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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가죽옷이 짐승의 형상을 상징하는 것이라면(창3:21)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 회개하기 전의 모습은 짐승의 형상 그대로이다.
안되었지만 모든 사람의 회개하기 前의 본질적 상태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1-4). 하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아담의 원죄로 인해 후손들은 가죽 옷이 상징하는 바대로 라면 짐승의 형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벗는 길이 신앙의 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가죽옷 (짐승의 형상) 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고후4:4절)로 옷 입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아 입어야 되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해석하는 것이다(고후4:4).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고후4:4절)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이다(갈3:27). 그러니까 짐승의 형상이라는 낙인의 옷 가죽옷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 되는 길이 성경의 말하는 지혜의 길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미련을 벗어버리고 타락 전의 아담처럼 지혜롭게 되는 길이다. 타락 전 아담의 그 무한했던 지혜는 (창2:19절) 어디에 다 잃어버리고 지혜 없는 짐승 같은 자로 전락되고 만 것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짐승 같은 자로 지으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자기 스스로 지혜롭게 될 줄 알고 사탄에게 속아 선악의 나무 실과를 따먹을 때 원래 받은 지혜는 잃어버리고 미련한 짐승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지혜를 잃어버린 것이 성령 없는 짐승 같은 미련한 인간이다(마25:1-13절)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세상의 배운 학문이나 지식을 가지고 잔꾀 부리는 그런 것을 말함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 것이다.
세상 것은 성경 말씀에 비해 초등 학문이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런 초등 학문을 해서 얻은 것이 무슨 지혜인가? 세상에서 배운 초등 학문을 가지고 풀어먹는, 속언처럼 “말(斗)로 배워 되로 써먹는 다든지 되로 배워 말로 써먹는 다든지 하는 것” 과 같은 그런 것은 정직 없는 잔꾀인 것이다. (전7:29절)
정직 없는 세상의 지혜는 잔꾀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지혜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14:23절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이 罪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밖과 그리스도 안을 분별하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게 바로 미련이라는 해석이 가능 하지 않을까?
성경에서 미련하다고 한 것은 곧 악으로 규정되는 키워드다.
그리스도 안의 삶과 그리스도 밖의 삶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삶과 지혜 없는 미련한 짐승 같은 자의 삶을 분별하는 척도인데 이것을 지혜로 해석하는 것이다.
왕상3:4절 솔로몬이 일 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구한 것이 지혜인데 지혜로서 善과 惡을 分別하는 것을 왕상3:9절은 말씀하고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이어 보면 그리스도 안과 밖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이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 생활이 선에 속한 삶이냐 악에 속한 삶이냐 하는 것을 항상 분별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막10:18절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하였다. 그러니까 선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선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 때만 나는 바로 선에 속한 삶을 산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선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고후5:19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선에 속한 삶인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첫째 오직 공의를 행하며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셋째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신 미가서6:8절의 말씀 이것이 선의 기준이다.
그러니까 선을 알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된다.
그러나 악인은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다.(잠28:5) 그런고로 공의는 의인된 자리에서 지혜 명철 지식이 있는 자가 되어야 깨달음의 차원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짐승의 형상을 벗을 때 비로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당한 아담의 후손들이 다시금 실낙원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안의 삶을 사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성장의 최고점의 삶이 바로 지혜로운 삶인 바 온전한 구원의 자리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25장의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는 오늘날도 똑같이 교회 안에 공존하고 있는 신자들의 실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인 지혜는 그리스도라.(고전1:24,고후4:4) 그러니까 미련하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없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 없는 자이니 그러므로 지혜 없는 자라면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요원한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 미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 잠28:26절이 답을 준다. 미련은 곧 자기 마음만 믿는 자가 미련하다고 했다.
귀신에게 사단에게 소속되어 귀신의 조종을 받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미련한 자라 말해도 될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으니 빌2:5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닌 매일 자기 자존심 가지고 산다.
자존심이란 스스로를 자기가 지키겠다는 自存(자존)의 마음이 아닌가? 거기에 무슨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가?
입만 열면 “믿습니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자존심 가지고 사는 자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종교인 일뿐만 아니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 사람이 남 앞에서는 그럴듯한 교양 예의는 잘도 차릴는지 모르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계명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형상은 교양 예의를 가지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양 예의라는 것은 스스로의 수양이나 윤리적 도덕성을 함양하는 인간 본위의 수련을 쌓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런 것은 자기 수련이지 그리스도의 은혜는 아닌 것이다
은혜는 얻는 것이다(요1:17)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선물이라 했으니 어떤 사람에게 오는 것인가? 롬5:20절 죄를 많이 내놓고 회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이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눅7: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것을 자칫 오해하면 죄 많이 지은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으로 오해를 할까 봐 롬6:1절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다고 2절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죄를 많이 내놓으면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죄가 자기 죄인 것처럼 모든 것이 내 죄입니다) 하면서 남의 죄까지 주님 앞에 자신의 죄처럼 고백을 하는 거기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런 정도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비밀까지는(골1:27절) 이해를 해야만 이 말을 진정으로 아멘 하게 될 것이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행동으로까지 옮겨지는 것은 아니니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랑이다.
택함 입는 예복
성경이 귀중한 열쇠로서 여러 가지 알기 힘든 비밀들을 주었는데 비밀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옷에 관련된 계시의 일관성 역시 그리스도의 옷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된다. (갈3:27)
마22장에서 청함과 택함의 문제만 보아도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구원의 잔치 마당으로 하나님께 청함을 받은 손님인데 청함에 응했다손 치더라도 택함을 입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음을 마22장에서는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택함의 조건이 무엇인가? 예복을 입었어야만 되었다.
청함의 대상은 정해진바 없지만 요3장16과 같다 독생자(아들)을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 된다고 했다.(고후5:17) 믿기만 하면 되는데 이 믿음이 곧 옷을 입는 과정인 것을 지금까지 간과하고 성경을 대했던 것을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마22:14절대로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라고 했는데 택함을 입는 것은 예복을 입는 것이다. 11절 임금이 손님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 늘...! 예복을 입지 않고는 잔치 손님으로 불합격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초청하신 구원의 잔칫집 마당은 초청자의 품격에 어울리는 자만이 들어 갈수 있는 곳이라는 말 아닌가?
그러면 이 옷은 어떻게 하면 입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옷은 친구에게만 주는 옷인 것이다. 임금이 적어도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친구라도 예복 입지 않은 건방진 친구는 임금의 권위에 먹칠한 대가로 바깥에 쫓겨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된다.
타락한 인간 아담이 맨 처음 한 짓이 뭔가? 옷 만들어 입지 않았는가!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가 찰 옷,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었다. 하나님의 고집은 그 틀려먹은 인간의 알량한 옷자락 때문에 끝내는 계시록 막판에 천국 문에 들어 올 때 하나님이 원하는 예복차원의 옷을 입으라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다.
벧전2:9절은 그런 사람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왕 같은 제사장에게는 그에 맞는 옷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너무도 상세하게 증거 해 주고 있다.
옷이 없는 임금도 없으며 옷이 없는 제사장은 더욱 없다.
모든 사람의 어떤 사역이든지 그의 하는 일에는 그에 맞는 유니폼이 있게 마련이다 현대 사회의 직장에서도 회사에서 정한 옷이 있는 것처럼 제복을 입는 공무 집행자나 군인 경찰 등등....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든 자는 아버지가 원하시는 옷을 입어야 되는 그것이 아버지의 정하심이다.
또한 옷을 입을 때는 일반적으로도 속옷과 겉옷이 분명히 있듯이 같은 옷이지만은 분명히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과정도 속옷과 겉옷을 구별해서 입는 것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 아닌가? 나중에 더 상세히 말하겠지만 출애굽기 28장 전장은 제사장이 입는 곧 그리스도의 옷을 어떻게 입는 것인지 입는 과정을 정확하게 계시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아마 속옷과 겉옷을 서로 바꿔 입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분명히 정신 이상자 취급받아 요양원이나 가야 할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듯이 분명한 것은 제사장이 입는 옷도 격에 맞도록 입기 위해서는 얼마나 아름다운 복식이 있는가?
성경은 자세하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제사장의 옷은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옷이다.
그 옷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는 옷이므로 거룩을 위해 입는 거룩한 옷인데 이 거룩함은 또한 아름다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상이 곧 거룩한 옷이다.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는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마다 입는 아름다운 거룩함을 위한 옷을 입었던 것이다.
이 옷이 위에서 조금 언급한대로 모세를 통해서 계시하여 주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입는 제사장 옷이다.
모든 인간들은 이와 같이 제사장들이 입었던 그 거룩함의 옷을 입을 때에만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마22:14) 왜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이 제사장이 되기 때문이다.
마22장에서 말씀하신 잔칫집 예복이 곧 우리의 거룩함을 위한 제사장의 옷과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택함을 입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 사두개인의 오해의 교리
사두개인들의 교리처럼 성경을 잘못 깨달으면 항상 엉뚱한 오해 의 교리에 매몰되어 부당 만부당한 교리를 가지고 고집스럽게 전가의 보도로 사용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사두개파당 사람들의 교훈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될 것이다.
자기들은 기껏 성경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평생 신봉하고 가르치고 믿었던 “부활이 없다” 는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던가? (마22:23-29)
모세의 율법에는 형제 중에 자손을 보지 못하고 죽는 형이 있으면 그 밑에 아우가 형을 위해 죽은 형의 형수를 취하여서 씨앗을 주고 형의 후사를 잇게 해주라는 구절이 있다(신25:5-6) 이는 유다 와 며느리 “다말” 사건에서도 잘나 타나 있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에게 칠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가 모두 죽고 막내아들과 여자들만 남았는데 나중에 천국 가서 이 여자들은 누구의 부인이 되는 거냐는 유치한 질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었다.
저들은 제법 자기들 딴에는 복잡하고 골치 아픈 질문이라고 했으나,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함 그것이었다. 저들은 부활이 없다 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 사람들은 당대의 한 파당을 지어 유대인들의 바리새 파당과 쌍벽을 이루는 두 주류가 아니었던가?
성경을 오해한 저들의 잘못은 비단 그때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너무 성경에 무지한 나머지 편견에 치우친 교만 자만 거만으로 미련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교파든지 자기네 파당이 정한 교리라는 것을 가지고 덮어놓고 교리, 교리만, 외친다면 사두개인들 같은 유치함에 빠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예정이고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야만 택함을 입는다는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이 교리의 맹점은 그리스도를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택한다고 하니 말이 아닌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실 지금 장로교회의 신앙이 다 죽은 뼈다귀 신앙만 가지고 바리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만세 전에 택함 받았다는 것도 택정의 교리로서 대속의 교리만 큼이나 숭배의 신앙에 빠지게 할뿐. (계3:15-16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만세전에 택한 것은 그리스도 한분 안에서의 일로 그분을 숭배하는 신앙이 아닌 닮아가는 신앙이다.
행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는 것이어야 된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숭배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인 것이다(벧전1:21절)함은 역사적인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면서 현실 속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함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좇지 않는 자기 열심의 믿음은 무식한 믿음이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롬10:2절) 혼자서 믿는다고 대단한 열심을 내는 것 같으나 결국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원수가 된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그 의에 복종치 않는 것이니 복종치 않는 자는 볼 것 없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면은 하나님의 “義” 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물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義 되신 분이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밀인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모른다면, 안됐지만 하나님의 의는 죽어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되신 그리스도의 비밀을 모르는 것은 자기 열심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 가는 자가 아니다.(마7:21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하나님의 의에 대해 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평생 예수 믿는다고 열심히 뛰어 다녔는데 교회 활동도 많이 했는데 사회봉사도 많이 했는데......!
한때는 좋은 것 같아 재미있게 산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찾아오는 것은 공허한 마음뿐이라면 참으로 안타깝다 .
우리 모든 사람은 의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의인되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된다.
☆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어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명령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됨이다. 바울 신학 핵심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직설법과 명령법이 있는데 그 직설법과 명령법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있다 라고 하고 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공감이 간다.
그러면 직설법은 무엇이며 명령법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혹여 독자들 중에 신학을 하시지 않은 분도 계실 것을 생각하여 간단히 언급을 해 본다면, 이는 모든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어 사는 삶을 표현하는 말로서, 직설법에 대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자격을 얻는 것 즉 “이신칭의”는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지만, 명령법은 새 피조물로서의 새 삶을 영위해 가는 과정은 앞으로도 계속 점진적으로 실제화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회적으로 단번에 일어나는 영원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방 지대에서 태어난 존재들이기에 조상의 망령된 행실로 인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엡4:22-24절)을 말함이며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새 생활을 이루어 가는 신자의 영성은 날마다 변화해 가는 점진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배후에는 아직도 지나간 옛 시대의 죄악 된 습관들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사단의 세력권이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우리는 새 창조와 함께 새 시대에 속하며 또 한편으로 이 말은 땅에서의 천국 시민권을 말하는 것이 직설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편으로는 삶이 죽어 천국 가는 날까지 이 땅을 살아갈 육신의 때에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새로운 피조물 된 존재를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명령법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시대의 긴장 곧 다시 말해 새로운 천국 시민 되었다는(빌3:20절)직설법과, 천국 시민으로서의 삶을 표현하는 삶의 새로운 생애의 명령법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항상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긴장 속에 항상 두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 구습은 아직 살아남아 있지만 새 시대의 시민이다.
새것이 왔지만 옛것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것이 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완전하게 자동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의 몸이 멸하여 우리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새것과 옛것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직설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항상 명령법이 있어야 하는데, 이 두 시대의 긴장을 어떻게 조절해 나갈 것인가는 각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명령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명령법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실천이 의인이 되어 의를 실천하라는 이것이 명령법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와 같은 두 시대의 긴장을 어떻게 하여 조절을 해 가야 할 것인가가 관건인데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논의되는 이야기를 통해 해결되리라고 본다.
의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의인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이 성경의 명령어이다.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의인되는 길이 성경에 있으니 우리는 얼마든지 의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다 롬1:17절 합2:4절, 그렇다면 의인되는 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롬10:4절을 자세히 보자 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의인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자력으로 의인될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는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의의 표본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이다(마5:17절). 인간 스스로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완성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이루어 주시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 들어가면 다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빌3:9절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되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는 이모든 것은 잘못하면 말장난에 그치고 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깨닫는데 있는 것이다. (골2:2절) 최종적인 것은 바울신학 의 그것처럼 두 시대의 긴장을 풀고 사는 비결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 안에 있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말장난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말장난이 아닌 우리 실제의 삶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가 의를 이루는 삶인 것이다. 이제 모든 인생은 짐승의 가죽옷(짐승형상)을 벗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 되어야 하나님의 거룩 한 보좌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는 것이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 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한 세례란 그의 죽으심과 합한 세례라고 롬6:3절은 말하고 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 느뇨
그러니까 세례란 죽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에 대한 예고를 하시면서 눅12:50절에서 “나의 받을 세례라” 고 하셨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세례라고 하신 것이다.
마16장24절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 하셨다.
눅9:23절에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 날마다 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고 죽어 주셨는데 십자가 지심은 단번에 이루신 것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 그것도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가 또 있다!
이것을 갈라디아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고 한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진정 받아야 할 세례는 내가 지고 나를 못 박는 자기 십자가에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옛사람의 성품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없어지고 롬6:4절대로 그리스도의 부활대로 나도 함께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고 택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이다.
택하심은 부르심을 입은 뒤의 오는 성화의 단계다.
그러니까 부르심을 모르면 또한 택하심도 알 수 없다.
부르심을 먼저 입고 택하심을 온전히 입는다.
그러므로 벧후1:10-11절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만 실족하지 않고 천국을 넉넉히 들어간다고 했다.
이처럼 성경에는 입는 다는 말이 많다.
성경이 말하는 입는다는 표현이 무엇을 말함인지는 앞으로 계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좀 뒤로 미루기로 하고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