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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국보와 보물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보물 1960호(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충남 아산 세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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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세심사 전경 |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백제 때 창건하였으며 654년(신라 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중창하였다고 전하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 《범우고》 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일타(日陀)와 도견(道堅)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세심사로 고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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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사찰로 올라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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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누각 밑 계단을 올라서 경내로 진입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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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각 밑의 계단을 다 오르면 경내 전경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
세심사 다층탑(충남 문화재자료 23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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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다층탑 전경 |
고려시대에 창건된 세심사는 원래 ‘신심사’였다가 최근에 세심사라 그 이름이 바뀌었다. 절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탑은 3층 기단(基壇) 위로 9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기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탑신부는 벼루를 만드는 돌인 점판암으로 제작하였다. 3층을 이루는 기단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곳곳에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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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다층탑을 정면에서 좌측으로 돌아 본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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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부는 1층 몸돌만 4단의 널돌로 만들었고, 나머지 여덟 층의 몸돌은 모두 1매의 널돌로 만들었으며, 각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2단씩이고,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네 귀퉁이는 들려 있지 않고 깎여 있다. 꼭대기에 놓인 점판암의 머리장식들은 후대에 새로 조각하여 얹어놓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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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다층탑을 후면에서 좌측으로 돌아 본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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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돌을 다듬은 수법과 재질의 특수성·조각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짐작된다. 원래는 탑신의 몸돌이 없어져 기단 위에 지붕돌만이 남아 있었는데, 1956년 일타·도견 두 스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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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전경 |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소조(塑造)아미타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 18)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勝初)·원정(元正)·보심(普心)·품관(品寬)·대운(大云) 등이 그렸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 산신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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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사 대웅전 내부에서 행사 중이어서 소조여래좌상과 신중도를 볼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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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전방 좌우에 위치한 전각 |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靑石)으로 만든 구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231)이 있는데, 상륜부(相輪部)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松梅堂)' 부도 2기만 있다. - 지역정보포털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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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우측에 위치한 범종각 |
▲ 종각 뒷편에 위치한 산령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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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령당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
▲ 산령당(山靈堂) 전경 |
이밖에 1563년(명종 18)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 의식집인 청문판(請文板) 4매가 남아 있다. 영인산에 두차레(2000,2002년) 큰 산불이 났을 때도 세심사 소나무가 방화목 역할을 하고 스님의 기도로 피했갔다고 한다. 한적한 강청골 계곡을 따라 길을 걸으면 고즈넉한 세심사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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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뒷편 좌측에 위치한 영산전 내외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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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전 전방 축대 하단에 위치한 송매당(松梅堂) 부도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목판(보물 19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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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목판(문화재청 사진)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목판은 1545년에 오응성(吳應星)이 언해한 판본을 모본(母本)으로 판각한 것이다.『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한없는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과 멸죄를 설명한 불경으로『부모은중경』, 『은중경』이라고도 한다. 세심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목판은 언해본으로 총13판이 전하고 있다. 1563년(명종 18) 동림산(桐林山) 신심사(神心寺)에서 개판된 것으로 오응성의 발문은 없으나, 현존하는 언해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중 제작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언해본 경전의 판각 현황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
아산 세심사 신중도(충남 유형문화재 19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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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미륵사 백련정사의 신중도로 조성하여 봉안되었던 것을 현재 아산 세심사에 소장되어 있다. 세로 117cm, 가로 87cm의 작은 화폭에 그려져 있는데, 색채의 박락과 훼손이 거의 없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화기를 통해 건륭오십구년 갑인년 시월이십일 상단탱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조성화원은 승초, 원정, 보심, 품관 대운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의 구성은 회연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세석전, 일월천자 주악천인 및 동자를 배치하고 하단에는 위태천을 위시한 천룡팔부를 배치하였다. 상단 중앙에 큼직하게 표현된 제석천은 보관을 쓰고 합장하고 신체를 거의 드러낸 채 정면을 향하였는데, 뒤에는 그림이 그려진 5곡병이 둘러져 있다.
제석천의 주위에는 일천자와 월천자가 홀을 들고 시립하였으며, 그 옆으로 주악천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으며 주악동자와 공양동자상이 각각 3구씩 묘사되었다. 상단과 하단은 구름으로 구분하였는데, 하단의 중앙에는 위태천이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합장을 하고 정면을 향해 서 있다. 옆으로는 용왕을 비롯한 4인의 천룡팔우가 무기를 들고 후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석천룡도 형식의 신중도에서는 상단의 제석도 부분과 하단의 천룡팔부 부분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이 그림에서는 상단의 제석과 권속들을 훨씬 비중있게 그리고 있어 제석천과 천룡 위주의 신중도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도상이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 아산 세심사 신중도(문화재청 사진) |
아산 세심사 소조여래좌상(충남 유형문화재 24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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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세심사 소조여래좌상(문화재청 사진) |
아산 세심사 소조여래좌상의 제작 기법은 신체와 머리 등을 나무로 골조를 만들어 기본 형태를 잡은 후 흙을 붙여 이목구비와 신체의 표면, 그리고 옷주름 등 세부를 표현하는 목심형 소조 기법으로 제조하였다. 감마레이 촬영 사진상 불상 표면에는 많은 균열이 보이는데 이는 나무에 덧붙인 흙이 갈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조선후기 소조불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며, 이 밖에 제작 당시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고 흙을 나무에 고정하기 위한 조선시대 꺽쇠못이 확인되었다. 불상 바닥면에서는 꺽쇠못 외에도 현대 못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근래 불상 개금을 하면서 밑면을 보강 혹은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 세심사 소조여래좌상은 제작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발 및 얼굴 표현, 대의의 옷주름 표현에서 17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나무에 흙을 붙이는 조선후기 특유의 목심소조기법으로 불상을 제작하였으며, 내부구조를 결구하기 위한 전통식 꺽쇠못이 관찰되고 있다. 아산 세심사 소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소조불상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다. - 위키백과사전 내용 발췌 - |
아산 세심사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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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중앙에 아산 세심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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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 상단 화살표 지점에 아산 세심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측 하단의 아산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