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선생과 이 선생이 마을을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산림과학원에서 평생을 나무 연구에 매진하다가 퇴임한 사람들로 다시 그곳의 위탁을 받아 벚나무 육종을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은퇴 후에도 능력을 사주어 일을 주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고도 했다.
그들이 처음 찾아온 것은 지난봄이었다. 전국의 산을 탐색해 보니 마을 뒷산의 벚나무가 아주 우량한 품종으로 보여 찾아왔다고 했다. 산을 두루 살펴 이십여 그루를 연구 대상으로 선정했다. 식생 관찰과 종자 채집으로 우수한 나무를 개발하여 널리 보급할 계획이라 했다.
마을 뒷산은 해마다 4월 중순경이면 온 산이 해사하고 화사한 벚꽃 천지를 이룬다. 자욱한 벚꽃은 소나무 푸른빛이며 진달래 붉은빛과 어울리면서 한층 희고 고운 빛깔이 되어 온 마을을 꽃 대궐로 치장한다. 봄이면 그 장관을 바라보면서 감격과 환희에 젖곤 한다.
그 꽃의 찬연한 아름다움을 마을 사람들만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꽃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찾아올 뿐 아니라, 마침내 연구 대상이 되어 산림과학원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했다.
지금은 열매가 익어갈 철이라, 오늘은 그 종자를 받으러 왔다. 나무 아래에 깔아 떨어지는 열매를 받을 널따란 비닐이며, 높다란 가지를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기 위한 석궁 등 갖은 장비들을 다 준비해 왔다.
봄에 왔을 때 내가 산을 안내해 준 게 인연이 되어, 이번에는 작업을 아예 좀 도와 달라고 했다. 도와줄 또 한 사람을 구해 달라고 하여 이웃 조 씨도 함께 손을 모으기로 했다. 넷이서 해도 가풀막의 풀이며 잡목들을 걷어내고 큰 나무들 사이로 비닐을 깔아 바람에 날리지 않게 당겨 매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땀방울이 종자처럼 비닐 위에 떨어졌다.
열매를 떨어뜨려 받기 위해 이 선생은 석궁에 줄을 메어 단 화살을 장착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우량종자를 향한 희망을 쏘는 것 같았다. 줄이 날아가는 화살에 끌려 하늘로 올라가 나뭇가지에 걸쳐졌다. 줄을 잡고 가지를 흔드니 우수수 떨어지는데 아직 덜 익은 게 많다.
일단 나무 아래에 비닐만 모두 깔아두고 절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억지로 따기보다는 완전히 익어 떨어지는 것에서 좀 더 우수한 종자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비닐을 설치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일하는 사이에 대화를 나누면서 힘만 모을 뿐 아니라 우량종자를 수집하여 아름다운 나무를 만들기 위한 마음도 모아갔다.
해가 다하도록 열심히 땀을 흘렸지만 할 일의 절반 정도밖에 해내지 못했다. 나머지는 내일로 미루고 산을 내려오면서, 장 선생은 나를 보고 참 좋은 곳에 산다고 했다. 좋은 나무가 있는 곳에 사니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래요, 산벚꽃이 얼마나 좋으면 이런 시도 있데요. ‘저 산 너머에 그대 있다면/ 저 산을 넘어가 보기라도 해볼 턴디/ 저 산 산그늘 속에/ 느닷없는 산벚꽃은/ 웬 꽃이다요’(김용택, ‘산벚꽃’). 사랑하는 사람보다 벚꽃에 눈길이 먼저 간다는 말이겠지요?”
“어디 꽃뿐입니까? 열매는 어떻고요. 소화 기능을 강화하고 항암 효과도 있고 피로 회복이며 변비 개선에도 좋아 사람에게도 이롭지만, 산에서 살아가는 딱따구리, 직박구리, 멧비둘기, 꿩, 들꿩, 어치, 청설모, 다람쥐, 까치, 까마귀 등의 소중한 먹이원이 되지요.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을 이롭게 합니까?”
함께 산을 내려오는 길은 벚나무 예찬론 일색이다. 목재는 조직과 색상이며 문양이 미려하고 밝아 가구와 판재 또는 조각용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멀리로는 고려 팔만대장경판도 재질을 분석해 보니 많은 양을 벚나무로 만든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고 했다.
문득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경덕왕 24년(765)에 중 한 사람이 깨끗한 승복을 차려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안내하고는 그가 지고 온 통 속을 보니 차 끓이는 도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앵통은 앵두나무 통이 아니라 벚나무로 만든 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벚나무는 오래 전부터 유용한 가구재로 쓰여 왔다는 말이다.
이튿날 모두 다시 만나 산으로 갔다. 작업하지 못한 곳을 찾아 산을 오르면서 보니, 어제 쳐놓은 비닐 위에 검게 익은 열매들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봉투에 정성스레 담았다.
떨어진 열매를 수습하면서 정해 놓은 나무 아래에 비닐을 쳐서 열매 받을 준비를 다 해놓고 나니 또 하루해가 저물었다. 장 선생과 이 선생은 수습한 열매를 가지고 돌아가며 나에게 시일을 두고 모든 나무들의 열매를 좀 수습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늘 오르는 산이니 어렵지 않은 일이라 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비닐 위에 떨어져 있는 열매를 주워 모았다. 비탈을 오르내리며 열매를 수습하기가 힘은 들었지만, 내가 모으는 이 열매가 많은 산을 곱게 수놓을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부터 먼저 꽃밭이 되는 것 같았다. 이 종자가 우람한 나무가 되어 다시 많은 열매를 맺어 뭇 새들이며 짐승들의 좋은 식량이 될 수 있다면, 이들 나무가 좋아 이 한촌에 마음을 묻고 사는 한 보람이 될 것 같기도 했다.
모쪼록 이 열매들을 종자로 하여 장 선생과 이 선생의 육묘, 육종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산 곳곳에 우리 마을 뒷산 산벚꽃이 활짝 피어날 어느 봄날을 기대하며 골똘히 열매를 모은다. 열매를 갈무리한 배낭을 지고 산을 내려오며 시 하나를 조용히 왼다.
“아직 산벚나무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개울물 흘러내리는 소리 들으며/ 가지마다 살갗에 화색이 도는 게 보인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도종환, ‘산벚나무’)♣(201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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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더 아름답고 풍성한 자연을 위해 참 좋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정말 뜻있는 일이구요,
선생님의 자연사랑에 정말 복되고 밝은 미래를 꿈꾸게 됩니다.
그런 꿈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글과 헌신에 감동을 안고 갑니다.
그 분들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산에 발자국을 많이 찍었지요.
제가 수습한 종자가 다시 어느 산에서 피어나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요.
언제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건승하시기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