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 정영방 (鄭榮邦, 1577~1650) 선생은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다. 조부는 진사(進士) 원충(元忠)이며, 생부는 식(湜), 양부는 조(澡)이다.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고향 예천에서 후진들을 가르칠 때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으며 1605년(선조 38년)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進士) 3등(三等) 64위로 급제하였다.
정영방은 1605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나라가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후에 넷째아들인 제(悌)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경학과 당시(唐詩)에 조예가 깊었다. 스승이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관직에 나갈 것을 여러 번 권하였으나 당시의 혼란한 정치를 싫어해 벼슬하지 않고 진보(眞寶)에 내려와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1609년(광해군 1년)에 그가 건축한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석문종택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2호로 지정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 영양군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축조한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가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어 전한다. 편서(編書)로 《석문집(石門集)》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