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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춘의 글읽기 혹은 글쓰기>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에 대하여
정일근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정일근의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문학과지성 시인선 358)를 읽었다. 첫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후 그의 10번째 시집이다. 진해 김달진문학관에서 여는 ‘시야 놀자’ 행사에 와서 슬쩍 건네준 시집인데, 자필 서명란에 ‘이달춘(?) 형께’라고 써 놓았다. 아, 이 친구도 이달균과 나를 헷갈려하나 싶었다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지가 내 이름을 모르다니 싶어 한 마디 해 주려다가 참고 말았다. 작고하신 이선관, 정규화 시인께서도 그랬고, 이광석,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 문인들도 만날 때마다 우리 둘을 혼동하셨으니 그려려니 해야지 뭐 어쩔 것인가.
정일근이 누군가. 진해의 여좌3가동, 일명 대야동 비탈 동네 그것도 기차가 지나가는 옆 동네 출신이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동생들과 어렵게 살아온,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나타나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많이 보인다. 지금도 정일근은 어머니에게 극진하다. 나는 그런 그가 부러워서(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래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자주 아프시지만 어머니가 계시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하면, 만날 걱정만 끼쳐드려서 면목이 없을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제황초등학교와 진해남중학교와 마산상업고등학교(지금은 상업고에서 인문고인 용마고로 교명이 바뀌었다)와 경남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진해남중에서 교편을 잡다가, 항도일보(역시 지금은 없어졌다)와 문화일보 기자로 살다가, 한국작가회의 울산 회장도 했고, 경주남산을 오르는 늑대산악회(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는 언제나 특이하니까)를 만들어 야간산행을 즐기기도 하면서, 지금은 울산 은현리에서 전업 시인으로 산다. 그의 서재 이름은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청솔당(聽蟀堂)'이다. 그자 왜 마당으로 출근해 자연의 말씀을 받아쓰기하는 시인이라 하는지 알 것 같다.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와,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경주 남산> <처용의 도시>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오른손잡이의 슬픔>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의 시집이 있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월하진해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불법 포경 반대운동에 적극 나서 현재 울산, 포항 지역의 시인들과 함께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 모임'을 이끌고 있다. 등단 초기 1980년대를 풍미한 민중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90년대에는 경주 일대 신라 유적과 설화를 모티프로 한 시들을 선보였고, 농촌마을에 터를 잡은 이후에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외경을 담은 빼어난 서정시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나와 몇 년간 진해남중에서 같이 근무하기도 했고(지금도 진해남중학교 2층 1학년 5반 교실에 가면, 정일근의 첫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배경이 된 교실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내 첫시집 <칠판지우개를 들고>의 발간에도 큰 역할을 했으며, 진해에서 진해문협을 만들어 황선하, 방창갑 선생님을 비롯 정이경, 김승강 시인들과 지속적인 시낭송회(토요시낭송회, 진해와 진해사람들의 시)도 열었고, 1980년대 해군사관학교에 근무했던 정과리, 이광호 교수 등과 소줏잔깨나 비우기도 했다. 정일근과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에이포 50장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그래, 할 말은 많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이제 그의 시를 만나러 가 보자.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전문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16쪽>
정일근은 울산광역시의 외곽, 이름이 참 아름다운 ‘은현리’에서 산다. 그러면서 시도 쓰고, 창작교실도 운영하며, 아침이면 ‘마당으로 출근해 자연의 말씀들을 받아쓰기하며’ 산다. 또 울산의 트레이드 마크인 고래 사랑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가 관여하는 시노래 운동도 고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리움’과 ‘기다림’이 없는 생이 있을까. 이들이 없는 삶이 없듯 이들이 없는 서정도 없다. 외로움이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이 기다림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리움을 말하고 기다림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학은 그리움과 외로움과 기다림에서 시작된다.
정일근의 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이해하는 키포인트는 ‘고래’다. ‘고래’는 바다에서 산다. 지구 위의 육지를 둘러싼, 짠물이 괴어 있는 크나큰 부분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는 바다. 바다는 거대하고 역동적아며 생명력이 넘치는 물이다. 무한히 창조적인 생성력과 모성성으로 인하여 여성 또는 미지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하고, 광활함과 적막함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바다는 삶의 의지와 인고를 배우는 깨달음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정일근의 바다는 삶이었다가 상징이었다가 깨달음이 된 것 같다. 시 속의 ‘고래’는 ‘사랑’과 ‘기다림’의 연결고리를 갖고 시적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고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포획이 금지된 어류인 고래일수도 있지만, 이 시의 뉘앙스로 볼 때 전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 속의 시적 화자는 표면적으로는 그 옛날 울산 앞바다의 고래를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지금은 없는 화자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의미한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정서와 의미망에 대해선 문학과지성시인선 펴낸이의 한 사람이자 문학평론가인 홍정선 인하대 교수의 시집 해설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그는 정일근과 일면식도 없다면서 시만 읽고 정일근의 삶과 현실을 상당히 자세하게 유추하고 있다.
어쨌든 화자는 떠나간 고래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더 이상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맞다. 고래는 바다에 내려 꽂히는 햇살 아래 포경선의 작살에 등을 내주는 울산 앞바다 야생의 그것이 아니라 한때 화자가 사랑했던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홍정선 교수의 말을 빌리면 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는 ‘자신의 상처를 다스리는 작업이 만들어낸 신음소리’요, 자신의 상처를 쓸고 핥아서 견딜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나가는 과정과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정일근의 이전 시들에 비해 ‘실존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의 모순을 특유의 주관적 진솔함으로 드러내면서 그 모순의 피해자들을 따뜻한 서정으로 감싸던 이전 시집들과는 달리,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는 개인적인 상처와 그 상처의 고통스런 치유 과정을 선명하게 각인해 놓고 있다.
내가 볼 때 정일근 시인은 이런 상처들을 씻고 새로운 삶의 궤적을 그릴 것이다. 이번 시집이 올해 3월에 나왔으니 지금쯤 그는 생의 상처들을 정서적 재산으로 만들어 단단한 시적 ‘옹이’로 쟁여 넣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한국문화와 갈등을 겪는 외국인노동자와 동남아 이민여성들의 삶, 노인들만 남아 붕괴돼가고 있는 농촌공동체의 현실, 지역에서 느끼는 서울중심주의의 폐해 등에 대해 좀더 관심을 쏟을 예정이라 한다.
몸이 아파 술을 못하는 그가 좀 그렇지만(그는 동티모르에 봉사활동을 갔다가 무리를 하는 바람에 병을 얻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뇌수술을 한 후에 몸 관리에 열중이었는데 말이다), 진해로 보나 우리 문단으로 보나 정일근은 분명 큰 재산임이 분명하다. 더욱더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면서 그의 문운을 빈다.
필자의 시 <남지철교 부근>에 걸맞는 정일근의 여행편지 - 창녕 남지철교에서(경상일보)를 덧붙인다.
9월이 시작되는 첫날을 기다리며 낙동강 위에 놓인 창녕 남지철교 위에 섰습니다. 여름의 끝에 비가 많았기에 낙동강은 제 몸 가득 황토빛 물을 안고 일천 일백 리 물길 힘차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 지구를 돌리는 힘과 같은 물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큰물이 흘러가는 것을 물 밖에서 보는 것과 물 위에서 보는 것이 다릅니다. 서편제 판소리 한 자락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물길인 줄 알았는데 남지철교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낙동강 물길은 거대한 함성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강을 모성과 같은 여성적인 이미지로 이해했는데 남지철교 위에서 강이 남성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압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멀리서 보는 강은 굽어지고 휘어지는 부드러움이 있지만 그 속에는 무쇠를 뚫을 것 같은 강한 힘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남지철교는 경남 창녕군 남지읍 본동에서 함안군 칠서면 계내를 잇는 총연장 390m의 다리입니다. 1931년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이 다리는 70년이 넘는 세월을 낙동강과 함께 했습니다. 6.25 때는 비행기 폭격으로 끊어지는 아픔을 겼기도 한 역사적인 다리입니다. 그 역사는 1950년 9월8일 이 다리가 비행기 폭격으로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철교 상부에 상처와 같은 총탄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뚫린 구멍 사이로 바라보는 풍경 저 편에 민족의 아픔이 펼쳐집니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6.25까지, 이 강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민족사의 아픔을 남지철교는 낱낱이 다 보았을 것입니다. 해서 저는 남지철교를 근대사의 교과서라 은유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이 철교를 걸어보신다면 제 은유에 쉽게 동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리는 소통의 상징입니다. 다리가 없는 강의 이 편과 저 편의 거리는 차안과 피안의 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다리는 강의 이 편과 저 편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의 말(언어)과 노래도 이어줍니다. 남지철교는 창녕 남지와 함안 칠서를 잇는 다리일 뿐만 아니라 강의 이 편 저 편의 문화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좋은 다리를 많이 가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아치교인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포은 정몽주 선생의 피가 남아있다는 개성의 선죽교가 있습니다. 전남 함평에는 고려시대 때의 돌다리인 고막교(독다리)가 있고 서울 장충단공원 입구에는 조선시대 다리를 대표하는 수표교가 있습니다. 돌로 만들어졌기에 아직도 다리의 구실을 다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시내에는 기원전에 만들어진 석교들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다리의 역사는 14세기에 삼각격자상으로 짠 트러스(truss)가 고안되면서부터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목조 트러스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 이후 철의 출현으로 철제 트러스교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남지철교는 트러스교입니다. 다리의 본체는 부재가 휘지 않게 접합점을 핀으로 연결한 골조구조를 가진 트러스로 만들어진 소중한 다리입니다. 그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물결이 치는 모습입니다.
오랜만에 찾은 남지철교 위에서 오래지 않아 이 아름다운 다리가 철거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다리가 낡고 노후 되어 새 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가 개통되는 2007년에는 남지철교를 허물어버린다고 합니다.
저는 행정이 툭하면 새로운 것을 만들고 옛것을 허물어 버리는 일에 분노합니다. 부산의 영도다리도 그렇고 남지철교도 그러합니다. 쉽게 허물어버리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근대문화유산인 남지철교는 분명 문화재급 가치를 가진 다리입니다.
제 역할을 다한 소중한 것은 그 이후부터는 문화재로 대접하는 법입니다. 서울의 남대문 그렇고 동대문이 그렇지 않습니까. 남지철교는 오랫동안 보존되어야 하는 역사의 다리며 그 지역 사람들의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 낙동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추억이 남아있는 한 남지철교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다리는 만남의 광장입니다. 견우와 직녀를 위해 칠석이면 까마귀들이 오작교까지 만들어 주는데, 있는 다리를 끊어버리려는 그 생각부터 끊어버려야 합니다. 남지철교는 남아있어야 합니다. 먼 훗날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날에도 이 다리 위에서 오늘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대 떠난 후였지
아지랑이에 꽃멀미 아득해지는 오후나절이었지
강에는 물풀들만 속절없이 흔들리고
묵정밭 너머 산그림자가 재재거리며 내려왔지
분분한 꽃잎들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들길 속으로 사라져가는
빨간 버스의 뒷모습만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지
혼자 배웠던 사랑을 밟고
다시 홀로 떠난 그대 혹은 나
못난 사랑도 그늘이 있는지
언제나 간절해지는 마음 던져두고
강바람에 펄럭이는 서러움이
홀로 제 키를 키우고 있었지
- 이월춘 ‘남지철교 부근’ <경남문학 2006 겨울호>
계간진해 2010 봄호(68호)
첫댓글 정일근 시인이 마침 경남대학에 교수로 왔다하니 조만간 우리 한 번 만나야겠군. 모산시인이 한번 주선해보오. 역시 좋은 글 감사드리며 다다익선이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