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체육인 강원조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왜정 치하와 독립, 건국을 전후해 합천에서 청년운동과 체육경기 보급 지도에 앞장서서 오로지 건전한 체육정신과 경기력 향상에 전력해 합천의 체육과 문화. 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小雲 강원조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기념사업회는 '강원조 선생의 체육인 정신을 조명함으로서 합천의 정신적, 문화적 자산으로 가꿈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3월5일 합천스포츠센터 통합체육회 사무실에서 가진 '체육인 강원조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 날 회의에서 설립취지문 채택과 회칙을제정하고.
임원선출에서
회장 강석정 전군수, 당연직 명예회장 하창환 군수, 부회장 전석철 체육회 상임부회장, 사무국장 황득선 체육회 사무국장을 추대했다.
또, 강원조 선생 기리기 우선 사업으로는 4월에 개최되는 합천벚꽃마라톤대회에 '강원조 선생상' 제정에 관한 건의서를 집행부에 제출하고 차후에 조형물 건립등 기타사업도 발굴하기로 뜻을 모았다.
(아래 기사는 합천대야신문 2012년 11월 20일자 4면에 보도된 내용이다.)
체육인 강원조(姜元祚)선생
1980년 10월19일 파주육상경기장 결승점에 두 손을 하늘높이 번쩍 치켜들고 뛰어 들어오는 백발이 성성한 마라토너 강원조(姜元祚)선수! 이 날 경기도 노장마라톤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전국노장마라톤대회 70대 10km에 당당히 1등으로 들어온 선수는 합천출신으로 76세의 건각이셨다. 골인 하는 순간 선생의 뇌리에는 지난 세월이 고속필름 같이 스쳤으리라. 이 날 TV뉴스로 이 장면을 시청하던 합천 사람들은 모두 감동의 박수를 보냈었다.
소운(小雲)강원조(姜元祚) 선생님은 1905년 1월6일 합천읍 합천리638 번지에서 아버지 강석문(姜錫文)씨와 어머니 제완선(諸完仙)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17년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보(현,경북고)를 거쳐 일본체육대학교를 졸업하셨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체구가 단단하고, 총명하셨으며, 자라면서 동작이 날렵하시고. 성품이 강직하셨는데,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여러 종목의 운동을 곧 잘 했다, 高普시절인 1921년7월15일 여름방학 때에는 합천최초의 야구경기를 했는데, 유학생 팀의 대표로 선발되어 靑年軍 팀과 남정강 백사장에서 경기를 가졌었다. 이 경기는 당시 합천청년회 박운표(朴運杓)회장이 일본시찰을 마치고 5월에 귀국하면서 야구용품 일체를 구입해 와서 자신이 심판을 맡아 경기를 진행했었는데, 경기장엔 관중이 5백여 명으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관중들의 응원하는 환호성이 갈마산에 크게 메아리쳐 울렸고 경기는 12;11 靑年軍의 승리라는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그 때의 야구경기에 대한 합천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대회는 이 후 매년 계속되어왔다. 선생께서 대학시절에는 기계체조 선수로 전국 대표 급에 들어 1936년 베르린 올림픽에 출전하고자 했으나 대한제국 팀 이 불참하게 되어 가슴을 쓰러 안고 좌절하기도 했었다. 선생이 원산 루씨 여고에서 체육교사를 하고 있던 1935년1월6일자 동아일보에 <운동 정신이란 무엇?> 이라는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는데, 기고문 중 강조한 내용을 보면 “운동정신의 극치는 다만 규칙만 만든다던지 또는 규정에 저촉만 안돼 도록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요, 대회의 이상과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도의적, 인격적 통일에서 가장 자유롭게, 가장 유쾌하게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좇아 하라.”라고 썼다. 선생님은 루씨 여고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때에 가족들을 원산에 둔 채 국군을 따라 고향으로 남하 하여 합천중· 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하셨다. 선생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새벽 조깅을 집에서 왕복 4KM정도 되는 河泉水 까지 오가며 냉수마찰을 곁들여 하기를 30여 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주로 육상과 연식정구, 궁도에 시간을 많이 할애 하셨는데, 연식정구와 궁도는 군 대표로 경남의 각종대회에 출전하여 우승과 상위입상을 여러 번 했고, 노장마라톤은 전국대회(70세 10Km부)에서 10여 차례 상위에 입상했었다.
선생님은 한국노장마라톤협회 경남분회의 부회장과 합천지회장을 맡아 마라톤 육성을 위해 선수들을 힘껏 지원 노력하셨다.
강원조(姜元祚)선생님께서는 이계홍, 박흠, 백광흠, 이창식씨 등과 힘을 모아 1953년 합천군체육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1954년에는 합천. 의령. 함안. 창녕 등 4군 친선체육대회 개최를 창시하고, 이어서 거창. 함양. 산청을 포함한 7군대회로 까지 발전시켜 나가는데 주역을 맡았었다. 이 대회는 7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당시의 행사에 소요되는 비용의 대부분을 체육회 간부들의 갹출과 협찬금으로 충당했는데, 특히, 선생님의 국정교과서(초등학생)공급 대리점 운영에서 얻어지는 수수료의 대부분이 체육행사비로 쓰여 졌었다.
1961년 체육관계 법령이 개정되어 군수가 당연직 체육회장이 되고, 자치단체에서 행사에 소요되는 예산지원이 되어 경남도민체육대회를 개최함에 따라 체육계가 활성화 되면서 선생님은 도민체육대회 제3·4·5회까지 3회 연거푸 선수단 총감독을 맡았으며, 1967년도에는 경남체육회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선생님은 체육 외에도 지역의 교육·문화방면에도 열성적이셨다. 생계수단으로 <합천문화사> 간판을 내걸고 서점을 겸한 문방구와 운동구점을 경영했으며, 1954년에는 합천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경제적 환경 때문에 진학을 못하는 백여 명에게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중등과정 무료수업을 실시했는데, 필자도 그 학교에 다녔었다. 70년대에는 노인학교장으로써, 노인건강문제와 노년기를 보람 있게 보내는 방법, 가정과건강 등의 내용을 강의하시며 봉사하셨다.
또,1953부터 경향신문 지국장을 맡아 언론활동도 하셨고, 시간이 나면 붓글씨를 즐겨 쓰셨는데 행·초서에 능하셨으며. 자신이 소속된 단체의 간판글씨를 모두 붓글씨로 직접 휘호하셨다. 또, 학생시절인 1922년 1월 27일에는 합천청년회가 주최하는 웅변대회에 최연소 연사로 나서서 <자유>라는 연제로 나라 빼앗긴 민족의 한을 열변하여 청중들을 고무시켰다한다. 당시의 연사로는 이민좌(李民佐;시민운동), 강홍열(姜弘烈; 독립운동가), 강만달(姜晩達;유학자), 박운표(朴運杓;청년회)임학찬, 이석순, 이용수, 이면근, 강원조씨 등 10명이었다. 선생의 정치노선은 민주당 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정교과서 대리점계약을 자유당 권력에 의해 강제로 해지 당했다가 4·19 이후 다시 찾기도 했는데, 국정교과서 공급대리점 계약 규정에 보면 그 지역에서 서점을 운영 하는 자 중에서 1곳을 지정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자유당 권력자들은 교과서 회사에 압력을 가하여 합천의 1개 공급소를 중.북부, 동부, 남부 등 지역별로 분산시켜 자신의 측근들에게 이권을 나누어 주는 형식으로 선생의 밥줄을 빼앗았다. 선생님은 민주당 공천으로 합천면 의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선생의 생활철학은 정신. 이론. 실기를 합일 시키는데 두었다, 또,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北에 두고 온 가족과의 상봉이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81년 봄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인하여 기력이 급격히 저하되시면서 고통을 겪어 시다가 1982년4월19일 영면 하시니 향년78세이시다. 그 뒤 1997년 합천군민들이 수여하는 합천군민대상을 追敍하게 되니, 영원한 합천의 체육인으로 우뚝하게 빛나시리라. (전 합천군수 강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