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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8차 산행안내 |
산행지 코스 |
피재-대박등-유령산-우보산-통리-태현사입구 |
산 행 거 리 |
실거리 11 km |
산행시간 |
04:00 |
산행 준비물 |
도시락,행동식.목욕준비 ^^* 산행후 태백연탄한우 식사 |
출 발 일 자 |
2015년 4월26일 |
출발장소 |
범내골역
4번출구앞 |
출 발 시 간 |
06:00 *^^*한사람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늦~지 마세요 |
산 행 회 비 |
1/n |
문 의 전 화 |
구정맥 산악회 051)246-5992 HP.010-5581-7581 |
☞산행(종주)거리
삼수령→통리역
☞산행(종주)코스
피재(920m)→작은피재→대박등(930.8m)→철탑(118번)→예낭골임도(서미촌재:채석장)→약900m봉→철탑(119번)→유령산(932.4m)→느릅령(유령산령당)→우보산(약900m)(밀양박씨묘지)→갈미봉분기점(좌회하여급비탈)→통리역(720m)
☞위치 : 강원도 태백시,삼척시, 경북 봉화군 석포면등 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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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피재>
<백두대간 피재(삼수령)
06시 정각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분기점이고 한강과 오십 천을 가르는 삼수령(큰피재:해발 920m)을 출발한다. 질주하는 차량들을 피해 로견에 바짝 붙어 300m정도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왼쪽에 임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차단기가 보이는데 이곳을 작은피재라 부른다.
작은피재는 오십천과 낙동강을 가르는 분기점이고 정맥은 여기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돌려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차단기안으로 들어가 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우측에는 수자원공사 시설물이 내려다보이고 좌측의 낮으막한 봉우리인 구봉산(九峰山)은 허리를 돌아 나간다. 뒤를 돌아보면 고랭지 채소밭인 매봉산일대가 한편의 풍경화 처럼 정겹게 시야에 다가오고 그 아래 분기되어 내림질로 이어지는 정맥의 능선이 뚜렷히 한눈에 들어온다.
<대박등오르기전 뒤돌아본 피재>
<대박등 오르기전 뒤돌아본 백두대간 매봉산>
<당겨본 매봉산>
<낙동정맥 구봉산>
<대박등 가는길>
<대박등 가는길>
10여분 후 임도를 따라가면 좌측에 대박등이 올려다 보이는데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붙어 산길로 오른다.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초입에서 잡목들이 나타나 위아래에서 완강히 버티며 진입을 방해하고 기세를 꺾고 있다. 빼곡한 잡목과 산죽이 어우러진 빡센 급경사를 고도 약 100m정도 힘겹게 치고 오른다.
06시 32분 삼각점이 있는 대박등(930.8m)에 올라선다. 시원스럽게 조망이 터지며 북쪽으로 매봉산천의봉의 시설물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대박등 정상부>
<대박등 삼각점>
그 우측으로는 피재를 향하여 뻗어 내려가는 대간의 연릉이 역동적이고 그 앞으로는 낮은 구릉을 따라 왼쪽으로 내려가며 이어지는 예수원목장의 목초지가 넓게 펼쳐져 보인다. 다시 잡목을 치고 내림질하면 곧바로 방화선이 기다리고 있고 잠시 방화선을 따라 진행한다.
<대박등 지나서 계속 이어지는 방화선>
06시 47분 118번 철탑을 지나 계속 방화선을 따라가다 진행한다. 잠시 후 두 번째 철탑 도착 전 20-30m전에 방화선을 버리고 정맥은 좌측으로 돌려 이어지는데 이지점이 예낭골과 할미골로 갈라지는 자작목 고개인 것 같다. 왼쪽으로 돌려 조금 내리 서면 묘지가 나오고 직진하여 잡목을 헤치고 나가면 안동권씨묘지를 만난다
07시 17분 안동권씨 묘지를 지나 다시 잡목을 헤치고 내려와 서미촌재라고도 부르는 예낭골임도에 선다. 좌측에 있는 쥐치리 마을명을 인용하여 이 고개를 ‘쥐치’ 또는 ‘서미촌재’라고도 부른다.
<서미촌재(예낭골임도)>
고개마루는 넓은 채석장으로 되어 있었고 주변에 굴삭기 등 채석작업을 위한 대형장비가 여러대 보인다. 양쪽으로 차량들이 넘나드는 비포장도로가 아주 잘나있고 우측에는 예낭골로 오르는 포장도로가 뚜렷이 내려다보인다.
07시 30분 가로질러 나가면 다시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약 900봉에서 좌측으로 돌려 잡목을 따라 2개의 연이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진행한다.
07시 47분 922봉에 올라선다. 사방이 시원스럽게 터지며 오른쪽으로 멀리 태백산과 시설물이 있는 함백산이 아스라히 시야에 들어오고 왼쪽으로는 도계읍일대가 내려다보인다. 다시 5분 후 119번 철탑을 지나 또 하나의 무명봉을 넘어 진행한다.
08시 01분 유령산(932.4m)에 올라 잠시 걸음을 쉬고 주변을 조망해본다. 이제 매봉산은 차츰 더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남쪽으로 활짝 핀 연꽃 같은 연화산(蓮花山:1171.2m)이 정겹게 가까이 다가온다.
<유령산 정상부>
그리고 지척에는 느릅령을지나 우뚝 솟은 우보산이 잔뜩 겁을 주며 기세를 꺾고 있다. 다시 10여분정도 가파른 길을 내려오면 임도를 만나고 가로질러 2분 정도 더 내려오면 느릅령에 닿는다.
08시 16분 황지와 도계를 연결한 고개로 좌측은 비포장도로이고 우측은 시멘트 포장도로인 느릅령(약 800m)에 내리선다. 색동저고리를 입혀놓은 것처럼 산뜻하게 페인트칠한 유령산령당(楡嶺山靈堂)이 고개마루를 지키며 지나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그 왼쪽에는 흑돌에 음각한 유령제유래문 표석이 있다.
<느릅령>
★유령제유래문(楡嶺祭遺來文)
이곳 느릅령은 신라때 임금이 태백산 천제를 올리기 위해 소를 몰고 넘던 고개이며 조선시대에는 태백산을 향해 망제를 올리던 곳으로 우보산(牛甫山)이라고도 했다. 먼 옛날 차도와 철도가 나기 전 이 고개길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 험하고 높기에 맹호의 피해가 심하여 고개 밑에서 10명씩 모여서 넘곤 했다. 그 후 주민들이 산당을 짓고 영로(嶺路)의 무사 안행과 주민의 평안과 풍년농사를 기원하게 된 것이 천년이 넘는다. 중간에는 관청에서 보조봉제하다가 임진왜란등 난세에는 중단하므로 산당이 무너지는 등 피해가 극심하던 때 황지에 살고 있던 효자가 소달장(所達場)에 부친제사 장보러 갔다가 그날따라 늦어서 모군(募群)에 합류하지 못하고 혼자 산을 넘다가 호랑이인 산령에게 홀려서 죽게 될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 제사봉행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산령왈 효성이 지극하니 나의 청을 들어주면 살려주겠노라고 하여 청왈 황소를 잡아 여기에 제사를 올려주면 무사하리라 하기에 약속하고 귀가하여 부친 제사 후 황우를 제물로 음 4월 16일에 제사를 올리게 된 후부터는 태백과 삼척 주민들이 산당을 복원하고 매년 이날 황우를 제물로 무사태평과 소망을 기원 봉제사하게 된 것도 우금(于今) 수백년이다.
= 단기 4330. 음 4.16 유령제 봉사회 근수(謹竪) =
느릅령의 산령당을 뒤로 하고 다시 서서히 가파른 오름길을 따라 고도를 높인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한 한차례의 된비알을 끝내면 ‘가선대부 밀양박씨묘지’가 올라오느라고 수고했다며 반겨준다.
08시 28분 소가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우보산(약 900봉)에 올라선다. 묘지 외에 전혀 특징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로 되어있고 다시 5분 정도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보산의 석불상>
<내려다 본 도계읍 일대>
<내려다본 도계읍 일대>
08시 33분 직진하면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에서 정맥은 직진로를 버리고 갑자기 좌측으로 90도 팍 꺾어 내림 질로 이어진다. 무거운 침묵을 느끼며 호젓한 숲길을 따라 한동안 내려오면 열차 지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기 시작하는데 통리역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잠시 후 조망이 트이며 웅장한 자태의 백병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곧이어 빨간 지붕의 통리역이 눈앞에 나타난다.
<통리로 내려오는길>
▲ 백병산(白屛山 : 1,259.3m)
강원도 태백시 통동, 백산동등 태백 동쪽 경계에 있는 백병산(1259.3m)은 함백, 은대, 금대,대덕, 덕항, 깃대, 구봉, 백병,면산의 두리봉, 삼봉, 연화봉,문수봉, 부소봉, 태백산 천제단 까지 원을 그리는 태백시계의 연봉 중에 있으며, 백두대간 작은피재에서 시작해 다 대포에 이르는 낙동정맥 가운데 최고봉이다. 고스락 서쪽으로 갈래친 지릉에병풍을 펼친 듯한 암봉(병풍바우)이 있는데 갈수기(가뭄)에는 흰빛으로 보인다 하여 백산(白山) 또는 백병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명유래-
■ 통리(桶里)
마을의 사방에 산이 높고 그 가운데로 길게 골짜기가 형성되어 흡사 구이[구유]처럼 생긴 곳이라 하여 '통(桶)', 마을 '이(里)'라 하여 통리(桶里)라 부르게 된 동네이다.
. 일설에는 옛날 이곳에 속이 빈[구새먹은] 통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통나무 '통', 마을 '이'라 하여 통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 때는 통의(通義) 또는 통리(通里)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의 동쪽에 있는 통골을 넘어가면 삼척시 원덕면 쪽 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해서 통할 '通'자를 써서 통리 또는 통의(通義)라 불렀다.
. 또 다른 이야기로는 우보산 (牛甫山 一名 楡嶺山) 동쪽에 와우형국(臥牛形局)의 명당이 있는데 원심(源深) 부근이 소의 여물통처럼 생겨서 와 우형국에 부합되므로 구유 '桶', 마을 '里'하여 통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요물골[龍井谷], 요정(堯井), 용정(龍井) 등으로 불리운 때도 있으니 그것은 요물골에 있는 용정에서 기인된 이름이다.
. 그 용정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용우물에서 용물로 다시 요물로 부르게 된 것이며 한자로 표기하니 '용정' 이고 소리 나는대로 적으니 '요정'인 것이다. 용정은 이중군(李中軍)의 전설이 있는 곳으로 그 집의 업구렁이(龍) 가 그 우물로 들어갔기에 용정이라 하였으며, 옛날엔 요물골에 사람이 많이 살았고 원심엔 사람이 살지 않았다.
. 1759년 경에는 마을 전체를 요정리(堯井里)로 불렀으며, 1842년 경에는 요물리(料物里)라 부르다가 1916년 경에는 양지, 음지, 용정, 웃통골[上桶谷], 원심[源深] 등 5개 자연촌락을 합쳐 통리(桶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태백시로 개청되면서 백산과 통리를 합쳐 연화산 동쪽에 있다고 연화동(蓮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연화동은 행정동이며, 법정동으로는 백산동과 통동이 있다.
-자료인용-
<통리일대 및 정맥북쪽 백병산 방면>
<통리일대 및 정맥북쪽 백병산 방면>
<통리역 도착전>
08시 50분 비탈길을 내려와 통리역(720m)에 내리 선다. 정맥의 마루금을 확인하기 위해 시골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통리역사에 잠시 들어가 본다. 좁은 대합실엔 열차를 기다리는 객들이 앉아 한쪽에서는 TV도 보며 서로 마주 앉아 담소하고 있는 모습이 한층 더 정겹게 보인다.
<통리역사>
첫댓글 2명 참석. 1명 범내골, 1명 대동IC
환영합니다 ! 쭉 ~몰운대까지 함께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