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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慶山) - 원효, 설총, 일연이 탄생하신 역사 문화 도시
경상북도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동쪽은 영천시, 북쪽은 군위군과 접하고 있으며, 대구의 위성 도시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전체 면적은 411.75㎢이며 총 인구는 242,744명 (2008년 12월 31일 기준) 시청소재지는 중방동이다.
경산 문화관광 http://www.gbgs.go.kr/tour/
경산자인단오제
한장군놀이는 경산군 자인면에서 단오날에 행하던 단오굿을 말한다. 자인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신라때이거나 고려때 왜적이 침범하여 마을사람들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꾀를 내어 여자로 변장하고 누이동생과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광대들의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 춤을 구경하려고 왜병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한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왜병을 급습하여 무찌르게 되었다. 그 후부터 한장군의 사당을 짓고 해마다 단오날이면 제사를 지내고 성대한 놀이가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경산팔공산갓바위/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
경산 임당동 고분군[慶山林堂洞古墳群]
경산향교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으로, 큰 자연석을 세벌대로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으며, 기단 전면 양쪽에 4단의 계단을 두었다. 기단의 윗면은 시멘트로 마감하고, 그 위에 평평한 자연석 주초를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경흥사[經興寺]
경흥사 목조삼존불좌상 1990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되었다. 경흥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 삼존불좌상으로, 영규(靈圭)가 화주(化主)가 되어 전국을 돌며 탁발하여 1637년에 조성하였다. 원래는 지금의 명부전(冥府殿)에 봉안되었는데 1993년 대웅전을 완공하면서 이전·봉안하였다. 본존불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대웅전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큰 규모이다. 결가부좌를 한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으로, 높이 1.58m이며 두발은 나발(螺髮)이고 육계는 둥그스름하고 자그마하다.
반룡사[盤龍寺]
국가의 동량인 설총을 키워낸 반룡사도 원효스님과의 깊은 인연 때문에 설총의 유년을 여기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정신적 귀의처인 일개 사찰이 얼마나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신라의 임금과 왕후가 인근 왕재(王峙)를 넘어 이곳에서 설총 모자와 함께 불공을 드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으니 반룡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상당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선본사[禪本寺]
현재 선본사는 본절과 갓바위부처가 있는 웃절로 나뉜다. 본절에는 극락전과 산신각·요사·선정루가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5년에 세워졌고,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본래 있던 산령각을 1985년 다시 지은 것이다. 선정루는 종각과 사천왕문을 겸하는 건물이다. 웃절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용왕각·기원정사·요사 2동이 있다.
산전동 분청사기요지[山田洞粉靑砂器窯址 ]
특히 분청사기 조각에는 ‘경산장흥고’· ‘경산맥석’· ‘부’등의 글자가 찍혀 출토되었는데, 이중 ‘경산장흥고’의 출토로 보아 관청에서 사용되었던 도자기도 제작하여 공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경산시에 따르면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은 2004년부터 남산면 인흥리 일원 26만2천774㎡(8만여 평) 부지에 445억원을 들여 원효, 설총, 일연 등 삼성현 관련 자료를 모아 전시할 유물과 문화관, 야외 공연장과 조각원 등 휴식공간을 갖춰 2012년 6월 말 완공할 예정이었다.
자인 계정숲 [慶山慈仁─桂亭]
평지에 가까운 자연숲으로, 구릉지에 남아 있는 천연임군락(天然林群落)으로서는 경상북도는 물론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다. 1982년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굴참나무· 이팝나무·말채나무·느티나무·참느릅나무 등 향토수목이 낙엽활엽혼효림을 이루며, 이팝나무가 만개하면 흰 구름 같은 꽃들이 장관을 이룬다.
자인향교[慈仁鄕校]
1562년(명종 17) 경주 부윤 이정(李楨)이 고려 때 문묘를 지은 터에 다시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후에 이춘복(李春馥) 등이 상소하여 1728년(영조 4)에 이건하였다. 1900년에 대성전을 짓고 1924년에 명륜당, 1926년에 다시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하양 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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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대추축제
전국 대추 생산량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최대 대추 산지인 경산. 국산 대추중에는 지리적표시 등록된 경산대추가 으뜸이며, 그 중에서도 압량면 금구리가 대추 주산지입니다. 경산대추는 경산지역은 지리적 특성으로 태풍과 홍수피해 등의 천재지변이 거의 없는 천혜의 기후조건과 일조량이 많아 대추재배의 최적지로서 알이 굵고 무기질이 풍부한 품질좋은 대추를 생산하여 전국각지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생몰년대 미상, 경주 설씨의 시조. 태종무열왕 때인 654∼657년 사이에 태어나 경덕왕(景德王)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라고 전한다. 6두품 신분으로 추정되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벼슬은 한림을 지냈고 주로왕의 자문역을 맡아 보았다. 즉 한글창제 이전엔 고유한 우리문자가 없었으므로 한자의 몸을 빌려 우리말을 나타냈는데, 이를 이두라 하며, 이것을 그가 집대성하여 깊이 연구하여 규칙 있게 사용함으로서, 비로서 경서 기타 한문학에서도 널리 사용하여 경전의 훈독을 우리 것으로 하며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이러한 방식은 한글창제 이전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후세에까지 그가 추앙 받는 것은, 해동경학에 그가 끼친 공로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설총이 신문왕에게 얘기해서 책으로 저술하였다는, 왕자들이 유념하고 지켜야 할 내용인 화왕계(花王誡 장미와 할미꽃)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1022년(현종 13) 홍유후에 추봉되고, 문묘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617(진평왕 39) ~ 686(신문왕 6) 신라의 고승. 성은 설, 원효는 법명, 설총의 아버지, 경상북도 경산시 출신.
661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고 길을 떠났다. 밤이 늦어 남양주 부근의 한 무덤에서 하룻밤을 자게됐는데, 밤중에 갈증이나 해골에 괸 물을 모르고 마시게 되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대사는 크게 느낀바가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사물 자체는 정도 부정도 없다”고 대오하고서 되돌아왔다.
자기를 못잊어하는 요석공주에게 “자기는 승려이므로 안 된다”고 말하자, 그녀는 죽겠다고 하며 자살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자기로 인하여 남이 죽는다면 그 또한 일종의 살인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정을 주어 안심시키고 난후 집을 떠났다.
그 후 설총이 태어났다. 이때부터 본인 스스로는 파계승이라 여기어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 복성거사로 자칭하며 <무애>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세속의 온갖 신고와 열락에 매이지 않고 초연하고 살았다. 그 후 절에 파묻혀 참선과 저술에 만년을 보내면서,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하였다.
1206(희종 2)~1289(충렬왕 15) 고려 승려, 학자. 성은 김. 이름은 견명, 일연은 자, 언필의 아들로 경상북도 경산 출신. 1214년(고종 1) 9세 때 해양 무량사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에게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왕명으로 운문사 주지에 취임하였으며, 1283년 국존으로 추대되어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으며, 이 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돌아갔다. 이듬해 조정으로부터 토지 1백 경을 받아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궁궐에 들어가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였다.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고대의 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하였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기록 및 고조선을 세우신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책이며, 아울러 희귀한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가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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