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원효가 기장의 척판암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암자에서 서쪽 하늘을 혜안으로 바라보니
중국 산동성에 있는 법운사에 천명의 신도가 불공하고 있는데 그 절이 곧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은 그 절의 법교가 죄인으로서 벼락을 내려 천벌을 주려는 찰라였다. 따라서 천명의 신도들도
억울한 죽음을 당할 형편이었다. 그 때 원효대사가 '海東元曉擲板救衆'라고 새긴 판자를 던지니 갑자기 법운사 주위가 금빛으로 변하였다. 신도들은 환한 금빛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여 전부 밖으로
뛰어 나오자마자 그 절은 무너지고 신도 천명은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게 되었다.
이들 천명이 판자가 가는 곳을 따라가서 지금의 천성산에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는데,
《화엄경》을 배워 모두 득도하였다.
(나) 원효와 의상은 결의 형제를 맺고 천성산에서 득도할 때까지 떨어져 있기로 했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밤 묘령의 여인이 의상을 찾아가 하룻밤만 쉬어가기를 청했으나
의상은 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원효는 그 여인을 편히 쉬게 해주고 산기(産氣)가 있는 것을 알고
옥동자를 낳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관세음보살이었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이 남긴 그 목욕물로 몸을 씻어 도를 터득했고, 의상도 원효의 도움으로
도를 터득했다.
2) 원효설화의 의미
(가) 사바세계로부터의 구원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 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羊)이 끄는 수레,
사슴(鹿)이 끄는 수레, 소(牛)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 법화경 비유품 <화택의 비유> 중에서 -
(나) 한국인의 의식에 보이는 엄격과 관용의 미학 원효와 의상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함께 속세를 떠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다. 원효는 소탈하면서도 관용적이었고,
의상은 엄격하면서도 자신에게 철저했다. 이 때문에 깊은 산 속에서 밤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낭자가 찾아 왔을 때 원효는 측은히 여겨 맞이하였고, 의상은 수도하는 것과 맞지 않다 하여 그 여인을
바깥으로 내쳤다. 이같은 소탈과 엄격이 원효와 의상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민중은 원효가 요석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도 바가지 춤을 추면서 교화를 펼쳤으니 그의 성격을 소탈하면서 원융한 것으로 보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 정우락, 양산고을 문화사랑 중에서 -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그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성주에서 삼십대의 두 젊은이가 제자로 입문하고자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한강 정구요, 다른 한 사람은 내암 정인홍이라고 하였다. 그 날은 마침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퇴계가 그들을 만나보니, 두 젊은 선비는 스승에게 대한 예의를 갖추느라고 그 더위에도 도포를 입고
행건까지 치고 있었다. 수인사를 끝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정구라는 청년은 “에이 더워 ……
선생님! 더워서 도포를 좀 벗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얻은 뒤에 도포를 훨훨 벗어 벽에 걸고
갓까지 벗어 놓더니, 수건으로 땀을 씻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하나에서 열 가지 소탈하고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인홍이라는 청년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도포와 갓을
벗어붙이기는커녕,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린 듯이 정좌를 하고 앉은 채 눈썹 한 개도
까닥하지 않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몸은 땀으로 멱을 감고 있을 지경이련만,
그는 덥다는 말 한 마디도 아니 하고 정좌를 하고 있어서 몸에는 찬바람이 일어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인품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었다.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조적인 성품은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 정구는 텁텁하고 무례스럽기는 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반면에, 정인홍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로 잰 듯이 이론이 정연하여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퇴계는 담화를 나누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세밀히 관찰하고 나서, 그들을 농운정사(隴雲精舍)로 가서
쉬라고 일렀다. 두 사람을 농운정사로 보낸 뒤에, 퇴계는 동자를 불러 이렇게 명하였다.
“너, 농운정사에 가서 지금 찾아왔던 두 젊은이가 어떤 모양으로 쉬고 있는지, 그들의 동태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오너라.” 잠시 후에 동자가 농운정사에서 돌아와 다음과 같이 아뢰는 것이었다.
제가 가 보았더니, 정구라는 사람은 더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윗통까지 벗어붙이고 우물가에서
발을 씻고 몸을 씻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인홍이라는 사람은 옷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깎아놓은 부처님처럼 지극히 단정한 자세로 방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 …… 잘 알았다.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퇴계는 거기서 무엇인가를 결심한 바 있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정식으로 제자로 입문하는 예식을 갖추려고 폐백을 가지고 퇴계 앞에
다시 나타났다. 옛날에는 제자로 입문하려면 소위 집지(執贄)라고 해서 필목이나 꿩이나 그 밖의
간단한 물품을 가지고 와서 스승에게 큰절을 올리며 폐백을 드리는 것이 입문하는 의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먼저 정구의 큰절과 폐백을 받음으로써,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의 차례가 오자, 퇴계는 손을 들어 폐백 올리기를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것이 없으니, 그대는 그냥 돌아가 주기를 바라네.
그대를 가르치기에는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야.” 이리하여 정인홍만은 제자로 입문시키기를 거절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다른 제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정인홍이 돌아간 뒤에 퇴계에게 거절한
이유를 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왔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구에게만 입문을 허락하시고,
징인홍은 그냥 돌려 보내셨습니까?” 퇴계가 조용히 대답한다. “내가 두 사람의 거동을 살펴보니,
정구는 시종이 여일하게 상정(常情)에 따라 행동했지만, 정인홍은 하나에서 열까지 상정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국가에 무슨 쓸모가 있다고 글을 가르쳐 주겠느냐?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남에게
해는 주어도 이익은 못 주는 법이다.” 그 당시 제자들은 그 말을 무심코 들어 넘겼다.
그러나 먼 훗날에 보면 퇴계의 예언은 너무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퇴계에게서 입문을 거절당한
정인홍은 그 후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입문하여 대학자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인홍은
벼슬이 높아지자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주동자로서, 국가에 공헌이 많은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
유성룡(柳成龍) 같은 조정의 중신들을 모조리 탄핵하여 조정을 크게 어지럽혔고, 급기야는
계축옥사(癸丑獄事)까지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증살(蒸殺)까지 하게 했던 것이다.
그 모양으로 불의의 영화를 누리며 갖은 작패를 다 부리다가 마침내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참형을 당하고, 가산은 모두 적몰되고 말았다. - 정비석의 퇴계소전}에서 -
2. 천성산과 문학 1) 천성산 조계암 상량문 양산(梁山) 북쪽 30리쯤 떨어진 거리에 산(山)이 있으니
원적(圓寂)이라 한다. 신라(新羅) 시대 원효(元曉) 조사(祖師)가 천인(千人)을 데리고 도(道)를 체득한 산이니, 또한 이름하여 천성(千聖)이라 하였다. 도를 닦을 시기에 산중(山中) 암자를 지은 것이
89개 암자이었다. 모두 그 터는 있지만 겨우 남아 있는 것은 9개뿐이었는데, 그 중에 이 조계암(曺溪庵)이 또한 89개의 기틀이 된다. 그러나 그 처음 지을 때를 보면, 곧 숭덕(崇德) 4년(1639년) 정해(丁亥)년에 유총((有聰) 도인(道人)이 재물을 모아 처음 창건하여 스스로 조계암이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의 일은
알지 못했다. 해는 뜨면 기울고 만물은 번성하면 쇠약해 지는 것이 천도(天道)의 일정함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집의 모양이 완전하기 어려우니, 단청이 바래지고 대들보가 무너지고 동자기둥이 썩고 서까래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주지 스님과 스님들이 본심을 찾으려 해도 불안하여
마음에 병이 된 것이 오래 되었다. 이에 선총(善聰)․국환(國環)․연징(演澄) 도인(道人)이 마음을
일으켜 재산을 모아 건륭(乾隆) 54년(1789년) 기유(己酉)년 맹춘(孟春)에 일을 계획하고,
그 해 계춘(季春) 초구일(初九日)에 공(功)을 고(告)했다. 상량(上樑)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중창(重創)함에 그 옛 제도를 증가하였다. 이에 더욱 모든 봉우리가 높고 수려하며, 숲은 매우 아름답고,
嵒開古窟千年色 바위는 옛 굴 속의 천년 색으로 열리고, 囱引扶桑萬里津 창은 해뜨는 곳 만리의
나루로 이어지네. 待得田園投紱臥 기다렸다 전원에 돌아와 관인을 던지고 누워, 一樽來作白蓮賓 한
동이의 술을 지고 와서 백련의 손님이 되네.
(다) 賞楓, 李覲吾 千聖山高早得霜 천성산 높은 곳부터
일찍 서리가 내리니, 滿林紅紫雜靑黃 숲에 가득한 홍색과 자색이 청색 황색과 섞여 있네.
蒸霞浮出桃花水 성한 노을은 맑은 물 위로 떠서 나오고, 雲錦裁成織女裳 비단 같은 구름은 직녀의 치마를 만드네. 朝露晞時方見豔 아침 이슬 마를 때 바야흐로 농염함을 보고, 夕陽明處便增光 저녁 해 밝을 때 문득 빛을 더하네. 三秋物色休云美 가을의 물색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게. 搖落偏知白髮傷 흔들려
떨어지는 것이 곧 백발의 아픔이라는 것을 알지니.
(라) 同李雪山遊圓寂山, 李覲吾 坐久溪邊夕氣寒 오랫동안 시냇가에 앉아 있노라니 저녁 기운 싸늘한데, 高吟山水酒杯闌 산수를 격조 있게 읊조리려 하니 술잔이 다하네. 待君不至吾先到 그대를 기다려도
(가) 원효가 기장의 척판암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암자에서 서쪽 하늘을 혜안으로 바라보니
중국 산동성에 있는 법운사에 천명의 신도가 불공하고 있는데 그 절이 곧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은 그 절의 법교가 죄인으로서 벼락을 내려 천벌을 주려는 찰라였다. 따라서 천명의 신도들도
억울한 죽음을 당할 형편이었다. 그 때 원효대사가 '海東元曉擲板救衆'라고 새긴 판자를 던지니 갑자기 법운사 주위가 금빛으로 변하였다. 신도들은 환한 금빛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여 전부 밖으로
뛰어 나오자마자 그 절은 무너지고 신도 천명은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게 되었다.
이들 천명이 판자가 가는 곳을 따라가서 지금의 천성산에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는데,
《화엄경》을 배워 모두 득도하였다.
(나) 원효와 의상은 결의 형제를 맺고 천성산에서 득도할 때까지 떨어져 있기로 했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밤 묘령의 여인이 의상을 찾아가 하룻밤만 쉬어가기를 청했으나
의상은 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원효는 그 여인을 편히 쉬게 해주고 산기(産氣)가 있는 것을 알고
옥동자를 낳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관세음보살이었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이 남긴 그 목욕물로 몸을 씻어 도를 터득했고, 의상도 원효의 도움으로
도를 터득했다.
2) 원효설화의 의미
(가) 사바세계로부터의 구원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 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羊)이 끄는 수레,
사슴(鹿)이 끄는 수레, 소(牛)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 법화경 비유품 <화택의 비유> 중에서 -
(나) 한국인의 의식에 보이는 엄격과 관용의 미학 원효와 의상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함께 속세를 떠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다. 원효는 소탈하면서도 관용적이었고,
의상은 엄격하면서도 자신에게 철저했다. 이 때문에 깊은 산 속에서 밤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낭자가 찾아 왔을 때 원효는 측은히 여겨 맞이하였고, 의상은 수도하는 것과 맞지 않다 하여 그 여인을
바깥으로 내쳤다. 이같은 소탈과 엄격이 원효와 의상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민중은 원효가 요석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도 바가지 춤을 추면서 교화를 펼쳤으니 그의 성격을 소탈하면서 원융한 것으로 보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 정우락, 양산고을 문화사랑 중에서 -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그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성주에서 삼십대의 두 젊은이가 제자로 입문하고자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한강 정구요, 다른 한 사람은 내암 정인홍이라고 하였다. 그 날은 마침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퇴계가 그들을 만나보니, 두 젊은 선비는 스승에게 대한 예의를 갖추느라고 그 더위에도 도포를 입고
행건까지 치고 있었다. 수인사를 끝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정구라는 청년은 “에이 더워 ……
선생님! 더워서 도포를 좀 벗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얻은 뒤에 도포를 훨훨 벗어 벽에 걸고
갓까지 벗어 놓더니, 수건으로 땀을 씻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하나에서 열 가지 소탈하고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인홍이라는 청년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도포와 갓을
벗어붙이기는커녕,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린 듯이 정좌를 하고 앉은 채 눈썹 한 개도
까닥하지 않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몸은 땀으로 멱을 감고 있을 지경이련만,
그는 덥다는 말 한 마디도 아니 하고 정좌를 하고 있어서 몸에는 찬바람이 일어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인품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었다.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조적인 성품은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 정구는 텁텁하고 무례스럽기는 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반면에, 정인홍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로 잰 듯이 이론이 정연하여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퇴계는 담화를 나누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세밀히 관찰하고 나서, 그들을 농운정사(隴雲精舍)로 가서
쉬라고 일렀다. 두 사람을 농운정사로 보낸 뒤에, 퇴계는 동자를 불러 이렇게 명하였다.
“너, 농운정사에 가서 지금 찾아왔던 두 젊은이가 어떤 모양으로 쉬고 있는지, 그들의 동태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오너라.” 잠시 후에 동자가 농운정사에서 돌아와 다음과 같이 아뢰는 것이었다.
제가 가 보았더니, 정구라는 사람은 더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윗통까지 벗어붙이고 우물가에서
발을 씻고 몸을 씻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인홍이라는 사람은 옷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깎아놓은 부처님처럼 지극히 단정한 자세로 방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 …… 잘 알았다.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퇴계는 거기서 무엇인가를 결심한 바 있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정식으로 제자로 입문하는 예식을 갖추려고 폐백을 가지고 퇴계 앞에
다시 나타났다. 옛날에는 제자로 입문하려면 소위 집지(執贄)라고 해서 필목이나 꿩이나 그 밖의
간단한 물품을 가지고 와서 스승에게 큰절을 올리며 폐백을 드리는 것이 입문하는 의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먼저 정구의 큰절과 폐백을 받음으로써,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의 차례가 오자, 퇴계는 손을 들어 폐백 올리기를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것이 없으니, 그대는 그냥 돌아가 주기를 바라네.
그대를 가르치기에는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야.” 이리하여 정인홍만은 제자로 입문시키기를 거절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다른 제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정인홍이 돌아간 뒤에 퇴계에게 거절한
이유를 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왔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구에게만 입문을 허락하시고,
징인홍은 그냥 돌려 보내셨습니까?” 퇴계가 조용히 대답한다. “내가 두 사람의 거동을 살펴보니,
정구는 시종이 여일하게 상정(常情)에 따라 행동했지만, 정인홍은 하나에서 열까지 상정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국가에 무슨 쓸모가 있다고 글을 가르쳐 주겠느냐?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남에게
해는 주어도 이익은 못 주는 법이다.” 그 당시 제자들은 그 말을 무심코 들어 넘겼다.
그러나 먼 훗날에 보면 퇴계의 예언은 너무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퇴계에게서 입문을 거절당한
정인홍은 그 후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입문하여 대학자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인홍은
벼슬이 높아지자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주동자로서, 국가에 공헌이 많은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
유성룡(柳成龍) 같은 조정의 중신들을 모조리 탄핵하여 조정을 크게 어지럽혔고, 급기야는
계축옥사(癸丑獄事)까지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증살(蒸殺)까지 하게 했던 것이다.
그 모양으로 불의의 영화를 누리며 갖은 작패를 다 부리다가 마침내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참형을 당하고, 가산은 모두 적몰되고 말았다. - 정비석의 퇴계소전}에서 -
2. 천성산과 문학 1) 천성산 조계암 상량문 양산(梁山) 북쪽 30리쯤 떨어진 거리에 산(山)이 있으니
원적(圓寂)이라 한다. 신라(新羅) 시대 원효(元曉) 조사(祖師)가 천인(千人)을 데리고 도(道)를 체득한 산이니, 또한 이름하여 천성(千聖)이라 하였다. 도를 닦을 시기에 산중(山中) 암자를 지은 것이
89개 암자이었다. 모두 그 터는 있지만 겨우 남아 있는 것은 9개뿐이었는데, 그 중에 이 조계암(曺溪庵)이 또한 89개의 기틀이 된다. 그러나 그 처음 지을 때를 보면, 곧 숭덕(崇德) 4년(1639년) 정해(丁亥)년에 유총((有聰) 도인(道人)이 재물을 모아 처음 창건하여 스스로 조계암이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의 일은
알지 못했다. 해는 뜨면 기울고 만물은 번성하면 쇠약해 지는 것이 천도(天道)의 일정함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집의 모양이 완전하기 어려우니, 단청이 바래지고 대들보가 무너지고 동자기둥이 썩고 서까래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주지 스님과 스님들이 본심을 찾으려 해도 불안하여
마음에 병이 된 것이 오래 되었다. 이에 선총(善聰)․국환(國環)․연징(演澄) 도인(道人)이 마음을
일으켜 재산을 모아 건륭(乾隆) 54년(1789년) 기유(己酉)년 맹춘(孟春)에 일을 계획하고,
그 해 계춘(季春) 초구일(初九日)에 공(功)을 고(告)했다. 상량(上樑)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중창(重創)함에 그 옛 제도를 증가하였다. 이에 더욱 모든 봉우리가 높고 수려하며, 숲은 매우 아름답고,
嵒開古窟千年色 바위는 옛 굴 속의 천년 색으로 열리고, 囱引扶桑萬里津 창은 해뜨는 곳 만리의
나루로 이어지네. 待得田園投紱臥 기다렸다 전원에 돌아와 관인을 던지고 누워, 一樽來作白蓮賓 한
동이의 술을 지고 와서 백련의 손님이 되네.
(다) 賞楓, 李覲吾 千聖山高早得霜 천성산 높은 곳부터
일찍 서리가 내리니, 滿林紅紫雜靑黃 숲에 가득한 홍색과 자색이 청색 황색과 섞여 있네.
蒸霞浮出桃花水 성한 노을은 맑은 물 위로 떠서 나오고, 雲錦裁成織女裳 비단 같은 구름은 직녀의 치마를 만드네. 朝露晞時方見豔 아침 이슬 마를 때 바야흐로 농염함을 보고, 夕陽明處便增光 저녁 해 밝을 때 문득 빛을 더하네. 三秋物色休云美 가을의 물색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게. 搖落偏知白髮傷 흔들려
떨어지는 것이 곧 백발의 아픔이라는 것을 알지니.
(라) 同李雪山遊圓寂山, 李覲吾 坐久溪邊夕氣寒 오랫동안 시냇가에 앉아 있노라니 저녁 기운 싸늘한데, 高吟山水酒杯闌 산수를 격조 있게 읊조리려 하니 술잔이 다하네. 待君不至吾先到 그대를 기다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