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의 선조와 5대 파조
시조공 흥광(興光)
광산 김씨 시조공 흥자 광자께서는
신라국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에 태어났다.
신라 말엽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미리 아시고
무진주 서일동에 옮겨와 사시면서
광산 김씨의 시조가 되시고 이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신라 45대 신무왕 3자라는 설과 49대 헌강왕 설이 있으나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왕자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조공이 뿌리내린 서일동에서 고려 때 후손들 중에서
평장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동명이 평장동으로 바뀌고
현 행정 주소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이다.
2세 식
벼슬이 각간이니 평장사(정2품) 품질이다.
3세 길(佶)
고려 태조 왕건이 3국을 통일할 때
학행이 높고 지략이 뛰어난 공이 기위한 계책으로
왕건을 도와 민족통일을 도운 공으로 삼중대광사공을 지냈다.(고려사)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 중국의 사서인 책부원기(중국 사료집)의 외신부
조공조 청태원년(934) 8월에
고려조 김길의 선박이 산동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광산 김씨 약사)
김길이 고려의 개국 공신이되어 삼중대광에 오르자,
김길의 조부 김흫광은 광산 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후 조부의 작호이자 세거지인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후손들 중 평자사가(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을 평장동이라 불렀고,
그명칭은 지금까지 남아 평장리로 불리고있다.(위키백과)
4세 준(峻)
아버지는 길이며 벼슬은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였다.
5세 책(策)
아버지는 준이며, 한림학사 평장사를 지내고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처음으로
충당대 문을 열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어진 선비를 뽑았다.
이때에 왕융과 서희와 김책 등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다.(최자의 보한집 서문)
광종 15년(964) 3월에 한림학사 조익을 상시관으로 삼아 진사(進士)를 뽑을 때에
김책이 급제하니 광종이 덕천전에 거동하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김책에게 베옷을 벗게 하고 공복으로 갈아 입혀 잔치에 참여케 하였다.
잔치가 끝이 나고 헤어질 때에 말을 타고 의봉문을 나가도록 허락하였다.
급제한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의전의식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려사)
벼슬은 평장사(정2품 장관급)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6세 평장사 휘 정준
아버지는 문정공 책이다.
고려 정종 2년(1035) 전중시어사에 제수,
정종 7년 이부원 외랑과 권지승성(임시직)이 되다.
문종 4년(1049) 중추원사와 판어대사를 거쳐, 문종 8년에 참지정사,
문종 10년에 내사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문종 12년 평장사로 치사할 때 어구마 한 필을 하사받았다.
문종 12년(1051)에 식목도감 최충이
“급제한 이신석이 씨족을 기록치 아니하여
등조(登朝)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다.
시랑 김원충과 탄어대사 김정준이 아뢰기를 “씨족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그 조부의 과실이요, 신석의 죄가 아닌데 힘써 공부하여
임금의 연전에서 급제하였고 몸에 허물이 없으니
신하의 반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께서는 공의 상소대로 등용시켰다.
7세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 양감
고려 전기의 문신이며 유현. 아버지는 평장사 정준이며
시호는 문안공이다.
문종 6년(1051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종 25년 「상서우승좌 간의대부」와「서북로병마부사」가 되었고
이듬해「상서좌승지어대사」로 제수되었다.
문종 27년 태복경이 되어 송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문종 29년(1074년) 산기상시를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부상서로 송나라 사신의 접반사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와 서경유수사주국을 겸하고
중추원사를 거쳐 좌복야가 되었다.
1083년 중서시랑 평장사로서 시정의 득실을 따졌다.
선종 4년(1086년)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어
이듬해 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으며,
판상서 호부사로서 그해 7월 선덕전에서 또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12월에 수태위가 되고 여러 요직을 거쳐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학문을 널리 알리고
예절을 지키는 법도를 배웠고,
심오한 글과 깊은 뜻을 정자문에서 배웠고
태묘(왕가의 사당)와 태학(최고 학부 대성전)을 그려오고
경전(사서삼경)을 싣고 돌아와 성현의 연원을 닦고,
공자의 사당을 집 뒤에 세워
봄․가을 제사 지내니 동국문묘가 시작된 것이 처음이고
이로서「동박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송나라에서 돌아올 때 시인 소동파가 공에게 전별시를 지어 보냈다.
알거라 금마의 손님이 때로는 벽계방에 꿈꾸더라(似知金馬客時夢碧雞坊).
빙설은 난잡에 살아지고 연좌는 고향으로 풍기더라(氷雪消殘臘烟波瀉故鄕).
우는 말 방울소리 위의를 갖추었고 서서 있는 말은 오래도록 배회하네(鳴鐢自容與立馬久回).
비노니 삼한의 사신은 신도가 낙랑에 도착하리니(翔乞與三韓使新圖到樂浪).
유문(遺文) 1
병든 손이 한적한 절에 들리니(炳客投肅寺)
시원한 그늘이 상쾌하도다(淸陰滿意凉).
스님을 만나도 침묵이요(逢僧無一語)
바람은 푸른 연꽃 향기를 보내주네(風送碧荷香).
시2
세상일이 유유하니 마침내 무엇이 될꼬.(世事悠悠意若何)
부질없이 낙서대로 창파만 희롱하네.(謾將漁竹弄滄波)
이제 강남에서 또 이별하니.(如今又作江南別)
석양에 뱃노래 소리 더욱 구슬프다.(落日難堪廳槕歌)
성리학을 고려 사회에 실용학문으로 널리 보급한 공으로
「동박이학의 조사」로 불리는 회헌 안유 선생께서
문안공에 드리는 감모시가 있다.
이 감모시는 안향 선생께서 양감공이 세운 공자의 사당을 보고 지은 시로 추론된다.
향과 등불을 밝혀 곳곳마다 부처에게 빌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통소와 젓대로 신령을 섬기도다.(簫管家家盡事神)
두 어 칸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이 홀로 서 있는데(獨有數間夫子廟)
봄 나무들은 뜰 안에 가득하고 인적은 적막하네.(滿庭春草寂無人)
․ 가학 태조 남능비명의 글은 전해 오고 있다.
실기 출화해사전동방 사문 연원록
김문안 선생의 이름은 양감이요 광주인이니
벼슬은 문화시중 감수국사요 평장사 정준의 아들이다.
원운곡이 말하기를 “기자께서 동방에 온 후 설총(홍유후)이 있었고
그 뒤에 최 문헌공(치원)이 중흥하였고
김문안공이 끊어져 가는 계통(系統)을 잇고
성현 연원의 묘를 세우고 중국에 들어가 경전을 가지고 와서
우리 동방후학의 길을 열어준 공이 컸다.
그 실천 궁행한 공부는 문집에 기재되어 있을 것인데
문집 간행이 넓지 못하여
홍유후와 문헌공의 유집은 널리 전하여지지 못하였는데 또
정중부의 난리에 불타 없어졌다.
선비들도 그 유고를 얻어보지 못하였거늘
천박한 나의 식견으로 잘 알 수 없으니
중부사가 사문에 해를 끼침이 어찌 그리 혹심하였던고....”하였다.
김정이 범복애(북송 때 명신)께 보내는 글에 말하기를
“아! 나는 이유현 선생과 선고(先考: 영리(英利))에게 들었고
선생님과 선고는 운월재 문정 선생에게 들었으니
그 글이 이르되
”우리 동방에 성도는 단군께서 아들을 도산에 조회하였으므로
처음 전하여 크게 밝았으니 오랑캐를 면하였다.
기자(箕子)께서 처음 오셔 중국의 도통을 전하고
오륜을 밝히므로 도를 지키고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많았다.
홍유후와 문원공의 도학이 가장 뛰어나서 학문의 탁월함이 적지 않으나
그 마음은 기자의 유풍, 여운에서 깨달았고 그 도는 경전에서 넓혔으나
이에 유지(遺旨)가 요령에 대강일 뿐이다.
김문안공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을 때 자세한 말과 깊은 뜻은
정자의 문하에서 받았으니 귀로 듣고 직접 배웠다.”
그러므로 문안공은 일찍이 말씀하시되
“내가 심법[心法:송대에 유학자가 심체(心體)를 존양(存養)하고
심용(心用)을 성찰(省察)]하는 도(道)는 본래 우리나라 선생에게 배웠으나
그 학문이 넓고 간략하며 자상하고 깊은 뜻은
송나라 정자 문하에서 친히 배웠고
소식(호 소동파) 선도(仙道)와 술석(불도)을 하니
이름은 유자(儒者)이나 행하는 것은
묵적(전국시대의 노나라 사람, 이단학설인 겸애설을 주장)이라,
진리를 좀먹고 문란케 하는 줄 알았으나 제후국(작은 나라) 사람으로 감히
그에게 거슬리지 못한 것은 그는 대국인(중국인)이라 서로 틈이 생기면
우리 나라에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여 극히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과 충절은 가상함으로 내가 사랑하였고
소식(소동파)도 또한 나를 아껴준 일이 많았다 하였으니
한자(漢子: 유자)가 소주에서 수 십일 곽주에서
태전당과 술 마신 일이 한자의 본뜻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은 대개 문안공을 사문의 정통이라 함이 지나침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이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문안공의 유결(遺訣)이 불에 타고 전하여지지
못하였으니 사문(斯文)에 미친 화액이 어찌 그리 심한고.
간재 선생이 제자들을 명하여 노선생(불원재)이 원나라에 갔을 때
문안공이 송나라 정자와 문답한 말과
또 최문헌의 일을 수집하여 온 것을 <화해대사전>에 기입하였는데
사전(師全)도 또한 여러 번 난리를 겪었으므로
비슷한 말 한마디도 세상에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다행히 들으니 법문정(복애)이 원처사(元處士)와 같이
약간 남은 글을 보관한다 하기에 글을 올린다 하였다.
비록 문안공의 사적에 그럴 만한 문헌은 얻지 못하였으나
편말에 기록하여 사문에 만 분의 일이라도 발명될까 한다.
주(註) 설총(유후) 최충 (문헌) 원천석 (운곡) 범세동 (부애) 신현 (문정) 신득청 (이유헌)
8세 사청공 휘 약온
1059년(문종14)-1130년(인종9) 고려 전기 문신, 구명은 의문, 자는 유승.
시호는 사청, 아버지는 문안공 양감, 어머니는 증 서해군 대부인 최씨.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1년 평장사 검교사도와 수사공상주국을 지냈다.
수태부 문하시중 판호부사(종1품)로 치사하였다.
이때에 문벌귀족의 대표적 가문인 인주 이씨가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80년간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이 대표적 인물로서 정준(6세)의 외손자였다.
공께서는 성품이 공손하고 청렴하시어서
세도가인 이자겸과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남에게 교만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시호는 사청(思청)이다. 아들 선(9세)은 벼슬이 병부시랑이었다.
선의 아들 정(10세)은 고려 충혜 왕조에 호부시랑 호부사로
재임 중 유배되어 자손이 이곳에 살았다.
8세 충정공 휘 의원
1066년(문종21)-1148년(의종3) 고려전기 문신. 시호 충정공.
아버지는 문안공 양감이시며 어머니는 증 서해군대부인 최씨이다.
문종 37년(1082) 성균시에 급제하여
아버지 문안공의 음덕으로 장사랑과 군기시주부동정이 되다.
예종 6년(1088) 수어도감판관을 지내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어사가 되다.
예종 4년(1108) 길주 관외에서 여진족을 정벌하여
다량의 철갑과 궁마를 노획하였다.
예종 9년 형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우리나라 조제(弔祭)한테 대한 사례를 하였다.
인종 2년(1123) 예부시랑지어사대사에 제수되었고
인종11년 호부상서로서 삼사사를 겸하였으며 금자 광록 대부 태자태사를 증보하고
특진되어「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시호는 충정이다.
특진 금자 광록대부 태자태사 호부상서 겸 삼사사 사자금어대 충정공 묘지명
공의 휘는 의원이고 나주 광양현인이다.
기선(基線:시조공)은 신라에서 나와서 말기에 난을 피하며
이곳에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양감이니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요,
어머니는 최씨인데 상서우복야 중추원사 연하의 따님이니
증 서해군 부인이요,
조(할아버지) 정준은 수사도 문하시중 평장사요.
증조는 책(策)이니 좌복야 한림학사요.
고조는 준이니 삼중대광이요, 준의 부는 길이니 삼중대광이다.
길(佶) 이상은 구속(舊俗)에 족보가 없었으므로 이름이 실전하였다.
공의 성품이 엄격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기력이 뛰어나
남의 위급함을 보면 반드시 구원하여 주었고,
젊었을 때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제주(祭酒) 김근이 시관으로 있을 때
성균시에 급제하니 공의 나이 17세라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 군기 주부동정이 되고
23세에 수어도감 판관을 지내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어사로 연주자사가 되었을 때였다.
예종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동으로 여진을 정벌할 때
공으로 병마판관을 삼았다.
공이 화살과 투석을 무릅쓰고 병사들 앞에서 여진을 쳐서 군공을 자주 세웠다.
그 후 적병이 날로 강성하여 길주를 침범함에 원수(元帥)가 공을 불러 이르되
“길주가 위태하여 구원할 일이 없으니 전술이 능한자가 아니면 적에게
성을 빼앗길 것이니 공에 가서 지켜라”하였다.
병마사 이관진. 병마판관 허재와 함께 길주성을 지켰는데
적이 원근에 사나운 무리를 모아 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수개월을 물러나지 않았다.
공이 사졸들과 같이 어려움을 같이하며 밤낮으로
수비를 굳게 하더니
때 마침 원수의 구원병이 오다가 적에게 패하였다.
적은 하루사이 승세를 이용하여 사다리를 걸고 성을 공격하여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성이 무너져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공이 칼을 빼어 들고 적 한 사람을 격살하고 호통을 치니
적의 무리는 후퇴하고 날이 저물었다.
공이 사졸들을 독려하여 밤사이 중성 26칸을 쌓았다.
다음날 아침 적이 바라보고 모두 탄복하고 사기가 떨어져서
화친을 청하였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조정이 화친을 허락하였다.
적이 성을 싸고 공격할 때 군사들이 모두 실색하되
공이 홀로 안색이 태연하여
군사들을 독려하니 사졸들이 모두 의기와 용맹에 감탄하였다.
고립무원의 약한 군사로 성을 지키되 적병 백만으로도
성을 빼앗을 뜻을 저버리고
화친을 청함은 모두가 공의 힘이더라.
회군할 때에 길주도 병마원에 조서하여 예를 갖추어 복명케하고
임금이 간곡히 위로 하였다.
논공행상(論功行賞)하는 자리에 장병들이 공을 서로 다투되
공을 그 자리에 참관하지 않았다.
형부원의랑과 중부랑중을 엮임 하였다.
계사에(1113) 글안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큰 사신을 능히 맞아 줄 사람이 있어
공을 후한 예로 대접하고 모든 범절이 풍족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외국의 귀한 손님이라 하고
관(館)에 나아가 비밀리에 바라보았다.
환국할 때 국경까지 전송하는 일행 관원들이
공의 덕에 감동하여 울면서 작별하니,
사신을 대접하는 절차 성(盛)함이 근고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공부시랑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여 병부시랑 지다방사를 제수하고
「지어대사 호부상서 지추밀원사」에 발탁되었다.
이때에 외척이 정사에 참여 터니 병오년(1126)에 궁궐에 화재가 있었다.
공이 규탄할 수 있는 직위에 있어 시어사 송근과 전중시어사 이중 등으로
방화 용의자를 찾아 고발하려하니 용의자가 듣고 미리 방해를 하였다.
공(公)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더니 외척이 패(敗)함에 공도 외척이라 하며
양주자사라를 보내니 그 꺼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놓게 함이더라.
공이 덕으로 정사를 함에 백성이 그 덕을 칭송하였다.
1128년에 임금이 외척으로 허물이 없음을 알고 안변도호부로 옮기고
1132년에 공부상서 대도호부사를 제수함은 다 치적이 있었음이더라.
늙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고하니
호부상서겸 삼사사를 겸하고「금자광록대부」에 특진되었다.
무진년(1148)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5일 성동 임천사에서 돌아가셨다.
왕이 듣고 슬퍼하여 부의를 보내어 장사를 도우니
19일에 진봉산서강에서 화장을 하고 계유(1153) 12월 7일 유해를
임강현 북산서록에 장사 지내니 향년 83세이다.
초취부인은 국자 좨주 이석의 따님이니 1녀를 생산하여
예빈 소경에게 출가하였고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후취부인은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이작인의 따님인데 3남 4녀를 낳았다.
장자에 광중이요.
차자 대균을「문림랑 전중내급사 동정」이며
다음은 대용이니「문림랑 위위주부동정」이라
장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최윤의에 출가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후 4년에 졸하고
공의 남은 따님도 모두 명문거족에 출가하였다.
명(銘) 하노니
오직 공의 선조는 신라로부터 낳으셨고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왕가(王家)에 복로(服勞)하였도다.
공의 출사는 우등으로 사과(士科)에 급제하였고,
흉막(군진중)에 종사함에 군사를 통솔함이 인화(人和)를 이루었네.
흉적이 놀래어 창을 거꾸로 잡고 도망하였네.
웅주, 길주, 양성을 지킴에 공의 열성을 다하였고
본조(本朝)에 우뚝 서서 한결같이 다른 뜻도 없었도다.
관에 임하여 정사를 행하심에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을 쉽게 만들었도다.
태산의 무너짐은 천명이라 어찌하리오.
돌에 새겨 전하노니 산하와 같이 무궁하리로다.
9세 간의대부 휘 광중
고려 후기 문신. 아버지는 충정공 의원,
어머니는 이씨로 예부상서 자인의 딸이다.
의종 18년(1163)급사 벼슬로 있다가 병마부사로 승진되어
실지를 회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그 집을 불사르고
병사를 주둔시켜 농사를 지으면서 방어하는 둔전을 두었다.
의종 25년(1170) 비서감이 되었고
8月 정중부의 난에 박광승의 밀고로 화를 입었다.
비어대 휘 광중 사실
의종 18년 가을에 급사중 광중이 병마부사가 되어 국경을 회복하려고 군사를 보내어
금국인(金國人)을 쳐서 그 사는 집을 불사르고 그 지역을 지키면서 둔전을 두었다.
의종 23년(1168) 3월 지문하성사 김영윤을 공지거(과거 시험관)를 삼고
김광중으로 동지공거를 삼아 장영재 등 27인과 경서에 밝은 4인을 뽑았다.
의종 25년(1172) 8월에 왕이 보현전에 행차하였는데
무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이 난을 일으켜
호종한 문관과 환관을 죽이고 군사를 보내어 성안에 있는 문신도 죽였다.
이고와 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거느리고 밤거리에서 외치되
문인(文人)으로 의관(衣冠)한 사람을 비록 아전일지라도 모조리 죽이라 명하였다.
병졸들이 몰려다니면서 일일이 수색하여 판이부로 치사한
최부이와 비서감 김광중 등 50여명을 죽였다(고려사).
공께서 금나라를 쳐서 둔전(농사를 지으면서 방어하는 군대)을 설치한 뒤에
김장(金莊)이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니 금나라 임금이 꾸짖어
“요사이 변경에 소요가 있으니 너의 임금이 시켜서 하였는가?”
만일 변방 관원이 자의로 한 일이라면 마땅히 징계하여야 할 것이다.
” 하거늘 장이 돌아와 임금께 아뢰오니 임금이 그 섬에서 방수를 철폐하라 하였다.
일찍이 몸종처럼 부리던 박광승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사랑하여 다른 사람에게 청을 넣어 대교(종9품)라는 벼슬을 시켜주었다.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전 주인의 은혜도 무시한 채
자기 집으로 광중을 유인하여 숨겨놓고 발고하여 살해되게 하였다.
그 뒤 공의 아들 체(10세)가 순안 현령(종5중)이 되었는데
마치 배순석이 군사를 모집함으로
체가 군사를 훈련하려고 응접하러 가다가
광승이 제고사로 온다는 말을 들었다.
먼저 사람을 보내어 울주에 가서
광승의 아비를 체포하고 또 광승을 잡아서
순안에 이르러 부자가 서로 보게 한 다음 먼저 그 아비를 죽였다.
그리고 광승에게 말하되
“네 아비 죽음을 보니 슬프냐.”고 물으니 광승이 대답하되
“슬프다.” 하거늘
체가 말하되 “아비를 애모하는 것은 한가지거늘 어찌하여
은혜를 배반하고 내 아버지를 죽게 하였느냐“ 하니 광승을 대답을 못하였다.
드디어 그 팔을 끊어 군중(軍中)에 가두었다가
여러 고을에 조리를 돌리고 죽였다.
<여사열전>
10세 체(광중 유사에 병기)(인물 열전 참조)
11세 주영
고려 후기 문신으로 벼슬은 금오위 중랑장 동정행 대정(정5품)이었고
호부상서 상장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아들 광존(12세)은 흥위위 별장동정(정7품)이었고,
판예부사 상호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광존의 아들 대린(13세) 는
금자광록대부(종2품) 문하시랑 평장사로 추증되었다.
대린의 아들 연(14세)은 양간공파조이다.
11세 위(位)
송나라에서 상서령으로 추봉되었다.
아들 광세(12세)가 신호위 중랑장이었고
황국에서 상서 우복야에 추봉 받고 신호위 대장군(종3품)에 추증되었다.
광세의 아들 경량(13세)은 금오위 대장군(종3품)이었고 문화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경량의 아들 주정(14세)은 문숙공파조이다.
14세 감찰어사 휘 수
옥구군(沃溝郡) 대부인 고씨 할머니 수 배(配)
옥구군 대부인(大夫人) 고씨 열부전을 어느 맥에서 누가 될까 옷깃을 여미고 각급족보,
영광군지, 탐라지, 광산 김씨가 기타 문헌을 참조하여 삼가 기록하나이다.
대부인 성은 고씨며 그 세계(世系)는「조청대부 여빈경」으로 사퇴한 휘 정의 따님이요,
「국자감 대사성 한림원 시강학사 지제호」조 휘 통의 외손이며,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례부사」김 휘 수(須)의 처이며
「수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이사사」를 역임한 문정공(태현)의 자친이다.
출가 전 친정에서는 삼가 공손하시고 심성이 곧으시고 유순하시어
모든 언행에 있어서 조언(造言)하거나 단정하지 못한 일이 없으셨다.
출가하신 후에 시부모님을 섬길 때나
자녀와 노비를 통솔하실 때나 원근친지간에 친화(親和)하며
어제든지 온 집안을 화락(和樂)하고 근엄하신 자태를 연중 변함이 없으셨다한다.
여기에서 그 숭고하신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참지정사」이신 부군(수)이 일찍 밀칙을 받들고 서해도(황해도) 금륵장에 감사차 나가셨다.
이때 젊은 사람이 부군(수)의 명이라고 사칭하며 목탄(숯)을 여러차 가지고 왔다.
이를 본 대부인이 말씀하시기를 그 어른께서 도의에 어긋난 것이면 일찍이 타인으로부터
터럭 끝이라 할지라도 탐을 내어 거두어들인 일이 없거늘,
하물며 특파된 감찰관의 신분으로 비리를 묵인하고 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필시 잘못된 계책이라 직감하시고 대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시었다.
밤이 되자 청년은 목탄을 담장밖에 두고 가버렸다.
그 당시 권신인 김인준의 아들이 사악한 증오심을 품고 부군(수)을 중상하려고
그 애비 인준에게 찬언을 구함으로 인준이 부하를 시켜서 엿보게 하였다.
목탄은 그대로 야적된 채 방치한 상태로 놓아두니 이를 경비하는 자가 없으므로
이에 감복하여 더 이상 감히 추궁하지 못했다.
「감찰어사공 휘 수 장군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을 간략히 소개하여
본전의 맥을 같이 하고자 한다.」
원종 11년 경오(1270) 9월에 어사공이 영광부사로 재임 중
당시 반란군인 삼별초의 괴수 배중손, 김통정 등이 강화도로부터 진도를 거쳐
탐라(제주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원종이 중신을 모아 물어본 즉 모든 신하들이
김수 장군이 아니면 양 괴수를 무찌를 수 없다고 하였다.
원종은 매우 기뻐하며 안무사 권저에게 명하여 관군 200명과 어사보검을 하사하시고
탐라국에 원정하여 수호함과 동시에 양 괴수를 참 하라는 어명을 받아
김장군은 배중손과 그의 선봉장인 이열 등 적장을 무찔러 평정하였다.
왕자가 그 공훈을 찬양하고 큰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후 김통정과 배중손의 막하인 이문경이 명월포로 잠입하여
군영과 토성을 구축하여 횡포가 날로 심해였다.
이를 공격하여 누차 승리하고 고여상, 김유성과 합세하여 진격하니
괴수 김통정과 이문경의 말을 거꾸러뜨리고 거의 생포하려는 찰나
적군의 화살에 맞아 김장군께서 순절하시니
하늘이 명하여 일사보국의 충절을 다한 것이다. (고려사 및 탐라지)
감찰어사공께서 순절하신 후 고씨 대부인께서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수륙 삼천리 먼 길을 걸어서 어사공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달구지를 이용하고 노숙이나 인가의 사랑채 등에서 노독을 달래며
40여일을 걸쳐 개성에 당도하니 그 노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하시었다.
삼별초 난 때 어사공이 영광 군수로써 군사와 더불어 탐라로 출정하신 후
겨울이 되어 의복을 보내려 하였다.
동료자가 은자(銀子)를 증상하면서 생계에 보태 쓰도록 간절히 청하였으나
대부인께서는 끝내 사절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이 숭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께서 전력을 다하시어 싸우다가 전사하시여 과부가 된 후에 힘들고
긴 60여 년간에 가족과 더불어 친척과 화목하시고, 노복과 비첩들을
자비로 어질게 사랑하시기를 공께서 생존 시처럼 똑같이 하셨다.
슬하에 두 아드님을 두었으나 모두 어리어 교양에 각별하신 신경을 집중하시었다.
그 교목(敎目)으로 청렴정직하고 언행이 예절과 법도에 어긋남이 없고
또한 남의 원성을 들은 일도 아니하며, 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말게 했으며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교육을 하시어 출세시키셨다.
큰아들 태일은 관직이「신호위록사참군」이었으나 일찍이 돌아가시었다.
둘째 태현은 15세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다음해 문과에 뒤이어 전시에 급제하였다.
태현의 10세에 부친을 사별한 고난을 겪고 한 시대를 걸어
관직이「첨의중찬」에 이르렀다.
태현을 낳을 때 대부인 고씨께서「샛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종 2년 신 유(1261)에 낳으셨다.
10세에 아버지를 사별하는 슬픔을 이기고 학문에 용맹 정진하여
어린 나이로 문학에 통달하였으며 풍채와 외모가 그림같이 수려하였다 한다.
위와 같이 엄격한 교목(敎目) 밑에 대부인 고씨 모친의 절의 60여년과
일편단심 강직 하게 걸어오신 그의 아들답게 숙부이신 문숙공(주정)이
그의 학문의 모든 면이 뛰어남을 보시고 말씀하시길
「우리 형님 감찰 어사공께서 비록 돌아가시기는 하였으나
우리 집 가문을 현양하고 빛내줄 사람은
나와 조카 태현이니 형님이 죽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기뻐하시며 칭송하였다.
대부인 고씨께서 위로가 되셨으나 국가와 가문을 위해서
더욱 훌륭하게 길러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했다.
오호라! 대부인은 명가의 영애로서 절부와 인자로운 어머니가 되어
그의 부군으로 하여금 청백리 열장부가 되게 하셨다.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이름 있는 학자로서 명재상이 되게 하였다.
망(亡)한 금국(金國)의 대정 3년 병술에(1226) 2월 21일에 탄생하시고
원의 4년 정유(1327)년 7월 1일에 백하고도 이세의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신
동월 12일 무신에 송림현 죽암서초에 안장하였다.
추고하건대 대부인이 훈서 하심에 듣는 이들 모두가 감탄하였으며
인간의 욕구 중에 수명만한 것이 없고,
하늘이 사람에게 보시함에 제일 애석히 여기는 것 또한
수명만한 것이 없는데,
대부인께서 고종명 하시도록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시고
강녕하셨으므로 오법오복 중의 삼복(三福)을 겸비하셨다고 보거늘
필시 그 소치가 원이라 하시겠다.
명(銘)하노니,
쌍명당(고영중)과 아회(雅會)하는 시우(詩友: 조통)들과
세상 사람들은 신선이라 불렀다오,
뜻이 크고 집착 없는 고씨와 조씨는
그 인품의 현철함이 견줄만하네.
옥 같은 고운 나무에 가지가 나가고
감미롭고 맑은 샘 물줄기 가려
아! 대부인께서
집안밖에 경사로운 복이 한데 모였구나.
친정에서 부모님을 효성으로 모시고
그 용모 단아하고 성품 온화하여
경과 신으로 정성 다하여 구고를 받들었네.
낭군님 여의어도 그 절개 빙설같이 굳으니
그윽한 향기 난혜같이 방분하구나.
의(義)아닌 재물은 아예 버리시니
그 아름다운 덕행이 역사의 수에 빛나리라...
용감한 낭군님 한 몸 버려 나라에 받치고
절의에 돈독하여 고운님 여의어도
일평생을 사곡(邪曲)함이 없으셨네.
아비 잃을 아들을 곱게 키워 가르쳐 세 임금 재상으로
부조(父祖)의 이름을 날리셨네.
하늘이 길상을 내려 형수백(亨壽百)이요,
또 둘이 쉬고 명군이 가상하여 국록을 하사하셨네.
아! 대부인을 누가 따르랴
명(銘)을 새겨 광속에 묻노니 길이 멀리 빛나리
(익제 이제현 선).
종보 91. 9. 1.
14세 문숙공파조 휘 주정
고려 후기 문신으로 자는 지숙, 아버지는 증 문하평장사 경량이다.
1264년(원종6) 문과에 급제하였고 해양부녹사를 거쳐 이부시랑을 지내고
충렬왕 1년 대부경 좌사의 대부로 승진되었다.
충렬왕 5년 행정도감사가 되어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서
고려에 주둔해있는 원나라 군대에 바치는 공물을 면죄케 하였다.
김방경이 공을 세웠음에도 억울하게 유배된 것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충렬왕 8년(1281) 원나라 세조가
제 2차 일본정벌의 계획을 세우자
소용대장군 우부도통에 특진되고 이어 동지 밀직사사가 되었다.
일본 정벌 때 고려 원연합군의 부원수를 지냈고 연합군이 일본에 침입하였으나
태풍으로 실패하고 광정대부 도청의사(정2품)를 지내고
시호는 문숙공이다.
아들 유(15세)는
수문전 태학사를 지냈다.
윤장(16세)은
유의 아들로 밀직부사를,
중간(16세)은
밀직사사였다.
14세 양간공파조 휘 연
1215년(고종3)-1291년(충렬18) 고려 중기 문신, 초명은 중룡, 자는 기지.
시호는 양간(良簡), 아버지는 증 평장사 대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 김씨.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가(시중드는 아동)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고종 13년 시어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네 고을에 치적을 남겼으며 병부시랑 추밀원 부사를 거쳐 형부상에 이르렀다.
충렬왕 2년(1275) 경상도 지휘사가 되어
려‧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전함 900척 건조자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때 어느 날 밤 꿈에 허리에 찬 금어대(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에 장식이 이미 갔으니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하고
사퇴하니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로 치사되어 물러났다.
초상화가 있었으나 임진란 때 불타 없어지고 화상찬만 남아있다.
1261년(원종2) 발행한 호적이 후손 부필(23세‧후조당 예안파)의 종가의
유물관인 숭원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적으로 보물(1018호)로 지정되어있다.
내용은 1271년 공의 나이 47세 때 작성된 것으로, 본인의 증조, 외가의 외조,
처가의 처증조까지 기록이 되어있다.
여자는 소사로 칭하고 남자는 이름과 나이, 여자는 나이로만 기록되어있다.
천성이 순후하여 모든 경사나 조상하는 일에 친소에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간격이 없어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78세에 수를 마치니 시호는 양간공이다.
양간공의 화상찬
높고 훌륭한 평장(平章)이여,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눈썹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도다.
일찍이 내시로 임금을 가까이 모셨도다.
용이 아니면 봉이니 상서롭게 세상에 나리었도다.
나이 삼십이 못 되어 약관의 나이에 황금인패(조복)를 찾도다.
시주에 애휼을 끼치니 백성이 선정에 감사 노래하네.
정승자리에 오르니 곽양분의 부귀를 누렸도다.
아들, 사위, 생질이 조정에 가득하니
영화가 이어져 조무가 상접하니 문호가 휘황하게 밝았도다.
청풍만고에 길이 영당에 걸어 모시리라.
집에서 세 사람의 화상이 한 폭으로 되어 각각 찬(贊)이 있으니
한분은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찬이요
둘째 분은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로 치사한 김연이요
셋째 분은 증산대부 판비서성사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제이다.
김찬의 찬은 전하여 지지 않고, 김연의 찬은 위와 같고,
김제의 찬에는 조부가 동복이 있고 아버지 또한 그러하더니 공의 형제에 와서는
칠폭홍천(병풍)이 있다하였으니 다 문벌의 화려함을 성대히 칭찬함이다.
그러나 김찬과 김제는 김연의 일가인 듯 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선조 26년 임진란에 화상이 소실되었으니 원통하도다.
14세 낭장공파조 휘 규
고려 중기 문신, 아버지는 평장사 대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 김씨.
낭장동정(정6품)의 벼슬을 지냈고 낭장공파조이시다.
15세 문정공파조 휘 태현
문정공은 휘(諱)는 태현, 자는 북기,
호는 쾌헌 또는 설암이니 고려 후기 학자요, 명신이다.
아버지 감찰어사공 수(須)와 어머니 옥구군 대부인 고씨의
둘째 아드님으로 원종 3년(1261)에 태어났다.
일찍 15세 때 사마시(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이어
16세에 문과급제하고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28년(1302)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갔을 때
「황제의 명으로 모든 진공사는 연경에서 대기를 명하자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황제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니
중서성이 허락하여 행재소에 가게 되었다.
황제는 그의 충성을 치하하여「동동 행중서성 좌우사랑 중」으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32년(1306)에 「지도첨의 사사」로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왕부자간을 이간시키려는 무리의 흉모를 밝히고 돌아와
벼슬이 중찬에 이르렀다.
충선왕 3년에 다시「판삼사사」에 배명되었고 그 후 상위관제가 폐지됨으로
퇴관하여 10년간 집에서 유유자적 심신을 정양하고 학문에 전념하다.
충숙왕 9년(1321)에「첨의평리」에 기용되어「판삼사사」가 되었으며
그 후 요직을 두루 거쳐
충숙왕 15년「삼중대광문하시중 수문관 대제학 겸 전리사사」로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이다.
공의 성품은 세인이 공평하다고 칭송하였으며
위용과 표상이 수려정엄하고
언어와 행동이 예법에 어긋남이 없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응구 접대에 음성과 기색이 온유하고 유화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효도로 받들고 교자(敎子)에 법으로 지수하고
친척 간에 돈목으로 화합하였으며 사람들과 함부로 교류하지 않았지만
원망하는 소리는 없었다고 한다.
공은 공무를 집행함에 지공무사하여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진주하는 바가
모두 원대한 계책이었으며 모든 송사를 상호화해로 귀결하고,
이해득실과 기호욕념을 배제하였으며
언제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충렬‧충선‧충숙 세 왕조를 섬김에 진퇴를 예의로서 처신해 매사에
조그마한 실책도 없었으며 국가 중요정책에 있어서
공에게 자문하여 시정하였다.
공의 저술인 훈(訓)과 교(敎)의 체제가 잘 짜여지고
시(時)는 청신(淸新) 염려하여 명시문(名詩文)으로
우리나라의 문장을 수집 편찬하여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제목을 붙이니 상응 필적한 명칭이라,
자호(自號)를 쾌헌(快軒)이라 하고 만년에는 설암(雪菴) 이라 하였다.
성균시를 관장하여 이청등 70인을 얻고「지공거(시험관)」가 되어 박리 등
30여인을 얻어 당대에 명망 있는 선비를 발굴하였다.
공은 좌우위낭장 김의의 딸을 배필로 맞았으나 일찍 별세하고,
신호위 중낭장 왕정단의 딸을 취처하니 이분이 개선군 대부인으로 봉작되니
현숙하여 가정이 화목하고 삼형제를 대과에 급제시켜 국록을 받았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광식, 광철, 광재, 광로와
장녀는「예문관직제학」안목에게 출가하고
차녀는「예문관 공봉」박윤문에게 출가하였다.
김씨 부인이 1남을 낳고 여는 왕씨 부인 소생이다.
공이 충혜왕 원년에 70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제사를 올리고 문정이라 증시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상수(喪需)의 조달을 명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 덕수현 해운산에 안장하면서
문인(門人) 계림군 최해가 묘지명을 찬술하여 이르되
아! 문정공이시여
당신은 국가 원로의 귀감이신데 어찌 홀연히 가시니
누구에게 의심된 바를 물으오리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다 하오리까.
현철하신 스승님 저를 내버려두고 가시나이까..
아! 그 슬픔 그 감동이 공자를 잃은 자공의 심정이외다.
종보 94. 11. 1.
15세 충숙공 휘 심
공(公)의 휘는 심(深)이요, 자는 연수이니 고려 원종 4년(1262)에
문숙공과 상질현 대부인 장씨 맏아드님으로 태어나니 고려 후기의 명신이다.
공은 15세 때 문음(門蔭)으로 관직으로 보임되어 충렬왕 때에 볼모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낭장(郎將)이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계실 때 오기, 석천보 등이 왕의 총애를 믿고
왕의 부자를 이간함으로
홍자번과 조력해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왕궁을 포위하여
오사를 잡아 원 나라에 압송하고
뒤에 충렬왕을 따라 충선왕을 모시고 와서 찬성사가 되었다.
공의 딸이 원나라 황후가 되어 원으로부터
고려 도원수의 벼슬을 받았고
충숙왕 때 벼슬이 수첨의 정승 판 총부사에 이르고
여절 보안공신에서
「수성수의 충량공신 화평부원군」으로 개봉되고
협보공신의 호를 더했다.
섭행 동정사인 장백상의 탐관농권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장백상을 잡아 가둔 후에
만호 홍수와 함께 성서(省書)를 대행하게 하였다.
충숙왕의 약사를 살펴보면
용모와 거동이 기위(奇徫)하고 매사에 진퇴와
주선함이 법도에 맞으니 왕이 크게 쓸 인재라 하고 기뻐하여
별장과 금위(禁衛)의 수령(守領)과 사순위 등을 임명하니 각산에 출정해
군령이 엄숙하니 주위에서 아버지 문숙공의 기풍이 있다했다.
왕의 총애를 받아 우군 만호「홍위위 대장군 우부승지. 우승지 지신사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임금에게 주대함이 자상하여 칭찬을 받았고,
이어 우상시 상장군을 거쳐 도순사로 나아가 관리를 잘 살피고
백성을 잘 다스리니 그 지방이 평안하였다.
한때 행궁을 받들고 원에 머문 지 오래되고 신기가 미편하여
일행 신료와 함께 글을 올려 귀국을 빌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임조부에 하옥되었는데
아들 석견이 그의 누이 영정옹주와 더불어
대궐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정성을 다해 슬피 호소하니 왕이 이에 사면하였다.
공이 문무접전의 재량으로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70세에 글을 올리고 물러나려 하니
임금이 거듭 그의 뜻을 어기고「벽상삼한중대광 화평부원군」에 제수하되
중요한 직무만 해직하니 공이 사은하고 집에 거처하였다.
한적으로 낙을 삼고 요양한지 4년 무인 10월 23일에 졸하시니 향년 77세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탄식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제기와 부물을 후히 보내 조상하였고
봉국산 동록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충숙이라 내리시었다.
공은 아드님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영걸하여 세상에 위명을 떨쳤다.
종보 95. 1. 1.
충숙공 휘 심 묘갈명
공의 사람됨이 위엄 엄중하니
바라보는 사람마다 경외하며 굴복하였다.
그러나 손님을 대접함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화락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잔일에도 개의치 않았고 산업에도 간섭하지 않아
집에 남은 재산이 없고,
벼슬에 있을 때에는 경제로 나의 임무로 삼아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아
어려움을 한결같이 절조 있게 하니 이 또한 황신이
바른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들 석견은 지금 광정대부 삼우사사 상호군이다.
배(配)는 변한국부인 왕 씨이니 4남 1녀를 두었다.
장녀는 순정대부 판통예문사 오첨에 출가하고
차녀는 원나라에 들어가 황후가 되었다.
3녀는 종실 단양부원군 비 복안옹주가 되고,
사녀는 안동으로 출가하여
아들 승사가 대호군 간판내시원사이다.
뒤에 진강군 부인 노씨를 취하여 2남을 낳으니
맏 승한은 도재고 판관이요,
둘째는 승진이니 상호군 광산부원군이다.
영가군부인 김씨를 취하여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승노는 예조판서이며
딸은 출하가지 않았다.
아! 공의 아버지(문숙공 주정)는 장원급제로써
명상(名相)으로 만호에 제수되어
두 조정에서 중망이 있었고 공 또한 만호가 되고 또 도원수가 되었으며
세 번 정승이 되어
훈계, 공신, 부원군에 장상까지 겸하여 벼슬은 신하로서 극에 이르고
가문이 성대하고 자손이 경상(卿相)에 오르고
딸은 황후‧옹주‧택주를 두었으며
수는 길어 8순에 가까웠으니
그 사람이 사는 세상에 어찌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장사지내기 전날에 우사가(석견) 공의 살아온 전말을 자세히 갖추어
명을 청하는데 사양타 못하여 드디어
명(銘)하노니
태악이 신을 내려 우리 명공(明公:충숙공)을 낳았도다.
사직을 책임지고 바른말로 몸을 돌보지 않았네.
지위 높아 정승이요, 위엄이 중해 대장이다.
정성 다해 나라를 받드니 태산 같은 공이로다.
77세에 늙은 덕 더 높으니 동국에 분양이요,
인망이 우레 같구나.
다들 정승에 오르고 딸은 황후가 되었네.
문벌이 번창하여 해동에 빛나도다.
공중에 선유하니 아득하여 하늘 기러기 같네.
조정과 백성이 흠탄하고 삼한의 벼슬을 다 했네.
백관이 모여 장사지내니 마지막 보내는 의식도 풍성하도다.
평원이 아름답고 봉우리 총총하네.
무덤이 편안하니 자손이 무궁하리.
글을 새겨 후생들에게 보이고 무덤에 들이니
천년 뒤에도 그 아름다움 더 넓으리라.
대제학, 상호군 윤선좌술, 통직랑 기거주지제교 이선 서
15세 정경공 휘 사원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요, 초명은 구(埧) 또는 원구(元具)이다.
양간공(연)과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 조씨(裬城曺氏)의 맏아들로
고려 고종 5년(1257)에 통랑(通郞)으로 재임 시에 언(諺)을 국문하여
그 옥사를 공평하게 잘 다루어 대언(大諺)과 영(領)을 배웠다.
충렬왕 35년에 이훈, 채균 및 승지 권준과 함께 번양왕이 제정한
관제와 비판서를 가지고 원(元)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니
권세를 부리던 세신(世臣)과 구관들이 물러났다.
공은 왕을 독대할 수 있는 총애를 받았으며
충선왕 3년 원나라에서 팔찰(八札)을 보내어
황후(皇后)를 책봉한 일을 반포했다.
환관 이대순이 원에 들어가 총애를 받아 용사하더니 구평궁으로 더불어
노비의 분쟁이 있자 황제(皇帝)가 제령을 내려
형부(刑部)에서 결정하라 함으로서
전서(典書) 김사원 등이 안건을 주청하여 구평궁 위씨(韋氏)에게 조비를 돌려주니
대순이 노하여 팔찰들과 같이 황제의 명이라 사칭하며 공을 귀양 보냈다.
충숙왕 4년 상의회의(商議會議) 도감사를 거쳐
동왕 6년(1318)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는데
왕명으로 온천에 잡은 새를 태묘(太廟)에 올렸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를 바로 잡으니 왕이 이르되 “내가 깊은 궁중에 있어 경이 아니면
이런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냐”고 찬양하였다.
충선왕 4년(1319)에 평양 윤이 되고 이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니 충숙왕 기미년 정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였고 배(配)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 안씨로
안문성공(安文成公:유, 호는:매헌)의 따님이요,
외아들을 두었는데 휘(諱)는 진(稹)이니
광정대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을 지내시니
시호는 장영공(章榮公)이다.
충숙왕후 2년 계유(癸酉)에 호적이 전하니
슬하에 다섯 아드님과 두 따님을 두어 모두 영달하였고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광김을 명문화벌로 승화시키니
이는 양간공(良簡公), 정경공(貞景公), 장영공(章榮公) 삼대에 터전이 잡혀
음덕이 자손에 드리워져오고 있다.
종보 95. 3. 1.
16세 장영공 휘 진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척재. 아버지는 정경공 사원,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문성공 유(裕)의 따님이시다.
충렬왕34(1307) 문과 추장제술과에 급제하여
충혜왕3(1332)에 중현대부 성균제주로 통례문 부사를 겸하고
충숙왕2(1333)「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충혜왕 4년에 과거의 총책임자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다.
1333년의 호적이 전해오며 시호는 장영공이다.
묘는 개풍군 홍교면 조문리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가
순조29(1828)에 후손 성은과 수등이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지 춘추관사 상호군시 장영공 휘 진 묘갈문
공의 휘는 진이요,
묘는 충덕부 동부 망포리 제일동 응봉 아래 양마교위 자좌원에 있다고
구보에 기재되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정조(正祖) 신해년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의 선대 분묘를 찾다가
망포리에서 구 묘비 갈명(碣銘)을 찾았는데 이끼는 끼었으나
그 갈문(碣文)은 식별할 수가 있었다.
갈문에 이르되 고려「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지 춘추관사
상호군 시 장영 김공 휘 진지묘」라 기록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 선대의 묘인 줄 알고 우리 종중에 와 알려줌으로 종중에서
그 비의 도형과 글자를 탑본하여 왔다.
그러나 비가 상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요,
족보가 증거 될 수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전한지 오래 되었는지라 일이
또한 큰지라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미루어 온지 40년이나 되었다.
순조 무자(1829)에 종인이 깨우쳐 감동시키는 이가 있으므로
종중의 의견 또한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다시 가서 살펴보니 그 비는 그 사이 암장한 사람들이 쪼는 바가 되었으나
묘는 여전하니 무엇을 다시 의심하리요.
이에 모든 종중이 다시 수축할 의논을 세우고 말하되
“추만보의 처가 아니었던들 공자로 오부가의 장사 지낸 일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요.
선령을 봉치한 묘인 줄 알고 주자도 관에 고하고 다시 곡을 하였거늘
이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이 저 같이 미덥고 산 이름과 땅이름이 합치되어
비문은 비록 쪼았다 할지라도 탑본이 있는데 이대로 그만두면
자손의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1829년에 힘을 모아 봉영을 수축하고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짓고 묘전(墓田)을 장만하니 묘역의 모양이 새로워졌다.
“우리가 성을 가진 후로 묘소의 실전이 많았으나
오직 공의 묘소가 여러 백년 만에
다시 석물을 설함하게 되니 어찌 무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김씨의 근본은 광산이니 신라 왕자 휘 흥광이 공에게 시조가 되고,
판예부사 휘 광존과, 증 평장사 휘 대린과 판 판도사사 시호가 양간인 휘 연과
찬성사 시호 정경인 휘 사원과 순정군 부인 순흥안씨 문성공 휘 유의 따님은
곧 공의 고조, 증조, 조, 고, 비가 된다.
이로부터 가지처럼 나눠지고 잎처럼 퍼져서 계속하여 번성하니
자손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석덕 대현과 영공 거경이 앞뒤로 배출되었으므로
국조에서 시례고가를 헤아릴 때 반드시 우리 광김을 일컬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삼가 고려사기를 살펴보면 공이 충렬왕19(1292)에 나시어
임신년(1332)에 벼슬이 중현대부 성균제주와 통례문 부사를 겸하였다.
1333년에 벼슬은 묘전에 새긴바와 같았고
충혜왕 4년(1342)에 공거(과거 책임자)를 맡아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그 뒤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공의 덕행과 사적이 반드시 많으련만 돌아가실 때까지 아울러
전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십칠 세손 중추부사 상모 찬
*장영공 유문시(章榮公 遺文詩)
바람은 엷은 구름조차 쓴 듯 맑은데
밝은 달이 푸른 하늘에 둥실 떠있네.
수정같이 찬 기운은 눈(雪)빛을 시새우고
맑은 빛은 비단의로 싼 등불을 비추어주네.
보름밤은 오직 밝기만 한데
술동이에 달이 비취니 동이 채 비울 것 같네.
이 정경(情景)을 베개에 옮겨 접어 두었다가
임과 같이 즐기고 싶네.
(월하(月下)의 회포를 추상서에 올리는 글)
16세 광식‧광로‧광재‧광철
같은 형제들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아버지는 문정공 태현이고,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이다.
광식은
1294년(충렬21) 문과에 급제하여 총부의랑(정6품)을 지냈다.
광로는
1317년(충숙5) 문과에 급제하여 가안부녹사(정8품)를 지냈다.
광재는
1313년(충선왕5)에 식년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이 되어 이어 도관정랑이 되었다.
판도판서 밀직부사(정2품) 등 여러 요직을 거쳐 충정왕 2년에는 사부가 되었다.
이때 정방(政房)에서 문서를 총괄하는 폐단을 없애고 전리판서 및 대제학을 겸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은퇴하였다.
어머니가 별세하자 여묘 3년을 마쳤고
효행으로 정려를 명받으며,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라 명명하였고
시호는 문간이다.
17세 문민공 휘 광철(光轍)(문정공파‧문민공파)
고려조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둔헌(鈍軒)이요, 시호는 문민(文敏)이니
문정공(태현)의 둘째 아드님으로 충렬왕 32년(1305)에 문과에 급제,
입조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충목왕 2년(1345) 6월에 서연(書筵)을 설치하였을 때에 우정승 채하중, 좌정승 한종유,
지신사 김광철 등 40여인이 연일 시독(侍讀)을 하였다.
충정왕 2년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해「판밀직사사」김광철로 판사를 삼아
여러 「도(道)」의 경전(耕田)을 상고하고 살피게 하고
안겸사(按傔使)를 경임하게 하였다.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족제인 기삼만이 황후의 세력에 의지해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탈취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함으로 안겸사로서
기삼만을 장형(杖形)으로 다스린 끝에 옥사하게 하니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 등을 국문 하였으나,
전 밀직사사, 공과 대호군 이원구는 병으로 사면이 되었다.
삼중대광 밀직사사에 화평군에 봉작되었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 배위(配位)는 원주 원씨이니 찬성사 관의 따님으로 두 아드님과 세 따님을 두시니
장자 희근은
판도판서 해양군이요,
차자 도락은
천우위 해령별당으로 추성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의 증직을 받았다.
◦ 공(公)의 손자 계지(繼志)는 태종묘(太宗묘)에 공훈으로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을 받았으며 호는 송곡(松谷)이니
풍해도 병마절도사겸 수군절제사를 거쳐
「지초토영전사」를 지냈고 해주목사를 역임하였다.
‧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체에 승진되니
태조 태종의 양대에 당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양궁을 내왕하면서 태조의 뜻을 돌이켜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회천(回天)대업의 공이 있어서
전토(田土)와 많은 노비를 하사 받고
선왕의 뜻을 이었다 하여 계지(繼志)라는 사명을 받고
순충 보조 명량 개국 공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지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니
가문의 영화가 문민 공의 손자와 증손 대에 더욱더 창대 하였다.
종보 95. 5. 1.
16세 석견‧승로‧승사‧승진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같은 형제들로 아버지는 충숙공 심이다.
석견은
고려 충숙왕 때 여러 번 밀직부사(정2품)를 지냈고
상호군 우정승(종1품)을 지냈으며 화평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충혜 왕조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일등공신에 책훈되고
벽에다 초상화를 걸 수 있게 하였으며
부모와 처에게는 3등급 초과하여 봉작하고,
아들에게는 7품직을 제수하고,
밭 100결과 노비 십구(十口)를 하사받았다.
수(17세)는
그의 아들로 해양군에 봉해졌으며 평의 우정승에 추증되었다.
승로는
예조판서(정2품)였다.
승사는 충목 왕조에 벼슬이 병마도원수(종1품)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도적 이혼성을 토벌하였다.
승진은 상호군(정3품)으로
광성부원군에 책봉되었고 공검충직으로 칭송되었다.
덕선(17세)은
승진의 아들로 문하시중
종선(17세)은
벼슬이 병사였고
적선(17세)은
중추원사로 일찍이 왜적을 격멸하는데 공이 컸다.
17세 사온직장공파조 영(英)
고려 후기 문신, 여조 말기에 사온서 직장을 지내셨다.
조선조 공조 참의에 추증 되었다. 묘는 실전되고 중원군 금가면 점병리에 설단 하였다.
17세 광리‧성리‧안리‧영리‧천리
같은 형제들로서 고려 후기의 문신들이며, 아버지는 장영공 진,
어머니는 영가부인 복주 권씨이다.
광리는
1532년(공민2) 좌언대부로 밀직부사 전리판서(종2품)를 지냈다.
광리의 아들 갑우‧남우‧삼우‧시우‧인우(18세)가 모두 뛰어났다.
갑우(18세)는
공민왕 19년 대장군으로 명나라 황태자 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다녀왔다.
공민왕 22년(1372) 11월 대호군으로 제주도에서 조정에 바칠
말 50필을 몰고 명나라에 가는 도중 2필을 잃어버렸다.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황제가 대노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공민왕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 오극충과 함께 주살되었다.(고려사)
이 사건으로 형제들이 연좌되어 여러 지방(전남‧경남)으로 좌천되어 살았다.
남우(18세)는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갑우의 일로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합천 영창리 설단)
유(19세)는
남우의 아들로서 공민왕 때 중령낭장으로 남북정벌 때 큰 공이 있었다.
신돈이 정사를 문란케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에 살다가 합천 영창리로 이거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은 공을 목은‧도은‧포은과 함께 절개 있는 사람이라 칭하였다.
삼우(18세)는
벼슬이 상서였고
묘는 실전하여 산청군 신동면 가슬리에 설단하고 원일재를 지었다.
시우(18세)는
판사벼슬이다.
인우(18세)는
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 때 임금을 모시고 호종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동왕 13년에 우정승 홍언박과 같이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일등공신에게는 초상화를 걸게 하고,
부모와 자식에게 3등급 작위를 올려주고,
아들 한 사람에게 1품 벼슬을 주었다.
또 마부 5명, 파수병 7명을 거느리게 하고,
자손을 음직에 채용하였으며 밭 100결, 노비 10명을 주었다.
밀직부사(정2품)에 승진되고 이어 봉익대부 전리판서에 이르렀으나
공민왕 24년 갑우의 화로 연좌되어 현 고창군 감무로 좌천되었다.
승길(19세)은
함종 현령을 지냈으며 고려 말의 절신이다.(인물 열전 참조)
성리는
사온승(정6품)을 지냈다.
학문이 절륜하고 효우가 독실하여 사림(士林)이 추증한 바 있다.
안리는
판도판서(종2품)를 지냈다.
영리는
문정공 신현의 문인으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성리학을 배웠다.
충목왕 4년 정치도감을 지냈고
충정왕 4년 전라도 안렴존무사로 민전(民田)을 다스렸다.
공민왕 4년(1354) 판군기 감사(종3품)에 이르렀다.
문정공 신현 선생의 사실을 모아「화해사전」6권을 저술하였다.
당(18세)은
영리의 아들로 낭장이었고,
정(18세)은
광성군에 봉해졌다.
천리는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을 지냈고,
조선 태종조에 명원 종훈(공신)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첫댓글 자료 많이 기다렸습니다 ㅎㅎㅎ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