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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권은 8권 '위기와 극복'편입니다. 저번에 네로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의
그런 사이코패스 폭군은 아니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아무튼 네로가 죽은
뒤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갈바'였습니다. 명문가였기 때문에 핏줄 상으로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행한 몇 안 되는 대부분의 조치들이 삽질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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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잘못된 인사로 군단이 그에게서 돌아서버렸어요. 비텔리우스를
필두로 한 반란이 벌어졌고, 갈바는 68년부터 69년도까지의 1년 남짓한
치세를 끝내고 허망이 살해되어요. 갈바에 대한 타키투스의 평이 기억에
남아 인용합니다. “좋은 자질을 타고났다기보다 나쁜 자질이 전혀 없었던
데 불과한, 요컨대 평범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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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황제는 네로에게 아내를 뺐긴 기억이 있었던 '오토'입니다. 오토는,
갈바처럼 너무 평범해 황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어요. 집안이 귀족이 아님에도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사람
들로부터 인망도 두터웠어요. 네로정권을 뒤집고 갈바에게 처음 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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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것도 바로 오토였지만 이후 갈바가 인사정책에 있어서 하나, 하나 모두
너무도 뼈아프고 결정적이 실책들을 하자, 오토는 결국 갈바에게서 뒤돌아섰고
근위병들을 회유했고 근위병들은 갈바가 암살자들에게 당하는 것을 수수방관
했어요. 그리고 근위병과 시민들의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황제자리에 앉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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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진 성공적이었으나, 69년 1월 15일부터 동년 4월 15일이라는 3개월
이라는 짧디 짧은 치세기간이 보여주듯, 황제로서 뭣하나 제대로 해보지 못
하고 무너졌어요. 왜? 위에서 언급한 야심에 불타는 '비텔리우스'의 반란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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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오토의 생각대로 되었을 것이지만 예정대로
진행되는 일이 거의 없는 게 인간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
에게 임기응변이 요구되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것이 오토의 약점이었어요.
실전을 알았다면, 만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어야만 효과가 있는 전략은 애당초
세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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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는 숙주 통치나, 정치력에 있어서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문제는 군사
적 경험이 아주 없다는 것입니다. 황제군의 사령관으로 경험 많은 장수가
아닌, 자신과 마찬가지로 실전경험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근위대장을 발탁했고,
비텔리우스 군이 그렇게 강력한 군대가 아니었음에도 결국 전투에는 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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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의 마지막은 자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토 다음으로 황제자리에 오른
비텔리우스는 어땠는가? 그는 오토보다 더 멍청했어요. 오토군을 격파하고
로마로 가는 길에 그가 보여준 행동들은 하나같이 무분별한 언동과 환락과
경망이었어요. 그가 저지른 것은 내전이었기에, 내전에 대한 발 빠른 수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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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했는데, 수습은 나발,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어요. 이때 쌓인 반란군들의
불만은 몇 개월 뒤, 이어서 벌어진 베스파시아누스의 궐기 때 다시금 폭발
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해야할까나. 참고로 비텔레우스의 치세는 전임자
인 오토보다 몇 개월 더 해먹은, 69년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에 불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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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네로 사후 약 2년간의 시간동안 황제가 무려 3번이나 바뀝니다. 로마는
혼란했고, 게르만족은 이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어요. 또한 네로시절부터 시작된
유대전쟁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어요. 이런 난국 속에서 흔들리는 로마를 다시
붙잡고, 이후 이어지는 오현제 시기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되는 사람이
'베스파시아누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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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이 사람은 참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일단 아버지는 아시아
속주 출신으로 징세청부업자였어요. 오늘날은 국가가 징세업무를 담당하지만,
이 시절 로마는 징세업무를 민간에게 위탁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징세청부업자
들 만일 징세를 못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징세를 대신 내줌으로써 이후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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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징세에 대한 이자를 받는, 그러니깐 사채업자였어요. 이런 사람의 장남도
아니고, 차남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정국을 주도했던 엘리트 원로원
이나 일부 명망 있는 기사계급들에 비하면 미천하기 짝이 없는 신분으로 인생
을 출발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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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출세에 뜻이 있었던지라, 형을 따라서 로마 공직에 입문했고, 36년엔
트라키아 지방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장교라고 적어놨지만, 당연히
말단 장교였어요. 근데, 워낙 부지런하고 꼼꼼했기 때문에 실력으로 꾸준히
승진해나갑니다. 그래도 이 시절엔 참 핏줄이라는 게 워낙 중대한 요소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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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래도만 있었다면 황제는 무슨, 장군 자리에도 못 올랐을 인물이었어요.
게다가 네로 황제 치세말기엔 그리스 별궁에서 네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
하였다가 네로 황제의 시를 들으며 졸았다는 이유로 출셋길이 막혀 버리기
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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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로부터 2년 뒤에 유대전쟁이 터졌어요. 내가 7권 리뷰 때 언급했나
모르겠는데, 네로는 내정에선 바보였지만, 외교에선 나름대로의 탁월함을
보였던 황제였어요. 유대에서 전쟁이 터지마 전쟁을 종결할 사람으로 베스파시
아누스를 발탁합니다. 출신이 미천했고, 자기 시를 들으면서 졸았던 짜증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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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私)였지, 공(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생 끝난 줄 알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지휘관으로 다시 군단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뀝니다.
당시 갈바-오토-비텔리우스로 이어진 황제들의 치세는 병맛5이었고, 이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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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변방에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이집트 장관 알렉산드로스가 유대전쟁을 수행하던 지휘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비밀 회담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 회담에서 새로운 역사에 대한 논의가 전개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결정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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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위라는 황제의 역할을 증명하기 위해 유대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로 했고,
무키아누스는 수도로 진격했다.6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로마로 들어가는
이집트의 밀을 잠정 중단시켜 본국에 경제적인 제스처를 보였고, 이후엔
베스파시아누스의 유대전쟁을 도왔다. 이 세 박자는 척척 맞아떨어졌고, 서기
69년 12월 21일 베스파시아누스는 팔자에도 없던 황제자리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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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 사령관은 언어에서부터 피부색이며 음식까지 서로 다른 병사들을 통솔
해야 했어요. 군단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느닷
없이 끌려나와 참전한 아랍병사들에게 라틴어가 통할 턱이 없지요. 로마 황제들
가운데 군인 출신이 많은 것은 로마 제국에서 군인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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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잡다한 인간 집단을 이끌고 전과를 올릴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면
정치도 잘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10년 동안의 치세는 나름대로의 선정
이었어요. ‘황제 법’8같은 약간의 삽질도 저질렀지만, 제국의 방위와 경제는
정상궤도로 복귀했고, 베스파시아누스도 워낙 소박한 인물이었기에 ‘서민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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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행보를 이어갔어요. 특히 재정의 건전화에 힘썼는데, 인색하다는 불평을
들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정책이었으며 또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유머감각에 대한 일화들도 참 재미 진데, 분량 상 여기선 패스. 한번 찾아
보시라. 베스파시아누스가 서거한 79년엔 그의 맏아들 티투스가 황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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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랐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영민하고 검소했던 인물이었어요. 문제는 자연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로마엔 대화제가 벌어졌고 폼페이에선 난데없이
화산이 터졌어요. 재난수습을 전두 지휘하던 새 황제는 어이없게도 2년 만에
과로사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티투스에게 오랫동안 통치의 경험을 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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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 다음에 황제자리를 물려준 것처럼, 티투스도 동생에게 그런 경험들을
해주리라고 믿었건만, 예기치 않은 죽음에 30대의 도미티아누스가 졸지에
황제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리하여 30세의 새 황제는 통치에 필요한 실무
경험도 없이 제위에 오르게 됐어요. 그래도 황제 일에 참 열성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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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이런 열정적인 모습은 아마도 베스파시아누스 집안의 전통인
듯싶은데, 안타까운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과의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내 생각엔, 그는 아마도 로마의 번영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관철하기 위해선 우둔한 원로원을 배제한 자신만의 강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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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가 시행한 병사
들의 봉급 인상, 외교책,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 내각설치, 사법의 공정화
노력, 야간경기 개최, 교육사업 등의 모든 정책들은 도미티아누스 후대의 황제
들이 그대로 계승하여 더욱 유지보수에 힘썼을 만큼 꼭 필요하고 중요한 정책
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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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적만으로 모든 것이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 세계의
어처구니없는 진실 아니겠는가? 이런 통치과정에서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에
대한 배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행한 것은 원로원들을 짓누른 철권
통치였고, 공포정치였어요. 타키투스의 말을 인용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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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는 소홀히 하고, 거리낌 없이 간통을 저지르고, 바다
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 나르는 배가 넘쳐흐르고, 암초는 이런 희생
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혈통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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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 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
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 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만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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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
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도 친구 때문에 파멸 당
했다.” 분노가 끓어 넘치는 문장입니다. 근데 저 문장들은 모두 진실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실제 도미티아누스는 종교제의에도 열심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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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죄 처벌법을 되살린 것도 도미티아누스였어요. 결국 문제는 종신직인 원로
원 의원을 재적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재무관에 종신으로 취임하여, 고발
자들을 이용한 일종의 함정수사를 통해 원로원들을 탄압한 것이었다. 도미티아
누스의 치세 15년 동안 사형당한 사람은 8,9명, 추방당한 사람은 5,6명
그리고 공직생활에 절망하여 은둔한 사람이 3,4명이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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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원로원들의 이해관계였지, 군단이나 시민들의 문제는
아니었어요. 실제 도미티아누스 치세는 원로원을 제외한 자들에겐 선정이었기
에, 별 불만 없었다. 마치 오늘날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보는 우리 국민들의 모습처럼. 그럼 도미티아누스는 누가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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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 반대파들은 철권통치에 힘을 잃었고, 군단과 시민은 불만이 없었어요.
암살의 원인은 도미티아누스의 가정과 최측근들에게 있었습니다. 자세한 얘기
를 할 순 없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 제위계승자를
조카딸의 두 아들로 정해, 그들을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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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인 플라비아와 클레멘스가 이교에 귀의해버렸던 것입니다. 로마는 원래
종교에 관대했던 나라였지만,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의 친부모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버리고 이교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와는 별개 문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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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황제가 될 신분이 아니었는데도 황제에 올랐다는, 그런 느낌의 콤플렉스
가 도미티아누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황실에 어울리지 않은 짓을
저지른 이들에게 냉혹히 대처했어요. 조카딸 플라비아는 유배를 갔고, 황족인
클레멘스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일가붙이가 처형당한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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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씨족은 불안해졌어요 여기에 가정적으로 삐걱거렸던 도미티아누스
의 황후의 증오가 뒤섞였어요. 암살은 단행됐고, 도미티아누스는 어이없게
죽어버립니다. 이후 그는 ‘기록 말살 형’에 처해져요. 그래서 그가 악인이었냐
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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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얘기를 마저 하자면, 다음 황위는 '네르바'에게 돌아갑니다. 난데없이
갑자기 등장한 이 친구는 뭐냐고? 내 말이. 네르바는 명문귀족이었지만,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그냥 평범한 사내였다. 원로원이 황제 직을 권했을
때도 71세의 고령이었어요. 혹시 그가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가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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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언급하지 않아요. 뭐, 네르바가 원로원 귀족이니 원로
원을 탄압하는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하고 제위에 올라 원로원의 권력을 회복
하려했다, 는 식으로 얘기를 엮어보려면 어떻게 얘기를 엮어 볼 수도 있겠지
만, 71세로 죽을 날도 얼마나 안 남은15, 결정적으로 제위를 물려줄 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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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던 사람이 네르바라는 남자였는데, 그가 뭣 하러 그런 야심을 발휘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딱히 여기관련 기록도 없고. 그래서 나도 네르바의 도미티아누
스 암살설에 대해선 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원로원은
왜 네르바를 선택했나? 아마 그가 친도미티아누스파도 아니고 반도미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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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 고령이기도 했고,
아들이 없다는 점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싶습니다.
오현제 중 첫 번째 황제라지만, 정말 딱히 한 게 없는 인물이 바로 네르바
라는 인물이다. 짧은 치세 동안 네르바가 한 유일한 업적은 트라야누스를 양자
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왜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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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딱히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원로원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군단에서도 환영했기 때문이라고 간략히 적었지만, 개인
적으로 나는 네르바가 군단을 심각하게 의식했던 탓으로 보입니다.
위에서부터 거듭 적고 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나름대로 황제노릇을 참 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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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었어요. 군단은 그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었어요. 이런 황제를 하루
아침에 암살해놓고 네르바라는 군단도 잘 모르는 사람을 제위에 앉혔으니,
군단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낼 리 만무했습니다. 실제 군단은 네르바에게 소극
적인 지지만을 표했을 뿐이었다. 당시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군 사령관이었던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는 것은, 이런 군단의 적극적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한 수였을 것입니다.
2.
로마인 이야기 8은 네로 이후부터 네르바 전까지의 황제들에 대한 이야기
인데 황제라고 해 봐야 선정을 한 놈은 없어 보입니다. 네로의 14년 통치
부터 이번 책에 나오는 황제들은 일을 열심 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어서,
아니면 그냥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황제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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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 -> 오토 -> 비델리우스 ->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타우누스
-> 네르바가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네로가 자살을 하면서 춘추전국
시대가 됩니다. 이 시대에 나온 갈바, 오토, 비델리우스는 끝이 좋지 않아요.
이들은 자살을 하거나 죽임을 당한 황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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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타우누스는 가족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스라엘의 봉기를 진압 하러 갔다가 황제가 되었고 다음 황제를 미리 지정
하지 않아서 생기는 권력 공백을 없애기 위해서 티투스와 도미타우누스를
다음 황제로 지정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를 황제 교육을 시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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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도미타우누스는 2년의 기간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집권을 하면서 로마의 방위 및 공사를 많이 했습니다. 암살을 당
하면서 네르바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전에는 권력에 의한 암살이라면 이
암살은 여자의 질투가 아닌가 싶네요. 집에서 노예들에 의해서 암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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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시대에 그 유명한 ‘폼페이최후‘가 발생합니다. 그 시대의 편지에 의한
생생한 묘사가 책에 나옵니다. 그리고 로마의 대 화재 , 전염병이 돕니다.
의사와 교사는 로마시대에서는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전염
병을 치유하는데 동원 되었어요. 티투스는 전염병이 돈 이후에 요양을 하러
가서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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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적인 티투스가 조금 더 살았다면 로마는 어떻게 변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도미티아누스가 그렇다고 못한 것은 아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서 군영을 돌고 군대 지휘도 하였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여러 황제가
바뀌면서 재정이 열악한 로마를 증세 없이 도미티아누스에 대공사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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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될 정도로 안정화 시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로세움이 이때
지어졌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빵과 놀 거리(야간 경기)를 제공합니다.
지금은 야간 경기가 쉽지만 이전에는 어둠이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어두워지면 잠을 자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야간 경기는 많은 돈이 들 것
입니다. 이런 일을 해도 될 정도로 재정을 안정화 시킨 걸 보면 세수 정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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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한 것 같아요. 현시대에도 재정의 안정화를 위해서 합당한 세금을 걷으면
재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지나온 길의 깊이가 깊고
넓은 것 같아요. 카이사르로 인해 다른 황제들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 들
만큼 카이사르의 전쟁, 그리고 정치 모든 것이 엑설런트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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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아들 티투스가 이스라엘의 봉기를 정리해요.
이스라엘 신전을 불태워 버려요. 유일신앙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유일 신앙으로 인한 로마와의 거리감 그리고 로마인의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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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이스라엘 본국의 봉기에 대해서만 무차별 공격으로 정리를 하고 본국
의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는 대우를 합니다. 이것이 로마의
역사가 오래 동안 이어지게 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네요.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보다 언행의 자유가 제한된다. "
(카이사르)
3.
메모한 구절들
아무리 이치에 맞는 전략이라 해도 인간적 요소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탁상
공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p129
존경심은 무력보다 효과적인 전쟁 억지력이 될 수 있다. p177
“그리고 게르만족이 갈리아 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상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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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먹는 말은 언제나 자유와 독립이다. 하지만 잊지 말라. 남을 지배하려는
민족치고 이 두 마디를 기치로 내걸지 않는 민족은 하나도 없다는 인간 세계
의 냉엄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갈리아 족들에게 게르만족반란에
대해 연설하는 페틸리우스 켈리아라스의 연설문 中 p188
-
다신교 민족의 경우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는 반면, 일신교 민족의
정치체제는 종교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신권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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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생활양식, 인종이 달라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옥쇄는 후세를 감동시킬 수 있을지언정, 결국은 자기만족에 불과
하다. 요세푸스는 거기에 도취할 수 없는 유대인이었다.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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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로마군의
전법은 병력이나 무기나 군량 보급 같은 확정 요소를 정비하는 것에서 시작된
다. 그런 다음, 아군은 병사들의 사기 면에서도 적군보다 우세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력 같은 불확정 요소는 맨 마지막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는 이 불확정 요소가 가장 중시되었다.
일본이 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p246
-
민주 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뜻밖에도 다른 폴리스 출신이나 노예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사회였던 반면,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 정 이었고 제정 시대
에는 군주정으로 바뀐 로마가 아테네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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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이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라이벌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여자끼리의 문제지만, 한쪽이 죽으면 남자의
기억 속에 있는 여자가 라이벌이 된다. 교양 있고 성격도 드세고 자존심도
강한 여자에게, 남자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라이벌만큼 힘든 상대도 없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여자의 가슴 속에 솟아나는 증오는 라이벌의
그림자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에게 돌려지는 법이다. p423
4.
'폼페이 최후의 날’은 스릴, 드릴, 서스펜션이 완전 쩌는 스펙터클입니다. 감독을 칭찬해야할지 원작을 쓴 에드워드에게 경의를 표해야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십 수 년 전에 양재 동 문화 센터에서 보았던 폼페이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면서 두 어 시간 기도 굴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 촌음을 아끼면서 열심히 잘 살아야겠습니다. 폼페이의의 최후는 ‘쿠어바디스’, ‘벤허’, ‘파비올라’등과 더불어 초기그리스도교 시대의 4대 명작으로 손꼽습니다. 작년에 묵상한 요한계시록을 통해 로마의 멸망 원인으로 ‘향락과 사치’라는 결론을 얻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확인 사살을 한 셈입니다. 다만 연대기 - 문제는 성경과 약간 차이가 있어 보였고 62년에 화산 폭발이 일어났으면 네로 치세인데 티투스가 거론 되는 것이나 AD70경의 예루살렘 정복 사건이 빠진 것이 의문입니다. 하여튼 풍류와 향락을 추구하는 로마 상류사회의 젊은 남녀 사이의 사랑, 갈등, 모험, 음모가 엇갈리는 가운데 마지막 장면의 - 극적인 구성은 저를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몰아갔습니다. 어릴 적 로마 군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뒤 노예 검투사가 된 마일로’(킷 해링턴 역)는 폼페이 영주의 딸 카시아(에밀리 브라우닝 역)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고 풍요를 기원하는 비날리아 축제의 대규모 검투 경기에 참여한 마일로는 자신의 - 부모를 죽인 ‘코르부스’(키퍼 서덜랜드 분)를 발견합니다. 로마의 상원 의원이 된 ‘코르부스’는 카시아와 정략결혼을 계획하는데 노예 마일로가 부모의 복수와 자신의 연인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건 최후의 검투에 나서게 됩니다. 영화니까 클라이맥스를 향한 플룻이 전개 - 되겠으나 하필 그 순간 갑자기 폭발을 시작하는 베수비오 화산, 도망칠 새도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에 폼페이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데 한 순간도 서로의 시선을 놓지 않았던 두 주인공의 버-닝 러브는 전율 그 자체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본 착한 영화입니다. - 엔딩에서 주인공 남녀가 화석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저는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우리 가족이 떠올랐습니다. 아, 멋집니다. 내일 또 해가 뜬다면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쥐, 2020.10.20.tue.악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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