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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 기독교 장애인합동 교류세미나 여행기
10월 14일(화)
오전 9시 30분 비행기여서 은혜교육관에서 5시 45분경 출발했는데, 이른 새벽이라 올림픽도로가 원활하여 6시 45분경에 도착하였다. 구자일 집사님이 바쁜 시간을 내어 농아부 차량 그랜드 카니발로 운전을 해주셨다. 오다가 생각해보니 약과 여행일본어 책이 든 여행용 허리가방을 집에 두고 왔다. 다음부터 약은 넉넉하게 분산해서 짐 가방과 손가방에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공항에서 일단 엔화로 환전을 하였는데, 100엔이 1280원이어서 40만원을 환전하고 나니 대략 3만 1천 엔 정도였다. 그리고 LG텔레콤에 가서 로밍을 하였는데, 예약하지 않은 관계로 조금 더 먼 창구를 이용하여야 했고, 내가 사용하는 기종이 오래된 것이라 결국 다른 휴대폰으로 교체하였다. 하루 이용료가 2000원이고, 요금이 1분당 1천 4백 원 정도였으며, 물론 받는 것도 750원인가 요금이 지불되고 문자도 건당 450원인가 된다고 하였다.
단체라 여행사직원이 단체 티케팅을 하고, 짐 가방에 이름표를 걸고 각자 짐을 붙였다. 수화물 태그는 나라마다 짐 찾을 때 요구하는 데가 있으므로 보관을 잘 할 필요가 있어 챙겨두었다. 휠체어 장애인들이 있다고 말하였더니 항공사 직원들이 휠체어도 가져오고 엘리베이터로 수속절차와 탑승을 잘 도와주었다.
비행기 탑승 전 몸 보안검색을 하였다. 장애인창구가 있으면 그곳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고 쉬운데, 오늘은 그냥 일반창구를 이용하였다. 동전이나 지갑을 양복이나 재킷에 넣고 상의를 벗어 바구니에 담는 것이 제일 쉬운 것 같다. 보조기를 착용했으므로 항상 보안대에서 삐 소리가 나지만 장애로 인해 브레이스를 착용하고 있다고 하면 외관상 장애가 보이므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탑승구 번호와 비행기 편을 잘 파악하고 자유롭게 쉬면서 서로 인사하고 근황을 묻고 있다가 시간이 되어 탑승하였다. 비행기 탑승은 보드가 되어 있으므로 편하였다.
탑승하고 잠시 후 스튜어디스들이 입출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를 나누어주었다. 입출국신고서는 붙어 있는데 입국신고서는 오늘 일본에 입국하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한자와 영문이름과 항공편과 체류기간과 여권번호 그리고 일본에 거주할 주소를 적게 되어있었다. 함께 붙어 있는 출국신고서는 5일후 일본을 떠날 때 제시해야 하는 것으로 돌아오는 항공편과 도착지를 적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에서 체류할 주소를 몰라 한동안 헤매었고, 결국엔 박지태 NCC간사 목사님이 일일이 보여주고 다녀야 했다.
인천서 후쿠오카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해외여행인데다가 때가 때인지라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아주 간단한 일본식이었는데, 시간상 커피까지 일괄적으로 제공되지는 않았으므로 어떤 분들은 스튜어디스에게 커피를 주문하여 마셨다. 옆자리 동석한 시각장애인 정수영목사님과 마냥 기다리다가 커피를 마시지 못하였다.
일본에 도착하니 곧바로 입국신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 탓인지 안내도우미가 간간히 한국어를 사용하였다. 입국신고서에 무엇이 적혀 있지 않았나보다. 뭐라고 지적하기에 보니 뒷면에 소지한 무기류나 엔화나 마약이나 체크해야할 것이 더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 11월부터 지문과 사진촬영을 한다고 하였다. 지문은 양손 검지를 전자인식기 위에 올려놓고 힘껏 누르고, 사진은 앞에 카메라를 바라보면 자동으로 찍혔다. 여권을 보여주고 돌려받으니 거기에는 비자증이 부착되고 옆에 5일후에 제시해야할 출국신고서를 스탬플러로 붙여 놓았다. 짐을 찾아 세관심사대로 와서 세관신고서를 건네고 짐을 통과시키고 나왔다.
공항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 서기인 김병호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병호 목사님이 4박 5일의 모든 일정을 인솔해주었는데, 그는 예장 통합 측 목사로 평양노회에서인가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로 동경 근처에서 23년째 목회를 하고 있으며 NCCK와 NCCJ의 4회째 맞이하는 본 교류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주도해왔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큐카무라 시카노시마(休暇村 志현島)라는 작은 섬인데 이제는 다리가 놓인 곳에 있는 작은 호텔로 버스로 이동하였다. 그냥 전형적인 시골 섬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매우 깨끗하고 조용해보였다. 그리고 일본의 도로는 매우 폭이 좁아보였고, 차도 대부분 소형이었다. 운전석은 오른편에 있어서 차량이 좌측으로 운행되었고 대개 규정시속은 50km였다.
도착한 호텔은 좁은 길을 건너 바다와 백사장이 훤히 보이는 매우 쾌적한 곳으로 가슴이 탁 트이고 한 눈에 들어왔다. 호텔도 일렬로 방이 만들어져서 모든 방이 한쪽으로는 바다를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만 장애인용 객실인 각층의 1,2호실을 제외하고는 방마다 욕실이 없다는 것이 불편하였다. 2층으로 이어진 온천탕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온천문화가 아주 대중이어서 의례히 일본사람들은 호텔에 오면 온천을 한다고 한다. 방마다 온천용 가운이 따로 있어 띠로 한번이나 두 번 감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이동하기가 난감하여 하는 수없이 첫날은 간단히 씻고 잤다.
첫째 날 저녁 일본 측에서 환영회 겸 만찬을 베풀었다. 먼저 루츠꼬라는 50세는 되어 보이는 한 중년여성 가수의 작은 콘서트가 있었는데, 가사의 내용이 참으로 교훈적인 것으로 찬양이 매우 차분하고 조용하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한국노래도 불렀다. 열광적인 한국의 찬양콘서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음식이 나의 음식성향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체류하는 내내 잘 먹고 잘 소화시켰으니 말이다. 일본음식은 자기 몫의 구역이 분명하였다. 모든 음식이 한사람씩 먹도록 자기 것으로 정해져있어서 더 먹을 수가 없었는데, 그날 저녁식사의 특이한 것은 개인별로 화로가 둘 있어서 하나는 솥 밥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동을 끓이는 것이었다. 무슨 연료인지 그 불이 다 타고나면 딱 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유원철 목사님의 어머님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침도 못 먹고 점심도 기내식으로 간단히 먹어 시장한데 음식 앞에 두고 노래만 불러댄다고 성화를 내셨다. 방영희 목사님은 벌써부터 서울서 가져온 김과 고추장을 꺼내들었다. 긴 해외여행에 한국음식을 준비해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들었는데 외국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튜브나 개별 포장된 상품이 좋을 듯싶었다. 튜브 고추장, 낱개 포장된 김, 컵라면 같은 것들 말이다.
10월 15일 (수)
둘째 날 아침식사는 호텔 뷔페였다. 일본음식이 여럿인 것 외에는 여느 호텔의 뷔페와 비슷했다. 아마도 국제적인 세미나를 하거나 대회를 할 때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큰 불편이 없도록 이런 뷔페 식사 스타일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에 원주 치악산명성수양관에서 할 때는 수양관식당 메뉴 그대로 식판에 밥과 국에 반찬 세 가지만 부실하게 나와서 일본사람들에게 미안했다고 누군가 말하였다. 다음에 한국에서 그것도 명성교회와 관련한 장소에서 한다면 단단히 신경 써야 할 대목이다.
둘째 날은 정말 온종일 세미나를 하였다. 오전에 바르트 전공자인 테라조노 요시키 박사가 장애자 예수에 대해서 주제 강연을 하였는데, 이것으로 논란이 많았다. 대체로 일본 사람들은 조용히 차분히 강의를 읽어 나가는 식으로 하는 것 같았다.
저녁식사 전에 바닷가로 나가 황필규 목사님 가족들과 유원철 목사님과 그의 모친과 박지태 NCC간사목사님과 산책을 하였다. 참으로 좋았다. 한번쯤 내 식구들과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들어오는 주차장에서 근방에서 목회하시는 김명균 목사님이 수요예배를 인도해야 된다고 나가다가 마주쳤다. 순간 일본교회의 예배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일정에는 없어서 너무나도 아쉬웠다.
저녁 식사 후에는 오후에 그룹 토의하였던 것을 조별로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2년 후에 한국에서 개최해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의견이 있었다. 주제로 장애인의 노령화 문제가 제기 되었고, 문제점으로 토론할 주제가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제기되었고, 일본사람들이 개최지로 제주도를 제안하여 제주명성수양관이 추천되기도 하였고, 박서근 목사님은 부산으로 오라고 제안하였다.
밤에 이계윤 목사님이 호텔에서 빌린 휠체어로 온천을 갔다. 휠체어를 타는 것도 몸에 조금 익으니까 편하고 재미있었다. 간단히 샤워하고 실내 대중탕에 들어갔다가 노천으로 나가서 노천탕에 한 시간 가까이 몸을 담그고 조동교, 정수영, 백승중 시각장애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노천탕이 참으로 좋았다.
10월 16일(목)
셋째 날 폐회예배 설교를 내가 맡았다. 이미 8월 말에 설교원고를 달라고 해서 보내준 지 오래였기에 설교에 부담은 그리 없었다. 일본사람들은 준비가 철저한 것 같다. 그것을 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자료집에 실어 놓았으니 말이다. 설교원고 분량이 주제 강연처럼 6페이지에 이르는 많은 분량이었다. 셋째 날 모두 피곤한 관계로 예정인 7시 30분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데다 아침식사 후 9시에 버스로 출발한다고 하여 가뜩이나 시간에 쫓겼는데, 이예자 선생님과 이광옥 사모님(양동춘목사님 부인)과 김은숙 권사님이 순서에 없던 찬양 특순을 하여 더욱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나는 준비했던 설교 원고를 요약하여 내용을 두개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헬라어 두 가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나름 재미있고 내용도 있게 구성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역시나 한국 사람들의 설교반응은 매우 은혜 받고 재미있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는데 비해 일본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전날 인사를 나누었던 가나자와 마미가 설교가 너무 짧아 놀랐다고 말해주었을 뿐이다.
나중에 김병호 목사님을 통해 일본교회 이야기를 들으니 그 사람들의 설교는 매우 지적이어서 예화가 아예 없다고 하였다. 세미나처럼 딱딱하게 조용히 읽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설교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재미있고 감동적인 설교를 추구하는데 비해 그들은 조용하고 지적이고 사색적인 설교를 좋아한다고 한다. 아무튼 한수 배웠다. 그런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낭독체로 현학적으로 할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설교야 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니 이제야 나중에라도 누군가 설교원고를 읽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개화하였는데, 메이지(명치) 유신 때에 사무라이 집안들의 자녀들을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었고, 그들이 들어와 일본사회를 주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한다. 그가 초대 수상이 되었고, 결국 안중근 의사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당시 그렇게 명문에 서지 못하였던 사무라이 집안들이 개신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후손이 일본의 개신교회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고 하니 일본 기독교의 분위기가 지적이고 자존심이 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 근처에 있는 중증장애인시설인 히사야마 요육원에 들러 견학을 하였다. 그야말로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병원과 학교와 가정을 결합한 시설이었는데, 이런 스타일은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였지만, 향림원의 요양원과 비슷하기도 하고 내게는 큰 매력이 없었다.
점심식사는 한국 NCC측이 한국식불고기를 내었다. 김병호 목사님이 식당에 도착하기 전 버스 안에서 일본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되 예절을 지켜달라고 사전설명을 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자기 음식이 분명하다고 그래서 한국인들처럼 자기 수저로 국이나 찌개를 들거나 고기를 굽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이계윤, 김종복 목사님과 가나자와 마미와 합석하였는데, 이계윤 목사님은 별로 개의치 않은 듯 고기를 구워 가나자와의 접시에 덜어놓았다. 고기는 개인당 한 접시에 접시마다 얇은 고기 네 점씩 놓여있어서 한국에서야 양에도 차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그리고 개인별로 제공된 비빔밥을 먹었다.
점심을 마친 후 우리는 2년 후의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시간은 긴 여운과 감동을 남겼다. 황필규 목사님 가족과 이예자 선생님과 이계윤 목사님과 정 목사님도 바쁜 일정 관계로 서울로 돌아갔다.
이후의 2박 3일 추가프로그램 진행자들은 김병호 목사님의 인솔을 따라 나가사키 지역으로 버스로 이동하였는데, 김병호 목사님의 많은 경험과 정보가 여행을 풍요롭고 유익하게 해주었다.
먼저 일본인의 장례문화였다. 버스를 타고가다 보니 거리마다 묘지가 보였는데 절과 함께 있었다. 일본에는 절이 동네에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화장을 하는데 한국처럼 가루를 내어 뿌리거나 담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남은 뼈들, 주로 머리와 장단지 뼈를 추려 단지에 담아 묘지 아래 문 안에 보관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은 태어나면 먼저 신사에 가서 신고를 하고, 사람이 죽으면 절에 가서 새로이 법명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부르는 것이 값이라 한다. 스님들이 형편을 보고 부른다고 한다. 일본인은 가족유대가 워낙 강하고 가족중심의 문화여서 죽은 후에 그 가족의 묘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한 이유가 된다고 한다. 가족에 들지 못하면 사회생활에 많은 불이익이 있다고 한다.
최근에 일본인 젊은이들은 결혼은 기독교식으로 하고 싶어 해서 약 50%정도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한다. 전통식은 의상도 절차도 길고 복잡하지만, 기독교식의 턱시도나 웨딩드레스는 희망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네나 호텔에 교회가 세워져있는데, 이것은 예배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웨딩을 위한 교회이며 이 일을 업으로 삼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오후에 나가사키 운젠을 가는 길에 시마바라 성에 들렸다. 거기에는 오래된 일본의 성이 있었는데, 인공으로 성주위에 못을 파고 물을 넣어 적이 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운젠의 화산을 보았다. 1991년엔가 운젠 화산이 폭발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그 흔적을 그대로 전시해놓았다.
아마쿠사시로의 유적지에 들렸다. 뒤로는 강 절벽이었다. 1700년대 16세의 나이로 박해받던 민중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와 정부군과 싸우다가 잡혀죽었다고 하는데, 그들 중의 상당수가 천주교인어서 마치 유대의 마사다를 연상케 하였다.
그날 저녁 운젠의 한 호텔에 묵었는데, 호텔이라기보다는 모텔이나 여관 정도 되는 것이었다. 저녁식사와 다음 날 아침식사는 일본식이었는데, 밥과 물은 더 주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더 주지 않았다. 심지어 작게 잘라놓은 단무지(다꽝)과 일본된장국(미소)조차도 더 주지 않았다.
김병호 목사님은 오랜 여행 가이드 끝에 여행의 법칙은 678이라고 설명하였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8시에는 출발해야 제대로 하루 일정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운젠 온천이라 온천탕이 유명하였는데 손원재, 전경수 목사님은 온천을 하러 나가고 나로서는 이동하기가 불편하기 그지없어서 마침 방마다 작은 욕조가 있어서 거기서 몸을 담갔다. 9시가 조금 안되어서 두 명의 여종업원이 들어오더니 이불을 다 깔아 잠자리를 봐주고 나갔다. 그날 저녁 창가 작은 베란다에 앉아 세 사람이서는 방영희 목사님에게서 얻어온 믹스 커피도 나누어 마시고 호텔 방마다 준비된 녹차도 몇 주전자 끓여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화산 냄새 속에 참 좋은 밤이었다.
10월 17일(금)
아침식사 후 그 앞에 있는 지옥을 여행하였다. 아마도 화산이 계속활동하고 있어서 마치 지옥을 연상케 하여 그곳은 지옥이라 하고 지옥관광이라고 이름 하는 것 같았다. 운젠의 화산을 배경으로 그대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화약 냄새가 진동하였다. 열음이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연듯 들었다. 이전에 거기에 천주교인을 담가 고문하기도 하였고, 간음한 여자를 죽이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나가사키 해변가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있는 엔도슈사꾸 문학기념관을 들렸다. 작지만 잘 꾸며진 기념관이었으며, 옆에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전날부터 사겠다고 하던 인천 연수제일감리교회 김종복 목사님이 모두에게 음료수를 제공하였다. 그런 자리에서 모두를 위해 대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마음 자세가 참 좋은 모습으로 보였다.
오래된 천주교 교회당을 들렸다. 여러 계단을 올라간 후에 예배당을 둘러보았는데, 그 동네가 주로 기독교인촌 같았다. 기록들을 읽어보니 1500년대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박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00년대에 다시금 세워진 교회라고 한다. 26성자의 이야기도 나왔다.
점심식사는 외해(外海)라고 하는 바닷가의 한 식당에 들렀는데 값은 저렴하지만 매우 실속 있는 도시락이었다. 김병호목사님의 이야기로는 한국 사람들은 도시락하면 일단 대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먼저 앞서는데, 일본사람들에게는 도시락이라고 하면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 노회를 모여도 교회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고 교회는 물만 제공해주거나 아니면 회비로 도시락을 제공해준다고 한다. 그 식당에서 제공해준 도시락 안에는 정말 육해공 음식이 다 제공되었으며, 친절하게도 김치까지 테이블마다 제공되었다. 처음부터 노년의 신사정장을 차려입은 주인이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고 지배하고 배웅까지 해주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으며 보기가 좋았다.
오후에는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원폭기념관에 들렸다. 김병호 목사님의 말로는 일본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폭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여서 이것들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평화공원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평화를 기원하는 조형물들이 있었다. 원폭기념관의 사진과 자료들은 정말로 끔찍하였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천주교 교회당과 기념관이 있었다. 26성자 기념관이었다. 1700년대 천주교 박해로 선교사들은 추방되고 도쿄와 오사카의 교회지도자 24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하고 본보기를 보였는데 코와 귀를 베고 수레에 태워 매일 동네에 돌리며 본보기를 보이고 처형은 나가사키에 가서 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명의 평신도들이 지도자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순교하였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서 아주 흥미 있는 상을 보았으니 소위 성모관음상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전날 김병호 목사님이 히뎅 기리스탕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내게 다가와 좋은 증거로 설명해 주었다. 히뎅 기리스탕이란 일본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천주교인들이 약 200년이 지나 메이지(명치)유신이 되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숨어 있은 탓에 전통 일본종교와 완전히 혼합되어 기독교라고 이름 하기에는 매우 곤란하다고 말하였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 위로 한 50미터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이번에는 피해자 일본이 아닌 가해자 일본을 폭로하며 평화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아주 초라하게 있었다. 3층짜리 건물에 일본과 중국 등에서 행한 일본제국주의의 만상이 소개되고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많이 들어오고 알고 있던 것이라 그리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가사키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그래도 제대로 된 호텔인 것 같은 것이 이전까지 묵었던 곳에는 인터넷 실도 없더니 그 호텔에는 로비에 인터넷 실도 있고 무선인터넷도 되었다. 100엔짜리 동전을 바꾸어 100엔에 15분에 걸쳐 짧게 메일만 확인하였다. 김병호 목사님의 말을 듣자 하니 대학가나 대도시에나 인터넷이 활발하지,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인터넷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텔에 짐을 푼 이후에 원하는 일행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천주교 교회당을 걸어서 갔다. 그다지 멀지도 않았고 신부는 무료라고 해서 김병호 목사님의 언변 끝에 개신교 목사인데도 무료입장하였는데, 다만 6시면 문을 닫아야 하기에 서둘러 나와야 했다. 그곳이 바로 히뎅 기리스탕들이 다시 발견되어 지은 기념교회로 26성자가 처형당한 곳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지었고 옆에는 신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원폭당시에도 산에 교묘하게 가려져 창문이 몇 장 깨어지는 정도로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김병호 목사님이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교회당을 옆으로 해서 골목길의 계단을 한참을 계속 올라갔다. 나로서는 따라가기 만만치 않았는데, 마침내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그것을 타고 높은 3층을 올라가니 나가사키 시내와 항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가 넘어가는 어슴푸레 야경이 절정이었다. 그리고 내려 올 때는 옆에 케이블카 비슷한 것이 있어서 타고서 한참을 내려왔다. 여기의 엘리베이터나 케이블카는 영업용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을 위해 참 배려를 잘한 것 같았다. 걸어 내려오다 보니 동네에 나비부인 광고가 붙어 있었다. 나가사키가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이라고 한다.
나가사키에는 주요 교통수단으로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1인당 100엔짜리 동전을 하나씩 내고 짧은 두정거장인데 전차를 타보았다. 호텔 앞에 내려 잠시 걸어 바닷가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그런데 바다 비린내가 거의 없었다.
저녁식사가 마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밤에 시내로 나간다고 하였는데, 친절하고도 성실한 정광서 목사님이 반드시 호텔연락처가 적힌 네임카드를 로비에서 지참해 나가라고 하였다.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택시를 타고 그곳을 보여주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가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의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인천 연수제일감리교회 담임인 김종복 목사님과 룸메이트로 보내게 되었다. 김목사님은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님의 목회가 몹시 궁금하였나 보다. 방에서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일방적으로 궁금해 하시는 것에 대하여 대답을 하고 설명을 해드렸던 것 같다. 김 목사님은 그동안의 장애인 사역을 토대로 감리교 교단에서 모든 것을 내어 장애인사역으로 교회부흥을 이루고자 자원하여 장애인선교부 부서기가 되어 겨우 이렇게 봉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해보니 참으로 겸손하고 순수하고 좋은 분 같았다. 이후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나 당회장목사님께도 교류를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10월 18일(토)
10월 18일 토요일 이제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김종복 목사님은 아침 온천을 하고 와서 옆에 있던 한 중년의 일본사람이 단 두 바가지의 물로 수건을 적셔 몸을 씻고 온천 하는 것을 보면서 옆에서 샤워기를 틀고 몸을 씻어대는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말하였다.
아침식사를 뷔페로 간단히 하고 로비에서 카스테라를 샀다. 김병호 목사님의 말로는 나가사키 카스테라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데, 이 지역을 벗어나면 카스테라가 있기는 하지만 맛은 보장 못한다고 하며 권하기에 작은 것 5개를 구입하였다.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길에 나가사키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콜베 신부가 섬겼다는 천주교 교회를 들렀다. 콜베는 일본 선교사로 일하다가 오란다(폴란드)로 돌아가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자원하여 순교당하였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에 이래저래 알고 있어서 설교 예화로도 사용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그의 인생을 피부로 접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소개해준 수도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까지 버스로 거의 2시간이 걸렸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번 쉬었다. 휴게소에서도 열심히 과자선물을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차내에서 김병호목사님의 봉사에 감사하며 선교비로 사용하라고 1천 엔씩 거두고 몇 사람이 합쳐서 3만 엔을 만들어 전달하였다. 양동춘 목사님이 앞장을 섰다. 그는 베데스다선교회의 대표로 NCCK에서 이미 오래 일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주도적으로 일을 이끄셨다.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부산정>이라는 한국음식점에 들러서 김치찌개에 라면사리를 넣고 끓여서 먹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한국음식을 먹어야 힘이 나는가 보다. 일본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얼큰하게 땀을 뻘뻘 흘리고 먹으니 오히려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근처에 <유메>(꿈)이라고 하는 대형 쇼핑센터에 들렸다. 마치 한국의 <이마트> 같은 느낌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선물을 사는 것이 하나의 큰 과제인가 보다. 여행 출발할 때부터 한 켠에 있던 숙제가 툭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손원재, 전경수 목사님과 함께 쇼핑을 하였다. 김병호 목사님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하며 과자를 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장난감이나 문구류나 공산품들은 대개 마데친(메이드 인 차이나) 중국산이었다. 나도 가급적 과자를 많이 사려고 하였다. 전날 아내가 칼이 부러졌으니 일본 칼을 구해달라고 해서 3천 8백 엔짜리 칼을 하나 샀는데, 김병호 목사님이 반드시 짐 가방에 싸서 붙여야한다고 했다. 열음이를 위해서 지프차의 바퀴에 시계가 달린 것을 비싸게 주고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중국산이었다. 아내와 예음이의 것은 공항 면세점에서 사기로 하고 그저 과자를 몇 개라도 더 사고자 하였다. 두 손에 많은 것을 들고 다닐 수없는 나로서는 가방도 한계가 있고 돈도 힘도 부족하였다.
출발 2시간 전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 한구석에서 쇼핑한 물건들을 다시 정리해서 짐에 다 실어 넣었다. 카스테라 5개 담은 봉지를 빠트린 것을 이향자 사모님(조동교 목사님의 부인)이 챙겨주었다. 공항에 도착하면 곧 반납할 휴대폰만 따로 꺼내어 작은 쇼핑백에 넣어 두고 모든 짐을 짐 가방에 다 넣어 붙이고 탑승절차를 밟았다. 상의를 벗어 몸 검사를 하고 출국심사대에 여권을 제시했다. 여권에는 입국할 때 붙여 놓았던 출국신고서를 심사관이 떼고 스탬프를 찍고 돌려주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니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도록 나눠 주었다. 그리고 또 다시 기내식이 제공되었는데 지난번과 거의 같았다. 이번에는 옆 좌석 김종복 목사님의 것 까지 부탁해서 커피를 잘 마셨다.
인천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를 거처 짐을 찾는 데까지 한참을 걸어 나와야 했다. 힘든 것은 아니지만 정말 멀었다. 여권을 보여주고 나오니 이미 손원재, 전경수 목사님이 짐을 내 다 찾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이다.
밖으로 나와서 휴대폰 로밍을 반납하고 모여서 양동춘 목사님이 기도한 이후에 서로 작별인사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사랑부 김만섭 집사님의 차로 교회로 이동하였다. 토요일 오후 막힌다고 해서 외곽순환을 타려했는데, 올림픽대로도 놓치고 결국 강변북로에 들어서니 길이 막혀있었다.
생각해 볼수록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도 감사, 교회와 당회장목사님께도 감사, NCCK와 NCCJ에도 감사, 함께 한 모든 목사님과 사모님과 일행들 모두에게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