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초계변씨(草溪卞氏)
변씨의 선대는 중국 당나라 사람 변원(卞源)이다. 그는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정착했다. 초계변씨의 시조 변정실(卞庭實)은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에 오르고 팔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팔계(八溪)는 초계의 옛 이름이다.
시조의 4세손인 변고적이 밀양에 살면서 그 후손 일부는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2000년 현재 ▲밀양변씨는 16,911명으로 초계변씨 49,506명에 비해 적은 편이다.
밀양 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이 된 변옥란과 시문으로 이름이 높은 그의 두 아들 변중량. 변계량을 꼽는다.
변계량은 여말에 목은과 포은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7세 때 문과에 급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드러냈다. 20여 년간을 봉직하면서 태조실록을 편찬한다. 고려사를 개수하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초기에 참여했다. 현재 밀양에는 변옥란 등 3부자를 모시는 유허비가 있다.
수주 변영록(1898-1961)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한때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다.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가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논개, 사벽송(四壁頌) 등이 있다. 술을 좋아해 대주호(大酒豪)로 알려졌다.
변희용은 일본 경응대학에 유학하면서 조선 유학생 학우회, 북성회 등에서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귀국한 뒤에도 농촌 계몽에 힘쓰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민중당 당수를 지낸 박순천여사는 그의 아내다.
주요파는 장파, 중파, 계파 등이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경남 합천군 청덕면 앙진리 등이 집성촌이다
제목: 정변의 역사
변계량과 밀양변씨
변계량(卞季良.1369∼1430)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활약한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춘정(春亭)이다. 그는 밀양 고을 통바우골에서 태어났다. 통바우골은 오늘날 초동면에 있다.
검교판중추원사 변옥란(卞玉蘭)의 아들인 변계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네 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했다. 전교주부, 비순위정용랑장 겸 진덕박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건국 때 천우위중랑장 겸 전의감승이 되었다. 태종 초에는 성균관악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한 뒤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하여 상왕인 태종이 크게 근심했다. 그러자 변계량은 태종 임금에게 < 하늘제사 >를 지내자고 주청했다. < 고조선 시대 배달겨레가 하늘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고조선을 이어 받아서 나라를 일으킨 우리 조선국이 하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마땅한 일로 됩니다. >라고 말했다. 상황이 절박하다며 원단(圓壇)에서 기우제를 지내자고 청한 것이다.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을 보내 제사를 드린 뒤 얼마 후 과연 큰비가 내렸다.
그는 세종 2년 집현전이 설치된 뒤에는 대제학이 되었으며,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를 역임했다.
변계량은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또한 과거의 시관으로 선비를 뽑는 일에 지극히 공정을 기하여 과거시험의 폐단을 개혁했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주위로부터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변계량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화산별곡.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 왕조의 건국을 찬양했다.
저서로는《춘정집》3권 5책이 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개수(改修)에 참여하였으며,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낙천정기.樂天亭記〉, 〈헌릉지문.獻陵誌文〉을 지었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변계량이 지은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온다. < 내해 좋다하고 남 슬흔 일 하디 말며 (내 하기 좋다고 남에게 싫은 일을 하지 말며), 남이 한다하고 의(義) 아녀든 좃디 마라 (남이 한다고 하여도 의로운 일 아니거든 따라하지 말라), 우리는 천성을 딕히여 삼긴 대로 하리라 (우리는 타고난 성품에 따라 나 생긴 그대로 하리라) >
한편 그는 시집 간 누이동생의 모함으로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정종 1년(1399) 8월 19일의 < 정종실록 >에는 변계량 누이동생의 사형집행 소식을 알리면서 사건의 내막을 기록하고 있다.
변계량의 누이동생 변씨는 죽은 남편 박충언의 종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인의 재혼이 허용되었던 조선 초기였던 때라 변씨는 다시 박원길과 재혼했다.
그 뒤 남편이 변씨의 부정을 알게 되자 변씨는 변계량에게 달려가 “남편의 성질이 사나워 같이 살기 힘들다”며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변계량이 허락하지 않자 변씨는 자신의 정부와 공모해, 박원길과 변계량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모함했다. 그 뒤 변씨의 남편 박원길은 억울하게 극심한 문초를 당했다. 결국 사건 전모가 밝혀지기는 했으나 박원길은 심하게 매를 맞아 이미 죽었다. 물론 변씨 자신도 정부와 함께 참형을 당했다.
변(卞)씨는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 째 아들이 노나라의 변읍(卞邑)에 봉해지면서 시작됐다. 그의 후손 변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예부상서에 오른 뒤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 한질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 때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았다.
그 뒤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군에 봉해진 문열공(文烈公)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팔계는 초계의 다른 이름이다. 초계변씨들은 변정실을 본관 시조로 섬기고 있다.
초계변씨에서 밀양으로 본관이 갈라진 밀양변씨는 고려 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한다. 밀양변씨는 초계변씨와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다.
밀양변씨는 조선시대에 변강지(卞綱之):문과.성종23년(1492), 변종헌(卞鍾獻,1857 丁巳生):문과.고종29년(1892), 변삼근(卞三近,1579 己卯生):문과.광해군3년(1611), 변구상(卞九祥,1579 己卯生):문과.세종1년(1419), 변삼계(卞三戒,1613 癸丑生):무과.인조15년(1637), 변이찰(卞爾札,1663 癸卯生):무과.숙종15년(1689), 변강(卞綱,1650 庚寅生):무과.현종13년(1672), 변세걸(卞世傑,1662 壬寅生):무과.숙종12년(1686),변이흥(卞爾興,1651.辛卯生):무과.숙종12년(1686),변이윤(卞爾玧,1659 己亥生):무과.숙종12년(1686) 등 모두 19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4명, 무과 6명, 사마시 11명, 역과 106명, 의과 27명, 음양과 10명, 율과 22명, 주학 10명이다.
변(卞)씨는 거창, 경주, 공주, 광산, 남원, 달성, 문화, 밀양, 백음, 보령, 부용, 비안, 영천, 원주, 장성, 진주, 창녕, 청주, 초계, 팔거 등 20개본관에 인구는 2000년에 78,685명이다. 밀양변씨는 16,911명, 초계변씨는 49,506명이다.
초계, 밀양 변씨(草溪, 密陽 卞氏)에 대하여 참고만 하세요~~
변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이 처음 조(曺)로 봉해졌다가 후에 노나라 변읍에 봉해지자 성을 변이라 했다고합니다.
그후 후손 변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예부상서에 오르고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 한질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았으나 그후의 대는 알 수가 없었으므로, 고려 성종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초계)군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합니다. 초계 변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고려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하는 밀양 변씨도 같은 변정실의 후손으로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인구:
초계 43,669명, 밀양 17,228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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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밀양 변씨(草溪, 密陽 卞氏)에 대하여 참고만 하세요~~
변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이 처음 조(曺)로 봉해졌다가 후에 노나라 변읍에 봉해지자 성을 변이라 했다고합니다.
그후 후손 변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예부상서에 오르고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 한질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았으나 그후의 대는 알 수가 없었으므로, 고려 성종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초계)군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합니다. 초계 변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고려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하는 밀양 변씨도 같은 변정실의 후손으로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인구:
초계 43,669명, 밀양 17,228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초계변씨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섭(燮) 환(煥) |
재(在) 교(敎) |
석(錫) 수(銖) |
태(泰) 영(泳) |
모(模) 식(植) |
희(熙) 문(文) |
준(埈) 균(均)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용(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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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洛) 순(淳) |
정(楨) 주(柱) |
묵(默) 옥(沃) |
치(致) 근(根) |
탁(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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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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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
44세 |
45세 |
4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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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杓) |
남(南) |
중(重) |
일(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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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표] 밀양변씨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진(鎭) |
사(思) |
준(俊) |
수(洙) |
영(榮) |
환(煥) |
변씨는
경주 |
남원 |
밀양 |
백음 |
부용 |
원주 |
장성 |
진주 |
청주 |
초계 |
팔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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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1개의 본관과 64,143명이 있다.(1985년)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 송정마을(초계변씨)
삼동면사무소에서 양산 신평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보은천을 앞에 두고 그림같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집들 뒤로 대나무들이 마치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송정마을이다. 예부터 송정마을을 봉좌송정(鳳坐松亭)이라 불렀을 만큼 경치가 뛰어나다. 송정마을을 딱히 구분한다면 상송정과 하송정으로 나누는데 보은으로 쓰여진 버스정류장에서 들어가는 곳이 하송정마을이다. 이 곳이 울산 곳곳에 퍼져있는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문중(草溪卞氏 參判公派 蔚山門中)의 대표적 집성촌이다.
송정마을은 양산과 언양, 웅촌으로 사통팔달의 길목에 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어 전형적인 도시근교의 시골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재실인 일송재(一松齋)가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긴다. 외지로 많이 떠났지만 아직도 집 주인을 알리는 문패들 가운데 상당수가 변씨 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이 노나라의 변읍(卞邑)에 봉해지면서 변씨의 성을 얻었다. 변씨의 비조라 할 수 있다. 그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당나라 때 예부상서로 8학사 중 한 자리를 차지했고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가 사신으로 오면서 효경 한 질을 갖고 오자 경덕왕이 그의 학식에 감동해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 신라에 남아있게 했다. 그리고 그 사신의 후손인 문열공(文烈公) 변정실(卞庭實)이 고려 성종 때 1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인 문하시중으로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초계변씨들은 문열공을 수관시조(受貫始祖)로 섬기고 있다.
멀리 중국의 주문왕에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초계변씨가 울산에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예전엔 울산이었던 양산시 웅상읍 백동리다.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지낸 성천(誠泉) 변승정(卞承貞)이 약 400년전 경기 안성에서 옮겨왔다. 시조인 문열공의 16세손으로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파의 입향조이다. 울산 입향조 문열공의 묘소는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에 있으며 후손들은 지난 97년 중구 성안동에 입향조를 모신 성모재(誠慕齋)를 지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양산 웅상의 편들이란 지명은 예전에 변씨들의 논이 하도 많았기에 변씨의 들에서 변들로 다시 편들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입향조의 아들로 가선대부 병조참의를 지낸 현동(玄東) 할아버지 때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교육청사 인근인 지금의 유곡동 지역으로 옮겨왔다. 태화동 동강병원 뒤와 유곡동, 성안동 곳곳에 전답을 가졌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변철종 종친회장은 "지금의 우정선경1·2차 아파트단지는 예전에 초계변씨들의 선산이었으며 1960년대 선경직물에 자리를 내주면서 인근의 태화공원으로 모두 이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초계변씨 울산파들이 본격적으로 울산의 곳곳으로 확산된 것은 입향조의 손자인 기복 할아버지가 상북의 명촌으로 옮겨갔다. 지금까지 종택은 큰 변화없이 예전의 그 자리에 있다. 종손인 태수(泰守)씨가 입향조의 16세손이다. 기복 할아버지는 11남2녀를 두었다. 그 아들들이 울주군의 상북, 삼남, 삼동, 언양, 중구 성안, 북구 호계 등으로 흩어져 또 다시 일가를 이룬 뒤 경북 경주, 양남, 양북, 부산, 서울, 안성 등까지 그 세를 넓혔다. 울산파의 회원으로 약 700여명이 등록돼 있다. 그 가운데 삼동 보은의 송정마을이 아직까지 집성촌으로 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종친회 총무를 맡고 있는 변동선씨는 "열한분이나 된 입향조의 손자들께서 울산의 곳곳으로 흩어져 일가를 이뤘으나 도시화가 되면서 이제는 그래도 집성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송정마을로 재실과 문중선산이 있는 중구 태화동과 성안동, 그리고 종가가 있는 명촌 이 세곳이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문중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울산종친회의 회기에도 천성산과 태화산, 함월산의 세봉우리를 형상화해 두고 있다. 종친회 변철종 회장 등이 매년 8월 여름방학 때 성모재에서 아이들을 모아 조상들의 내력과 함께 집안의 예절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고한 변동수 전 언양향교 전교와 변재선·변만선씨가 초계변씨 울산문중 출신이다. 이와 함께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변조웅 장군과 변철종 울산시 국장, 변재근씨, 변창섭 총경, 변성관씨 등이 군과 교육계, 관계, 경찰에서 활동하다 퇴임했다. 변상백 전 면장과 변기찬 전 출장소장도 같은 집안이다. 현직에서 활동중인 문중들로는 변양섭 울주군의회 의장이 선출직으로 눈에 띈다. 공무원 가운데 시 사무관으로 변동주·변정복씨가, 군 사무관으로는 변동구씨가 있으며 중구청에 근무중인 변건수씨가 있다.
교육계에서는 변철만 부산여대 교수와 변정용 동국대 교수, 변영대 영천고 교장, 변동섭 언양중 교감을 비롯해 변재철·변강섭씨가 고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변태곤 강북교육청 감리관도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종친회 회원이다. 또 변경민 공학박사와 변달석 공학석사도 집안이다. 변재국 대우자동차 부장도 마찬가지이며, 농협이사로 변춘호·변윤백씨가 활동하고 있다. 농협이사와 울산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하고 농협이사로 활동중인 변정의씨도 울산문중의 일원이다.
초계변씨(草溪卞氏)
변씨의 선대는 중국 당나라 사람 변원(卞源)이다. 그는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정착했다. 초계변씨의 시조 변정실(卞庭實)은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에 오르고 팔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팔계(八溪)는 초계의 옛 이름이다.
시조의 4세손인 변고적이 밀양에 살면서 그 후손 일부는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2000년 현재 ▲밀양변씨는 16,911명으로 초계변씨 49,506명에 비해 적은 편이다.
밀양 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이 된 변옥란과 시문으로 이름이 높은 그의 두 아들 변중량. 변계량을 꼽는다.
변계량은 여말에 목은과 포은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7세 때 문과에 급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드러냈다. 20여 년간을 봉직하면서 태조실록을 편찬한다. 고려사를 개수하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초기에 참여했다. 현재 밀양에는 변옥란 등 3부자를 모시는 유허비가 있다.
수주 변영로(1898-1961)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한때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다.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가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논개, 사벽송(四壁頌) 등이 있다. 술을 좋아해 대주호(大酒豪)로 알려졌다.
변희용은 일본 경응대학에 유학하면서 조선 유학생 학우회, 북성회 등에서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귀국한 뒤에도 농촌 계몽에 힘쓰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민중당 당수를 지낸 박순천여사는 그의 아내다.
주요파는 장파, 중파, 계파 등이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경남 합천군 청덕면 앙진리 등이 집성촌이다
http://cafe.daum.net/jungbokyu
집성촌을 찾아서16] 정헌대부 지낸 승정 울산에 처음 터잡아...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 송정마을(초계변씨)
삼동면사무소에서 양산 신평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보은천을 앞에 두고 그림같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집들 뒤로 대나무들이 마치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송정마을이다. 예부터 송정마을을 봉좌송정(鳳坐松亭)이라 불렀을 만큼 경치가 뛰어나다. 송정마을을 딱히 구분한다면 상송정과 하송정으로 나누는데 보은으로 쓰여진 버스정류장에서 들어가는 곳이 하송정마을이다. 이 곳이 울산 곳곳에 퍼져있는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문중(草溪卞氏 參判公派 蔚山門中)의 대표적 집성촌이다.
송정마을은 양산과 언양, 웅촌으로 사통팔달의 길목에 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어 전형적인 도시근교의 시골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재실인 일송재(一松齋)가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긴다. 외지로 많이 떠났지만 아직도 집 주인을 알리는 문패들 가운데 상당수가 변씨 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이 노나라의 변읍(卞邑)에 봉해지면서 변씨의 성을 얻었다. 변씨의 비조라 할 수 있다. 그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당나라 때 예부상서로 8학사 중 한 자리를 차지했고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가 사신으로 오면서 효경 한 질을 갖고 오자 경덕왕이 그의 학식에 감동해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 신라에 남아있게 했다. 그리고 그 사신의 후손인 문열공(文烈公) 변정실(卞庭實)이 고려 성종 때 1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인 문하시중으로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초계변씨들은 문열공을 수관시조(受貫始祖)로 섬기고 있다.
멀리 중국의 주문왕에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초계변씨가 울산에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예전엔 울산이었던 양산시 웅상읍 백동리다.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지낸 성천(誠泉) 변승정(卞承貞)이 약 400년전 경기 안성에서 옮겨왔다. 시조인 문열공의 16세손으로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파의 입향조이다. 울산 입향조 문열공의 묘소는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에 있으며 후손들은 지난 97년 중구 성안동에 입향조를 모신 성모재(誠慕齋)를 지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양산 웅상의 편들이란 지명은 예전에 변씨들의 논이 하도 많았기에 변씨의 들에서 변들로 다시 편들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입향조의 아들로 가선대부 병조참의를 지낸 현동(玄東) 할아버지 때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교육청사 인근인 지금의 유곡동 지역으로 옮겨왔다. 태화동 동강병원 뒤와 유곡동, 성안동 곳곳에 전답을 가졌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변철종 종친회장은 "지금의 우정선경1·2차 아파트단지는 예전에 초계변씨들의 선산이었으며 1960년대 선경직물에 자리를 내주면서 인근의 태화공원으로 모두 이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초계변씨 울산파들이 본격적으로 울산의 곳곳으로 확산된 것은 입향조의 손자인 기복 할아버지가 상북의 명촌으로 옮겨갔다. 지금까지 종택은 큰 변화없이 예전의 그 자리에 있다. 종손인 태수(泰守)씨가 입향조의 16세손이다. 기복 할아버지는 11남2녀를 두었다. 그 아들들이 울주군의 상북, 삼남, 삼동, 언양, 중구 성안, 북구 호계 등으로 흩어져 또 다시 일가를 이룬 뒤 경북 경주, 양남, 양북, 부산, 서울, 안성 등까지 그 세를 넓혔다. 울산파의 회원으로 약 700여명이 등록돼 있다. 그 가운데 삼동 보은의 송정마을이 아직까지 집성촌으로 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종친회 총무를 맡고 있는 변동선씨는 "열한분이나 된 입향조의 손자들께서 울산의 곳곳으로 흩어져 일가를 이뤘으나 도시화가 되면서 이제는 그래도 집성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송정마을로 재실과 문중선산이 있는 중구 태화동과 성안동, 그리고 종가가 있는 명촌 이 세곳이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문중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울산종친회의 회기에도 천성산과 태화산, 함월산의 세봉우리를 형상화해 두고 있다. 종친회 변철종 회장 등이 매년 8월 여름방학 때 성모재에서 아이들을 모아 조상들의 내력과 함께 집안의 예절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고한 변동수 전 언양향교 전교와 변재선·변만선씨가 초계변씨 울산문중 출신이다. 이와 함께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변조웅 장군과 변철종 울산시 국장, 변재근씨, 변창섭 총경, 변성관씨 등이 군과 교육계, 관계, 경찰에서 활동하다 퇴임했다. 변상백 전 면장과 변기찬 전 출장소장도 같은 집안이다. 현직에서 활동중인 문중들로는 변양섭 울주군의회 의장이 선출직으로 눈에 띈다. 공무원 가운데 시 사무관으로 변동주·변정복씨가, 군 사무관으로는 변동구씨가 있으며 중구청에 근무중인 변건수씨가 있다.
교육계에서는 변철만 부산여대 교수와 변정용 동국대 교수, 변영대 영천고 교장, 변동섭 언양중 교감을 비롯해 변재철·변강섭씨가 고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변태곤 강북교육청 감리관도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종친회 회원이다. 또 변경민 공학박사와 변달석 공학석사도 집안이다. 변재국 대우자동차 부장도 마찬가지이며, 농협이사로 변춘호·변윤백씨가 활동하고 있다. 농협이사와 울산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하고 농협이사로 활동중인 변정의씨도 울산문중의 일원이다.
역대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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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조
변정실(卞庭實)(팔계군(八溪君)·시호(諡號) : 문열(文烈)·문하시중(門下侍中)) 변광(卞光)(시중(侍中)) 병위보(卞爲寶)(좌우위보승대호군(左右衛保勝大護軍)) 변돈(卞敦)(용호교위(龍虎校尉)) 변돈미(卞敦美)(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 변득형(卞得亨)(검교신호장군(檢校神護將軍)) 변득형(卞得荊)(사예(司藝)) 변용(卞勇)(검교감문대호군(檢校監門大護軍)) 변경(卞卿)(좌우위보승대호군(左右衛保勝大護軍)) 변주(卞珠)(좌우위보승상장군(左右衛保勝上將軍)) 변윤(卞贇)(문하평리(門下評理)) 변원(卞原)(상장군(上將軍)) 변우성(卞愚成)(판도판서(版圖判書)) 변중량(卞仲良)(호(號) : 춘당(春堂)·이조판서(吏曹判書))
▲ 조선조
변계손(卞季孫)(사간(司諫)) 변남룡(卞南龍)(한성판윤(漢城判尹)) 변옥란(卞玉蘭)(이조판서(吏曹判書)) 변순(卞純)(연안부사(延安府使)) 변타(장흥부사(長興府使)) 변굉(卞紘)(참판(參判)) 변효문(卞孝文)(자(字) : 일민(一敏)·예문제학(藝文提學)) 변효경(卞孝敬)(이조참판(吏曹參判)) 변효량(卞孝良)(우윤(右尹)) 변계량(卞季良)(자(字) : 거경(巨卿)·호(號) : 춘정(春亭)·시호(諡號) : 문숙공(文肅公)·대제학(大提學)) 변효량(卞孝良)(자(字) : 사우(士友)·호(號) : 경태(景泰)·찰방(察訪)) 변포(卞袍)(병사(兵使)) 변한(좌윤(左尹)) 변금(卞衿)(홍문교리(弘文校理)) 변질(卞質)(자(字) : 충보(忠甫)·병사(兵使)) 변심(개령현감(開寧縣監)) 변이흠(卞李欽)(호(號) : 지악헌(至樂軒)·진잠현감(鎭岑縣監)) 변구상(卞九祥)(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변영수(卞英壽)(사정(司正)) 변림(卞琳)(자(字) : 응보(應甫)·호(號) : 수묵·연안부사(延安府使)) 변산동(卞散仝)(자(字) : 자혜(子惠)·중직대부(重直大夫)) 변준(卞儁)(초계군(草溪君)·시호(諡號) : 충경(忠敬)·병조판서(兵曹判書)) 변충남(卞忠男)(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변훈남(卞勳男)(군수(郡守)) 변온(卞溫)(자(字) : 청헌(淸軒)·동복현감(同福縣監)) 변무(卞珷)(자(字) : 근석(謹碩)·훈련도정(訓練都正)) 변대헌(卞大獻)(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변경복(卞景福)(자(字) : 중신(仲申)·호(號) : 백음(栢陰)·효행(孝行)) 변종인(卞宗仁)(자(字) : 자원(子元)·시호(諡號) : 공장공(恭莊公)·공조판서(工曹判書)) 변회보(卞懷寶)(현감(縣監)) 변기수(卞耆壽)(자(字) : 국로(國老)·호(號) : 입재(立齋)·학행(學行)) 변응수(卞應壽)(자(字) : 희로(希老)·학행(學行)) 변유헌(卞有憲)(경력(經歷)) 변유정(卞惟正)(자(字) : 문호(文好)·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변몽량(卞夢亮)(자(字) : 경휴(景休)·호(號) : 평송(平松)·통제사(統制使)) 변여량(卞汝良)(훈련주부(訓練主簿)) 변국생(卞國生)(부장(部將)) 변시민(卞時敏)(자(字) : 사눌(士訥)·부사(府使)) 변시환(卞時煥)(자(字) : 휘경(輝卿)·현감(縣監)) 변시망(卞時望)(자(字) : 표경(表卿)·호(號)·공암(公巖)·호조좌랑(戶曹佐郞)) 변시익(卞時益)(자(字) : 우경(虞卿)·호(號) : 이지당(二知堂)·좌승지(左承旨)) 변시중(卞時重)(자(字) : 저순(著舜)·대사헌(大司憲)) 변성온(卞成溫)(자(字) : 여윤(汝潤)·호(號) : 호암(壺岩)·학자(學者)) 변성진(卞成振)(자(字) : 여옥(汝玉)·호(號) : 인천(仁川)·참봉(參奉)) 변국형(卞國衡)(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변국간(변국간)(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상증(卞尙曾)(자(字) : 양백(養伯)·號 : 사익재(四益齋)·효행(孝行)) 변황(卞榥)(형조참의(刑曹參議)) 변정민(변정민)(자(字) : 자선(自先)·호(號) : 수당(壽堂)·同知春秋館事)) 변홍건(변홍건)(첨사(僉使)) 변존서(卞存緖)(자(字) : 흥백(興伯)·부장(部將)) 변덕기(卞德基)(첨정(僉正)) 변포(卞抱)(자(字) : 군헌(君獻)·호(號) : 수옹(睡翁)·판관(判官)) 변상규(卞尙圭)(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동상(卞東尙)(자(字) : 대로(大老)·호(號) : 상우재(尙友齋)·효행(孝行)) 변동명(卞東明)(주부(主簿)) 변공의(卞公毅)(자(字) : 약무(若武)·부장(部將)) 변연수(卞延壽)(자(字) : 오원(五元)·훈련주부(訓練主簿)) 변혼(卞渾)(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변세림(卞世琳)(자(字) : 탁여(琢汝)·호(號) : 백은(白隱)·첨정(僉正)) 변삼근(卞三近)(자(字) : 용징(用徵)·호(號) : 귀항(龜巷)·형조참판(刑曹參判)) 변연호(卞璉瑚)(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일석(卞日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지건(卞至健)(자(字) : 여행(汝行)·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변지원(卞至遠)(자(字) : 자준(子駿)·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변지영(卞至英)(용천부사(龍川府使)) 변지복(卞至復)(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벽(卞璧)(자(字) : 여헌(汝獻)·호(號) : 덕은(德隱)·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성준(卞成俊)(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원규(卞元奎)(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 변유정(卞有晶)(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호응(卞浩應)(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승화(卞昇和)(공조참판(工曹參判)) 변시하(卞時夏)(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응와(卞應和)(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정희(卞廷喜)(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변일재(卞一載)(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귀재(卞貴才)(좌승지(左承旨)) 변상원(卞尙瑗)(이조참의(吏曹參議)) 변택말(卞宅末)(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위천(卞渭川)(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문옥(卞文玉)(호조참의(戶曹參議)) 변성순(卞聖順)(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화득(卞花得)(호조참판(戶曹參判)) 변필룡(卞弼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변홍기(卞洪基)(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형규(卞炯圭)(좌부승지(左副承旨)) 변우규(卞禹圭)(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의동(卞義東)(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운백(卞雲白)(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청순(卞昌順)(좌윤(左尹)) 변희준(卞希俊)(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변두상(卞斗相)(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봉필(卞奉弼)(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변종구(卞鍾球)(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변응수(卞應洙)(자(字) : 여혜·호(號) : 지재(志齋)·지평(持平)) 변달연(卞達淵)(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 변인수(卞仁洙)(형조참판(刑曹參判)) 변길수(卞吉洙)(좌승지(左承旨)) 변정상(卞鼎相)(부윤(府尹)) 변재영(卞載永)(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변천규(卞千奎)(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등과인명(登科人名)]
▲ 고려조
문과(文科) 변계량(卞季良)(우왕조)
▲ 조선조
문과(文科) 변효문(卞孝文)(직학(直學)) 변효경(卞孝敬)(이참(吏參)) 변구상(卞九祥)(사예(司藝)) 변철산(卞哲山)(이랑(吏郞)) 변강지(卞綱之)(승정(承正)) 변형량(卞亨良)(정자(正字)) 변헌(卞獻) 변삼근(卞三近)(참판(參判)) 변시익(卞時益)(승지(承旨)) 변시환(卞時煥)(현감(縣監)) 변황(卞榥)(참의(參議)) 변옥(장령(掌令)) 변응수(卞應洙)(지평(持平)) 변종헌(卞鍾獻)(교리(校理))
[조선조 급제자 정록]
계손(季孫)(태조(太祖) 2년·춘장시(春場試)·병과(丙科)) 효문(孝文)(태종(太宗) 14년·친시(親試)·을과삼과(乙科三科)) 효경(孝敬)(세종(世宗) 1년·식년시(式年試)·진사과(進士科)) 철산(哲山)(성종(成宗) 3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형량(亨良)(연산(燕山) 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헌(獻)(광해(光海) 2년·별시(別試)·병과(丙科)) 시익(時益)(인조(仁祖) 6년·별시(別試)·을과(乙科)) 시환(時煥)(인조(仁祖) 1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황(榥)(효종(孝宗)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옥(고종(高宗) 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응수(應洙)(고종(高宗) 17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계량(季良)(태종(太宗) 7년·중시(重試)·을과(乙科)) 구상(九祥)(세종(世宗)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강지(綱之)(성종(成宗) 23년·별시(別試)·병과(丙科)) 삼근(三近)(광해(光海) 3년·별시(別試)·병과(丙科)) 종헌(鍾獻)(고종(高宗) 29년·별시(별시)·병과(병과))
[벌열(閥閱)]
●공신(功臣) : 변옥란(卞玉蘭)(태조조 개국(開國)1등공신(等功臣)) 변중량(卞仲良)(태조조 개국(開國)1등공신(等功臣)) 변준(卞儁)(중종조(中宗朝)·중종반정(中宗反正)4등공신(等功臣)) ●문형(文衡) : 변계량(卞季良)(태종조) ●청백리(淸白吏) : 변훈남(卞勳男)(명종조) ●문집(文集) : 춘정문집(春亭文集)(변계량(卞季良)) 춘당유사(春堂遺事)(변중량(卞仲良))
족보
시조, 비조, 중시조 시조(始祖)란 제일 처음의 선조(先祖)로서 첫 번째 조상이며, 비조(鼻祖)란 시조 이전의 선계조상(先系祖上)중 가장 위사람을 일컫는다. 중시조(中始祖)는 시조 이하에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으로, 모든 중종(中宗)의 공란에 따라 정하여 추존한 사람이다.
선계와 세계 선계(先系)란 시조 이전 또는 중시조 이전의 조상을 일컫는 말이며, 세계(世系)는 대대로 이어가는 계통의 차례를 말한다.
세와 대 세(世)는 대체로 씨족에서 많이 사용되며, 시조로부터 혈통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탄생하는 인물에 대한 순번을 정하는 단위이다. 시조를 1세로 하고 그의 자(子)는 2세, 손(孫)은 3세, 증손(曾孫)은 4세, 현손(玄孫)은 5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이나 대통령, 교장, 회장, 사장 등 혈통의 흐름에 구애되지 않고 직책에 임명된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는 세를 쓰지 않고 대(代)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와 대는 다르다고들 말한다. 즉 세는 시조를 1세로 하여 차례로 따져서 정하는 것이고, 대는 기준이 되는 사람을 뺀 나머지를 차례로 따지는 것이다. 세나 대는 각자의 위치를 설정하는 숫자에 붙는 단위이지 기준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는 각 항렬에 붙는 고유번호라고 해도 될 것이다. 대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숫자라고 보면 된다.
이름자 ① 아명과 관명 옛날에는 어렸을 때 부르는 아명(兒名)이 있고, 남자가 20세가 되면 관례를 올리면서 짓게 되는 관명(冠名)이 있었다. 관명을 흔히들 자(字)라고 했다. 자는 집안 어른이나 스승, 선배 등이 성인이 된 것을 대견해 하는 뜻으로 지어 주었다.
② 호 옛날에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과 존장의 앞에서만 쓰이고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동년배, 친구 그 외 사람들은 자로써 불렀다. 한편 어린 사람이나 격이 낮은 사람, 또는 허물없이 부르기 위해서 호(號)를 지어 불렀다. 호는 남이 지어 줄 수도 있고, 스스로 짓기도 했었다. 호는 요즘도 쓰인다.
③ 시호 신하가 죽은 뒤에 임금이 내려 주는 호를 시호(諡號)라 하였다. 시호를 내려 주는 것을 증시(贈諡)라고 하였으며, 죽은 뒤 장례 전에 증시하지 못하고 훨씬 뒤에 증시하게 되면 그것을 추증시(追贈諡)라고 하였다.
④ 함과 휘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서 함(銜)이나 명함(名銜)이라 하고, 더 높여서 존함(尊銜)이 라고도 한다. 반면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휘(諱)라 한다.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血族) 안에서 상하관계(上下關係)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만든 서열로, 시조로부터의 세수(世數)를 나타낸 것이며, 정해진 글자로 각 항렬을 나타내는 것을 항렬자라 한다.
사손(嗣孫)과 사손(詞孫) 사손(嗣孫)이란 한 집안의 종사(宗嗣), 즉 계대(系代)를 잇는 자손을 말하며, 사손(詞孫)이란 봉사손(奉祀孫)의 줄임말로 조상의 제사를 받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출계와 제자 후사(後嗣)란 세계를 이을 자손을 말한다. 후사가 없어 대를 잇지 못할 때에는 무후(无后)라고 쓴다. 무후는 무후(無後)와 같은 의미이다. 무후가(无后家)로 하지 않고 양자를 맞아 세계를 이을 때는 계자(系子)라고 써서 적자와 구별한다. 계자의 경우는 세표에 생부(生父)를 기록한다. 또 생가의 세표에는 출계(出系)라고 쓴다. 양자를 들일 때는 되도록 가까운 혈족 중에서 입양한다. 또 호적이 없는 자를 입적시켜 세계를 잇게 하는 경우는 부자(附子)라고 쓴다. 옛날에는 적자 이외의 자로 세계를 잇고자 할 때는 예조(禮曹)의 허가를 얻어야 했으며 파양(罷養)을 하고자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 | | | |
첫댓글 기현아 2014년도에 이초안을 토대로 정리에서 시제때 발표토록 하자 아~자 홧팅!!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