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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Review (2007. 12월)
이 순 구
한 계절이 변화한다. 올 한해를 돌이켜보면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각예술 작품들이 넘쳐나 창작에 대한 열정과 의욕의 발산으로 가득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의미에서는 문예적인 부흥기처럼 볼 수 있으나 그렇게 단정하는 경우는 없는듯하다. 오히려 세기의 초임에도 세기말적 불안정한 요소가 전 세계적으로 아직 남아있거나, 세기 초의 강력한 계획과 결심에 의한 과도한 행동의 실천이 확산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어째서 불안한 것일까. 교묘히 틈을 요리조리 조율하는 예술적인 취향들이 그렇고, 맛 집, 멋 집을 기어이 찾아내어 먹고 입어야하며, 한쪽에서는 기름범벅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져 망연자실한데 어느 지자체에서는 불꽃축제에 화사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 다양해서 좋다고 해야 하나, 그저 개념이 혼란스러울 뿐이다. 인문학적 글들에서는 여전히 '느림의 철학'을 아우르고 있는 사이 통신망과 광고들은 '빠름의 행동'을 실천하고 있다.
2007년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를 '교수신문'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자기기인自欺欺人"으로 정리했다.(교수신문12월24일자, 배원정 기자) 학력위조 사건이 문화예술계에 유독 많았고, 이중섭, 박수근의 미술시장에 유통되던 2834점이 모두 위작이라는 어마어마한 불감증을 가져다준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과하다 할 정도로 풍성하게 커버린 미술계의 외형적인 성장 이면에는 이러한 고질적인 도덕의 불감증이 만연된 것이다. 어디 미술계뿐인가. 우리는 곳곳에 연결된 인간사슬들을 인간관계라 한다. 이 관계란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의 기본성격을 띄지만 이를 아주 잘 활용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다. 언뜻 들으면 이것은 인간의 사회학적 구조의 기본이지만 그 구조라는 것이 단순치 않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관계의 아름아름에 의한 의식의 패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패거리문화 속에 존재하는 개인주의적인 사회에는 페어플레이가 있을 수 없다. 패거리문화는 집단적인 이득취하기와 또한 그 집단속에서의 개인적인 욕심 채우기의 결과는 무엇일까. 야합적인 결탁이다. 결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 속에는 냉철한 자의식이 발동되지 않는다. 얽히고설킨 관계들에서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의식이 발현될 수 있겠는가는 많은 사람들이 표현은 하지 않아도 경험한바 많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사회'를 배운다고 단정한다. '그렇게' 물들어가는 과정을 사회를 '좀 안다'는 인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또 꼬리를 문다. 처음 의욕적으로 새웠던 이념과 신념의 시간은 요원한 것인가. 앞으로의 시대에는 상부에서부터 하부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페어플레이를 기대할 수 없을까하는 다소 환상적인 생각을 잠시 해본다.
1. 변이된 형상과 풍자
동물이나 사물의 모습으로 형상을 표현하기 시작한 회화의 역사는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는데 예리한 시각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닮은 모습들은 대상의 외형적인 속성을 그려내었고, 이 외형적인 속성은 내면적인 성격의 표출이기도 했다. 외형그리기는 대상을 정확히 기록하게 되는 역할과 대상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이입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 예술과 비예술 사이를 이러한 관점에서 구분하였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분명 혼재한 유형의 시각예술 시대이다.
혼재한 유형 속에 웃음을 유발하는 변이된 형상과 풍자가 담겨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웃음의 미학>이라는 주제 하에「탈상투」그룹에서 기획하고 갤러리이안에서 후원한 전시(2007.12.13-12.19)이다.「탈상투」는 1998년 <이 시대의 돼지를 위하여>의 주제로 처음 전시회를 시작하였다. 물론 회원들이 같은 한 학교의 출신이란 점에서 다양성을 확보하기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회를 거듭하고부터 작업의 양상이 개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98년 <이 시대의 돼지를 위하여>를 시작으로<사형선고(99)>,<사계(00)>,<아버지(01)>,<거짓말(02)>, <탈상투 하이마트에 가다(03)>,<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04)>,<학창시절(05)>,<예술가의 선택(06)> 등의 주제어를 달았다. 그들의 작품을 처음부터 본 것은 아니었지만 전시의 주제들을 보면 그들이 작업의 틈에서 시대적 젊은이들이 고민했던 사고의 유형변화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을 언뜻 스치듯 보다가 2006년 롯데화랑에서 <예술가의 선택>의 주제로 열린 전시회에서 몇 점의 작품들은 눈에 띄었다.【그림1】은 자연목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태를 조합하여 붙인 작품으로 발칙한 강아지의 모습이다. 영역 표시하는 개들의 습성과 수컷의 번식본능이 전체적인 포즈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거기에 미소를 머금은 입에 빨간 장미를 물고 버젓이 생식기를 드러낸 채 구애하는 듯 표정이 익살스럽다. 몸체의 전반적인 나무를 고른 작가의 눈썰미와 이것을 희화화시켜 내는 작업의 완성도에 관심을 가졌던 작품이었다.
이번 <웃음의 미학>이라 주제를 붙인 전시회에 그와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탈상투」회원 각자의 생활 속에서 찾아낸 깨달음의 과정과 시각적인 발견을 <웃음의 미학>이라는 주제로 관람객과 함께 가가이 하기를 원했다.
【그림2)】서덕현, 방귀대장 뿡뿡이의 【그림2)】서덕현, 방귀대장 뿡뿡이의 토르소, 합성수지에 오브제 2007 <웃음의 미학>을 성도형은 웃음과 미학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고, 거기에 빗대어 작가노트에서는 "웃음 : 하하 호호하는 것인 듯함. 미학 : 미술시간에 일어나는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인 듯함. 웃음의 미학 : 미술시간에 일어나는 하하 호호하는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인 듯함."이라고 가볍지만 함축적인 비아냥거림 섞인 어조를 내비친다. 미술시간이 하하 호호거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전공을 한 이후 마냥 즐거워 할 수 없는 미술계의 현실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림3)】남형돈, 동심, 폴리에 아크릴채색, 2007
서덕현의 작품은 학교에서 배우는 아카데믹한 토르소에 만화캐릭터의 가면을 씌웠다. 어찌 보면 크게 새로울 것은 없지만 청동 빛의 무거운 토르소에 가볍기 그지없는 플라스틱 캐릭터의 부조화적 조화는 "아직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게 조소를 날린다."는 작가의 짧은 멘트에 핵심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된다.
남형돈의 <동심>은 말의 얼굴로 희화된 세발자전거를 타는 어린이다. '헤벌레' 벌어진 입과 벗겨진 머리, 다운증후군의 초점이 흐트러진 눈물 흘리는 눈, 이마에는 대변 모양인지 머리카락인지 모를 물체가 놓여있다. 색채는 뒤 머리카락과 동일하다. 그냥 장난감으로 보기에는 쓸쓸한 현실로 보인다. 바퀴에는「닌자」같은 놈이 붙어있다. 바퀴의 굴림을 제어하는 것인가. 녹녹치 않은 현실은 자전거의 라이트에 박힌 조각달에서 이상향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림4)】이필수, 아이고 내 새끼,2007 이필수의 <아이고 내 새끼>는 홍조를 띠고 열심히 알을 품는 암탉을 흥미롭게 만들었다. 코믹하게 만들어진 얼굴과 벌거벗은 통닭을 연상시키는 몸체를 가지고 태어날 아이를 위하여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다. 닭의 닭다운 품위(?)는 그저 엉덩이에 【그림5)】임종찬, 봉황 닭, 2007 붙어있는 털 하나뿐이다. 알을 품는 곳도 과거의 풍족한 닭장속의 볏짚으로 만든 곳이 아니라 작은 꽃바구니위에 불안히 정착했다. 근심어린 눈과 턱 아래 처진 벼슬이 애잔한 서러움 같은 것을 달고 온다. 굳이 붙이자면 사회적 풍자성도 보이는듯하지만 이곳에서 이야기를 멈추자. 그렇지 보지 않아도 형상과 몸짓 그 자체에도 충분한 희화성이 보이지 않은가.
【그림7】최성철,3학년6반 X나게 달리다, 2007 【그림6】김진아, Michael, 2007 또 하나의 조류가 있다. 임종찬의 <봉황 닭>이다. 봉황은 동양권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신비한 새이다. 이상적인 물성으로 신성을 겸비한 가공의 새이다. 오동나무에만 내려앉고 백년에 한번 피는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 했던가. 그래서 어릴 때 가끔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살핀 적도 있다. 임종찬의 <봉황 닭>은 코미디프로의「같기도」의 "이것은 봉황도 아니고 닭도 아녀!, 닭도 아니고 봉황도 아녀!"처럼 생활 구조의 혼재를 비꼬는 멘트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자연광이 잘 드는 갤러리에서 만난 <봉황 닭>은 민화적 요소를 물씬 풍기며 내달리는 포즈를 연출하고 있었다. 위용을 자랑하는 관을 머리에 이고 잘 조직된 겉옷과 멋진 꼬리를 달고 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를 황망함, 다급함이 서려있는 포즈는 닭도 아니고 봉황도 아닌 <봉황 닭>으로 이 시대에 서 있었다.
김진아의 작품은 만화「둘리」에 나오는 <마이콜>이라 불리는 자칭 가수이다. 빠글빠글한 머리에 까만 안경, 그리고 멸치처럼 마른 캐릭터이다. 이웃집에서 시끌벅적 소란한데 바로 <마이콜>이 노래 같지 않은 노래를 연습한다. 그 노래는 <라면과 구공탄>인데 후에 어느 그룹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진다.「둘리」는 가상의 캐릭터지만 경기도 부천시에 주민등록번호도 부여받은 진짜 존재하는 사회구성요인이다. 이 시대의 문화코드를 읽게 해주는 한 단면이다. 지면 속에서 선묘로 살다 애니메이션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으며, 드디어 인간세계의 일원이 되는 창작의 힘은 새로운 DNA를 개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진아는 유년에 간직했음직한 「둘리」중에서 가장 희극적인 <마이콜>을 선택하여 저부조로 만들어 드로잉과 함께 액틀에 끼웠다. <마이콜>은 떠올리기만 하여도 재미난 캐릭터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최성철의 <3학년6반 X나게 달리다>는 외발 자전거에 평면으로 만든 추리닝의 짓궂은 표정을 한 녀석이 자기 몸과 같은 가상의 핸들을 잡고 신나하는 모습이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은 짓궂거나 음험한 캐릭터의 특성을 잘 표현한다. "3학년 6반"이란 36세의 나이를 지칭하는 치기어린 표현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조형작업을 하며 오는 탄성력과 거기에 비례해 오는 불안감을 풍자한 느낌이다.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것, 조형작업을 하며 산다는 것은 그리 행복한 것도 아니고, 그리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3학년6반 X나게 달리다>의 표정을 보며 자꾸 혼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이된 형상과 풍자는 미술가들에게 많이 쓰이는 기법이다. 풍자가 현대에는 코미디프로나 신문지상의 카툰에 많이 몰려있는 듯 여겨지지만 한국전통의 그림화첩들에도 자주 있어온 주제이다. 또한 대중화가가 그린 민화의 면면을 살펴보면 풍자와 위트의 기지들이 넘쳐 남을 볼 때 생활의 저변에 흐르는 웃음에 대한 욕구는 끝없이 진행 될 것이다.
「탈상투」그룹은 처음 가지고 출발했던 의미가 앞으로 퇴색하지 않기를 바라며, 학연뿐만 아닌 폭넓은 활동에 의한 좋은 계기로 발전 지속하는 모임들이 속속 출현하고 유지되었으면 한다.
2. 기념비적 서정
과거 우리는 산마루에 오를 때 돌을 하나 던진다. 그 돌들이 쌓여 돌무덤이 형성된다. 이는 탑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치의 돌 세 개 주어다 정성껏 쌓으면 돌탑이 된다. 이는 기념비적인 탑이다. 조각은 나무뿌리나 돌을 골라 어떤 형상을 만들며 시작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동안 한국사회는 웬만한 건물 앞에 조형물을 세웠다. 더불어 치열한 경쟁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 그 작품들을 보면 도시곳곳에 처치 곤란한 생각이들 정도로 방치되었거나 묻혀있다. 그 당시 조각 작품에는 당시 어느 평론가가 말했듯이 "X무더기" 같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비슷한 유형들이 많았다. 기념비적인 조형물은 적어도 시대와 공존하며 공간을 초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바라봄의 미학>은 조각가 양충모가 조각과 조각의 이야기를 펼친 전시회이다.(2007.12-20-12.26 우연갤러리) ‘조각이야기’란 작가가 팸플릿에 펼쳐 논 그의 작가적 메모와 느낌들의 단상들이다. 전시장엔 오로지 조용한 작품들만 놓여있었다.
양충모는 대전충남의 2세대 조각가로 말할 수 있다. 1세대가 외지에서 들어온 교육자 세대라면 바로 다음으로 수학한 세대인 것이다. 따라서 척박한 세대를 거쳐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많은 실험도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맥은 <기념비적>조각에 관심을 둔 듯하다. 여기에 대체적으로 작품의 유형은 유려하거나 절제되어있다. 지난시절 내 보였던 폐목에 의한 작업들은 토속적 느낌을 묻혀 나왔던 반면, 이번에 모은 작품들은 모뉴멘트성 유형이 많이 제시되었다. "함축된 내용과 조형적 가치가 조화를 이룬 하나의 작품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세월을 인정받고 싶은 솔직한 심정을 밝히는 전시"라는 작가의 말은 그가 지나온 세월의 몇 토막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번 팸플릿에 쓰인 글들은 작품을 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진솔하게 표현한 일기형식의 어렵지 않은 글들이다. 때로는 좌절과 용기가 동시에 나타나고, 때로는 희망과 애환, 삶의 본질과의 고뇌, 생명에 대한 애착심과 갈증들이 생활과 예술의 틈에서 고민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단상의 글은 글일 뿐이다. 작품과는 구분된다. 관람객이 보기에는 양충모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겉과 밖을 혼재하며 맴돌고 읽혀진다.
【그림7)】양춤모, 상생의 징후, 2004
그는 <바라봄의 미학>에서 "바람 봄은 겸손이요 성찰이다. 존경과 섬김이며 나눔"이라고 한다. 이는 작가가 작업에 한 바라봄의 성찰을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신학 공부를 한 지성인의 삶의 성찰인가? 잠시 머뭇거려지지만 삶과 작업이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명쾌히 드러나는 것을 많은 작가들도 알고 관람자도 안다. 그의 앞날에 기념비적 서정이 가득하길 빈다.
2007년에 많은 작가들의 작품전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작품들도 많았지만 그곳까지 시선이 미치지 못한 곳도 많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지면특성상 모든 작품전을 리뷰로 쓸 수 없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기준한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많은 전시정보는 안내책자를 참고하시면 되리라 생각됩니다. 2008년에도 건강하시길 지면을 빌어 새해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