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이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잔혹한 시기임을,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방식으로
괴롭고, 고통 받으며,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1978년이 아니어도,
말죽거리가 아니어도, 모든 청춘은 잔혹한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같은 사고와 행동을 반복
하고 있는 '동류'들 입니다. 이들은 수십 년간 같은 체인에 의해, 같은 모양새의 틀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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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되는 오래된 과자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맛은 언제나 씁쓸합니다.
이런 독특한 설정을 통해 이야기되는 "말죽거리 잔혹 사"는, 영화제작상의 여러 측면에서
너무나도 탁월한 성취를 거뒀기에, 같은 '복고 영화' 장르 내에서는 물론, 한국영화사를
꿰뚫는 '청춘 영화'의 계보 내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히 할 걸작으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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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교내 폭력'을 통해 청춘의 각박함과 방황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지난 날 '교내 폭력'
을 다룬 영화들이 보여준 몇 가지 시선, 즉 이들을 '신화적'으로 다루는 우스꽝스런 시선과
그저 '어딘지 모자라고 기괴한 사고체계를 지닌 아이들의 난동'으로 다루는 시니컬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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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마저도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일부로서 다루는 다소 위험한 시선 등에서 멀찍이
떨어져, 완벽하게 '기억'과 밀착되어 있는 가감 없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내 폭력이 이루어지는 상황 특유의 발작성, 의외성이 그대로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친우와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될 때 생기는 기묘한 관계의 재설정,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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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지 못하는 어슴푸레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상황과 인물, 미묘한 감정의 곡선을 이 영화는
완벽히 '기억'해내고 있으며, 그 '기억'으로 인해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시키는, 보기
드문 쾌거를 달성해냈다고 봅니다. "말죽거리 잔혹 사"의 플롯 자체는 그 닥 신선하지만은
않습니다. 한 눈에 반한 여학생을 두고 친한 친구와 벌이게 되는 삼각관계 구도와,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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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는 학생, 학교, 세상에 대해 복수극을 펼친다는 두 갈래 줄기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플롯은, '어디에다 있을 법한 이야기'라기 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며, 의외성과 독창성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고색창연한 파트들도 다소간 존재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부한 설정'은 유하 감독이 '기억'해내는 상황의 디테일과 감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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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사고의 디테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독특한 양상으로 변모해가며, 결국
'처음 보고 듣는 이야기'로 생각되어질 만큼 독보적인 영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성취는 '정확한' 기억만이 유지시킬 수 있는 밸런스, 밀착 적 시선과 관조적 시선의
절묘한 밸런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유하 감독은 단 한 번도 이 밸런스의 균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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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뜨리지 않고 종결까지 한 달음으로 내달리는 뚝심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출연진의 정확한 캐스팅과 연기통제 방식도 주목할 만합니다. 보통 배우들 개개인의
개성과 연기패턴보다도 감독의 연기통제 방식이 더 눈에 띈다는 지적은, 배우들 본인들로서는
어딘지 모욕적인 구석이 있을 법도 한 일인데, 이 영화의 경우, 감독의 방향성을 명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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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하고 연기의 '포인트'를 제대로 밟아준 배우들에게도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현수' 역의 권 상우에게 많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는 활달한 역 전문의 배우가
소심한 역에 도전한 상황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효과, 즉 꿈틀거리는 폭발적 본성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뜻한 불안정한 상태를 정확히 묘사해냄으로써 관객들의 복잡다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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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대를 일순간에 집중시키고, 폭발시키며, 또 와해시킵니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무술연마' 시퀀스들에서도 관객들은 '현수'에게서 의욕보다는
광기를, 흥분보다는 애잔함을 더 먼저 포착하게 되며, 결국 이 시퀀스들은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자 가장 폭력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맙니다. 외모를 중심으로 타입 캐스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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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과 한가인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역할을 조정시켰기에 배역의 소화에
있어서 별 무리가 가지 않았고, 특히 '약방의 감초'라는 식으로 반드시 집어넣곤 하는
'개그 전문 조역'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많은 호감을 삽니다.
줄거리를 서 머리 하면 권 상우는 상당히 착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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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학생입니다. 이 정진은 이 학교의 짱 으로 선도부의 2인자와의 신경전을 벌이긴
하지만 막강한 파워로 학교에서 위세를 떨치는 인물로 나오는데 저는 1학년 까지 권
상우로 2학년부터는 이 정진정도의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공부 못하는 태권도 관장의 아들 권 상우와 발랑 까진 엑스트라 엄마를 둔 더 까진 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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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정진의 이야기를 담은 청춘 느와르입니다. 이기지도 못할 상황에서도 꼭
덤비고 보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지요. 인생은 덤비면 안 되는데 돌아보면 제가
덤비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가 아니엇을까 생각합니다. 한가인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여자로 처음엔 쌈 짱 에 나름 훤칠한 이 정진에게 끌리지만 이정진이 그녀를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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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는 권 상우와 이어지게 되는 인연으로 나옵니다. 둘이 소풍같다가 "님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이 흘러 나오는데 솜털이 오삭하더리고요. 테입 녹음해서 생일 선물주는
장면에선 난데없는 '긴머리 소녀와 사랑하는 사람아'가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말죽거리 잔혹 사에서는 과거 고삐들의 다양한 내적갈등과 혼란을 잘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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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무협 만화처럼 서로 치고 박고하는 것을 멋있게 묘사하는 것이 아닌 조금은 유치
하기도 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세력싸움에서 그들이 보이는 가장 순수한 야망과 욕심,
그리고 청소년이기에 오는 아노미적인 가치붕괴까지 우리세대에서 조금은 이해가 가기
힘든 영역의 순수함을 보여줍니다. 싸움은 일진, 하지만 그 순수함만은 초등학생 수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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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상우는 떡볶이 집 아줌마에게 순정을 바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제가 대인동이라는 창녀촌에 가서 센 척하면서 바친 순정처럼 너무 당황해서 거부조차
못했지만 그의 마음엔 성욕보다 넘치는 한 가인에 대한 사랑이 있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사랑도, 싸움도, 학교도, 배움도 모두다 일순간 스쳐가는 시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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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죽거리 잔혹 사’에서 보이는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학교에
교사의 자격으로 있는 이들이 군인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학생들의 두발이며 인권에 대한
예민한 사회의 시선으로 인해서 교정이 무너진다는 기사까지 난무하고 있지만 과거엔
학생에게 인권 따위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던 시대이었습니다. 덕분에 싸움만 했다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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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교화하기 보단 처벌하려는 행위가 뒤따르던 시대였습니다. 이 역시 지금에 와서는
미친것 아니냐며 몇몇 불량 청소년들이 개 거품을 물만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들이 촌스럽게 차려입고 가는 고고장도, 이 소룡 프로 메이드를 보며 체력을 키우는
권상우의 모습도 일그러졌지만 아름다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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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100평은 족히 될만한 우리 집은 사람들이 앵비집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토방마루가 있는 한옥 집이었는데 돈이 없어서 왼편에 있는 부엌딸린 방 한 칸만 전세로
얻었습니다. 그래도 옆 집에 영택이 형이 이사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혼자 사용했습니다.
우리 집은 사방을 둘러싼 담벼락이 1.5m정도로 낮아서 골목을 지나는 어른들은 꼭 우리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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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쳐보고 지나들 갔습니다.우리 패밀리는 고3,고1,중2,초5입니다.
생활비는 제가 관리했어도 실제 부엌살림은 명희가 맞았습니다. 명희는 30분 쯤 걸어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 아침까지 챙긴 똑순이입니다. 어느 날은 제가 일어나 보니 정갈하게 놓인 상보에
쪽지가 있습니다. "찌게는 아궁이에 얹어 놨어" 진즉부터 부엌에는 연탄찌께 위에서 된장찌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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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거리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야물게 살림을 하고 있는 동생이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우리 집은 가져갈 것도 없었지만 친구들이 아예 함께 살다시피 해서 항상 오픈돼 있었고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보다 먼저 집에 들어와 밥도 먹고 펀치볼을 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우리 집 마당은 사과 나무부터 앵두 나무까지 유실수가 많았는데 뒤집에 자두나무가 우리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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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 주러주렁 열려 있어서 그 것도 우리들 몫으로 다먹었지요.
일도는 제 불알 친구로 소년원에 다녀왔고 현역입니다. 정진이 정도는 게임도 안되는 친구로
내 동생 진호와 같은 학교인 광 고1년 생입니다. 80년대는 우리나라의 혼란기였습니다.
담양은 태촌이 형이 사는 동네로 텃세가 센 곳이고 실제로 구 '오비'와 담양의 '우림'이 합쳐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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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 오비가 되었는데 김태촌의 후계자인 경선이는 제 동생 명희와 동창입니다.
물론 이때는 경선이가 아직 어렸지만 일도는 직접선배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우림파의
막강한 건달입니다. 일도가 자기 조직을 두고 우리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제가 우리 학교를
접수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으나 저는 늘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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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우림파 현역들과 부딪힐 때가 젤 힘들었습니다.
권상우가 혈전을 앞두고 맹 훈련을 한 것처럼 우리는 샌드백을 치며 키 높이의 발차기를 했고
헬스는 생활이었습니다. 물론 운동이라는 것이 몇 년 해서 아놀드 슈왈츠 제너거가 되지는
않았지만 몸무게 100kg을 육박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다보니 고단백질 섭취도 신경을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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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담장을 사이에 두고 노치과 집은 순옥이네 집입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순옥이는
중학교때까지 코보짱이라고 놀림을 받은 친구인데 어느 날 담양여고 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순옥, 현숙, 영미, 미숙 4인방이었는데 등하교길에 보면 샘터에서 빨래를 하거나
담 넘어 우리 집까지 들리도록 장계현의' 너, 너, 너' 를 불러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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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어머니께서 여인숙이 잘 돼서 김제에 반도여관을 하나 더 차리고 아버지에게 맡겨
놓아기 때문에 주말이면 2시간씩 차를 타고 김제와 정읍을 오가며 저는 사회와 장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사랑이 무언지 미움이 무언지 모르는 나에게 나에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너를 알고부터~"
2016.10.4.tue.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