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선사가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며 10여 년을 머물렀다. 물론 참선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세간에 전해져오는 것은 대장경을 두루 열람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개인도서관이라고 불릴 만큼 누구보다도 많은 경전을 소유했고 또 읽었다. 경전뿐만 아니라 외서(外書)에도 밝아 법문 속에서 종횡무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늘 후학들에게 “정진할 때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다. ‘도대체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것이 강원학인시절의 화두였다. 선(禪)과 교(敎)의 관계에 대하여 긍정론과 부정론이 늘 함께 했다. ‘강을 건넌 후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뗏목론과 ‘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필요 없다’는 득어망전(得魚忘筌)론은 점잖은 표현이고, ‘팔만대장경은 고름 닦는 종이에 불과하다’는 과격한 표현도 더러 보인다. 선종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육조혜능 선사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이라고 하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서 마음의 경지가 달라졌고, 이로 인하여 출가를 결행하게 된다. 덕이본에 의하면 스승 홍인에게 금강경 강의를 들으면서 “응무소주이생기심에서 일체만법을 대오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법을 전해 받게 된다. 고려 선종에서 우뚝한 업적을 남긴 보조지눌 선사는 『육조단경』의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성이 항상 자재하다”는 대목에서 깨쳤다고 했다. 그리고 늘 곁에 『서장』과 『육조단경』을 두고서 정진했다. 혜능과 지눌은 경전을 통하여 자기의 안목이 열린 탓에 경전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부정론도 그 못지않게 많다. 고령신찬(古靈神贊)은 경전을 보고 있는 스승에게 ‘위찬고지(爲鑽故紙)’라고 하였다. 벌이 묵은 종이를 뚫고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부딪치는 어리석은 짓으로 비유하였다.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는 스승 위산( 山)에게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질문 받고는 그 동안 열람했던 경전 속에서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헛공부했다면서 경전을 불살라버린다. 그때 어떤 학인이 가까이 와서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을 한 권 달라고 졸랐다. “내가 이것 때문에 평생 피해를 입었다. 그대가 요구해도 그 폐해를 아는 나로서는 줄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몽땅 태워버렸다. 금강경의 대가 주금강 스님도 용담 선사를 만나서 안목이 열리면서 자기의 금강경 주석서를 법당 앞에 놓고서 불을 지르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현묘한 변론을 다하여도 마치 넓은 허공에 한 오라기의 털을 둔 것과 같고 세간의 중요한 것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큰바다에 물 한 방울을 던지는 것과 같다.” 대혜종고 선사는 종문의 제1서라고 하는 『벽암록』을 불태워버렸다. 법을 전해 받은 스승 원오극근 선사의 저작이다. 하지만 당시의 수행자들이 이 책을 읽고 외우고 또 앵무새처럼 교과서대로 문답하는 광경을 보고는 어록의 폐해를 없애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알음알이로 수행의 척도를 삼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 만연한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전으로 인하여 깨달음의 지남을 얻은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대장경으로 인하여 허송세월을 보낸 납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전자는 긍정론의 시각을 가지게 되고, 후자는 부정론을 펴게 된다. 결국 경전 자체의 허물이라기보다는 당사자의 수행결과에 경전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임제 선사는 이런 외형적 책 불지르기에 대하여 또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어떤 것이 경전을 불사르는 것입니까?” “인연이 비고 몸과 마음과 법이 공함을 보고서 일념이 되어 초연히 아무 일 없으면 그것이 경전을 불사르는 것이다.” 외형적인 책 태우기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법이 공함을 아는 것’이 진정한 ‘경전 불사르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파릉(巴陵)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조사의 뜻과 교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닭은 추우면 나무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내려가느니라(鷄寒上樹 鴨寒下水).” 낙포(洛浦)에게 누군가 물었다. “조사의 뜻과 경전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해와 달이 허공에 오가는데 누가 따로따로 길이 있다고 하리오(日月幷輪空 誰言別有路).”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난해하고 또 알쏭달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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