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차-3 : 큰재에서 지기재
1. 일시 : 2007. 3. 3(토)
2. 도상거리
- 큰재-5.7-개터재-6.9-백학산-4.7-개머리재-2.7-지기재(20Km)
3. 주요지점별 운행시간(7시간 40분 소요)
- 큰재(08:13)-회룡재(09:20)-개터재(09:54)-윗왕실재(11:37)-
백학산(12:41)-점심(12:41-13:25)-개머리재(14:56)-안심
산(15:38)-지기재(15:53)
4. 동행 : 성관
김형
피곤하여 곯아 떨어집니다. 눈뜨니 아침이네요. 여기도 면지역이라 아침에 여는 식당이 없습니다. 어제 저녁먹으면서 예약을 해두니 우리를 위해 기꺼이 문을 열어준다 합니다. 고맙더군요
하늘정원이라는 식당입니다. 상호가 좀 특이하데요. 인심도 좋습니다. 점심식사로 밥 두공기를 주문하니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반찬도 이것저것 챙겨줍디다.
어제 타고내려온 택시를 불러 큰재에 섭니다. 오늘가는 구간은 백두대간중에 가장 낮은 구간이기도 합니다. 해발 400m정도의 오르내리락입니다. 이 구간을 중화지구라 부른다합니다.
지금까지 백두대간은 도와도의 경계 또는 시군의 경계를 걸어왔지만 여기는 이런 경계선이 아니고 상주시권을 걷게되죠. 중화지구란 뜻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렇습니다.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 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짐작컨대, 오늘날까지 중화 지역이 경상도 땅으로 뿌리를 벋은 것은 아마도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국경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원의 팔량치 일대가 비록 백두대간의 동쪽이지만 전라도 땅으로 굳어진 연유도 비슷한 내력이 숨었을 터이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그 두 곳은 싸움의 결과에 따라 쉴새없이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 두 곳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물론 이는 사람이 걷거나 아니면 기껏 말이나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종류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싸움이 있었다. 얼마 전, 문장대 용화 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사건이 그것이다.
용화는 바로 화북면의 마을이니 경상도 땅이지만 백두대간을 넘어 온 탓에 그 물은 달래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 수계이다. 돈벌이는 경상도가 하지만 수질 오염의 대가는 고스란히 충북의 몫이다. 결국 경북 쪽의 개발 포기로 단락을 맺은 이 사건은 지방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 쟁이었다.』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5월호)
큰재에서 1시간을 걸으면 회룡목장을 지나 회룡재에 섭니다. 과거 산행기에 보면 회룡목장을 이영도목장이라고 표기되었던 곳이죠. 회룡재, 용이 돌아온 곳입니다.
이 구간의 특징은 산이 야트막하지만 대간길은 남으로 서로 굽이굽이 돌고 다시 북으로 휘감으며 대간을 꾸미고 있죠. 계속 걸었던 곳을 휘돌아 다시 원점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날씨는 화창합니다. 더군다나 어제 내린 비로 산길은 상쾌합니다. 하지만 안개로 인하여 10m 앞만보입니다. 시계제로입니다. 회룡재에서 30여분 가면 개터재입니다. 개모양이라서 그런가...
산하의 자연은 새순을 움틔울 준비가 한창입니다. 조금있으면 싹이 돋고 꽃을 피우겠지요. 봄의 향연을 펼칠 준비가 한창이지요. 칙칙한 겨울의 무게감을 떨치고 가겹고 산뜻한 봄을 맞이하겠지요.
동물이동 통로인 윗왕실재를 지나 오르막을 한차례 치고 오르면 백학산입니다. 백학산정상에 오르니 두분이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죠. 어제 우리가 묵은 여관(이화장)에서 자고 우리보다 1시간 먼저 큰재를 출발했다 합니다.
지기재까지 갈지 신의터재까지 갈지 결정을 못했다 합니다. 비박을 한다 하더군요. 백학산 정상에서 맛나는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합니다.
백학산 내리막을 내려 임도를 거치고 개머리재를 지납니다. 개머리재에는 민가가 한 채있고 농부들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었죠. 오르막을 오르면 임도 비슷한것이 나오는데 무심코 가다보니 대간길이 아닙니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다 능선을 타고 올랐죠. 앞서간 사람을 몇차례 부르면서 말입니다. 산악회에서 붙인 안심산을 지나면 내리막이 시작되고 과수원으로 떨어집니다.
배나무인가하고 일하는 농부에게 여쭈니 사과나무라 합니다. 과수원을 지나면 지기재입니다. 여기도 분수령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지기재 산장지기에게 전화하여 숙박지를 부탁하니 화령에 여관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조금만 기다리면 택배를하여 준다고 하더군요.
10여분후 산장지기 차가 도착합니다. 오르자마자 커피를 한잔 건넵니다. 지기재 산장을 어찌 알았느냐 묻더군요. 대간하는 사람들은 다 알거고 산행기에 다 기록이 되어서 인터넷만 치면 나온다 했지요
화령에 도착후 산장지기는 내일의 날머리인 화령재까지 구경을 시켜주고 다음의 들머리도 친절히 일러줍니다. 고마운 분이더군요. 얼마를 드리면 되냐고 하니까 만냥만 달랍니다. 친절함이 고마워 그냥 이만냥을 건넸죠.
여관에 도착, 시간이 여유로와 거리를 걸으니 화령 5일장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다던 5일장이지만 그 명성은 간데없고...
지방의 문제가 곧 국가의 문제임을 다시 실감케 합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느끼죠.
두집건너 다방입니다. 무슨 다방은 그리 많은지...
화령장여관에서 지친 몸을 녹입니다. 대간에 섰다가 속세에 내려와 삶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김형
이제 본격적인 속리산권으로 들어갈 겁니다. 바위암봉을 오르내리는 짜릿함을 즐기면서 말입니다.
속세를 떠난다는 속리로 들어가는데 어찌 속세를 즐기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4일차에는 지기재에서 화령재까지 걸은 후 서울로 돌아오려 했는데 비날씨와 강풍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와 하느님의 경영학을 존중하여 그냥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다음에 또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