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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4. 3. 20.(수) - 음력(2. 11.), 일출 06:38~일몰 18:46
●산행지: 백룡지맥 1구간 졸업
●산행코스: 서광목장분기점-238m봉-영운재/819번도로-235.4m봉-독갓재-260.9m봉-형제봉(288.4m)-359.4m봉-쇠재-백룡산(白龍山, 420.8m)-363.6m봉-옹골재-가막재-131.8m봉-산장산고개-비석거리고개-떨국재-마산(馬山, 159.2m)-이천2구 복지회관-구장터삼거리-호산(虎山, 155.6m)-천제산(天祭山, 58.3m)-옥봉마을정류장-갈마재고개-종길재-태산봉(84.2m)-송정마을/구산오거리-61.3m봉-여시머리 끝봉-영암천/영산강 합수점
●먹거리: 생수500cc, 튀김건빵, 맛동산, 빵, 쿨피스, 사탕6
●준비물: 고아텍스, 바람막이, 상의, 장갑, 스틱, 헤드랜턴, 전지가위, 말방울, 충전지2, 충전짹, 휴지, 물티슈, 손수건2, 안대, 귀마개, 띠지10
●거리: 약 40.2Km
●소요시간: 11.23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32,700, 저녁9,000, 찜질방18,500, 편의점3,900, 뒤풀이94,000 직행5,200, 고속33,800, 편의점5,200
●날씨: 2~9
●산행경과:
- 05:43 : 출발/ 백룡지맥분기봉(418m)
- 06:10 : 304m봉/ 삼읍면봉(금정면, 영암읍 → 덕진면)
- 06:27 : 238m봉
- 06:36 : 영운재/ 여운치(150m)
- 06:40 : 235m봉
- 07:45 : 형제봉(288.4m)
- 07:55 : 오봉산(320.5m)
- 07:15 : 형제봉(359.4m)
- 07:30 : 쇠재
- 07:47~08:04 : 백룡산(420.8m)/ 삼면봉(금정면, 덕진면 → 신북면)
- 08:22 : 가막산갈림봉(295m)
- 08:58 : 121.4m봉
- 09:27 : 비석거리재
- 09:33 : 딸국재(75m)
- 09:43 : 마산(159.2m)
- 09:59 : 이천2구복지회관/ 천동길
- 10:13 : 62.3m봉
- 10:19 : 구장터삼거리/ 부선장
- 10:54~11:03 : 호산(155.6m)/ 시군면계(영암군 신북면 - 나주시 반남면)
- 11:42 : 천제산(58.3m)
- 11:52 : 송암고개/ 옥봉마을/ 솔잎식당
- 12:13 : 길마재고개
- 12:19 : 유호정길삼거리/ 면계(신북면 - 도포면)
- 12:30 : 산소버스정류장
- 12:40 : 류진농장/ 삼거리
- 12:46 : 삼면경계면(도포면, 신북면 → 시종면)
- 13:05 : 정언농장
- 13:12 : 종절재/ 태간로
- 13:25 : 송간버스정류장
- 13:46 : 태산봉(84.2m)
- 13:58 : 68.3m봉
- 14:06 : 송산길/ 송산마을
- 14: 35~40 : 육거리/ 봉소리
- 14:47 : 구산오거리
- 15:00 : 61.3m봉
- 15:38 : 구봉교회/ 봉소로
- 15:55 : 여시머리(12.7m)
- 16:59~17:04 : 합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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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룡지맥(白龍枝脈)이란..
백룡지맥은 땅끝기맥 활성산(498m) 북쪽 1.3km 지점의 418m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한다. 형제봉(288.4m)을 지나 5.4km 떨어진 백룡산(420.8m)에서 산줄기는 다시 서북쪽 두 갈래로 갈라진다. 서쪽으로 이어진 백룡지맥(白龍枝脈)은 마산(159.2m), 13번국도, 호산(155.9m), 천제산(58.3m), 태산봉(84.2m)을 지나 영암천의 좌측(북측) 분수령이 되어 영암천과 영산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1km인 산줄기이고, 북쪽으로 이어진 옥룡지맥(玉龍枝脈)은 조리봉(227.7m), 오봉산(162.3m), 태산(85.4m), 두류산(106m), 고문산(103.5m), 옥룡산(132.9m)을 지나며 삼포천의 좌측(북측) 분수령이 되어 영산강 몽탄나루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2km인 산줄기이다. 신 산경표에서는 땅끝지맥 지맥분기점~백룡산~태봉산으로 이어진 도상거리 31km인 산줄기를 백룡지맥(白龍枝脈)이라 하고, 백룡산에서 북쪽 오봉산~두류산~옥룡산으로 이어진 도상거리 42km인 산줄기를 옥룡지맥(玉龍枝脈)이라고 명명했다. 옥룡지맥의 끝을 옥룡산 아래 몽탄마을로 보는데는 별 이견이 없는듯 싶으나 백룡지맥의 끝은 현재의 구산리 여시머리 남쪽 들판은 매립지라 예전엔 강이었을 터이니 현재의 지형이 아닌 옛 지형으로 따져 태봉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신학리 학림마을 앞 딴섬쪽으로 가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 백룡지맥 개념도
* 백룡지맥을 지나는 동네
* 영암군(금정면, 영암읍, 덕진면, 신북면, 도포면, 시종면)
영암군은 동쪽은 장흥군, 서쪽은 영산강을 건너 무안군, 남쪽은 해남군·강진군, 북쪽은 나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쪽은 호남정맥의 줄기가 이어져 내려 산지를 이루고, 서쪽은 하천 하구에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서 월나군과 아로곡현(阿老谷縣)·고미현(古彌縣)이 있었다. 일본에 유학을 전수해 준 왕인(王仁)의 탄생지가 있으며, 유적도 전하고 있다. 신라의 통일 이후 경덕왕 때 영암군으로 개칭했고, 월출산은 신라의 소사(小祀)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최지몽(崔知夢)과 도선 등의 활동으로 고려초에 영암의 지위는 급속히 상승되어, 995년(성종 14)에 낭주로 승격되었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안남도호부가 전주로 옮겨감으로써 다시 영암군으로 복칭되었다. 이 무렵의 영암은 남부의 황원군·도강군·곤미현·해남현·죽산현 등을 영속하는 호남 서남부의 행정중심지로서 존재하였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의 파견이 시작되는 것을 계기로 이들 군현이 독립해 대체로 현재의 지역에 상응하는 구역으로 축소되었다. 남동부에 월출산(月出山)이 천황봉(天皇峰, 809m)을 최고봉으로 구정봉(九井峰, 743m)·사자봉(獅子峰) 등의 많은 봉우리를 만들고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주위 일대에 백룡산(白龍山, 420.8m)·국사봉(國師峰, 613m)·흑석산(黑石山, 650m)·주지봉(朱芝峰, 491m)·도갑산(道岬山, 376m) 등이 솟아 있다. 월출산에는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동석(움직이는 돌)이 세 개가 있다고 전해 오는데 그 하나는 운무봉(雲霧奉)에 나머지는 도갑과 용암 아래에 있었다 한다. 월출산에는 세개의 신령스러운 움직이는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는 천명을 동원해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단 한 사람이 흔들어도 곧 떨어질 것같이 흔들거렸다. 높이는 1m 정도이고 둘레는 열 아름 쯤 되는 큰 바위인데 서쪽은 돌뼈(石骨)뿐인 산머리에 있고 동쪽은 끝없는 절벽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동석은 그 무게로 보아 수 백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열 사람이 흔들어 보거나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이 세개의 동석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해서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이 바위 세개를 모두 떨어뜨렸는데, 그 중 하나가 다시 옛 자리에 올라와 있어 이 바위를 신령(神鈴)한 바위라고 전하고 있다. 이 동석 전설로 인해 영암(靈巖: 신령한 바위)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월출산의 줄기 사이로 밤재(栗峙)·감재·도갑재(道岬峙) 등이 있어 장흥·강진·해남 등지와 연결된다. 군의 북서부로 영산강이 굽이치고, 삼포강(三浦江)·영암천(靈巖川)·도갑천(道岬川)·송계천(松溪川) 등의 작은 하천들이 북서부로 좁은 평야들을 이루어 농경지가 전개되고 저수지도 많다. 1973년 7월 1일 군서면 송평리가 영암면으로, 금정면 용산리가 신북면으로 편입되고, 1979년 5월 1일 영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2003년에 삼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나주시(羅州市)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시로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금성산(錦城山, 450m)·신걸산(信傑山, 368m) 등이 있다.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이다.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주평야는 전남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평야와 화순평야 등의 주요 미곡산지를 관개한다. 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하는데, 이 지석강의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 수해지역이 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해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백제 시대에는 발라군(發羅郡)·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 협력하여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에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하면서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96년 2월 10일 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되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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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서광목장-1.8km-영운재-2.3km-형제봉-1.3km-백룡산-5.2km-마산-1.8km-13국도-1.2km-호산-1.4km-천제산-8.7km-태산봉-7.3km-영암천/영산강합수점
* 구간거리
- 접속 : 영암 서광목장 ~ 지맥분기점 0.3km
- 땅끝기맥 백룡지맥분기점(418m) ~ 구장터삼거리/ 13번국도 15.4km
-. 땅끝기맥 백룡지맥분기점(418m) ~ 백룡산(420.8m) 옥룡지맥분기점 5.4km
- 구장터삼거리/ 13번국도 ~ 영암천/영산강합수점 17km
-. 영암천/영산강합수점 ~ 영암 신학리 버스정류장 1.4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영운재/ 여운재: 약수터, 쉼터
- 13번국도: 이마트무인편의점(카드가 있어야 출입 가능함)
- 옥봉마을: 솔잎식당(061)473-9683/ 영암군 신북면 행정리, 진미식당
- 영암군 신북면 택시: 010-3620-6973, 061)472-9100, 5454, 3232
- 영암군 시종면 개인택시: 061)472-8215, 1110, 080-471-8282
- 나주 중흥오투스파 찜질방: 전화 061)335-0200, 15,000원(연중 무휴 24시간 영업, 광주, 나주 등지에서 999, 999-1번 이용 일단 남평정류장으로 와서 702번으로 환승, 30분 소요), 광주송정역 좌석 02번, 호수공원 하차
- 영암군 시종면: 그랜드모텔
* 서울에서 백룡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서울 센트럴시티 ~ 영암: 09:20, 15:05, 4.10h, 38,600~47,800원
- 센트럴시티터미널 ~ 광주유스퀘어: 05:30, 05:40, 06:15, 07, 07:10, 07:20, 07:30, 07:55, 08, 08:05, 08:10, 08:15,08:20, 08:25, 08:28,~ 22, 22:10, 22:20, 23, 23:20, 23:40, 23:50, 00:45, 01, 3.20h, 20,800~33,800원
- 광주 유스퀘어 ~ 영암: 05:50, 06:30, 07:10, 07:55, 09:05, ~18:20, 19:30, 20:30, 1.10h, 8,700원
- 영암 ~ 금정방면 군내버스: 06:20, 07:40, 09:00~
-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 891-2 활성산 풍력발전단지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강변 비포장임도에서 백룡지맥 산행종료
- 영암천/영산강합수점~학림길~신학1로~신학1로영산로사거리 영암 신학리 버스정류장
- 영암군 시종면 개인택시: 061)472-8215, 1110, 080-471-8282
- 시종면터미널(영암행 농촌버스) ~ 신북터미널(해남발 광주행) ~ 광주유스퀘어
- 영암 ~ 센트럴시티: 10:35, 16:05, 4.40h, 38,600~47,800원
- 영암 ~ 광주유스퀘어: 07:02,~19:43, 20:10, 21:02,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동서울: 12:40, 13:20, 14, 14:50, 17, 19:10, 19:50, 21:20, 3.30h, 22,500~33,3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센트럴: 19:45, 20, 20:10, 20:20, 21, 21:15, 22:30, 23:20, 24, 3.20h, 30,800~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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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룡지맥은 가시잡목이 그닥 심하지 않아 보통 원샷으로 10시간 내외로 진행한다. 백룡의 주빈 또한 옥룡처럼 월출산과 태조 왕건이다. 지맥을 운행하며 심심찮게 월출산을 확인할 수 있다. 마산(馬山, 159.2m), 호산(虎山, 155.6m) 이후로 도로를 많이 따르고 태봉산(太峰山, 84.2m)/태산봉에서 구산 여시머리와 학림 딴섬, 합수점으로 가는 두가닥 길이 갈린다. 옛날 수많은 황포돛대가 오가고 각종 수산물이 풍부했던 덕진포구는 이제 개천으로 변했고, 잘 포장된 국도가 뚫려 예전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으나 덕진포구로 향하는 영암천은 덕진포 해전(德津浦 海戰)의 현장이다. 통일신라 말 장보고 암살로 청해진이 붕괴되고 그 해상인들이 개성으로 이주했다. 개성의 토호세력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예성강에서 수십 척의 배로 상단(商團)을 꾸려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왕륭은 송악에 궁궐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왕건에게 아래쪽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견훤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궁예는 해제 임수리와 고이도 신안과 진도를 차례로 점령하고, 무안 군유산에서 내륙의 발판으로 영산강을 거슬르고 함평을 통해 나주로 진격했다. 호산은 그날의 월평리전투를 기억할 것이다. 백룡지맥은 마산에서 부선장터로 내려서고 호산을 넘어 천제산과 삼봉산을 지나며 반남의 자미산을 옆으로 스치고, 마한의 고대왕국 태봉산을 둘러본 뒤 영산강 뚝방길을 거닐어 영암천 합수점에 다다르면 그날에 불던 천년의 바람이 온몸으로 지맥꾼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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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밖에님이 출발지에 저를 내려주고 가시고, 분기점을 확인하고 출발할려는 찰나 갑자기 밝은 불빛 하나가 나타납니다. j3클럽 수도권지부 송림대장님이 혼자 나타나셨어요. 백룡을 거꾸로 하고 여기서 다시 옥룡을 출발하실 참이였답니다. 어둠속에서 만난 지맥꾼의 불빛 그것도 아는 분을 이 시각에 백룡의 출발지에 우연히 만나다니...
♤ 백룡지맥분기봉(418m)/ 서광목장/ 읍면계/ 삼리봉(영암읍 장암리, 금정면 연소리 → 연보리)
땅끝기맥 활성산 아래 옛날 서광목장이 있던 영암풍력발전단지에서 서북쪽으로 분기한 백룡지맥을 시작한다. 4번 풍력발전기를 지나 1분 정도 진행하면 영암군 금정면과 영암읍의 경계인 분기봉에 도착하고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백룡지맥분기점 산패가 매어 있다.
♤ 활성산(498m)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와 영암읍 농덕리 및 한대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명 유래를 보면 정상에 있던 활성산성에서 유래하였다. 임진왜란 때 궁성산과 함께 활 쏘는 훈련장으로 쓰였다고 전하며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활성산 정상에 서면 월출산과 함께 영암 읍내를 조망할 수 있으며 남궁성산이라는 별명이 있다. 활성산 좌우는 나주에서 강진과 장흥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여서 이를 통제하는 목적으로 추정된다. 서쪽으로는 영암읍내와 나주평야가 질펀하고 월출산이 가까이 마주 보인다. 활성산은 무등산에서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월출산으로 뻗어가는 땅끝기맥에 위치하고 활성산 동쪽의 영암읍 한대리와 금정면 연소리 골짜기는 탐진강 수계의 유치천이며 서쪽의 영암읍 농덕리와 장암리 계곡은 영산강 수계의 영암천이다. 한편 활성산의 세갈래 능선은 북동쪽은 국사봉을 거쳐 궁성산으로, 북서쪽은 백룡산으로, 남쪽은 월출산으로 이어진다. 활성산은 영암읍 동쪽 울타리로 금정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월출산이 화강암이 드러나 거칠다면 활성산은 정반대로 바위가 드러나지 않은 무덤덤한 흙산으로 산 정상은 평탄한 면이 넓게 펼쳐져 있어 산성의 입지로 적합하다.
♤ 강남재/ 영암풍력발전단지
영암풍력발전단지로 향하는 도로로 여운재에서 활성산으로 접어드는 고개이다. 아스팔트 포장이지만 노면이 거칠고 갈수록 경사가 심하다. 그나마 길이 넓은 것은 거대한 풍력발전기 자재 운반을 위해 확장한 덕이다. 한때 목장이 있던 산자락 전체에 광대한 태양광 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풍력발전기야 산 아래서도 보이지만 태양광 발전소는 정말 놀라운 규모다. 일대에 깔린 태양광 패널은 어림잡아 50만평은 될 것 같다.
♤ 금정배수지
처음에는 길이 흐려 그닥 좋지 않다. 마루금에 자리잡은 금정배수지로 내려선다.
꼭 확인할려고 했었는데 야간이라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동이 밝은 다음에 출발할거로 예상하고 랜턴도 허접한걸로 준비해 갔네요.
♤ 삼읍면봉(304m, 영암군 금정면, 영암읍 → 덕진면)/ 195번 송전탑
철탑에서 삼읍면봉에 올라 오른쪽으로 내려서며 월출산을 조망한다. 지맥의 왼쪽이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에서 덕진면 노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238m봉/ 4등삼각점(영암 469/ )/ 면리계/ 금정면 연보리 - 덕진면 노송리
맨발 대선배님 산패가 작은나무에 매어 있다. 십자 방향표시 기둥만 솟아있어 내용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조금 전에 지나온 분기점에 있는 4번풍력발전기가 올려다 보인다.
♤ 여운치(如雲峙, 150m)/ 영운재/ 819번지방도로/ 약수터, 쉼터, 간이매점/ 면계/ 삼리경계면(금정면 연보리, 덕진면 노송리 → 영보리)
영암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높은 산마루다. 워낙 산이 높아 구름도 쉬어간다는 여운재 남쪽으로는 둔덕치와 활성산, 북쪽으로는 형제봉과 호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금정면이 나주에 속해 있어 당시 여운재는 영암과 나주의 경계이자 두 지역의 소통로 역할을 했다. 여운재는 여운치(如雲峙)라고도 부르며 영원현(嶺院峴)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와 금정면 연보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해남을 잇는 삼남대로였고 영암과 나주의 경계부에서 두 지역의 교통로이자 소통로 역할을 해왔다.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인민군과 군인·경찰이 쏜 총에 쓰러지는 참상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2016년 9월 2일 터널이 개통되어 지금은 영암풍력발전단지로 출퇴근 하는 도로로 주로 이용된다. 여운재고개표석 뒤쪽으로 오르면 곧 등산로를 만나 길이 좋다. 235.4m봉을 향하며 바라보는 영암읍과 월출산 조망이 좋다.
♤ 235.4m봉
지나치는 능선봉으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가야할 백룡산이 바라다보인다.
♤ 독갓재/ 도가재
연보 저수지와 영보정을 잇는 고개로 이정표에는 도가재로 표기됐고 왼쪽에 묘지와 크다란 방구돌이 여기저기 놓여져 있다. [영보정 1.3km, 여운사 1.1km, 금정 동래가든 1.3km, 백룡산 2.5km]로 표시된 이정표는 잘 세워져 있고 지맥은 좌틀한다.
♤ 253m봉/ 면계/ 삼리봉(덕진면 영보리, 금정면 연보리 → 아천리)
지맥의 오른쪽이 금정면 연보리에서 아천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 260.9m봉
무명의 임도를 건너 260.9m봉에 오른다. 키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 형제봉(兄弟峰, 288.4m)
지나치는 능선봉으로 국가지점번호표지판이 있고 맨발 대선배님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오봉산은 따로 있는 산이 아니라 백룡산 일대에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를 합해 부르는 이름 같습니다.
♤ 오봉산(五峰山, 320.5m)/ 면계/ 삼리봉(금정면 아천리, 덕진면 영보리 → 운암리)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오룩스지도에는 형제봉 이정표가 있다. 오봉산으로 오르는 8부능선에서 지맥의 왼쪽이 덕진면 영보리에서 운암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지네가 독을 품는단 얘긴 들어봤어도 절지동물인 지네가 빨간 피를 흘린다는 얘기는 첨 들어보네요.
♤ 오봉산 벼락바위/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1994년 영암 문화원에서 발행한 『영암의 전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영암의 오봉산=백룡산(白龍山) 자락 아래에는 명동리(明洞里)라는 경관도 좋고 인심도 좋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오봉산에 사는 백 년 묵은 지네가 산에 나무하러 온 사람들을 물어 죽이면서부터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였고, 마을도 점차 흉흉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관아의 도움을 청하였으나 관병들도 지네를 두려워하여 누구도 지네를 잡으러 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관아에서는 오봉산 지네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는 방을 붙였다. 전국에서 힘깨나 쓰거나 칼, 창 등의 무기를 잘 쓰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아무도 지네를 잡지 못하였다. 지네가 무서운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뜨기 시작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버드나무 골 아래에다 제단을 쌓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하더니 큰 벼락이 오봉산에 떨어졌다. 잠시 후 핏물이 오봉산 골짜기로 흘러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가서 보니 지네가 피범벅이 되어 죽어 있고 지네가 살던 바위도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그 이후 마을은 다시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그때 지네가 벼락을 맞은 바위는 벼락 바위, 지네의 피가 흐르던 골짜기는 벼락 냇가로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 호재(315m)/ 면리계/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 덕진면 운암리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왼쪽은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이고 오른쪽은 덕진면 운암리이다. 지도상 호재이나 고갯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갈림길이다.
♤ 형제봉(兄弟峰, 359.4m)
맨발 대선배님 산패가 나무에 높이 매달려 있다. 영진 5만지도에는 여기가 형제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쇠재(305m)/ 면리계/ 덕진면 운암리 - 금정면 아천리
장의자가 여러 개 놓여져 있는 널찍한 안부 사거리이다.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옥룡지맥을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밀양박씨지천비가 있으며 반바지님 코팅지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백룡과 옥룡지맥은 한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게, 옥룡을 길게 잡는다면 백룡은 거리상 지맥이 되지 못합니다.
♤ 백룡산(白龍山, 420.8m)/ 2등삼각점(영암 23/ 1990 재설)/ 옥룡지맥분기점/ 삼면봉(금정면, 덕진면 → 신북면)
사각정자 옆에 산불감시카메라가 있다.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옥룡지맥분기점 산패가 매어 있다. 백룡과 옥룡지맥을 통틀어 제일 높은 봉우리이고, 백룡은 왼쪽으로 덕진면 운암리와 신북면 명동리의 경계를 향하고 옥룡은 직진으로 금정면 아천리와 신북면 명동리의 경계를 따른다. 조선시대에 나주목(羅州牧) 금마면 터였던 지금의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백운 마을 아래에 용지(龍池)가 있다. 백룡산이라는 이름은 이 산 정상에 흰 구름이 자욱하게 일고, 뇌성벽력이 치면서 용지에 살던 백룡(白龍)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백룡산은 활성산에서 형제봉을 거쳐 오르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영산강과 영암천 북쪽으로 등성이를 내밀고 있고, 동쪽의 금정면 아천리 골짜기는 영산강 수계의 금천(錦川)이다. 남동쪽의 덕진면 운암리 산기슭은 영산강 수계의 영암천이고, 북서쪽의 신북면 명동리 계곡은 영산강 수계의 삼포강의 발원지이다. 북쪽 두 갈래 능선은 북서쪽의 호산을 거쳐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과 영암군 시종면 태산봉에, 북쪽의 나주시 세지면 태산을 거쳐 영산포 가야산과 서쪽의 무안군 동강면 백련산과 옥룡산에 이른다. 영진 5만지도에는 418.3m로 표기되어 있고 오룩스맵에는 420.8m로 되어 있다.
♤ 월출산(月出山, 810.7m)
월출산은 전남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호남정맥 무등산 줄기에 속하고 해발 810.7미터로 높지는 않지만 산의 몸체가 매우 크고 수려하며 1973년 3월 남서쪽으로 3.5Km 떨어진 도갑산(376m) 지역을 합하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6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 하여 월라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러왔다. 천황봉(天皇峯)을 주봉으로 구정봉, 사자봉, 도갑봉, 주지봉 등이 동에서 서로 하나의 작은 산맥을 형성하는데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많아 예로부터 영산이라 불러왔다. 동쪽으로 장흥, 서쪽으로 해남, 남쪽으로는 강진만을 가로막고 있는 완도를 비롯한 다도해를 바라보고 있고 도갑사, 무위사 등의 사찰과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144) 등을 비롯해 뾰족한 암봉과 골짜기를 따라 폭포와 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며 곳곳에 얽힌 수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말기에는 9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북쪽의 용추폭포, 동쪽의 구절폭포, 남쪽의 금릉경포대 등이 절경을 이루고 1978년에 천황봉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 길이 51미터와 너비 0.6미터의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절벽 높이가 무려 120미터나 된다. 예로부터 월출산 산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외감을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암에 관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라는 뜻의 동석 3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이 바위들을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영암인데 이 동석 때문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고을 이름도 영암(靈巖)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384.4m봉/ 헬기장
백룡산 아래 봉우리로, 옥룡지맥의 분기점인 백룡산으로 두 곳의 접속로가 있는데 그 중에 신북면 명동리 백룡노인정에서 백룡산을 오르는 접속로상의 마루금이다.
♤ 가막재(335m)
국가지점번호와 이정표와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와 덕진면 운암리를 이어주는 임도가 지나는 안부인데 가막재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다. 산악오토바이로 등산로가 패여 있다. 임도로 내려선다. 2008년에 백룡산과 활성산 코스에서 제2회 전남 지사배 전국 산악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이때부터 잘 못 되었다 등산로에 산악오토바이가 나타날 줄이야~
♤ 363.6m봉
지나치는 능선봉이다. 산벚나무에 맨발 대선배님 산패가 높이 매어 있다. 상수도 보호구역 표지판이 있는 임도로 내려선다.
♤ 옹골재
안부도 아닌 곳에 이정표에 옹골재 표시가 있다. 옹골재란 이름의 자료도 찾기 어렵다.
♤ 가막산갈림삼거리(295m)/ 면계/ 삼리봉(신북면 명동리, 덕진면 운암리 → 신북면 장산리)
반바지님 가막산갈림삼거리 코팅지가 소나무에 매어 있고 가막재 이정표가 서 있다. 여기는 재가 아니라 1.5km 거리에 북쪽 가막산(加幕山, 165.9m)으로 가는 능선이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백룡산은 신북면·금정면·덕진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가막산·형제봉 등을 거느리고 있는 백룡산의 남쪽 계곡은 영암천의 많은 지류들이 흐르고 있어, 취락이 발달하고 있다.
백룡산에서 면계를 따르던 지맥이 경계를 벗어나 완전하게 신북면 장산리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 면리계/ 영암군 덕진면 백계리 → 신북면 장산리
가막산갈림삼거리를 내려서면서 지맥의 오른쪽이 신북면 명동리에서 장산리로 바뀌고 곧이어 지맥이 왼쪽이 덕진면 운암리에서 백계리로 바뀐다. 이제껏 따라온 넓고 뚜렷한 등로는 왼쪽으로 보내고 오른쪽 잡목능선으로 진입한다. 임도가 지나는 장산리 안부에 도착하여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면 약 208.4m봉에서 덕진면 백계리와 신북면 장산리의 경계를 떠나 지맥이 완전하게 신북면 장산리 내안으로 들어선다.
♤ 용산저수지(龍山貯水池)/ 장산저수지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에 있는 저수지로 장산리에 있는 용계동(龍鷄洞) 마을과 산장산(山長山) 마을에서 딴 것이다. 용계동 마을은 용산 저수지 남동쪽, 무네미 동남쪽으로 백룡산 밑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산장산 마을은 용산 저수지 남서쪽에 있다. 1996년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용산저수지의 수계는 영산강 삼포천이며 수혜 지역은 신북면 용산리 일원이다. 신북면 명동리 백룡산(420.8m) 북쪽의 조리봉 서측으로 타고 내린 물이 용산저수지를 거쳐서, 서촌과 용계동 사이를 지나 금박골을 거쳐 모산리 앞들에 이른다.
♤ 121.4m봉
소나무와 넝쿨 잡목봉이 어우러진 봉으로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묵은 임도를 따라 내려선다.
♤ 산장산길/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산장산(山長山) 마을
본래 영암군 북이종면 지역으로 영암문화원에서 발행한 ‘영암의 땅이름’ 책자에 따르면 마을 부군에 세명당이 있어 훌륭한 세 장군이 날 지역이라는 풍수지리설로 지명이 삼장산(三將山)이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긴 산에 둘려 쌓여 있다고 하여 산장산(山長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현리, 신동리, 대월촌, 가막산, 서당동, 기정리, 행군동, 주암리, 호암리를 병합하여 장산리(長山里)라 해서 신북면에 편입되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물이 맑고 깨끗하며 마을 중심부에 우물이 있는데 일제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 흉관에 ‘물이 좋다’라는 표시가 있어 옛날부터 물좋고 인심좋은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산장산 마을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을만큼 외진 곳에 위치한 탓에 늦게까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마을의 우물을 이용해 밥도 짓고 빨래도 하는 등 불편을 겪어왔다. 하지만 우물이 오염된 것으로 나오면서 최근 마을내에 상수도가 설치돼 수돗물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행군동, 행군저수지, 행군봉은 1,100여 년 전 태조 왕건 군사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지명입니다.
♤ 비석거리재(125m)
아래간은정 시장입구 비석거리로 통하는 재이다. 마루금을 차지한 칡넝쿨과 가시잡목을 요령껏 피하여 계속 따르던 농로는 잘 가꾸어진 시중달성배공묘까지 연결된다. 시중(侍中)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정승급 벼슬로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나 장관급이라 한다. 다시 또 잡목지대와 칡넝쿨을 헤치며 진행하니 반바지님 비석거리재 코팅지가 오른쪽 참나무에 매어 있다. 왼쪽은 장산리 행군저수지이고 오른쪽은 명동리 행군봉이다.
♤ 131.8m봉
오름 길에 가야할 호산(虎山)이 멀리 조망된다. 호산이라니 호랑이의 모습인지 살펴보게 된다. 왼쪽 주암마을 지나 한동안 거친 등로를 진행하면 131.8m봉 도착한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벌목지대를 지나면 내려서는 길이 좋은 편이다.
♤ 딸꾹재(75m)/ 떨국재
반바지님 코팅지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임도로 보이지만 좌우로 길 흔적이 남아있는 안부이다. 왼쪽은 행군동 행군저수지 방향이고 오른쪽은 냉천저수지로 가는 고개이다.
신북면 장산리 내안을 지나온 지맥이 여기서 이천리로 넘어가고 호산(虎山, 155.6m)까지 신북면 이천리 내안을 진행하는군요.
♤ 떡고개/ 리계/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 이천리
딸국재 안부를 지나 황톳빛 절개지를 오르면 묘 위쪽으로 더위를 피하는 가막사가 서있으며 지맥은 장산리와 이천리의 경계를 만나고 백룡산에서 뻗어가는 옥룡지맥의 마루금이 살펴진다. 경계를 따라 마산을 오르다가 7부능선 갈림삼거리인 이른바 떡고개에서 왼쪽 임도로 향하며 경계를 떠나 이천리로 들어선다.
♤ 영암군 신북면 이천리(梨泉里)/ 천동길
영암군 신북면 이천리는 본래 영암군 북이종면 지역으로 동쪽은 신북면 용산리, 서쪽은 도포면 성산리, 남쪽은 신북면 장산리, 북쪽은 신북면 월평리와 경계하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병합 마을인 이목동(梨木洞)의 이(梨) 자와 천동(泉洞)의 천(泉) 자를 합하여 이천리라 했다. 이천리는 본래 영암군 북이종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의해 남계리, 이목동, 신덕동, 천동, 월평리 일부, 북일종면의 탑동, 호산리를 병합하여 이천리라 했다. 마을 동쪽으로 마산(159m)이, 서쪽으로 호산(156m)이 있다. 중앙에 낮은 구릉이 있고, 그 사이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에 제방제, 중앙에 미남제 등의 제방이 있다. 1975년 야산 개발 조성 단지로 지정되어 낮은 야산들을 개간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소규모로 대봉감 과수원과 콩, 팥, 고추 등의 밭작물을 재배하기도 한다. 이목동 마을을 이천 1리, 천동 마을을 이천 2리, 신덕동 마을을 이천 3리, 구장터 마을을 이천 4리, 연동 마을을 이천 5리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섯 개의 반이 있다. 이천리에 영암 전자 과학 고등학교가 있으며, 마을의 명산인 호산(虎山)에는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망월사 내에는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259호인 영암 망월사 석불 좌상이 있다. 마을 내에는 영암군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와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국도 13호선이 이천리 중앙을 남북으로 길게 관통하고 있다.
♤ 마산(馬山, 159.2m)
912년 3차 나주해전 때 태봉국 왕건수군이 주둔했던 마산이다. 지나치는 둔덕봉으로 잡목이 많고 조망은 없다. 가는 감태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하산길은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좌틀하여 과수원 철망을 따라 내려선다. 하지만 마루금과 가깝게 오른쪽 가시밭을 뚫고 묘지와 밭뚝길을 지나 이천리 천동마을 도로로 내려서기도 한다. 천동마을은 마산을 내려선 과수원부터 마을 전체에도 감나무가 많은 감 주산지이다. 태조 왕건은 912년 덕진포 해전(德津浦海戰) 승리의 기세를 몰아 병선을 덕진에서 서호, 목포에서 몽탄에 이르는 요충지에 배치하고, 자신은 모산앞 이목동에 있는 신북면 마산(왕건의 馬이 있던 곳)에 진지를 구축한다. 마산은 덕진포에서 20리(8km) 거리이며, 견훤이 흩어진 병사를 모아 은거하고 있던 반남면 자미산성으로부터 또한 20리 거리에 있다. 왕건과 견훤 군사는 마산과 자미산성 사이에 있는 신북면 월평리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덕진포에서 신북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마산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방죽이 나온다. 이곳은 군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으로 말물통이라 불린 이목동저수지(냉천지 만들기 전에 저수지 가은데 물통이 있었음)자리이고 수백년 세월동안 덕진다리를 건너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도 말에게 물을 먹이고 쉬어 갔다. 마산 아래 박굴이라는 곳은 이목동저수지 위 떨국재와 마산 아래 떡고개 부근이며 옛날 군사들이 훈련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명동리 행군봉(왕건 군대가 행군했던 산)을 지나서 신북면 이천리4구 부선장터(영암석재부근)에서 반남 자미산성에서 온 견훤과 전투를 하였고 왕건 군대 군수품 칼과 창을 갈았던 숫돌은 여석산에서 공급했다. 왕건이 주둔했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1㎞ 정도 가다보면 신북면 소재지가 나오고, 소재지 약간 지나 왼쪽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숫돌이 나온다하여 숫돌뫼 또는 여석산(礪石山, 60.9m)이라 부른다.
♤ 62.3m봉/ 영암읍 신북면 이천리/ 이천2구 복지회관/ 이천양지촌길
멀리 호산을 바라보며 농로를 진행하다 오른쪽으로 옥룡지맥 곰봉이 보이고, 2차선포장도로를 가로질러 왼쪽 천동마을 천동길을 따르다 오른쪽에 보이는 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인 들머리로 들어서서 이동통신 중계탑이 높이 솟아 있는 62.3m봉을 오르는데 정상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잡목봉이다. 입구에 있는 문화류공 묘지 뒤편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이동통신중계탑까지 임도를 따르다 정문에서 옆으로 오르는 방법이 있다. 13번 국도로 내려서면 잡목길이라 다시 되돌아 나오는 경우도 많다.
이천리 천동길을 지나 구장터삼거리로 나갑니다. 구장터에서 신북면소재지 월평리가 아주 가깝게 있네요.
♤ 13번국도(S-OIL주유소)/ 구장터삼거리/ 이마트무인편의점
천년 너머의 세월 이곳이 왕건과 견훤이 일전을 겨룬 전장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다. 이천리 자연마을 중에 하나인 구장터는 일제강점기 때 부선장이라는 시장이 섰었다 하여 부선장(夫先場)터 또는 구장터라 했으며 부소원(夫所院)이라는 원집이 있었다 하여 부소원(夫所院)이라고도 한다. 구장터 삼거리에 5.18 민중항쟁 사적지 표지가 있다. 13번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5.2km 거리에 옥룡지맥 신북논공단지 군계휴게소가 지나간다. 가마정마을 표지석이 보이는 곳에서 망월사로 직진하여 2분 정도 진행하면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수로 위를 지나는데 나주호 물을 농사에 끌어쓰기 위해 인공으로 판 농수로라고 한다. 공동묘지 뒤로 오른다. 이천3구 신덕동경로당을 지나는데 정자나무 옆에 들창문이 달린 정자가 예사롭지 않다. 호산을 바라보며 망월사 앞까지 약 0.8km 도로를 따른다. 가마정마을 표지석에서 우틀하여 마을로 들어서고 마루금을 따라 과수원을 가로질러 가기도 한다. 사유지 입구 과수원 위에서 길이 없는 호산을 오르는데 약 20분 소요된다.
♤ 여석산(礪石山, 60.9m)/ 숫돌산, 싯돌메, 쉿둘메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 있는 야산으로 왕건이 주둔했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1㎞ 정도 가다보면 신북면 소재지인 월평리가 나오고, 소재지 약간 지나 왼쪽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쟁패의 현장으로 왕건 군사들이 숫돌을 캐내 이곳에서 생산된 숫돌로 칼을 갈아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숫돌이 나온다하여 숫돌산 또는 싯돌메, 쉿돌메라 불렀으며, 한자 표기로 礪石山이라 부른다. 어찌나 많은 숫돌을 파냈던지 정상 부근에 있는 지소(池沼)는 돌을 파낸 자리에 물이 고여 생긴 것이라 하며, 실제 못 주변 바위 표면에 당시 군사들이 돌을 캐낸 흔적인 빗살무늬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여석산에는 왕건과 관련하여 ‘용궁샘’과 ‘용천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여석산을 중심으로 왕건과 견훤은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했다. 실제 왕건과 견훤이 장소를 바꿔가며 이른바 나주공방전으로 10여 년의 지루한 싸움을 주고받는다. 여석산은 국도 13호선 서편에 있으며, 삼포강 건너 남서쪽 1.7㎞에 호산이 있다. 백룡산(420.8m)에서 북쪽으로 뻗은 오봉산(162.3m)에서 북서쪽으로 내려선 모산 뒤 곰봉(137.2m)의 산등성이 맺음이다. 한편 5,000분의 1 지형도에서는 해발 고도 60.9m 바로 남쪽에 48m 지점이 정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 호산 망월사(望月寺)
오른쪽 가마정 마을로 들어서면 호산이 올려다 보인다. 망월사 입구에서 호산까지 잘 생긴 등산로가 좌우에 있으나 제일 못 생긴 가시잡목숲으로 약 20분을 가파르게 오르며 원 맥길을 따른다. 오른쪽이 사유지인지 울타리가 쳐져 있다. 지맥꾼에게는 숙명과 같은 것이고 백룡이 무료하지 않기위한 양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망월사 극락전 오른쪽으로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서면 편하다. 호산에는 1777년(정조 1) 창건한 망월사를 비롯해 미륵굴, 선덕암이 있다. 망월사에는 “월출산의 구정봉 아홉 용이 승천하려면 정북향 망월사 샘물을 마셔야 하나, 망월사를 지키는 호랑이 산신이 절 앞을 여러 겹 산으로 쌓아서 용의 접근을 막는 방패로 삼고 샘물의 입구 또한 동쪽으로 만들어 남쪽의 월출산의 용들이 물을 마시기 어렵게 해놓았다.”라는 전설이 있다.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이 샘은 호랑이 음부에 해당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한편 망월사 약사전에는 2002년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259호로 지정한 영암 망월사 석불 좌상이 있다. 2012년 호산에 대한 등산로 정비 사업이 이뤄졌다.
암봉 정상이 있는 호산은 이름 값을 하려는듯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칩니다. 정상에서 백룡지맥이 나주시 반남면과 만나 잠시 시군면리계를 진행합니다. 호산의 또 하나의 봉우리 154.6m봉이 반남면의 극남점이 됩니다.
♤ 호산(虎山, 155.6m)/ 범뫼, 버미/ 3등삼각점(영암 307/ 1999 재설)/ 산불초소, 쉼터/ 시군계/ 삼리봉(신북면 이천리, 월평리 → 나주시 반남면 석천리)
인공 수로를 따라가다 다리를 건너 밭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는데 오름길에 경사도와 잡목이 심하다. 영암군 신북면 이천리와 나주시 반남면 석천리의 경계에 있는 구릉지에서 솟구쳐 오른 산을 뜻하며, 호랑이 형국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 풍수에서는 ‘호산 호랑이가 쫓으니 영암 도포의 돼지머리가 되었다.’라고도 해석하는데, 산줄기의 뻗어가는 모양을 동물에 견주어 풀이한 것이다. 『1872년 지방 지도』 중 「영암군지도」에 읍치 북쪽 북일종면과 북이종면의 경계에 호산이 보인다. 또 『호남지도』[영암]와 『해동지도』에도 금성(錦城, 지금의 전남 나주시)과의 경계에 기록되어 있다. 범뫼(버미)란 별명을 지닌 호산 밑은 길목으로 부소원(夫所院)과 부선장(夫先場)이 있었다. 『대동여지도』에 부소원이 표기되어 있다. 호산은 남동쪽에 위치한 백룡산에서 국도 13호선을 건너서 우뚝 솟은 산이다. 호산의 모양새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된 북동쪽 최고봉과 망월사 위 남서쪽 조금 낮은 봉우리가 마주보는 쌍봉 형태이다. 한편 호산의 북동쪽 냉천골에서 신북면 소재지로 내린 물은 영산강 수계의 삼포강이며, 남쪽 골짜기는 영산강 영암천의 수계인 도포천의 발원지이다. 두 갈래 능선은 국도 13호선을 건너 남동쪽의 신북면 이천리의 천동 마을 마산(152.9m), 서쪽 구릉지를 타고 시종면의 태산봉(84.2m)으로 이어진다. 운동시설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호산은 고도는 낮지만 영암군 신북면, 도포면과 나주시 반남면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이 일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호산 정상에서도 주변 평야지대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 뒤 작은 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영암 평야지대 뒤로 월출산을 한번 바라보고 급우틀로 내려서면 154.6m 조망암봉/ 시군계/ 삼리봉(나주시 반남면 석천리, 신북면 이천리 → 행정리)에서 직우틀하여 급경사로 내리고 무명봉에서 맥길은 직진인데 선답자 시그널이 오른쪽 산죽길로 우회하라고 안내한다.
호산 정상에서 반남의 주산 자미산(紫微山, 96.8m)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신북면과 그 뒤 옥룡의 곰산은 잘 보였구요. 월출산이야 백룡을 하면서 내내 고개만 돌리면 뾰족뾰족한 바위산의 특출남으로 보여집니다.
♤ 나주시 반남면(潘南面)
전남 나주시 남부에 있는 면으로 동남쪽으로 영암군 신북면, 서쪽으로 시종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북쪽으로 공산면과 왕곡면에 접하고 있다. 동서로 약 4km, 남북으로 약 5km의 야산 구릉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자미산이 있다.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이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며, 기름진 옥토를 이루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다. 면의 대부분이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삼포강이 면의 동부와 북부 경계를 흘러 영산강에 유입하며, 대안리·덕산리·하촌리 일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분포한다. 쌀·보리를 비롯한 채소 및 과일 생산이 많다. 나주 반남지역에 흩어져 있는 대형 고분군은 이 지역이 백제로 통합되기 이전의 마한 연맹 왕국을 이끈 세력들의 중심부였음을 말해준다. 자미산성 터는 백제 때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이전에 이 지역에 있었던 54국의 마한연맹 왕국 중 하나인 내비리국(內卑離國)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자미산성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해상교통의 요지여서 견훤이나 견훤의 배후를 공격하는 왕건의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자미산성 일대가 후삼국시대에 견훤과 왕건 세력이 충돌한 격전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주시지』에도 견훤이 자미산성에 주둔하여 나주의 왕건과 대항하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 여겨진다.
지맥이 나주시 반남면 경계와 헤어지고 좌우 모두 영암군 신북면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 2차선도로/ 연화동길/ 시군계/ 면리계(나주시 반남면 석천리 → 영암군 신북면 행정리)
축사를 통해 김해김공세산장비로 내려와 양회임도를 따라 나주시 반남면과 경계를 따르다가 인공 수로가 지나는 갈림사거리에서 좌틀하여 영암군 신북면으로 들어서고 멀리 보이는 천제산에 올랐다가 다시 도로로 내려선다.
♤ 천제산(天祭山, 58.3m)
100년 전부터 산이 유명하다하여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천제산이라 한다. 마을을 지나 밭을 가로질러 덩굴이 관목을 휘감고 있는 잡목숲을 헤집고 천제산에 오르니 수고와는 딴판으로 이름과 달리 전망도 없고 봉우리 같지도 않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를 인증하고 직우틀로 북쪽으로 틀어 잡목지를 지나 다시 밭을 가로질러 마을 도로로 내려선다.
♤ 송암고개/ 옥봉마을 정류장/ 솔잎식당/ 마한문화로/ 영암군 신북면 행정리 옥봉마을
도로로 들어서자 말자 왼쪽에 보림목장 푯말과 솔잎식당이 반갑다. 마한문화로 821번 2차선 포장도로에 나오고 여기부터 태봉산 아래 입석마을까지 한동안 길게 약7.5km를 도로를 따르는 도로가 곧 마루금인 구간이다. 신북면 행월 초등학교가 폐교 되고 그 자리에 희망채 가든이 들어섰다. 왼쪽 멀리 또렷하게 월출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봉산을 택하느냐 삼각점봉을 택하느냐 백룡에서 제일 고민이 깊은 곳입니다.ㅋㅋ^^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 길마재고개(45m)/ 리계/ 신북면 행정리 - 월지리
고갯마루를 넘어와서 오른쪽 돌계단을 오르면 4등삼각점(영암 433/ 1996 복구)이 있는 57.5m봉이다. 길마재는 오른쪽 55.9m봉과 왼쪽 삼봉산(68.4m봉)의 가운데를 지나는 안부를 말하는데 이름있는 삼봉산을 택하느냐 삼각점봉을 택하느냐 백룡에서 제일 고민이 깊은 곳이다.
영암군 신북면을 지나온 지맥이 길마재고개를 넘어 도포면에 닿는 지점입니다.
♤ 유호정길삼거리/ 면계/ 삼리경계면(신북면 월지리, 행정리 → 도포면 영호리)
도로가 곧 지맥인 구간으로 지맥의 왼쪽이 신북면 행정리에서 도포면 영호리로 바뀌는 면계 삼리경계면으로 지맥은 이후 직진하여 신북면과 도포면의 면계인 마한문화로를 따른다. 남쪽으로 비닐하우스 너머 아스라히 월출산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흑석지맥의 가학산과 흑석산이 연이어 보인다. 남서쪽으로는 영산강 너머 영산기맥 마루금이 정겹다.
♤ 영암군 도포면(都浦面)
도포면은 영암군 북부에 위치하며, 동쪽과 북쪽은 영암군 신북면, 남쪽은 영암군 덕진면과 영산강을 건너 영암군 군서면, 서쪽은 영암군 시종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개편(1914년) 이전에는 영암면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일종면이라 하여 원목점 등 56마을을 관할 하다가 1914년 4월 1일 일제의 시·군·면 통폐합에 따라 나주군 종남면의 인덕등 6마을과 북이시면의 태산, 중명의 일부를 병합하여 원항, 덕화, 봉호, 도포, 구학, 영호, 성산, 수산의 법정리를 관할하였고 1932년 면의 명칭을 도포면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포면은 도포리가 있어 유래한 이름인 듯하다. 도포리는 도싯개, 도삿개, 도시포, 도포라고 했다. 도포리의 동쪽 동도포 마을에는 저산(猪山, 37m)이 있는데, 한글로는 돛뫼이다. 돛뫼 밑 개(浦)를 돛개라 하였으며,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도포(都浦)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도포면은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고도 30m 이하의 야산이며, 도포만 연안의 넓은 간석지를 방조제로 막아서 간척지를 만들었다. 영산강 농업 개발 사업으로 원래 해변 지역이었던 도포리와 원항리의 바다가 없어지고, 해수면의 많은 면적이 농토로 바뀌면서 과거의 어업 중심에서 농업 중심의 농촌 지역이 되었다.
♤ 산소버스정류장
산소는 영암군 신북면 월지리(月池里)의 자연마을 중 하나인 산소동 마을을 말한다. 산소 버스정류장에 월지사(月池祠) 표석이 서 있다. 여재각(如在閣)은 영암군 신북면 월지리에 있는 하동 정씨 문중의 재실로 여재각의 뒤로는 1947년에 건립된 월지사(月池祠)가 있다. 영암 출신의 조선 선조 때 예조 좌랑을 지낸 하동 정씨 정지성을 모신 사당으로, 영암에 거주하는 하동 정씨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는데...
♤ 칠거리(류진농원)/ 면계/ 삼리경계면(신북면 월지리, 도포면 영호리 → 구학리)
서리동 갈림삼거리이다. 오른쪽은 류진농원이고, 왼쪽은 도포성당 입구를 지난다.
도포성당과 마한문화로에서 덕화만수로로 갈라지는 삼거리 중간 정도가 삼면경계면입니다.
♤ 삼면경계면/ 삼리경계면(도포면 구학리, 신북면 월지리 → 시종면 만수리)
마한문화로에서 좌틀하여 덕화만수로로 진행하며 지맥의 오른쪽이 신북면 월지리에서 시종면 만수리로 바뀌는 갈림삼거리 지점이다. 칠거리에서 7분 후, 도로는 작은 산이 나타나며 Y자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은 시종면 소재지로 가고 지맥은 남쪽으로 틀어 영암 명당머리 이정표 쪽이다. 오랫동안 지나온 신북면과 헤어지고 도포면과 시종면의 면계를 따르다가 왼쪽 농막이 보이는 양회임도를 타고 58.5m봉에 오르는데 정상은 잡목봉이나 오던 길쪽을 돌아보면 예상치 않게 눈에 띄는 봉우리, 반남면 자미산을 찾을 수 있다. 올랐다가 금방 다시 도로로 내려서기에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 영암군 시종면(始終面)
시종면은 영암군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은 영암군 도포면과 나주시 반남면, 남쪽은 영암군 덕진면과 영암천을 사이에 두고 영암군 군서면·서호면, 서쪽은 영산강을 통해 나주시 동강면과 무안군 일로읍, 북쪽은 나주시 반남면·공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의 북쪽 첫머리가 된다고 하여 북이시면이라 하였다. 1914년 나주군 종남면의 25개 마을과 진도군 명산면의 14개 마을을 합할 때, 북이시면의 시(始) 자와 종남면의 종(終) 자를 따서 시종면이라 하였다. 시종면 전체가 해발 고도 30m 이하의 구릉과 저지대이며, 북부의 삼포강 유역은 저습지이다.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크고 작은 저수지 20여 개가 있으며, 해안의 갯벌을 간척하여 농토를 넓혔다. 과거에는 해안과 접하여 주 산업이 농업과 어업이었으나, 영산강 유역 농업 종합 개발 사업에 따라 해수면이 없어지고 많은 농토가 늘어나면서 전형적인 농촌으로 변모하였다.
♤ 정언농장(영농조합법인)/ 면계/ 삼리경계면(도포면 구학리, 시종면 만수리 → 태간리)
영농조합법인 정언농장 600m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시종면 만수리에서 태간리로 바뀐다. 멀리 태봉산이 바라다 보인다.
♤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泰澗里)
태간리 북쪽은 시종면 만수리, 남쪽은 도포면 봉호리, 서쪽은 시종면 월송리, 동쪽은 도포면 구학리에 접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태산리(泰山里)의 태(泰) 자와 송간리(松澗里)의 간(澗) 자를 따서 태간리가 되었다. 태간리 명산마을은 조선시대에 진도군 명산면 지역으로 고종 32년(1895) 영암군에 편입되었다. 그 지명을 따라 명산(命山)이라 한다. 송간 마을은 구송마을과 신송마을로 나뉜다. 구송마을은 태간제 저수지의 북쪽에 있으며, 송간마을의 옛 마을이라는 뜻이다. 신송마을은 구송마을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송림이 울창하여 그 속에서 나오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였으므로 마을 이름을 송간(松澗)이라고 했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송간리, 금성리, 상명리, 입석리와 구송리·중명리의 일부와 북이시면의 유곡리, 명축리, 회덕리, 태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태간리라 하고, 시종면에 편입하였다. 태간리는 대부분이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에 태간제가 있고 지방도 821호선이 지나간다.
지맥이 도포면과 면계와 헤어지고 시종면 내안으로 들어서는데 곧, 태봉산(太峰山, 84.2m) 정상 직전에서 다시 만나는게 되는군요.
♤ 종절재사거리/ (시종면 태간리, 도포면 구학리 → 봉호리)
종절재마을 인근 사거리를 이룬 곳으로, T삼거리로 표시되어 있지만 앞쪽에 농로가 뚫려있는 사거리이다. 지맥의 왼쪽이 도포면 구학리 → 봉호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직진으로 신송마을 방향으로 송간목장과 태봉산을 바라보며 농로를 따라 진행한다. 면계를 따라 마한로를 진행하던 지맥이 오른쪽에 우사가 있는 지점에서 면계를 버리고 시종면 태간리 내안으로 진입한다.
♤ 신송버스정류장/ 821번지방도(2차선도로)
821번 도로에서 우틀하니 신송마을 버스정류장에 송간마을 표석이 서 있다. 송간마을 입구를 지나자마자 821번도로를 버리고 왼쪽 농로로 진행한다. 입석마을에서 태산봉에 오르며 다시 도포면과 만나기까지 지맥은 시종면 태간리 내안을 지난다. 오른쪽으로 신송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직진하면 태간제를 지나 시종면소재지가 가깝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영산강 하구인 태산봉 주위 너른 들판으로 마한의 고대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고인돌과 고분이 자리잡은 마을이라 입석이란 지명이 생겼군요.
♤ 입석마을/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泰澗里) 2구
천제산에서 내려선 옥봉마을에서 여기까지 약7.5km를 도로를 따른다. 월송리 마을길에서 절개지 왼쪽으로 능선에 있는 배수장에 올라 태봉산 맥길로 진입한다. 마루금에 생긴 임도따라 통신탑을 보며 잡목지대로 힘들게 오르면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야자매트가 깔린 등산로와 만나니 굳이 마루금을 고집할 필요없이 도로따라 마루금을 넘어 태봉산을 오르는 등산로를 따르면 되겠다. 백제 초기의 고분·옹관묘 등이 시종면과 신북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입석마을은 태봉산 북동쪽의 밑단부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은 낮은 구릉이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구릉의 말단부와 논 가운데에 지석묘 20여기가 남북 방향으로 2열을 이루고 있다. 상석은 대부분 민묘 조성으로 이동되었고 일부는 논 경작으로 인해 묻혀있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또한 이곳에서 남쪽으로 자라봉 고분이 보인다. 태산봉 동쪽 550m 지점 시종면 태간리 해발 고도 6m의 논 가운데는 전방후원분인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이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이 고분은 2001년 전남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전남 지방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2만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곳으로,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두가닥으로 갈리는 백룡지맥의 끝은 태산 아래까지 밀고 들어온 바닷물이네요. 입석마을의 고대 문명은 그 바닷물의 높이를 알고 이용했겠군요.
♤ 태봉산(太峰山, 84.2m)/ 태산정(2층팔각정)/ 2등삼각점(영암 24/ 1990 재설)/ 면계/ 삼리봉(시종면 월송리, 도포면 봉호리 → 시종면 봉소리)
영진 5만지도에서는 태산봉(泰山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암군 시종면 월송리와 도포면 봉호리의 경계에 있는 구릉지 위에 우뚝 솟은 뫼로 큰 산을 뜻하여 태(太)뫼라고 하였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며 태산이 되었고, 봉우리가 첩어로 뒤에 붙으면서 태산봉이 되었다. 남동쪽 기슭에 태산마을이 있다. 백룡산(420.8m)에서 북쪽으로 내려선 호산(155.6m) 능선이 서쪽으로 흐르다 솟아오른 봉우리다. 야트막한 야산 봉우리는 사방이 잘 조망되며, 백룡지맥의 출발지 활성산이 보이고 특히 서편 영산강 쪽이 훤히 보인다. 바다와 이어지는 이곳 일대는 소금이 나오고 연안에 가득 널려 있는 갯벌에서는 각종 수산물이 풍부했다. 이러한 풍요로은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철기시대 마한 세력은 이곳에서 수백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정상에는 2004년 총 공사비 1억 4000만원을 투입하여 철근 콘크리트 팔각 2층 한식 지붕으로 지은 태산정(泰山亭)이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태산봉이 사자의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정상은 넓은 잔디밭 안부로 체육시설이 있고 조망이 좋다. 2등삼각점 뒤 산벚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지맥은 태봉산 정상 직전에서 도포면과 다시 만나고 정상에서 내려서며 완전하게 시종면으로 진입한다. 태봉산 정상에서 백룡지맥 합수점이 다른 두 곳(여시머리와 학림)을 향해 갈라지기도 한다. 즉,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구산리를 거쳐 삼포천 합수점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면 신학리를 거쳐 영암천 합수점으로 간다. 신학리 학림마을 딴섬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태산봉을 내려서서 도로 투어로 10.3km이다.
♤ 영암군 시종면 월송리(月松里)
월송리는 조선 시대 영암군 북이시면의 지역이다. 동쪽은 태간리, 서쪽은 구산리, 남쪽은 봉소리, 북쪽은 내동리에 접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명목리, 치리, 신당, 송산, 회덕리 일부와 진도군 명산면의 망월리를 병합하면서 망월리의 월(月)자와 송산의 송(松)자를 따서 월송리가 되었다. 월송리는 대부분 30m 이하의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월송리 앞에 태산봉과 남산봉이 있으며, 시종저수지와 밭갱이저수지가 있다. 치리 마을·송산 마을·신소정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송산 마을은 월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치리 마을과 진봉이라는 낮은 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형성되어 있다. 송산 마을에 월송리 송산 고인돌 떼가, 신소정 마을에 월송리 신소정 고인돌 떼가 있다.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수박, 총각무, 고추 등도 재배한다. 월송리 북쪽 월송리 삼거리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지방도 801호선이, 북동쪽으로 지방도 821호선이 지나간다.
♤ 68.3m봉
태봉산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잠깐 다시 올라서는 지나치는 잡목봉이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 영암군 시종면 월송리(月松里) 송산마을
영암군 시종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월송리는 조선 시대 영암군 북이시면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명목리, 치리, 신당, 송산, 회덕리 일부와 진도군 명산면의 망월리를 병합하여 망월리에서 월자와 송산의 송자를 따서 월송리라 하여 시종면에 편입되었다. 월송리는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월송리 앞에 태산봉과 남산봉이 있으며, 시종 저수지와 밭갱이 저수지가 있다. 동쪽은 태간리, 서쪽은 구산리, 남쪽은 봉소리, 북쪽은 내동리에 접한다.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수박, 총각무, 고추 등도 재배한다. 두 개의 행정리가 있으며, 치리 마을·송산 마을·신소정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송산 마을은 월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치리 마을과 진봉이라는 낮은 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형성되어 있다. 송산 마을에 월송리 송산 고인돌 떼가, 신소정 마을에 월송리 신소정 고인돌 떼가 있다. 월송리 북쪽 월송리 삼거리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지방도 801호선이, 북동쪽으로 지방도 821호선이 지나간다.
송산마을과 월송마을 뒷산이 지맥이지만 대나무가 쩔어 지나기가 쉽지않아 목미처 길로 우회합니다.
♤ 고인돌/ 삼리경계면(시종면 월송리, 봉소리 → 구산리)
68.3m봉에서 7분 여 내려서니 오른쪽 아래로 송산 버스정류장이 보이는 801번지방도/신학로를 만나 우틀하다가 송산마을회관 고인돌을 지점을 지나며 지맥의 왼쪽이 봉소리에서 구산리로 바뀐다. 오른쪽 송산마을로 넘어가는 양회임도를 건너니 인삼밭과 민가 하나가 있는데 마루금은 민가 뒤 인삼밭으로 이어지나 왼쪽으로 잠시 돌아가는 양회임도를 따른다.
평택임씨세장산 위로 올라선 고개에서 내려서지 않고 우틀로 들어섭니다.
♤ 치리(峙里)/ 삼리경계면(시종면 구산리, 월송리 → 내동리)
무명의 무덤봉에서 내려서니 오른쪽에 치리마을이 자리한 오거리를 이룬 양회임도 고개로 지맥의 오른쪽이 월송리에서 내동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치리는 시종면 월송리 자연마을 중의 하나로 송산 서북쪽 고갯마루에 있는 마을이며 문화재로는 월송리 선사유적이 있다.
빈집들이 보이고 오른쪽 차고가 있는 인가에 들어가 수돗물을 얻었는데 여기서 시종까지 약 2km로 옛날에는 광화문네거리처럼 번화했던 곳이라고 들려줍니다.
♤ 시종면 구산리 오거리/ 구산리교차로/ 820번지방도/ 구산리 - 내동리/ 육거리
커다란 봉소리 마을 표지석이 서있는 육거리이다. 시종면과 봉소리를 연결하는 820번 도로를 버리고 마을길을 따른다. 도로 건너 구산3구 방향 화정동로 2차선으로 향한다.
백룡에서 봉소리와는 태봉산에서 처음 만나 송산마을까지 같이 하고, 육거리에서 봉소리 표지석을 만나고, 마지막 합수점에서 탈출하며 원봉소마을로 나가기도 합니다.
♤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鳳巢里)
봉소리는 영암군 시종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이시면(北二始面)의 지역이다. 북쪽은 구산리, 동쪽은 월송리, 남쪽은 신학리에 접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철두리, 봉암리, 괴목리, 수동리, 대호정, 연동, 조동을 병합하여 시종면 봉소리로 개설하였다.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마을 서쪽으로 영산강이 흐른다. 저수지는 남동쪽에 동방제가 있고, 연동 마을에 연동 저수지가 있다. 입향조인 봉암(鳳巖) 강연(姜淵)과 관련하여 마을에 봉소정(鳳巢亭)이 있어 봉소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주민 대부분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수박, 무, 배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두 개의 행정리가 있으며, 원봉소 마을·철두 마을·조동 마을·연동 마을·괴목정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원봉소 마을에 조선 시대 조개더미인 봉소리 봉소 조개더미가 있고, 시종면소재지에서 원봉소 마을로 들어오는 길가에 삼국 시대 고분군인 봉소리 진등 석실 고분군이 있다. 봉소리 연동 마을은 부근에 연동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연이 많이 자생하였으므로 거주민들이 연꽃 연(蓮)자와 마을 동(洞)자를 써서 연동이라 불렀다고 하며, 괴목정 마을은 예전에 태산봉 남봉에 괴목으로 지은 정자인 괴목정(槐木亭)이 있어 마을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봉소리 동쪽으로 지방도 801호선이 지난다.
♤ 회정마을 쉼터삼거리/ 삼리경계면(시종면 구산리, 내동리 → 와우리)
왼쪽 구산3구 표석이 보이는 마을 들어가는 갈림길을 지나며 2차선 도로가 북쪽으로 휘어지더니 3분여 후 다시 서쪽의 도로 오름이다. 화정동로 회정버스정류장을 지나서 만나는 쉼터삼거리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내동리에서 와우리로 바뀐다.
♤ 61.3m봉/ 2등삼각점(영암 22/ 1990 재설)
2차로 도로를 벗어나 동복오씨 가족묘지로 오른다. 평장묘로 전환 중인데 규모도 크고 묘지 마무리 진입로공사가 한창이다. 이름 모를 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산패가 있는 백룡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봉우리를 넘어서서 묘지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서면 밭지대 농로다.
♤ 새동네/ 리계(시종면 와우리 → 구산리)
61.3m봉을 내려와서 밭둑길을 따르다가 구산제 바짝 옆으로 도로에 붙어 다리를 건너 만나는 새동네에서 지맥이 와우리에서 구산리로 진입한다. 화정동로 2차선 도로를 따라 화정봉 표석이 있는 곳으로 진행한 후 이번엔 왼쪽이 아닌 오른쪽 태정길 양회임도를 따르니 820번 2차선도로를 다시 만나 오른쪽 구산로를 따라 진행한다.
♤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九山里)
구산리는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이시면 지역이었다. 북쪽은 시종면 와우리, 남쪽은 시종면 봉소리, 동쪽은 시종면 내동리와 접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정리, 회정리를 병합하여 시종면 구산리로 개설하였다. 구산리(龜山里)는 마을 뒷산이 거북이처럼 생겨서 거북 구자에 뫼 산자를 써서 구산(龜山)이라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아홉 구자를 쓰는 구산(九山)으로 바뀌었다. 거북 구의 획수가 많고 쓰기가 어려워 쓰기 쉬운 아홉 구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마을 서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구산에 태뫼봉이 있으며 동쪽에 구산제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원구산마을, 세까지마을, 송정마을, 희정마을, 태정마을, 육거리 마을 등이 있다.
♤ 송정버스정류장/ 820번지방도
하동정씨세장산비를 통과하고 송정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계속 진행한다. 농로와 인공수로, 고공수로를 지나며 도로를 따라 약500m 진행하는데 42.8m봉을 오르지 않으면 굳이 도로따라 원구산마을로 직진하지 않고 송정마을버스정류장을 지나 10시 방향 마루금 임도를 따라 구봉교회로 향한다.
후반부 시간도 각박하고 다리힘도 빠져 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42.8m봉/ 4등삼각점(영암 441/ 1999 재설)/ 원구산마을
구봉교회 방향으로 가지않고 원구산마을에서 오른쪽으로 들르는 잡목봉으로 삼포천 건너 옥룡지맥의 몽탄나루 합수점과 가장 근접하는 백룡지맥상에서 빠져나가는 봉우리이다.
♤원구산버스정류장/ 구산로
고갯마루 목장에서 오른쪽 사면길로 오른다. 언덕 위에 있는 구봉성결교회 오른편 뒤쪽으로 간다. 구봉 교회를 지나니 남서쪽 영산강 건너로 영산기맥 마루금이 펼쳐진다.
♤ 여시머리 끝단(12.7m)/ 구산리 → 봉소리 → 신학리
양회임도로 가며 왕릉처럼 솟아 있는 백룡지맥 마지막 봉인 여시머리로 오른다. 잡목봉으로 바로 앞에 영산강이 보인다. 옛날에는 여시머리 끝단이 하천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지로 개발되었고 배수관문까지 설치되어 긴 영산강 뚝방길 비포장 농로길을 따라 봉소리를 지나 신학리 배수펌프장까지 진행한다. 영산강 건너는 무안군 일로읍 망모산(望母山, 144m)이 보이고 영암천 건너로는 영암군 서호면으로 하은적산(下隱跡山, 304.2m)과 모재산(197.3m)이 보인다.
♤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新鶴里)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7㎞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영산강 하구의 남해만 북쪽에 위치하여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영암군 북이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암리, 행화리, 반학리, 신항리, 구골리, 연화리, 신원목, 마분점, 각동, 정동과 종남면의 학림리를 병합하여 '신항'과 '학림'의 이름을 따서 신학리라 하여 시종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은 구름머리, 밥밥굴, 샘몰, 우암, 학림, 창진 등이 있다. 약 350년 전 이웃인 영암군 도포면(북일종면) 원항리 항동에서 이주하였으나 식수에 어려움이 있던 중 어느 날 큰 스님이 와서 마을 중앙부에 정호의 위치를 정하여 주면서 식수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충효는 물론 부귀와 무병장수를 누리면서 큰 마을을 이루고 살 터라고 일러 주어서 샘을 판즉 청수가 넘쳐 식수가 해결되었다 한다. 그 후 도포면 항동에서 한 집 두 집 옮아 와 큰 마을을 이루게 되어 마을 이름을 신항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으로는 도포면 원항리와 면계를 두고 남서로는 영산강과 영암 덕진강에 접해있다. 학림(鶴林)마을이 신학리 3구이고 학모양의 반학동이 신학리 4구이다. 학림은 창터에 있던 조창을 관리하는 창감리가 살았다 하여 창감이라 하며 지형이 학처럼 생겨 학림이라고 한다. 창진은 창진나루 가에 있다 하여 창진이라고 한다. 옛날 마을 앞 뚝이 잘 터져 피해가 많으므로 도사의 말을 듣고 산 아이를 제물로 묻고 뚝을 쌓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소바우였다. 우암(牛岩)이란 이름은 거기서 유래하였다 전해 내려온다.
♤ 영암천/ 영산강 합수점
왼쪽이 영암천이고 오른쪽이 영산강이다. 목포에서 영암군과 무안군 사이의 좁은 해협을 지나 내륙 쪽으로 들어가면 두 개의 만이 Y자형으로 있다. 이들 2개의 만은 남북으로 서로 면하고 있는데, 1981년 12월에 축조된 영산강하구언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커다란 내륙호수인 영산호(榮山湖)가 되었다. 반바지님의 백룡지맥 종착점 코팅지가 배수구 덮개에 묶여 있다.
■ 덕진포 해전(德津浦 海戰)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일찍이 나주와 영암의 풍요로운 자연환경에 매력을 느꼈다. 그 옛날 덕진포까지 깊게 들어오던 바닷물은 해상인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 그는 903년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진출한다. 송악출신 왕건은 그곳에서 청해진에서 활동했던 장보고의 후손들과 친분을 쌓고 연이어 영암의 해상세력과 연줄을 잡았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 지역을 명목상 지배하고 있었으나 토착 성주를 확실하게 포용하지 못했고,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진 해상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왕건은 서남해에서 활동하던 해상인의 지원에 힘입어 이 지역 10개 군현과 연대하고, 금성을 점령하여 병력을 상주시키고 지명을 나주로 개칭한다. 왕건은 909년 2차 출병하여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서 견훤의 배를 빼앗고, 신안군과 진도군을 차지한다. 서남해 섬지역을 차지한 왕건은 내륙으로 눈을 돌린다. 나주와 영암은 넓은 평야로 이루어진 반면 해로가 발달하여 접근이 용이하다. 그 중 영암의 덕진포(德津浦)는 사통팔달로 통하는 육로의 정점이며 해남군과 강진군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왕건은 3천여 수군병력을 동원하여 견훤이 막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 덕진포로 향했다. 덕진포를 차지하면 그 주변은 물론 강진, 장흥, 해남군이 수중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견훤의 군대가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수로 곳곳에 배를 숨기고, 중요한 길목마다 군사를 숨겨놓고 수륙 협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912년 여름(8월), 밀물이 들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된 갯바람을 타고 왕건의 수군은 덕진포를 향해 출발했다. 덕진포구를 향해 은밀히 항해하던 왕건의 수군은 영암천에 이르러 진을 짜고 기다리던 견훤의 공격을 받는다. 왕건은 공포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하며 승리는 강한 의지와 단결력에 있다며 스스로 앞장서 싸웠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날리니 견훤의 군대는 불길에 싸여 혼비백산한다.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날고, 수백 척의 전함이 불에 타 죽지 않은 자는 도망가기 바빴다. 견훤은 구사일생으로 부하 몇 명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는 왕건의 지휘 통솔력, 함선 운용술, 물때와 바람 방향을 응용한 해전술, 그리고 지역토착 해상세력의 지원을 통해 얻어졌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왕건은 과거 장보고가 차지했던 서남해 연안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어 통일전쟁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 백룡의 합수점에서 교통편이 닿는 곳으로 빠져나와야 하는데 나오는 데도 족히 1시간은 걸리나 봅니다. 합수점에서 다시 뚝방길을 따라 원구산마을로 돌아나오며 시종면 택시를 호출하여 시종면터미널에서 영암행 농촌버스를 타고, 신북터미널에 하차하여 해남발 광주행 직행버스로 갈아타야 합니다. 선답자님들 트랙을 보니 신학리 학림마을로도 나가고 봉소리 원봉소마을로도 나가는군요. 저도 일단 무작정 시종면으로 나가는 버스나 차를 타기 위해 나가보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걸 그랬습니다. 다 끝냈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동밖에님이 기다렸다는듯이 곧바로 출발하셨습니다. 그 넓은 간척지 허허벌판에서 움직이지 않았음 10분이면 오셨는데, 서로 만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이제 그마저도 추억이 되었습니다.
♤ 에필로그
백룡과 옥룡은 실과 바늘의 관곕니다. 한 가지에서 나눠진 불가분의 관계인지라 가급적 서로 긴밀하게 붙여서 진행하는 게 두 지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답니다. 마침 주말에 봄비가 내린다니 서둘러 밀접하게 붙여서 백룡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동밖에님 지원이 크나큰 동력이 되어주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동밖에님이 캄캄한 밤에 바람부는 활성산에 저를 투하하고 떠나신지 5분도 되지않아 J3수도권지부 송림지부장님을 우연하게 마주쳤으니 반갑고도 놀랄 일이었습니다. 굳이 인연을 만들려 애쓰지 않아도 이렇듯 우연하게 오는 인연까지는 막질 못하겠네요.^^ 지부장님 사자를 준비하신다는데 같이 밤새워 사자를 한번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백룡에서 태조 왕건과 월출산을 잊지 못하듯 동밖에님이 조고문님, 조은산님과 백룡을 졸업한지 10년이 되셨다고요. 그 때 사진을 보여주시며 앞잽이사모님이 해주신 멍게비빔밥과 고인이 되신 조은산선선배님을 그리워 하시네요.
첫댓글 어둠속에서 우연한 오랜만의 만남 짧은시간이였지만 좋은추억만들었네요
첫차탈때까지 밤새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오래갈듯합니다
백룡지맥길 수고많으셨고 다음 여정도 즐산안산되시길 응원합니다
송림대장님!
밤새워 백룡을 거꾸로 하시고,(걸어놓으신 띠지를 보니 합수점에서 여시머리 태산봉으로 가셨습니다.)
이어서 다시 백룡의 출발점에서 되돌아 나와 옥룡을 마치시다니...
이틀밤을 세워 백룡과 옥룡을 단박에 끝내셨으니 시원하시면서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떻게 백룡의 출발지에서 저와 만나다니 그런 우연이 없네요.^^
걱정하시드만 졸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바람에 좀 더 늦으셨다구요.
새벽 3시에 몽탄나루에 도착해 차 한대 오가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3시간을 혼자 서계셨다니 얼마나 추웠겠어요.
막말로 군용 담요라도 하나 배낭에 넣어 다니시는 건데...
유스퀘어에서 21:10, 21:20분 차가 결략되는 바람에
강남센트럴에 새벽 1시반에 도착해 논현버스터미널에서 N37버스로 종로2가로 가서 9301막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인나자마자 대장님 걱정부터 되더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이...자징개 타고 하셨지요..?? 아니고서야...그 먼거리를 단숨에...
암튼 고생하시었구요.. 동밖에님이 가져오신 사진입니까..?? 하도 오래돼서 기억도 가물가물..
왼편은 이희중님... 수배령좀 내려줘요...전번도 몰라 연락도 몬하고 있어요.
고문님!
저도 사모님 졸라서 멍게야채비빔밥 먹고 싶어요. ㅋㅋ^^
이번에 동밖에님에게 오룩스를 사사 받았습니다.
이 정도만 알아도 트랭글을 보고 무작정 따라만 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등고선이 보이니 마루금을 쳐다보고 방법을 떠올려 보게 되더군요.
이제 오룩스를 직접 운용하시는 분을 따라다니며 잡다한 운용법을 몇 번 배우면 될거 같아요.
호산 오름 잠깐 명감나무 가시가 가로막는데요. 나머지는 그닥 어렵지 않았습니다.
송산마을 뒤편으로 대나무숲이 너무 밀림처럼 우거져서 뚫지를 못하겠더군요.
송산마을과 월송마을을 살짝 우회해서 반대편 평택임씨세장산을 넘어서다 날머리 쪽을 바라보니
그리로도 나온 분이 계신지 띠지가 보이는것 같았습니다.
동밖에님 지원 덕분에 옥룡과 백룡을 단숨에 끝내니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힘든 옥룡을먼저하고 쉬운 백룡을 하셨으니 껌 씸듯이 휘딱 해치우셨네요.
우리는 백룡을먼저하고 옥룡에서 무진 고생을했습니다.
날도 더운 초여름이었거든요.
우리 기록을 찾아보니 열세시간 오십분이 걸려다고 되어있네요.
좋은 계절에 멋진여행하고 오셨습니다.
부뜰이운영자님!
형님이 여기 진행하며 형수님과 산패 작업 다 하셨죠?
수고해 주신 덕분에 재미있게 백룡 진행했습니다.
옥룡과 백룡을 진행하며...
옥룡에선 암뽕순대를 백룡에선 솔잎식당에서 식사를 했어야는데 약간의 아쉬움이네요.
백룡을 마치고 동밖에님이 일부러 신북 군계휴게소 암뽕순대집으로 데려가시더군요.
안먹음 서운하잖겠냐며 그런데 하필 가는 날이 임시휴무날이었습니다.
맛이야 특별할게 없겠지만 옥룡을 하며 지맥꾼에게는 워낙 유명한 집이라서요.
하루 종일 건빵만 먹고 갔더니 뒤풀이를 든든하게 했는데도 금새 배가 고팠습니다. 감사합니다.^^
멀리 왼쪽 뒤로 광주 무등산이 보입니다.
활성산 팔랑개비 맨 앞쪽에서 백룡이 나가구요.
오전에 날이 좋아서 기가막힌 조망을 보여줬습니다. 지나오고 가야 할 땅끝기맥 산줄기를 하나 하나 짚을 수 있었습니다.
활성산은 옛 서광목장 초지가 여름~가을에는 칡과 풀들의 밀림이라 ...
활성산에서 백룡산 가는 산줄기기 그대로 보이는군요.
그리고 마산과 그 뒤로 옅게 웅산이 보이고 왼쪽으로 호산도 보입니다.
옥룡지맥은 기가막히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오른편으로 그나마 태봉산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왼편 멀리 보이는 도심지는 남악신도시인 모양이죠.
마찬가지로 옥룡지맥의 산줄기는 구분이 어렵습니다.
예. 전남도청 있는 남악 맞습니다. 그 앞에는 영산강 건너서 은적산. ^^
은적산은 백룡합수점 영암천 건너편 삼호에 있으니 여기서 보면 빌딩 앞에 보이는 산입니다.
예. 맞습니다. 은적산은 상은적산~하은적산으로 길게 늘어져 있고 완만하여 산책하기 좋습니다. 관봉이라는 멋진 바위가 있고요. ^^
여기를 진행하였군요. ㅋ
지난 3/16(토) 땅끝기맥 월출산 지나며 찍은 사진인데, 몇일 뒤에 이 길을 퐁라라님이 진행했다니 새삼스럽네요. ㅎㅎ
늘 안산 즐산 하세요. ^^
봉화동천선배님!
저도 4년 전 늦가을에 땅끝기맥 진행하며,
달기봉에서 올라 통천문에서 백룡지맥을 찾아보고 사진을 한장 남겼습니다. 사진 감사합니다.^^
풍라라님 잘 포스팅 하고 갑니다
담달에 할까 계획 중입니다
가시 잎이 많이 나기 전에 갈려고 합니다^)^
와룡산선배님!
옥룡하셨으니 백룡은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될것 같습니다.
구장터 지나 오른쪽 가매정마을로 들어서서 과수원으로 호산을 오르는데요.
경사 오름 오른쪽으로 사유지 울타리가 정상까지 계속 같이 합니다.
망개나무 가시가 가로 막는데 전지가위가 없어도 목장갑 끼고 꺽으면 뚝뚝 잘 부러지네요.
제가 가위로 끊는다고 끊었는데 깨끗하게 정리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표고가 150m 이니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되고요. 힘들다 하면 정상입니다.
호산 내리막도 작은 봉우리에서 곧바로 산죽밭으로 들어서서 내려서는게 편합니다.
능선을 고수하면 가시덤불을 길게 타야 하구요. 산죽밭으로 내려서면 이르게 묘지로 내려섭니다.
김해김공 통정대부, 호조참판, 공조참판, 호조참의 등등 짱짱한 가문의 묘지가 호산 뒤편에 열지어 있습니다.
그 외에 크게 걱정하실 데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백룡지맥 원샷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2월말 부터 한달 채 않되게 태청, 옥룡에 이은 백룡까지 두루 섭렵하는 쾌거를 이루셨네요.
거리도 먼 곳인데 암튼 대단하십니다.
40km 거리를 11시간 동안에 주파하는 체력도 대단하지만 열정으로 이루어 낸 결실이기도 합니다.
연일 도움주신 동밖에님 모습도 반갑고, 우연히 조우한 히어리(송림)님도 그간 잘 계셨는지요?
이번 여정에도 멋진 추억을 남기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검단부터 태행, 태청, 옥룡, 백룡 했습니다.
일단은 시작이 좋습니다.
준희선생님이 사자보다는 철성을 먼저 하라 하시네요.
일단 가까이 연관져서 먼저 하는게 나은것 같습니다.
송림대장님은 우리 홀대모에 히어리님으로 오래 전에 들와 계시더군요.
카카오스토리에 양원석으로 후기를 올리셔서 성함이 검색이 되네요.^^
동밖에님이 철성도 나와바리라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시는데
제가 서울서 첫차로 출발하면 24번도로까지 갈 수 있을지
거기서 함평읍으로 나갔다 들오던가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