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
서예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가고 싶은 곳이 추사 김정희선생의 제주에서 유배할 당시 기거하던 적거
지일 것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
당세한도 阮堂歲寒圖》(국보 188)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추사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 작품을 제자 이상적에게 편지를 쓴 곳으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옛 대정읍성 동문 바로 안쪽에 그가 제주도에서 6개월간 유배생활을 한 초가가 있었는데, 이를 복원한 것
이 바로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이다.
이 초가는 4.3항쟁때 불타 버린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어 복원한 것이다. 현재 이 곳에는 추사관이란 기
념관이 함께 지어져 있어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추사의 글씨와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그리고 모퉁이 한쪽에 세운 모거리(별
채), 제주식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에 의하면,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것은 윤상도의 옥에 관련된 까닭이었다. 흉소 사건으로 국문을
당하던 윤상도는 전 부사 허성도 관련됐다고 했고, 허성은 전 참판 김양순을 끌어들였으며, 김양순은 병
조참판 김정희를 끌어들인 것이다.(김봉옥, 제주통사. 146쪽)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의 진언으로 헌종 6년(1840), 이곳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
양살이를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금부하졸에 끌려 남해안을 경유하고 1840년 9월 27일 아침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처음에는 날씨가 좋았으나 오후부터는 날씨가 흐려지더니 폭풍우가 몰아쳤다. 배가 매우 흔들리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배멀미와 공포로 안색이 창백해지고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는데 추사만은 평상시와 다
름없이 태연하게 키잡이 선장이 앉아 있는 배 앞머리에 나서서 풍우파도를 즐기듯이 시를 읊으며 선장에
게 방향을 제시하였다.
추사의 항해 지휘로 배는 폭풍우를 벗어나 무사히 제주시 동쪽마을인 화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사의
풍향을 이용한 항해술은 그 당시 범선 교통으로는 매우 드문 예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도 추사의 비범한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유배지인 제주에 도착하는 즉시 추사는 대정으로 가서 교리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
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적거생활을 하며 그는 산야의 초목을 감상하며 외로운 심정을 달래었
으며 특히 수선화를 매우 즐겨서 수선화를 소재로 한 시도 남겼다.
9년이란 세월 동안 추사는 지방 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배우게 했고
그 자신도 독특한 추사체 글씨를 많이 남겼다. 한편, 추사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도 많
았는데 진도의 유명한 서화가 허소치 같은 사람도 헌종13년에 추사에게 사사하기 위하여 제주를 다녀가기
도 했다.
추사는 헌종14년(서기1848)에 방면되어 서울로 갔다. 그러나, 2년 후인 철종2년(서기1850)에 헌종묘천 문
제로 말미암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갔으니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그 후 그는 70세에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집을 지어 살면서 수도에 정진하다가
서기1856년 광주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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