마을로, 1960년에 장성동 사무소 개소되어 1970년엔 장량동사무소로 증축되었다가 1988년 성곡으로 옮겨졌다. 동제가 정월 대보름날 행해졌다.
1990년 5월부터 지역 주민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자흥(우구몰)과 침촌지역을 중심으로 약 53만평규모의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추진하여(1999년 12월 완공 예정) 현재는 동네의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동제당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양덕동(良德洞)>
양덕동은 사량골,불미골,돌골,기남골,북시골,대사말골,대박골등 여러 작은 골짜기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주민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기남골과 갈발리 일대에 34만평의 규모의 토지구획 정리사업(1990.5∼1999.12)을 추진하여 원래의 동네 모습은 사라졌다. 현재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과 대구지방검찰청 포항지청이 신축되어 있다.
• 양덕동(良德洞)
1914년 3월1일 사량동(思良洞),송곡동(松谷洞),신덕리(新德里)의 자연부락을 합할 때 사량과 신덕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동명이라고 하나, 사량(思良)의 덕(德)을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동명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 사량골(思良谷)
조선 정조 때에 진사 최기대(崔基大)라는 이가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고 그의 호 사량(思良)을 딴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 한다.
• 불미골(冶谷)
사량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 200여m 되는 곳에 대장간의 불미(풀무)형상과 같은 산, 그 아래에 쇠를 두들기는 쇠판 같은 언덕, 그리고 달군 쇠를 적시는 물통과 같은 작은 못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불미골 또는 야곡(冶谷)’이라 하였다 하며, 영일정씨 2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 돌골(石谷)
불미골 동쪽 고개 넘어 있는 마을로 뒷골에 큰바위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0여 년전 홍안 김씨가 입주한 후 은진안씨,김해김씨,경주김씨,파평윤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기남골·기낭골(長谷)
돌골과 갈바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동북쪽에 천마산이 있으며, 옛날에 기남이라는 사람이 살앗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 선비가 이 곳을 지나가다가 기와 조각 이 골짜기에 너무 길게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장곡(長谷)이라 불렀다 한다.
• 갈바리(渴發理)
옛날부터 식수가 귀하였다. 물줄기를 찾기 시작한지 3년만에 발견한 샘물의 맛이 없어 먹을 수 없었다. 이에 물이 없어 못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갈발리라 불렀는데,수십년후 갑자기 물맛이 좋은 식수가 솟아나기 시작하자 하늘에서 새로운 덕을 내린 것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신덕(新德)또는 신기(新起)라고 불렀다 한다. 1960년대에 양덕동 사무소가 있었다.
• 북시골·부수골(北水谷)
장성동과 환호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북쪽 계곡에서 항상 맑은 물이 솟아난다는 연유로 북수곡 이라 한 것이 변음 된 것이다. 이 마을에는 100여 년 전에 기남골에 살던 밀양 박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