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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역사의 진실
태권도의 역사는 해방 이후 현대에 시작된 것으로 고대역사와는 무관하다.
태권도의 직접적인 뿌리는 가라테(= 당수, 공수도)이며,
고대로부터의 우리나라 무술이 순수하게 이어진 것이 아니다.
택견이 태권도가 된 것이 아니다. 택견과 태권도는 전혀 다른 무술이다.
택견은 특유의 품밟기와 유술기법, 발차기 기법이 있으며,
초기의 태권도와 기술체계가 확연히 다르다.
초기의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테와 기술체계, 복장, 훈련방법 등이 흡사하다.
태권도가 애초에 가라테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본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1 >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 님의 증언
< 2 > 초기 태권도 9대관의 실상
< 3 >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고 최배달(최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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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 님의 증언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인 이종우 님이 증언하였다.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
(-------> 이 주소가 신동아의 해당 기사이다.
기사 전문을 보실 분들께서는 복사 떠서 주소란에 넣고 들어가보면 된다.)
이종우 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종우 부원장은 일제시대에
가라테(당시에 불린 명칭은 당수, 공수, 권법)를 배웠다고 한다.
그 가라테가 그대로 태권도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4월11일 고 최홍희 총재가 중심이 됐던 ‘명칭제정위원회’에서 결정됐다.
세계적인 권위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태권도의 창시자는 최홍희씨로 나와있다.
고 최홍희 님의 증언은 '태권도와 나'라는 회고록에 나와있다.
또한 무술잡지 '마르스'에서 고 최홍희 님을 인터뷰한 기사에도 태권도 창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인터뷰 내용은 '마르스' 잡지의 경영자였던 한병철 님의 저서 "고수를 찾아서"에도 실렸다.
최홍희 님은 가라테를 배운 가라테인으로, 택견의 발음을 따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분이다.
최홍희 님이 '택견’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태권(跆拳)’으로 했다.
태권은 지축 태(跆)와 주먹 권(拳)을 합한 뜻이다.
최홍희 님이 부대에서 여러가지를 조합해 무술을 만들었는데, 가라테를 기본으로 만들었다.
최홍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태권’ 휘호를 신청했는데 대통령은 쉽게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
5·16이 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최홍희가 태권으로 쓰자는 제의했다.
이종우 님이 태권이 뭐냐? 가라테의 변형인데’라고 대꾸했다.
가라테(= 당수·공수)와 태권도를 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다.
광복 직후 한국 무술계엔 수많은 파벌이 존재했다.
그들이 저마다 도장을 열었는데, 상당수가 가라테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이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했고,
엄운규 전부원장 고 이남석씨 등과 함께 실무작업을 맡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있다.
광복 이후의 태권도 문파는 지도관 청도관 무덕관 송무관 창무관 오도관….
거기에서 파생된 유파까지 합치면 9개가 주축이었다.
우선 협회 기준으로 9개관으로 정리했다.
이종우 부원장이 통합관을 주장했다.
을지로 6가에 9개 관이 함께 쓰는 총본관 사무실을 얻었다.
태권도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무예에서 태권도의 원류를 찾는 부류고,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신종 무예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태권도계는 오랫동안 전자를 대변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통무예와 태권도를 연결시킬 만한 구체적인 물증이 빠져 있다.
반면 후자는 최근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가라테 유입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가라테의 잔재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기화된 태권도는 가라테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품세 등에 아직까지 가라테적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무리가 따른다.
이종우 님도 과거에는 그런 식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이 서고 보급이 잘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다.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다.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다.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인가?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인가?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가?
그게 솔직한 대답이다.
이종우 님의 고백인즉,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사람들은 당시 “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다.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른가?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은 발로 올라가는데
태권도에는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 대해 이종우 님은 동의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글로 태권도와 가라테,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태권도와 택견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기술이 다르고, 직접적인 전수관계 또한 없다.
반면에 초기 태권도와 가라테는 기술상 완전히 동일하며, 도복도 동일하고,
직접적인 전수(스승과 제자)관계가 있다.
초기 태권도 9대 관장들은 모두 일본 가라데인으로부터 전수한 정통 가라데인이었다.
태권도의 직계조상은 가라테이지 결코 택견이 아니다.
< 2 > 초기 태권도 9대관의 실상
태권도역사 - 태권도의 초창기 도장들
"우리 태권도의 역사"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 태권도 기간도장
1.청도관
2.조선연무관
3.무덕관
4.YMCA권법부(창무관)
5.송무관
6.오도관
7.강덕원
8.한무관
9.정도관
* 태권도 기간도장 (基幹道場:母體館)
1946년 2월 27일 이원국(李元國. 당시35세)에 의해 최초의 태권도 도장인 '
청도관(靑濤館)'이 세워진 이후로, 대한태수도협회와 대한태권도협회로 이어지는
태권도의 통합은 1973년 40여개로 난립되던 군소 도장(관)을 9개로 정비하면서 정리된다.
1977년 8월 1일에 태권도총본관이 탄생하면서 대한태권도협회 산하 중앙 본관들이자
기간도장(基幹道場:母體館)들이던 9대 관을 아라비아 숫자로 개칭하는 등 통합이 가시화 되는데,
결국 1978년 8월 5일에 총본관이 폐쇄되고, 이어 동년 10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 공문에 의해
각 관을 폐쇄하게되고 태권도계는 통합되기에 이른다.
태권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초기 9대 기간도장(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바로 태권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1. 청 도 관( 靑 濤 館 )
청도관(靑濤館)'은 태권도 최초의 도장이다.
1944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전수를 시작한 시기는 1946년 2월 27일부터라는게 정설이다.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李元國)은 19세 때인 1926년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중.고교를 거친 뒤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진학하는데,
이때 일본 공수도(空手)의 본관(本館)인 '송도관(松濤館.쇼토칸)'에 입문하여
공수도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후나고시(船越)'선생으로부터 가라데를 전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송무관(松武館)'의 창설자인 '노병직(盧秉直)'관장과 함께
가라데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도관 분관(分館)으로는, 인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종의 국무관(國武館),
서울 서대문구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광주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과 최홍희의 오도관(吾道館) 등이 있다.
1대 관장은 이원국(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밀항), 2대 관장은 손덕성, 3대는 엄운규이다.
2. 조 선 연 무 관 (朝鮮硏武館.지도관 )
'지도관(智道館)'은 1946년 3월 3일 '전상섭'에 의해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로 출발하였다.
청소년 시절 유도(柔道)를 수련했던 전상섭은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배웠는데,
1943년 귀국후 서울 소공동에 위치했던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치게 된다.
그 후 해방이 되자 전상섭은 지체없이 '조선연무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관원을 모집한다.
한국전쟁시 전상섭이 행방불명되면서 조선연무관은 사실상 해체되는데,
당시 지도사범으로 있던 윤쾌병(尹快炳)이 이종우와 명칭을 '지혜로운 길'을 의미하는 '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한다.
지도관은 특히 다른 관에 비해 대련(對練:겨루기)을 중시해 70년대까지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도관의 대표적인 분관은 이교윤의 '한무관(韓武館)'이며,
초대관장은 전상섭, 2대 윤쾌병, 3대 이종우 등이다.
3. 무 덕 관 ( 武 德 館 )
무덕관(武德館)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서 '황기(黃
琦)'에 의해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했다.
황기 관장은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 그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주장
하지만 황기 관장의 무력(武歷)을 방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수련생은 모두 철도국 직원들이었다.
1955년 서울시 중구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한 황기는
그해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신설하고 한중(韓中)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
를 개최했다.
1960년 무덕관은 53년에 설립한 '대한당수도협회(大韓唐手道協會)'를 '
대한수박도회(大韓手博道會)'로 개칭한다.
무덕관은 1965년 3월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돼 황기를 제명하고 통합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고 뒤이어 홍종수, 오세준이 이었다.
무덕관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
4. Y M C A 권 법 부 ( 창 무 관 )
창무관(彰武館)은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며
조선연무관에서 전상섭과 함께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尹炳仁)에 의해
1946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 YMCA권법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어린 시절 만주에서 '주안파'를 익힌 윤병인 관장은 해방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가라데를 배웠는데, 무술의 경지가 높아 5단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일본인을 제치고 대학내 가라데부 주장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윤병인은 자신의 중국 무술을 보고 한눈에 매료된 가라데 창시자인 '도야마
간켄'과 서로의 무술을 교류하며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YMCA권법부는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남석.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자와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명명(命名)한 것으로,
두 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았다.
5. 송 무 관 ( 松 武 館 )
송무관은 1946년 노병직(盧秉直)에 의해 개성에서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노병직 관장은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과 일본 유학생 시절,
송도관(松濤館;쇼토칸)의 후나고시 선생 밑에서 함께 가라데를 배웠다.
해방 직전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궁사장(활터)이었던 관덕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 삼아 가라데를 가르친 것이 송무관을 창설한 계기였다고 한다.
노병직 관장은 수련생들에게 반드시 1백번 이상 권고대(※주먹단련대)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도했는데, 4급 이상이면 꼭 실전 대련을 시켰고, 추운 겨울에는 모한수련(冒寒修練)을,
더운 여름엔 모서수련(冒署修練)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6. 오 도 관 ( 吾 道 館 )
오도관은 군(軍) 장성 출신의 최홍희(崔泓熙)와 남태희(南太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홍희가 1954년 제3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기 까지는 부관 남태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운 뒤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과 인연을 맺는데,
1953년에 제주도 보병 제29사단에 있던 최홍희 장군과 만나게된다.
오도관에는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한차교.우종림.고재천.김석규.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도 손덕성.현종명 등 청도관 출신이 주류였다고 한다.
현종명은 1954년부터 10년간 오도관 관장직을 맡았다.(당시 최홍희는 명예관장)
1955년 '태권도'란 명칭을 창안해낸 최홍희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내어
본격적으로 전군(全軍)에 태권도를 보급하기에 이른다.
특히 오도관은 월남전쟁으로 1960년대 초부터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계기로
민간도장과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관세(館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오도관은 최홍희가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한 후 일탈행동을 하면서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현종명.곽병오(작고).백준기 등이 관장직을 맡았다.
7. 강덕원 (講德院)
강덕원은 한국전쟁직후 어수선하던 시기인 1956년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와 박철희 두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초대 관장은 홍정표다.
강덕원이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은 YMCA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이 납북된 이후
권법부를 재건하려던 이남석, 김순배와의 갈등으로 파생되었다.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베풀 '강(講)'에 큰 '덕(德)'자를
써서 '덕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다.
강덕원은 50 중반에 창설된 신생관(新生館)이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현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과 훗일
대한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맡아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
정화.이정후.이강희.한정일.김병수.지승원.임복진 등이다.
8. 한무관 (韓武館)
1956년 8월 이교윤 관장이 창설한 한무관은 50년대 중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신생관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당시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던
한국체육관 의 부관장인 이상묵의 허락을 얻어 당수도를 가르친 이교윤은
1년만에 2백명 이 상의 수련생을 확보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도관 관장이던 이종우와 갈등이 증폭 되자
이상묵의 제의로 지도를 중지하게 된다.
그 후로 이교윤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강문고등학교 뒷편 공터에 한무관 간판을 내걸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데 이 것이 한무관이 생기게 된 발판이었다고 한다.
1969년에는 중앙도장을 서울 왕십리에 개관한다.
9. 정도관 (正道館)
정도관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청도관 출신인 이용우(현 국기원 심사위원)에 의해
서울 서대문 로터리에 중앙본관이 개관되었다.
정도관은 모체관인 청도관과 이렇다 할 마찰없이 관을 개설했다는게
여느 신흥관의 파생과정과 다른 점이다.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라는 관훈의 정도관은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차원, 목포, 김제 등지에 지관을 개관하며 관세를 확장해나갔다.
< 3 >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고 최배달(최영의)
태권도 역사와 관련되어 거론되는 인물로 극진가라테의 창시자 고 최배달
(최영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츠) 선생이 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반일감정으로 인하여 최배달 선생의 극진가라테를 태권도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배달 선생이 수련하고 창시한 무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테였다.
최배달 선생이 집필한 극진 가라테 교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테 기술과 일본 가라테의 전통적인 훈련법들이 나오고,
가라테의 역사, 세계 무술의 역사 등에 대한 논술이 자세히 나온다.
일본의 쇠나막신(게다) 훈련법도 그 중의 일부이다.
바로 이 최배달 선생의 극진 가라테 교본이
우리나라에서 태권도 교본으로 둔갑하여 출판된 시절이 있다.
초기 태권도와 가라테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게다 훈련법처럼 일본색이 확연한 부분은 삭제했다)
초기 태권도와 오늘날 태권도는 품세가 확연히 다르다.
초기의 가라테에서 우리만의 태권도로 진화한 그간의 사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최배달 선생의 무술의 기본은 역시 가라테일 수 밖에 없었다.
최배달 선생은 일본에서 살면서 가라테 도장에 입관하여 정식으로 가라테를 수련한 정통 가라테인이다.
최배달 선생의 아들인 범수화 님의 저서 "This is 최배달"에 따르면,
최배달 님은 1942년 타쿠쇼쿠 대학에 입학하여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후나고시 키친(송도관 창시자)의 사설도장에서 2년 동안 운동을 했다.
그 무렵에 미야기 초주뉴(1888-1953)의 제자인 조선사람 조형주를 만나 강유류 가라테를 접했다.
최배달 선생은 실전경험과 무술연구를 통해 가라테를 발전시켜
극진 가라테라는 자신의 유파를 창시했다.
최배달 선생은 한 때 우리나라 태권도와 극진 가라테를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다.
통합 도복까지 준비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태권도계의 분열상황을 보고
통합을 포기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초기 태권도와 가라테가 유사한 무술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시도였다.
이상의 글은 다음의 도서를 근거로 작성했다.
"우리 태권도의 역사"
강원식, 이경명 지음 | 상아기획
"택견 연구" - 개정판 | 이용복 지음 | 학민사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펴냄 | 1999년 04월 01일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도기현 지음
동재 펴냄
"실전 공수도 교범"
최영의(최배달) 지음 /서림문화사
만화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 작화.
만화 "대야망" 고우영 작화.
만화 "무한의 파이터"(국내 발간명) 지로 쯔노다 작화. 이끼 카지와라 스토리.
"This is 최배달" 범수화(최배달의 아들) 지음.
찬우물.
"고수를 찾아서" 한병철 지음
영언문화사
출처 : 신동아 기사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
태권도 역사(펌)|
개요
대표적인 한민족 고유의 무술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투기 스포츠이자 대한민국의 국기이다.
태권도는 아무런 무기 없이 언제 어디서나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 또는 방어하는 무도로 신체 단련을 위한 목적과 함께 정신적 무장을 통한
올바른 인간화를 중요시하는 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신체운동으로서 태권도는 어린이의 성장발육, 청장년과 노인의 체력 증진,
여성의 건강과 미용 증진에 큰 효과를 준다.
태권도의 기술 체계와 운동 형태는 신체의 각 분절을 좌우 균형 있게 구사하도록 짜여 있어,
인체 관절의 유연성이 고르게 발달하도록 한다.
그리고 문명 발달에 따라 가중되는 정신적 장해, 스트레스 해소에도 큰 도움을 준다.
맨몸 투기로서 태권도는 맨손과 맨발로 상대방을 타격하는 기술 체계를 갖는다.
특히 다른 무술과 뚜렷하게 차이를 갖는 것은 위력적이고 다양한 발 기술이다.
발 기술이야말로 태권도가 세계 최강의 투기라 말할 수 있고
태권도가 차별성 있는 종목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태권도는 어떤 무기의 사용도 없이 인체를 사용하지만 일편필승의 가공할 공격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는 방어를 우선하는 기술 습득 원리를 강조한다.
이는 평화와 공정성을 존중하는 태권도의 정신적 기반에서 비롯한다.
이를 통해 태권도는 배우는 이가 수련의 목적을 결코 남을 공격해서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극복의 고결한 태도에 두도록 만든다.
교육적 수단으로서의 태권도는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가치관과 애국심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재료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자아완성에의 의지를 실천하도록 안내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 태권도 수련자는 평화 지향적인 기술 체득 원리를 이해하며 빈번하고
반복적인 예절 교육을 통해 자칫 빠지기 쉬운 자기 중심적 삶을 뛰어넘어
인간 생활에의 광범위한 적응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 생활에서의 덕목들이 교육으로서 태권도가 추구하는 바이며
바로 이점이 태권도의 무도적 가치관이다.
스포츠로서 태권도는 다양한 형태의 국제 대회를 갖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스포츠 종목이 되었으며
특히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서 채택된 것은 이를 명확히 해주는 결정타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과 뒤에는 태권도 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및 경기 규칙 개발, 보호 용구 개발 등에
노력한 덕분이며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스포츠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대 한반도의 부족국가들에게는 제례 의식으로서 가무, 유희 등이 존재했는데
이와 같은 몸짓들이 대결 구도로 잡히면서 축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본다.
즉 원시적인 형태의 스포츠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족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술이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무술과 진전 제례 행사로서의 목적이 융합되면서
한민족 고유의 무술 태권도의 원형이 갖춰진 것으로 여겨진다.
태권도에 관한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는 많은 편이다.
특히 고대의 고분 벽화나 불상, 서적 기록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고분 벽화 중의 하나로, AD 209~AD 427년, 당시의 고구려의 수도였던
현재 만주 집안현 통구에 있는 무용총 현실 벽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벽화에는 두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보며 손·발로 상대를 공격할 듯한 자세를 보여
오늘날의 태권도 경기 동작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이나 분황파 9층석탑의 인왕상 등의 몸 동작은 태권도의 품과 유사하다.
또한, 백제의 경우,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 조정에서의 백제의 대좌평 지적을 초청해
일본 건아들과 상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선진문화권인
백제인들이 맨손무예를 지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고려에 와서는 삼국시대에 행해지던 택견(태권도)이
체계화된 무예로서 무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행해졌다.
『고려사』에 보면 태권도가 '수박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을 여러 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하므로 의종 임금은 이를 사랑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 "임금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임금이 화비궁에서 수박희를 보셨다.", "말바위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고려시대의 수박희(태권도)는 무예로서뿐만 아니라 스포츠로서
제 삼자가 관람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서 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근세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와 비슷하게 무인들 사이에 수박희(태권도)가 계속 성행했다.
더욱이 대중화된 경기가 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행하게 되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작지 마을에서 양도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로서 승부를 다투었다는 기록에서 수박희는 무예로서만이 아니라 스
포츠로서도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태종실록』권 19에 보면 "병조의 의홍부에서 수박희로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에 보하되 3인을 이긴 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군사로 하여금 수박희를 행하도록 하고 구경했다."
(『태종실록』권32)는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박희는 실전에서도 사용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서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지에 따라 태권도(태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해방 후 잊힌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 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탕하에 전 세계로 진출한 태권도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태권도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경기 중에는 손기술과 발기술을 공히 사용할 수 있으며 유효 타격 부위에 명중하면 점수를 얻게 된다. 손기술은 바른 주먹의 인지와 중지의 앞부분을 이용한 공격이어야 유효하며
발기술의 경우는 복숭아뼈 이하의 발부위를 이용한 공격이어야 한다.
경기 시간의 경우, 남녀 공히 3분 3회전, 회전 간 휴식시간은 1분이 주어진다.
경기의 시작과 종료는 매 회전마다 주심의 "시작!" 선언으로 개시되며, "그만!" 선언으로 종료한다.
경기 진행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가. 선수는 주심의 "차렷", "경례"에 따라 감독관을 향해 입례한다.
나. 선수는 주심의 "좌우향우"에 따라 마주보고 "경례"에 따라 입례한다.
다. 주심의 "준비", "시작"에 따라 경기를 개시한다.
라. 선수는 마지막 회전이 끝나면 지정된 위치에서 마주보고 주심의 "차렷", "경례"에 따라 입례한 후
바로 서서 판정을 기다린다.
마. 주심은 경기결과에 따라 승자의 손을 들어 선언한다.
단, 부상으로 인해 승자가 선수위치에 서 있지 못할 경우 주심은 자신의 승자쪽 손을 들어 선언한다.
바. 선수퇴장
경기장은 12m×12m넓이의 정방형으로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또한 수평이어야 하며, 바닥은 탄력성 있는 매틀을 사용해야 한다.
단, 필요에 따라 경기장은 높이 50m∼60m의 경기대로 조정, 설치할 수 있으며,
이 때는 안전도를 고려하여 사방 1m 이상의 공간을 확보하고 30˚ 이내의 경사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12m×12m넓이의 경기장 정 중앙부에 8m×8m넓이의 정방형 지역을 경기지역이라 하고
그 외곽 지역을 경계지역이라 한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협회가 공인한 도복 및 보호 용구를 착용해야 한다.
보호 용구에는 몸통 보호대, 허리 보호대, 샅보대, 팔·다리 보호대를 착용하여야하며,
샅보대 및 팔·다리 보호대는 도복 안에 착용해야 한다.
또한 협회의 태권도 경기 용품은 공인 규격에 합당한 것으로 공인 등록 업체의 제품을 사용해야 하며
몸통 보호대의 득점 부위는 각각 청·홍색으로 구분해서 표시해야 한다.
또한, 머리 보호대도 각각 청·홍색으로 표시해야 한다.
ㆍ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태권도 메달 수 : 8개
ㆍ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태권도 종목
· 남자 : 58kg급, 68kg급, 80kg급, 80kg 이상급
· 여자 : 49kg급, 57kg급, 67kg급, 67kg 이상급
태권도 수련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가치
서론
태권도는 2000년 전인 삼국시대부터 이미 행해졌음이 입증되었고, 한국의 국기로서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내용이 담긴 무도적 스포츠이다. 중국 권법은 1500년 전 소림사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가라테는 500년 전 오키나와에서 시작되었음을 볼 때, 태권도는 동양무술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무술임을 확증할 수 있다.
태권도 수련은 손과 발을 이용, 공격과 방어기술을 연마 계발하여 심신을 단련하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무도이자 스포츠이다. 이러한 태권도는 현재 초, 중, 고 성장하는 시기에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생활화되고 체육으로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스포츠라는 개념을 벗어나 수련을 통하여 어떠한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가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태권도는 성장기인 초, 중, 고 학생들에게 균형있는 성장을 촉진하고 강인한 정신력과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며 이러한 요소는 사회전반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본론
태권도는 신체의 발육을 조장한다. 신체의 발육은 인체의 순환, 호흡, 소화, 배설, 내분비등 생리적 계통에 속하는 여러기관들의 협응작용에 의하여 성립된다. 그런데 태권도는 이러한 생리적 기능을 자극하여 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신체의 발육을 조장한다.
또한 태권도는 신체의 발달(근력, 지구력, 유연성, 균형성 등)을 조장한다.
태권도 품새는 팔을 뻗고 다리를 펴고 몸을 틀고 하는 일련의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움직임 속에서 근력, 지구력, 유연성, 균형성은 성장되는 것이다.
이를통해 건강한 생활에 필요한 기초체력과 운동기능을 향상시켜준다.
유아의 경우에는 신체가 발달함에 따라 운동 능력도 꾸준하게 발달하며, 생후 5세까지는 전반적인 운동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이는 걷고, 달리고, 뛰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 시기에는 기본 운동기능이 발달하는 시기로 신체활동을 통하여 유아의 크고 작은 근육의 발달을 조장하고 신체의 각 부분을 단련하여 운동기능과 정상적 발달을 도와야 한다. 유아기는 운동기능이 분화되고 섬세하게 되는 시기이므로 운동에 힘쓰도록 해야한다. 유아기에는 신체 움직임의 기초기능을 습득하는 신경기능의 발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유아의 경우에는 성인에 비하여 대뇌의 기능 중에 평형성, 속도, 정확성 등은 미흡한 점이 다소 있다.
유아들은 신체의 양적 성장률은 이전에 비하여 완만해지나 운동능력의 발달은 현저하게 증가되며, 주위 환경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신체 활동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즐기게 되면서 운동 능력도 발달된다.
또한 1993. 8. 27. 한국 체육 학회 제 31회 하계 학술발표회 발표 논문(조선대학교)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1년 동안의 태권도 수련이 비수련자에 비하여 19.5%의 신체 성장 발육 상태가 더 빠른 것으로 나타났고 1997. 12. 연세대학교 체육과학 논문에 의하면 태권도 3품 이상 수련자들은 비수련자에 비해 100m, 턱걸이, 제자리 멀리뛰기, 윗몸 일으키기, 오래달리기, 멀리 던지기의 6가지 모든 종목에서 기초체력이 월등히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비만을 질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비만이 많은 질변의 근원이 되며 과체중인 사람들이 서양 전체의 많은 비중을 차지함으로서 국민의 건강에 관련하여 질병으로 규정한 것이다. 비만의 근원이 되는 요소에는 고칼로리의 음식섭취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섭취된 칼로리의 소비를 위한 적합한 운동부족으로 인한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운동을 하기위한 적합한 운동으로서 태권도가 적합하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의 기초체력 향상과 현재 당면한 서양음식을 통한 비만을 줄이기 위해서는 흥미를 자아내면서도 무리하지 않은 태권도 수련을 꾸준히 지속시켜야 한다.
뿐만아니라 장년층의 경우, 신체는 노후화 되어가며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면 운동을 해야한다. 운동부족은 관절의 가동범위를 다소 제한하고 힘든 일을 외면하게 만들어 더욱 몸을 가동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을 가져오기 쉽다. 또 1989. 6. 대한 정형외과 학회지에 의하면 태권도의 수련이 신체 각 부위의 골밀도를 증가시켜 노년기의 골다공증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유아와 장년층에게도 신체활동을 원할하고 다양하게 할 수 있는 태권도를 권장하여 유아의 원활한 성장과 장년층의 건강증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태권도는 신체의 발육발달, 또 건강한 생활에 필요한 기초체력과 운동기능을 향상시켜줄 뿐만 아니라 인격, 예의, 인내, 의지, 강인한 정신력을 배양시키고 길러준다. 즉 , 첫째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행동으로 표시되는 높고 값진 인격의 기본으로서 서로 공경하고 의리를 지키며,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함으로 예의를 배양한다. 둘째, 부끄러움을 아는 깨끗한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에 어긋난 행동에는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염치를 배양한다. 셋째,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디며 스스로 이겨내어 인내를 배양한다. 넷째, 자기 자신을 조절하여 모든 욕심을 자기의 의지로서 눌러 이겨서 굳건한 의지를 기른다. 다섯째, 백 번 찍어도 바른 것을 위해 굽히지 않는 군자의 기상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올바른 정신을 기른다.
1992. 12. 한국 체육 학회지에서 음악을 이용한 느린 동작의 태권도 수련이 수련전보다 약 18%의 집중력이 향상 된다고 한다. 이는 태권도 수련이 신체만의 수련이 아닌 정신적 수양을 배양할 수 있다는 주요한 논거가 된다.
이러한 정신적 수양의 배양은 학업성적과 도 깊은 관련을 맺을수 있는데 1990. 12. 한국 체육 학회지에 의하면 4년이상 태권도를 수련한 3품증을 소지한 어린이들이 비수련자에 비하여 I.Q가 약 12포인트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학업 성적 또한 전과목 평균 점수가 6점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 13과목으로 환산할 때 총점 78점을 더 취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학급 석차 10등 이상 앞당길 수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한다. 즉 어린이 태권도 수련이 곧 정신적 수양이며 또한 실 생활에서 발현될수 있는 I.Q와 학업 성적등에서 훌륭한 촉진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수련을 통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줄 아는 지혜가 축적되며 행동을 유발하는 기본적 에너지인 욕구를 충족시켜 사회의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고 일반 국민들이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이룰 수 있다.
태권도수련은 신체적 가치와 정신적인 측면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앞서 말한바 있다. 태권도 수련자들이 신체적, 정신적 가치를 함께 배양하고 계발할 때 사회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예를들어 직장생활에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태권도 수련을 통한 신체적, 정신적인 수양은 사회전반에 활기 불어넣어 보다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업무수행을 촉진할 수 있다.
앞서 말한바 있지만 최근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게 돼 운동부족과 맞물려 비만증에 무기력증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직장인들의 현실이다. 원시사회에서 고대 근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을 거동과 활동을 수반하여 살아온 우리 인류가 최근들어 산업화되고 기계화 됨으로서 대부분 사무직에 종사하게되고 과다한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인한 인류의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이 발현됨을 우리 모두는 알고있다.
태권도 수련은 온몸의 근육을 모두 수축 이완시켜 움직이는 운동인데다 설사 혼자라 해도 아무 곳에서나 품새를 통하여 만족할만한 직접적인 운동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뛰어난 스포츠이며, 태권도로 인해 다량의 노폐물을 땀과 함께 배출하고 나면 가인한 체력뿐만 아니라 여러 유익한 기술습득으로 누구에게나 자신감을 지니고 대면할 수 있게 되므로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사무직의 직장인들과 전문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바람직한 무도이자 스포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태권도는 현재 팬암게임, 아시안게임, 올아프리칸게임, 남아메리카게임 등의 대륙별 종합경기 대회는 물론 올림픽 경기장의 관중들이 환호하는 여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처럼 1,000명이 넘는 많은 수련자가 아름답고, 정확하고, 강력한 힘이 표출되는 태권도 매스게임을 보이는 장면은 어떤 스포츠종목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맨몸투기로서 인명에 미칠 피해를 없애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을 하도록 과학적인 경기규칙과 보호용구를 개발한 건은 태권도가 각광받는 국제스포츠로 발전한 원동력이다.
비단 이러한 사회로서의 가치는 어린이, 학생, 직장인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있는 특수한 사회층에도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특수한 사회층으로의 확산에는 장애인 태권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장애인 태권도의 발전에있어 지난 17일에는 장애인태권도선수단을 조직하여 창단식을 갖기도 했다. 장애인태권도선수단은 오는 10월 국내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그들의 실력을 자랑할 예정이다. 또 내년에는 장애인태권도아시아대회를 미국, 베트남, 일본 ,중국 등과 함께 개최하여 세계에 한국장애인태권도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계획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점차적으로 장애인태권도가 장애인올림픽대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며 태권도연맹이 조직한 장애인태권도선수단은 성인부, 아동부, 장애유형별로 구분되어 유형별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해 선수단 출범에 이어 장애 선수를 유형별로 지도할 수 있도록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장애인 태권도 지도자 양성 과정을 개설할 계획을 진행 중이며 여러 재활프로그램을 연구 개발중이다.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정인태 상임이사가 "태권도 선수를 꿈꾸는 장애인의 희망되겠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는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태권도는 마치 비장애인들만의 국기인 마냥 편향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진정한 태권도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함께 할 수 있을 때 완성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 것을 보았다.
이제는 사회전반에 있어서 태권도 수련은 남녀노소 누구나 할수있는 운동의 개념에서 한 단계 도약하여 소외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세계적 스포츠이자 무도로 발돋움 하고 있는 것이다.
태권도가 이러한 여러 내용을 충족할 수 있어야 함에 고도산업문명사회의 길을 가고 있는 인류에게 적합한 현대스포츠로서 유희성, 안전성, 규칙성, 경제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발전하여 대한민국의 국기가 아닌 소외됨이 없는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의 무도, 스포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론
인간은 사회에서 혼자서 살 수 없으며 사회질서와 규범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태권도를 수련함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과 예의와 복종, 관용, 극기 등의 태도를 배우게 되며, 수련과정에서 비롯되는 심신의 수양 내지는 인내심 또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로부터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등 신체활동에서의 체력단련과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줌으로써 사회 생활에서의 능률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릴때 높은 가치를 지닐것이며 한정된 수련생의 한계를 극복하여 다양한 층을 포섭했을 때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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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8. 27. 한국 체육 학회 제 31회 하계 학술발표회 발표 논문(조선대학교), 서울 대성중학교 교사 김석련
1996. 4. 충북 의대 재활 의학과 교수 김상규 박사
1997. 8. 태권도 월간지 8월호. 서울 삼성병원장 하권익
1997. 12. 연세대학교 체육과학 논문집. 연세대학교 강사 김석련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정인태 상임이사에게 듣는 장애인 태권도의 미래
1999. 2. 20. 동아대학교출판부 체육원리, 정광복 외 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