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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8일
요절 39절: "그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와서 보라 하시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 첫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어떻게 사귀고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와서 보라. 이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가족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많은 성인들이 죽은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 예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 마리아, 세례 요한 세 사람의 죽음의 날을 기념하지 않고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을 말해줍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이는 그의 사역에 큰 성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1]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에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만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더욱 신경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을 유지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살이 높아져야 하고 자신은 낮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기를 원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훌륭한 교사, 자선사업가 또는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구원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 히브리서 9:13절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다음을 설명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심각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용서하는 능력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죄와 나쁜 감정과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죄용서를 믿지 않고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괴로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한 손으로 그들의 선행 목록을 들고 다른 손으로 그들의 악행 목록을 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하나님의 벌 받으신 것을 믿었을 때 우리 모든 죄의 목록을 깨끗이 지워 버리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충성스럽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우리의 어떤 선행과 큰 노력도 우리의 죄를 없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없애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용서뿐만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천국과 같은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와 넘치는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못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이 기쁨의 소식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으로 고통받을 필요도 없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한 양심에서 떠났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어졌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갑시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승인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우리의 삶은 밝고 즐거워집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교제와 행복하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약 1년 10개월 전, 저의 아내 에스더는 하나님 아버지께 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그리스도로 영접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저는 그녀가 1990년경에 쓴 신앙에 대한 간증의 일부를 여기 인용합니다.
“중학교가 집에서 약 8km 떨어져 있어서 저는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제때 수업료를 내지 못하여서 저는 수업 시간 중에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때 저는 학교 친구들 앞에서 매우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까지 저의 세계는 밝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저는 점점 말 없는 아이가 되어갔습니다. 누가 무엇을 물으면 저의 대답은 „예“ 또는 „아니오”가 전부였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부자는 되지 않을지언정 가난해서 괴로움은 당하지 말자"는 것을 저의 삶의 좌우명으로 삼음으로, 돈 버는 것이 저의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후 아버지는 병들어 고생하셨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으로 데려갈 수. 저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거나 수공예 기술을 배워 아버지와 가족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돈을 벌기 위해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가기로 결정하고 간호보조원 양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마친 후 1970년에 독일에 왔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돈을 벌어서 아픈 아버지와 가족을 도우면 행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내면의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에서의 삶은 저를 행복하게 하지도 만족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국에서 외로웠고 슬펐습니다. 오늘날 생각해 볼 때 그때의 저의 삶은 삶다운 인생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절망하며 방황하는 삶이었습니다.
2. 예수님과의 저의 삶 (1974년 이후부터)
1973년에 저는 박옥희 목사님을 방문하였었는데, 그분은 제가 독일에 도착한 해부터 제게 UBF에서 나온 “일용할양식" 성경읽기 보조용 책자를 우편으로 꾸준히 보내 주셨었고 저의 거듭남을 위해 줄기차게 기도하셨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하여 제가 근무하던 비텐 (Witten) 바로 옆 도시 보쿰 (Bochum)에서 근무하시던 이기향 선교사님을 소개받아 이분과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창 1장 1절과 3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저 또는 가족을 위해 살았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참된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후 창세기 12장 1-2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뜻을 영접하고 믿음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1974년 스위스의 제비스(Sewiss)라는 소도시에서 열린 여름성경수양회에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이때 이창우 목자님의 설교 중 요한복음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을 통해 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없는 삶은 참된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는 저의 삶은 어두웠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돈을 중심으로 죄 가운데서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에게 주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주셨고, 저의 어둡던 마음을 아주 밝게 해 주셔서 외국에서 사는 슬픔과 외로움의 고통에서 저를 해방하시고 참 기쁨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영접하자, 사죄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한 저는 평생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기쁨으로 에스더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대하기 시작했습니다.
2. 와서 보라!
이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과 메시야로 소개했을 때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세례 요한을 따랐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와 처음 두 제자[2]
예수께서 두 청년이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모든 사람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지?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지?”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구합니까? 예,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는 전부입니까?
안드레와 그의 친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을 때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안드레와 다른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거처는 어디입니까?"
두 사람은 예수님을 사귀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으며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 소개를 들었지만 예수님을 직접 사귀어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시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루 동안 그와 함께 지내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스스로 확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선생님,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당신을 방문하고, 당신의 말을 듣으며 당신을 사귀어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실제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근무를 하고나서, 저녁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TV를 보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찾아야 할지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병이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일시적인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단기적인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음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답하거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두 젊은이를 이해하시며 친절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것은 와서 예수님을 사귀어 예수님을 바르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알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즉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와서 저를 개인적으로 사귀고 바르게 아십시요! 나를 제대로 사귀어 알아 나를 믿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사귀고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개인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헸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발견보다 더 의미 있는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발견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주로 발견하고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기를 갈망하고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아가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기쁨을 거의 경험하지 못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아십니까?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이 전환은 저에게 평화와 기쁨과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70년 4월 6일 저는 대전 한국 대학생 모임에서 그룹 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18절을 배웠습니다. 놀랍게도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을 통해 저는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이시며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발견은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970년 5월 초, 나는 서울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주말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친절해서 그들의 친절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께서 제 마음문을 열어주셔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수양회에 참석한 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한국 대전의 대학생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7월 말 여름방학 동안 대전에 있는 우리 교회에서 일주일 동안 성경학교가 열렸습니다. 나는 이 성경학교가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참석했습니다. 매일 나는 먼저 스스로 사도행전 본무에 대한 문제지를 풀고, 그룹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었습니다. 그후 설교를 듣고나서 그 설교 말씀에 대한 소감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구룹 모임에서 발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학교로 인해 일주일 내내 모든 시간을 드려야 했습니다. 나는 이 성경학교가 그렇게 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시간 손해 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피해의식으로 어느 날 제 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자 이 눈물과 함께 제게 영의 세계에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순간 모든 것을 저 자신에게 유익하냐 아니냐는 관점에서 바라보던 자기 중심적인 사람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체험이었습니다. .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두 젊은이 중 한 명은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에게는 시몬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큰 기쁨으로 안드레는 시몬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으로 그의 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메시아를 찾았어!"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아 예수님을 소개합니다[3]
시몬이 안드레와 함께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당신 이름은 게바가 될 것이다.”
게바는 아람어 이름으로 바위를 의미한다. 게바는 헬라어로 베드로라고 합니다. 시몬은 모래와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반석인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름을 바꾸신 것은 베드로가 믿음과 신조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반석과 같이 되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시몬의 캐릭터는 어떤 면에서는 모래 같았다. 모래로 어떤 모양이든 빠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로 만든 구조물은 금방 무너집니다. 그러나 바위는 단단하여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름을 바꾸심으로써 변덕스러운 시몬이 믿음의 반석으로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시몬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희망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실제로 나중에 바위처럼 바뀔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귀하게 쓰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시몬같이 모래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결심은 모래처럼 잘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큰 희망을 주시고 언젠가 우리가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빌립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가 아니라 "예수가 빌립을 찾았습니다."
빌립은 아마도 예수를 믿기 힘든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제겐 초등학교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제 형수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그는 알래스카에서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이전에 아무도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교회나 믿음으로 초대하지 않았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40세에 사업에 실패하엿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를 교회와 신앙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고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우리의 상황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에게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초대를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빌립은 예수를 믿은 후에 나다나엘에게 가서 말하였다. 그 당시 가나는 이 지역의 주요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반면에 나사렛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없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날 수 있겠어?”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봐!"라고 대답했습니다.
“와서 보라!”는 이 말로 빌립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사귀어 예수님을 믿도록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사귀고 메시아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 와서 사귀어 보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구세주로 믿도록 예수님에 의해 초대받았습니다.
[1] http://kids.christiansunite.com/
[2] www.biblical-art.com/U-%5Cu-card%5Cu-card014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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