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나름대로 사회의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치고 ‘생명’, ‘생태’, ‘영성’ 등등의 말을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생명은 우리 이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근래에 빚어진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반생명적이고 생태적인 문화의 심각성이 부각되면서 생명사상의 중요성이 더욱 더 강하게 터져 나오고 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 철학, 신학 등 모든 분야의 학자들이 ‘생명문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배아복제, 생명복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에서 보듯이 같은 생명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오히려 반생명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조차 등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사상’을 운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 생명철학을 정립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명사상에 대한 관심이 보여주는 몇 가지 흐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흐름은 생태학적 관심과 도전을 기반으로 하여 생명가치를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 본래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생태학의 시작은 본래 “생태계를 기능적으로 연결된 부분들로 구성된 자기 조절적인 단위를 간주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적인 관점을 선호했는데, 그들의 이런 전일주의적 관점은 당시에 사회학에서 원용하던 유기체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풍미했던 기술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임경순, “자연과학의 새로운 변화와 생명가치”, 생명가치와 환겨윤리 학제간 연구, 1997. 한국환경정책 평가 연구원, p.46
이런 초기 생태학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60년대부터 부상한 환경사상과 연대하며 유기체적 사고나 환경주의 사상을 뒷받침하게 된다. 이런 흐름은 생명에 대한 이해를 보다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을 두었다는데 그 장점이 있다.
둘째 흐름은 인문학에 바탕을 둔 생명사상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삶과 가치, 그리고 인간존재 그 자체가 지니는 생명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관계,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는 신적 존재와의 관계 모두 ‘생명’으로 엮어져야 한다는 생명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특히 서구가 오래 잃어버리고 있었던 생명사상을 동양종교나 철학에서 찾으려는 많은 학문적이고 실천적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생명사상의 두 흐름은 상보적이어야 한다. 과학적 연구나 그 결과를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에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종교나 인문학의 생명에 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 연구 또한 중요하다. 전자의 뒷받침 없이는 생명사상은 자칫 추상적일 수 있으며 후자 없이 생명사상의 가치혼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함석헌의 생명사상은 안에는 이 두 흐름이 다 흐르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과학적 사고와 결과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추구했으며 동시에 동양의 생명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적 생명사상을 토대로 자신의 생명이해를 형성해 나갔다. 그래서 그의 생명사상은 단순히 환경친화적인 삶을 위한 환경운동의 범주에 있지 않고 인간, 사회, 국가, 민족, 종교 전 분야 걸쳐 펼쳐지고 적용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모든 사상과 실천은 이 생명사상의 펼침과 적용, 실천이다.
1. 생명의 원리
함석헌은 생명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생명은 생물학적 관점을 넘어서 생명현상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1) 일(一)과 다(多)의 원리
일과 다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인류 사상사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이다. 함석헌은 생명운동 그 자체이 일이면서 다이고, 다이면서 일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음을 간파한다. “무생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부터 인격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한 이상한 경향은 그저 많으려 하는 일이다. 물질의 분자. 원자, 나무의 잎 세포, 동물, 식물의 종류 하는 모든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듯 많으려 하면서도 또 한편 그 많은 것이 될수록 하나 되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함석헌 전집2, p. 92-93
함석헌은 그것이 생명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하나이면서 여럿이 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러한 그의 생명이해는 ‘개체와 전체’의 상호관계성으로 발전한다. 개체없는 전체가 있을 수 없듯이 전체없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의 생명력 획득은 전체에서 가능하하다고 말한다. “어떤 생명의 운동도 직선으로 올라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톱니 같은 오르내리는 굴곡을 그으며 올라갑니다. 모든 운동은 점점 줄어들고 내려가는 법칙이 있습니다. 어떻게 위대했던 종교도 정치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차차 그 생명력이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나가기 위해서는 자주자주 부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체에 돌아가서만 됩니다. 정말 생명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체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는 아무리 잘하노라 해도 개체이기 때문에 전체에서 떠나 수밖에 없고, 받은 생명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 단체적 모든 생명체는 다 때때로 전체의 발전소에 들어가 다시 충전을 해서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14:188)
씨사상에서 보면 로서 ‘나’(개체적 씨)는 하나님(전체) 속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다. 내 안에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내가 있다. 씨은 하나의 씨이자 동시에 열매를 품고 있으며, 열매는 씨을 품고 있다. 개체와 전체와 관계는 상호 유기적 생명적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생명이 많음으로 분화 발전하려는 현상과 더불어 다른 한편 하나로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또한 간과하지 않았다. 즉 많음이 하나로 모여지는 현상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회현상으로 볼 때 현대의 개인화된 개인적 삶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공동체적 삶으로 모아지려는 움직임도 이런 생명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2) ‘확산-수렴(收斂)의 원리
위에서 언급한 일과 다의 원리가 수의 측면에서 보여진다면 이 원리는 부피적 개념이 짙다. 생명스러운 기운의 확산되고 다시 모아지는 현상을 암시한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은 될수록 번져 나가려 한다. 물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나간다. 방전(放電)이 되면 빛이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빛도 소리도 열도 그저 방사되어 나가려 한다. 크게는 본체(本体)에서부터 작게는 사람의 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저 번져 나가려고만 하는 것이 그 근본 경향이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또 거두어들이려는, 될수록 모르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는 창조요, 하는 안식이다. 하나에서 진보주의가 나오고 또 하나에서는 보수주의가 나온다. 보수 없이 진보도 될 수 없고 진보 없이 보수도 될 수 없다. 늘 편하지 않으려 하면서 또 돌변하려하는 것이 생명이다. 진화는 여기에서 나왔다.” 위의 책, p.93
생명은 살아있는 것이고 변화되는 것인데 생명기운은 자신의 생명한계를 넘어서 밖으로 펼쳐나가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활동이요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편 생명은 자신의 남의 생명력, 자신의 생명력을 다시 수렴하는 운동을 펼친다. 무한대로 확산만 하려 든다면 곧 시들고 말 것이고, 무조건 수렴만 하려 한다면 썩고 말 것이다. 생명의 확산과 수렴원리는 생명의 들숨날숨 운동이다.
3) 자유와 통일의 원리
생명체는 결코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는 실재가 아니다. 생명다움은 그 생명의 주체성에 있다. 그 주체성은 스스로 함에서 나온다. 함석은 그래서 생명(삶)은 “스스로 따로 함”(自別)이라 이름지었다. “무한대의 우주에 대하여 나는 난다. 나은 너의 한 부분만은 아니다 하고 맞섬으로 생명은 거룩한 것이다.” 위의 책, p.209
그러나 생명이 저마다 스스로 함에만 머문다면 생명계는 혼돈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생명의 혼돈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2 열역학에서 주자하듯이 생명현상은 무작위, 혼돈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혼돈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스스로 함 속에서도 생명은 통일을 이루려는 운동력이 있다. 스스로함이 자유요 혼돈의 생명력이라면 통일은 코스모스, 즉 질서의 생명력이다. “모든 존재가 각각 저는 ‘저’려 하는 강한 경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될수록 하나로 통일되려는 것이 만물의 밑을 흐르는 원리이다. 원자에서부터 벌써 그 성질을 볼 수 있지만 인간에 있는 정치라는 현상도 이 원리의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하자는 면에서 하면 저는 될수록 독특(獨特)하려하나 또 통일되자는 면에서 하면 독특한 가운데서도 또 어디까지나 보통적(普通的)이려는 성질이 있다. 이것은 영원의 쌍둥이의 한 쌍이다.” 위의 책, p.93
생명의 통일은 단순한 숫자로서의 하나나 정략적인 통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화로운 일치감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생명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는 화(和)이다.
4) 생(生)과 사(死)의 원리
생명체는 태어나고 생명력이 다하면 죽기 마련이다. 그래서 태어남이 생명현상이듯 죽음 생명의 부작용이나 끝이 아니라 생명활동 그 자체이다. 만약 생명체가 죽지 않는다면 이 생명세계는 그 자체로 죽음의 세계가 될 것이다. 함석헌은 이 생과 사의 반복되는 세계를 하나의 신비로 보았다.
“생명은 나지만 또 반드시 죽는다. 왜 살면서 또 죽을까? 죽으면서 또 날까? 왜 생이면 그저 직선적 평명적인 생 하나가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생 사, 생 사, 생 사의 연속으로 되어 있을까? 왜 서로서로 원인 결과의 연쇄를 이루어 가지고 서로 얼크러져 있게 됐을까?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관찰하고 관찰할수록 끝이 없는 것은 이것이다. 그 신비는 우리 이성에는 영원이 못 들어가는 비원(秘苑)인지 모른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모든 정신의 세계란 것이 이 때문에 있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물결 없는 강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생사 없는 생명계, 존재계를 알 수 없다” 위의 책
때에 따라 죽어야 될 존재가 죽지 않으려고 생명을 조작하거나 죽음을 포장하려는 행위는 생명계나 진리계에서 볼 때 불협화음만 낳을 뿐이다. 종교에서는 오히려 ‘살림’을 위해 기꺼이 죽을 때 영원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과 사가 생명의 근원적인 현상임을 인정할 때 생명은 더욱 옹골차게 될 것이다.
5) 의식(意識)과 몰아(沒我)의 원리
생명에는 의식하는 능력이 있다. 그 의식의 깊이가 각 생명체에 따라 다르지만 모든 생명에는 의식이 있다. 함석헌은 이 의식이야말로 생명이 되비치는 현상으로 보았다. “의식은 생명의 반사(反射)다. 생명은 쏘아 나가기도 하지만 또 되돌아온다. 물질에 있는 반사작용이나 정신에 있는 반사는 한 가지 운동이라 할 것이다. 소위 정신이라는 것, 생각이란 것은 생명의 반사 혹은 반성이다. 하나님의 마음의 방사선의 끄트머리가 다시 저 나온 근본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 마음이란 것, 생각이란 것이다.” 위의 책 p.94
그 의식의 처음이 하나님이요 그 끝에 있는 것이 자아의식이다. 이 자아는 의식의 절대자인 하나님께 가면 사라진다.
몰아는 자기초월을 의미 한다. 우리가 현재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의식하는 존재이지만 그 생각과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욕구는 생명체의 기본 욕구이다. 인간의 인격, 종교성은 바로 그런 자기초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격의 본질은 자기초월이다. 제가 저를 아는 것이 긍정이면서도 자기부정이 된다. 내 지식의 내용으로 된 것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격은 자기반성으로 자기부정을 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 자기는 자기 이상일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쉬임없이 자기 초월을 해 가는 것이 인격이다” 위의 책 p.95
이상에서 함석헌이 생명현상을 통해 발견한 생명원리를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함석헌의 생명이해는 인간론에서는 씨사상으로 발전시켜 나아감으로서 씨과 역사, 우주, 그리고 하나님과 생명적 연결을 강조한다. 씨 그 자체가 생명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체적 실재이다. 박재순은 함석헌의 씨 사상에서 생명의 자발성, 무궁성, 개체성과 전체성, 평등성, 그리고 생명의 어울림과 서로울림(共鳴), 강인함을 읽어 낸다. 이경숙, 박재순, 차옥숭, 한국생명사상의 뿌리, p.123-124
함석헌의 생명사상이 종교와 만났을 때에는 생명력 있는 종교의 모습으로 새종교론이 펼쳐진다. 새종교론은 ‘하나 되는 종교’, ‘합리적인 종교’, 그리고 ‘총체적인 종교’로서 나타난다 또한 그의 생명사상이 역사와 사회를 만났을 때에는 반(反)생명적인 문화에 대한 저항으로 비폭력 평화사상으로 열매를 맺는다. 함석헌은 생명 그 자체의 특성이 거부, 저항에 있다는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생명은 환경 속에서 적용되고 맞추어가는 측면이 있지만 더욱 본질적인 것은 대듦이다. “생명은 대듦(拒否)이다.” 전집2, p.208
맞춰감으로만 보면 생명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수동이 아니다. 맞추어 가려는 성질 밑에는 힘 있는 능동적인 것이 늘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전한 받아들임 만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무생물밖에 있을 수 없다. 맞추어 간다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오는 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힘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생명은 대듦이라고 보아야 옳다” 위의 책
이처럼 함석헌의 생명사상은 단순히 소극적, 수동적인 생명주의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저항적인 동력으로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인 것이다.
3. 생명원리에서 바라 본 생명목회
이상에서 살펴본 함석헌이 본 생명원리는 생명현상을 모두 기술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본 하나의 관점이고 해석이다. 필자는 이 생명원리를 목회에 적용해 본다면 나름대로 생명목회의 신학과 철학이 도출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생명의 일(一)과 다(多)의 원리는 생명목회가 지향해야 될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의 올바른 관계를 상기시킨다. 교회를 구성하는 개인 성도들은 전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이 교리나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야 될 생명현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교회가 참 생명체이라면 ‘일과 다’의 통전성은 이루어야 될 목표가 아니라 이미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며 자연스럽게 생명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목회현장은 그렇지 못하다. 지체로의 개인의 은사가 교회전체의 선교와 조화롭지 못할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개체에 대한 가치 평가 또한 너무도 반(反) 생명적인 세속적 기준에 좌우되는 지라 생명으로 그 개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약하다. 교회에서 개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받고 위로 받는 계기가 점점 줄어들고, 거룩한 몸을 이루는 존재임이 재인식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생명체라는 인식은 더 이상 실재가 아닌 교리적 인식으로 끝나고 있다. 생명목회는 다시금 교회의 생명력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위해 생명목회는 개인과 전체로서 그리스도의 몸과 생명적 유기체적 연결 관계를 인식하고 배려하는 목회활동에서 시작된다. 목회자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부분을 이루는 것이 참으로 적절한지를 살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개인의 은사를 분별할 수 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생명력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이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생명 있는 교회로의 당연한 모습인데 그렇게 되지 못하게 분열시키는 거짓된 영(靈)의 분별력도 필요하다. 교회 내에 반생명적인 문화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의 지체가 많아도 ‘하나 되려는 마음’으로 모아지지 않으면 그 교회는 쉽게 생명력이 상실하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하나 됨을 위한 기도를 깊게 되새겨야 할 때이다.
생명목회는 전체로서 하나님과 예수와 개체로서 교회, 또한 전체로서의 교회와 개체로서 성도들 사이에서 생명의 통전이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관심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생명의 확산과 수렴의 원리는 생명목회의 선교활동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교회가 생명력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선교 활동이다. 교회가 생명력이 있을 때 밖으로 확산되어나갈 수밖에 없다. 교회의 생명력은 교회의 규모나 성도들의 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선교활동의 외형적 규모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자신의 생명을 남에게 나눠주는 선교적 사명을 지닌 선교 공동체이다.. 이 때 선교는 단순히 개종을 목적으로 한 전도(伝道)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참 생명으로 생명력 있는 삶을 펼치는 모든 개인적 집단적 행위를 의미한다. 생명은 흘러가고 이웃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생명의 확산’으로 서 선교는 그러므로 맘몬주의로 점철된 죽임의 문화, 이기주의로 전락해 버리는 개인주의와 소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선교가 되어야 한다. 즉 생명선교는 바로 개인과 사회, 역사와 인류 전체를 생명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선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의 생명은 작은 곳에서, 작은 자에게라도 그리스도의 현존 사건을 체험하게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바로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생명의 확산으로서 생명목회다.
생명의 확산으로서 선교가 교회 생명력의 원심력(遠心力)의 표현이라면 수렴은 구심력(求心力)적 활동을 의미한다. 개인이든 교회든 선교한다고 외부적인 활동에 매몰되면 자칫 오히려 선교가 짐이 되고, 신앙이 공허해질 수 있다. 그래서 선교확산은 영성적 수렴으로 재충전되어야 한다. 생명목회는 이 양자 모두가 생명현상으로서 중요한 요소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내 안에 깊은 영성 없이 선교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내적인 영성적 충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함석헌은 이것을 ‘창조와 안식’으로 비유함으로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 또한 창조(선교)의 쉼(영성적 삶)의 통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는 개인과 교회 이 과정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통찰하고 적절한 목회적 배려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생명의 자유와 통일의 원리는 목회의 개방성의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 종교는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것에 익숙하다. 왜냐하면 현재 종교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이 형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또 새로운 기운으로 자신의 기득권과 토대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혹은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조직적으로 볼 때 자유스럽지 못한 곳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까지 않다. 교회가 생명체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독특하고 자유스러움을 지향하는 개방적인 목회가 필요하다. 그것은 물론 전통적인 것과 올바른 ‘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현상이 필요에 대해 보다 과감할 필요가 있다. 생명체가 자유를 구속당할 때 생명의 위협을 가장 강하게 느낀다. 자유의 구속은 자신의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교리나 주장에 얽매여 참 자유를 잃지 않기 원하신다.
생명목회는 새로운 변화를 지향하는 성령의 자유로운 교회 내, 외 활동에 민감해야 한다. 성령은 바람처럼 저 불고 싶은 곳으로 움직이시는 살아있는 영이시다. 생명의 영이 교회의 변화에 참여하도록 목회자는 깊은 기도 가운데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영의 활동인지는 그것이 지향하는 것이 생명적인지 아닌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생명체는 이미 죽어있는 것처럼 자유와 통일의 원리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네 번째, 생과 사의 원리는 교회의 순교적 사명과 연결된다. 신앙공동체로서 교회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뇌이고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보여준 삶의 가장 큰 표본은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죽으심이다. 그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은 생명의 고귀한 차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이라는 상호 모순 된 차원이 현실 속에서 하나로 드러난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참다운 삶을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고, 참으로 죽은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마련되어 있다는 종교적 역설을 체험해야 한다. 생명목회는 이 양자의 차원을 넘나드는 목회이다. 자신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함으로서 “썩어지고 죽는 한 알 밀알의 삶”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생명을 드러내는 길임을 확신해야 한다. 생명목회는 ‘죽임 당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회이자 자발적으로 종교적, 역사적 십자가를 지는 목회를 의미한다.
다섯 번째 의식과 몰아의 원리에 대한 생명목회적 이해는 교회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思考)와 활동과 초월적이고, 영성적이며 보다 근원적인 것의 조화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많은 병폐와 약한 부분은 바로 이 양자가 통전되지 못하고 있는데서 비롯되고 있다. 어떤 교회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믿음의 양태로 착각하여 잘못된 신비주의나 열광주의, 기복주의로 빠졌고, 어떤 교회는 이성주의나 주지주의에 빠져 초월적이고, 초(初)합리적인 영역을 무시한 나머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도외시하며 건조한 교회로 전락해 버리기도 했다. 생명목회는 이 양자는 상호 모순 되는 요소가 아니며 오히려 반성적 성찰을 통한 ‘의식 있는’ 목회와 자기부정을 통한 초월적 존재와의 연합을 동시에 추구하는 ‘초월적인’ 목회이다.
나오는 말
생명목회란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환경보호운동을 넘어선다. 생태계를 보존하고 그 안의 생명을 소중 하게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선교활동이다. 그러나 생명목회는 목회자 스스로 이 생명 세계가 얼마나 세밀하게 생명력 있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체험적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한 본질적인 목회방향이다. 이런 생명목회는 목회자가 생명현상을 단순히 지식으로 ‘그렇다’라고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몸으로 실제로 체험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즉 개인과 사회, 국가와 인류와 역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 인간과 하나님이 얼마나 긴밀하게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는 “우주-신-인론적 영성(Cosmotheanthric Spituality)가 깊어질 때 비로 생명목회가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이 생명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의 또 하나의 형태이며, 성령세례 체험이다. 이런 생명체험의 지속성과 깊이의 더해감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또한 깊어질 수 없다. 생명목회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먼저 생명현상에 민감하고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의 구조 속에서 친생명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만큼 생명사상과 삶에 보다 철저한 자기헌신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사상이 이러한 생명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상으로 되살아나기를 희망해 본다.
<보론>
생명체험적 삶을 향한 12가지 ‘살림살이’
생명체험은 결국 ‘죽임살이’아니라 ‘살림살이’의 삶으로 이어진다. 생명체험을 토대로 한 자신의 살림살이 없이 교회 혹은 전체를 향한 생명목회는 가능하지 않다. 함석헌은 생명력 넘치는 살림살이를 위해 12가지 생활규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하나의 영성수련 기본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늘 하늘을 우러러보자”
이 표현은 우리 안에 있는 얼(靈)의 힘을 키우자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다. “머리의 위의 저 푸른 하늘은 우리 정신의 숲이다. 예로부터 하늘을 친하지 않고 된 시도 철학도 종교도 과학도 없다. 땅의 숲이 보이지 않는 물과 땅의 힘을 더하여 나타나듯이 우리 머리 위에 저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는 참 하늘의 표시다. 상징이다. 보이지 않는 그 얼을 우리 마음이 받아 나타낸 것이 저 푸른 하늘이다. 땅에서 보이는 것 중에 하늘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다시 말하면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맑고 영원 무한한 것을 나타내어, 우리로 하여금 거룩을 느끼게 하는 것이 저 하늘이다.”전집2, p.307-308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이냐 얼 힘(精神力)을 키우는 데 있다. 먹고 입고 자고 깨고 아들 딸을 낳고, 직업을 갖고 지식을 캐고 성격을 다듬고 예술을 지어내며, 나라를 하고 세계 문화를 쌓고 도덕을 행하고 종교를 믿어서, 결국 얻는 것은 얼의 힘을 키워 간다는 하나뿐이다” 위의 책, p.301
함석헌은 인간의 힘은 바로 이 얼 힘에 있기에 교육도 얼의 힘을 키우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력은 바로 이 얼의 힘에 나오는 것이기에 얼 힘 키우는데 힘을 다하는 것이다
2) 몸은 언제나 꼿꼿이 가지자.
모든 영성는 몸의 영성이다. 즉 몸의 바른 가짐 없이 올바른 영성이 심화될 수 없다. 함석헌은 이런 ‘몸의 영성’을 간파했다. 그는 말하기를 “꼿꼿이 서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살림을 바로잡으려면 그것부터 해야 한다. 설 때면 두 다리에 힘을 꼭 주고 서서 휘청휘청 밖에서 오는 힘에 밀려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하늘 땅 사이에 ‘나는 나다’라고 서야만 사람이다. 자주독립이다. 사람이란 하늘, 땅을 연락을 시키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힘이 내 발로 올라와 머리를 통해 저 까만 하늘에 뻗는다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 그래 1만 5천리 지구 중심까지 울림이 내려가도록 힘 있게 디디고 서자는 것이다. 또 앉을 때면 산처럼 부동의 정신으로 앉아야 한다. 그러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 한다.” 위의 책, p.311
3) 닭 울기에 일어나 하루 살림 준비를 하자
함석헌은 우리의 생활리듬을 열시에 자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는 것을 권한다.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쓴다. 아침에 해가 올라오도록 자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다거나, 어떤 자리에 있다거나, 무슨 책을 본다거나, 그가 어떤 사람이냐,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아무도 일찍 일어나기가 싫어졌거든 기운이 풀린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기운이 아주 풀리면 죽는다. 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사람이다. 모든 잎과 꽃이 새벽에 피고 모든 새가 새벽에 깨듯이 사람의 정신도 새벽에 가장 맑게 깬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위대한 정신의 사람은 다 일찍 깼다.” 위의 책
그는 일찍 일어나 몸이 잘 돌아가도록 움직여 주는 몸의 준비와 “천치창조 전부터 영원미래에 이르는 무한 우주를 거니는 마음의 산책”을 하는 정신의 준비를 강조한다.
4) 내 몸 거둠을 내가 하자
이것은 내 몸을 스스로 공경하고 남의 몸을 귀하여 여기는 살림살이를 의미한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의 귀함을 알아야 한다. 욕심의 하자는 대로 끌려 내 몸을 허투루 다루는 것은 내 몸을 천대함이다.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이 몸, 이 마음을 허투로 하면 우주와 만물은 차례와 뜻을 잃고 어지러워지고 맞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조심이란 몸공경이다.” 함석헌은 몸을 귀중하게 여긴다면 손수 몸을 거둬야 한다고 말한다. “정중히 모셔야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정성 있는 대접인가? 손수함이다. 귀한 어른 대접은 심부름꾼 아니 시키는 법이다. 네 몸 대접 네가 해라. 옷, 신발, 모자, 책상, 네 방, 네 손으로 치워야 한다. 제 신발도 닦지 않는 청년이 이 다음 사회봉사, 인류공헌이라니 곧이 들리지 않는 말이다.” 위의 책, p.314
5) 먹고 입음을 간단히 하자.
함석헌은 의식주를 간단하게 하는 간단주의를 말함이다. “예로부터 어느 정도의 금욕, 극기 없이 정신적 생명을 크게 키운 이는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 맛을 모르고 누구나 부드러운 것을 모르리오마는 힘써 욕심을 눌러서 간단히 하기를 힘써야 한다.” “먹고 입음 간단하게 하면 몸은 살이 찌지 못할지 모르나 혼은 살이 찔 것이다.” 위의 책, p.315
6) 술 담배를 마시지 말자
7) 하루 한번 땀을 흘리자
“생명은 신진대사, 즉 묵은 것은 나가고 새것은 자꾸 들어오고, 그리해서만 씩씩하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활동해야만 된다. 몸속에 묵은 찌꺼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분이 나쁜 법이요, 마음이 문을 닫고 들어앉아 묵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으면 정신이 시는 법니다. 생명에 가장 긴요한 조건은 청신(淸新)한 기운이다.” 위의 책, p.316
몸과 마음의 청신한 기운을 위해 땀 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특히 노동을 통한 땀 흘리기를 강조한다. 노동을 통한 땀을 흘리지 못할 경우에는 운동을 통해서라도 땀을 흘리라고 말한다. 위의 책, p.317
“생명의 건강법에는 틀어막는 것보단 내어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같은 땀이라도 이마에 흐르는 땀은 왕관 위의 진주 같으나 등골에 흐르는 땀은 마음을 죽이는 독약이다.” 위의 책
8) 날마다 글 읽기를 잊지 말라
“얼굴에도 빛이 있어야지만 마음은 더구나도 빛이 나야 한다. 속이 밝아야 밝은 사람이다. 그리고 속에 빛이 나는 것은 글 읽기로야 한다. 아무리 닦은 거울도 닦지 않고 두면 흐려 버린다. 공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티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둘러싸는 분위기도 그렇다. 그러므로 그냥 두면 흐린다. 자주자주 닦아야 한다. 마음을 닦는 데는 글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옛 사람은 공부한다는 사람이 사흘만 글을 아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난다고 해다. 그 대신 부지런히 공부하면, 사흘만 있다 만나도 눈을 비비고 봐야 알아 볼이 만큼 달라진다고 했다.” 위의 책, p.318
글 읽음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은 날마다 끊이지 않고 읽는 것이요, 책을 잘 선택하여 많이 읽는 것보다는 잘 씹어 읽는 것이다.
9) 때때로 산과 바다에 가자
함석헌은 자연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해 속화(俗化)되는 것을 막을 때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지. 높고 거룩하고 영원불변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산에 가야하고, 깊고 넓고 신비롭고 자라고 활동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바다야 가야 한다. 산과 바다는 생명의 정화처(淨化處)” 위의 책, p.319
라고 말한다.
10) 산 물건을 죽이자 말자
함석헌은 간디를 매우 존경했는데 그의 사상 중에서도 아힘사(불살생)의 사상을 중요시했다. 이것은 그의 생명사상의 논리적인 귀결이기도 한다. “이 세계, 이 인생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가장 위대한 것은 이것을 한 개 산 생명체로 보는 사상이다. 그것이 종교요 도덕이다.” 위의 책, p.321
“남의 생명을 먹고야 하는 이 생명일 수 없다. 남 죽이지 않고 나 스스로 사는 것이 영이다. 하나님은, 즉 진화의 목표는 영이다. 영이 되기 위해 불살생을 연습해야 한다. 이 다음 그 지경에 가고야 말 것이다.” 위의 책, p.322
11) 빚을 지지 말자
빚을 지지는 것은 곧 돈의 지배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돈들 쓰는 것 아니고 돈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가지고는 참 문명이라 할 수 없다. 지금은 돈의 지배 아래 있는 문명이다. 아직 어리다. 그리고 돈의 지배를 면하려면 빚을 지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굶어 죽어도 빚은 아니 진다 한 담에야 돈을 이겨다 할 수 있다. 돈을 이기면 나를 이긴 것이고 나를 이기면 천하를 이길 수 있다.” 위의 책, p.323
12) 시골을 지키자
“도시에서 보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힘이고 시골서 보는 것은 자연의 힘과 지혜다. 도시에서는 사람이 점점 교만해지고 시골에서는 점점 겸손해 진다. 도시에서는 꾀가 있지만 시골에서는 슬기가 있다. 정치와 법은 도시에 있고 도덕과 종교는 시골에 있다. 시골이 뿌리요 도시는 꽃이다. 꽃이 너무 커지면 가지가 꺽어지는 법이요 뿌리가 깊으면 온 나무가 다 무성하다. 도시가 발달한 것은 돈 때문이요 경쟁주의 때문이다. 바벨탑이 하늘에 닿을 듯하다가는 무너졌다. 도시문명은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이다. 평화사상, 협조사상이 늘어갈수록 지방자치는 늘어갈 것이요 그러면 시골이 문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도시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독재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배하는 자는 도시에 있다. 자유를 사랑하면 시골에 이어야 할 것이다. 거기는 산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이상에서 함석헌이 제시하고 있는 삶의 원칙들은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이기는 하나 현재 우리의 삶의 구조를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해 보인다. 더욱이 도시 생활에 익숙해 있는 삶의 구조라면 더더욱 힘든 생활원칙이다. 그러나 생명을 체험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 위 원칙이 일상적인 삶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생명친화적인 삶과 목회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구조를 바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