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 리태극박사90 수기념/시조문학 창간 20주년
시조의 부흥과 월하 선생/ "시조문학" 창간 42주년을 맞으며______________ 강상도 십 년이면 바뀐다고 했거늘 네 번이나 넘으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태산준령을 넘어 우리 민족 전통시가인 시조문학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오늘에 서기까지 시조시인 모두가 느끼는 감회 뒤에는 아마도 연면한 노력을 잋태하게 한 애정과 긍지를, 그리고 소명감 없이는 이룰 수 없었으리라 동감할 줄 안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 모두의 뜻이 아우러져야 함은 자명한 일이나 이를 위한 견인차가 없었다면 하는 돌아봄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외롭고 험한 길에서 마치 광활한 대양 위에서 시조문학이란 일렵편주를 젓는 사공처럼 보이지 않는 항구를 향해 일파만파를 헤치고 오늘의 찬란한 항구에 닻을 내린 일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마음으로 그 분의 발자취를 거슬러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본다. 그분은 시조문학계의 큰 산인 월하 리태극 님이다. 월하 선생은 1913년 강원도 화천에서 출생,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서울문리개 국문과(50)를 졸업했다. 그후 초,중,고 교사를 지낸 후 30여년간 이회여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 후에도 여러 대학의 강단에서 시조이론 강의와 창작 지도를 하였다. 월하 선생이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경이라고 하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1950년 무렵이다. 1953년 "시조연구"지에 발표한 "갈매기"가 선생의 최최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선생의 연조에 비해서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시조집 "꽃과 여인(70)"과 "노고지리(76)"에서 보여준 시조 창작에 기울인 열정은 참으로 놀랍도록 크다고 하겠다. 또 시조 창작뿐만 아니라 시조론의 학문적 이론 절립에 남다른 학구파이기도 하다. 당시 시조문학의 학문적 이론은 불모상태로서 가람, 노산에 의해 미소하게 나마 산발적으로 발표되었던 것이 월하 선생의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으니 오늘날 시조문각 연구에 커다란 주춧돌이 된 셈이다. 월하 선생이 우리 시조단에 끼친 공적은 무엇보다 시조 중흥을 위해 헌신해 왔다는 사실이다. 시조 중흥을 위해서 유일한 시조전문지인 "시조문학"((60)을 창간하여 오늘에까지 속간(통권 142호)하고 있으며, 전체 시조인의 단결을 과시하는 '국시조작가협회'64)를 결성하는데 앞장섰고 학생시조 창작 써클인 "새솔회"(59)와 "울림회"(63) 조직에 산파역을 맡았으며 일간신문 신춘문예 현상모집, 문예지의 심사위원으로 많은 신인을 배출한 점 등은 시조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이라 하겠다. 시조 운동의 방향은 의의를 부정하는 몰지각한 인사들을 계몽하려는 의도와 좌절감에 빠져있는 시조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자극, 그리고 동호인 획득에 초점을 두는 몇 가지로 그 성격이 두드러졌다. 이는 월하 선생에 의해서 일기 시작한 바람이었고 또 선생에 의해 상당한 실효를 거둔 것이었다. 그 당시 선생의 "시조형태론", "시조부흥론", "현대시조의 작풍론". "현대시조작법" 등 허다한 이론은 현대시조운명 타개를 위한 활력제가 되기에 족하였다. 선생은 때로는 몰지각한 인사들의 이론에 맞서기고 하며 때로는 욕설없는 비평을 제공하여 작가들의 창작의옥을 고취시키기도 하며, 또 때로는 입문서적 원론을 펴 일반의 시조이해를 촉진시키기도 하는 등 중흥운동의 주장으로서 식을 줄 모르는 용기와 성심를 보어주었다. 그러한 선생의 노력은 오늘의 시조를 있게하는 밑천으로서 이미 정평된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월하 선생의 치적과 뜻에 조그만한 흠이 되어서는 안되며 특히 마흔 두살의 시조문학이란 나무가 영원 무궁토럭 거름을 주고 다듬어 우리 문학의 위상이 전세계에 우뚝 서도록 튼신하게 가꾸어야 할 책무가 있음을 안다. 올해로 42주년을 맞는 시조문학의 생일을 자축하며 아룰러 구십수를 넘는 그분의 정열이 식지 않도록 건강을 빌어 마지 않는다. -"시조문학"143 여름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