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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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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싶은산 가고싶은곳 스크랩 [중국 동북 3성 배낭여행 : 제8일] 룽징(龍井, 용정) - 시인 윤동주의 고향
천년의미소 추천 0 조회 113 14.07.07 1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7일 간의 중국 동북 3성 배낭여행

 

 

이번 여행을 계획 할 당시 하일라이트는 당연 백두산이고 그 다음으로는 이번 여행지역이 옛 고구려 땅이라 고구려의 자취를 찾는 일이고, 그 다음으로 북한과의 국경선이 있는 지역이므로 이 또한 찾아보고 그리고 또 하나가 일본 침략과 싸워낸 자취를 찾는 일 등이었다. 이러한 여행계획에 연길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는 연길시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 룽징(龍井)을 찾아 시인 윤동주의 자취를 찾아보고 또 그곳에 있다는 일송정을 찾아보는 것이다.

 

 

제 8 일 2011. 7. 30 (토) 시인 윤동주의 고향 용정을 찾다

구름 조금 

 

09:10 숙소를 나서 站前街를 따라 기차역 건너 우편에 있는 옌지궁톄펀류버스터미널(延吉公鐵分流客運站)까지 걸어가 龍井 가는 버스표를 달라고 하니 “메이요(없다)”라고 한다. 가이드북에는 분명 이곳이서 있다고 했는데… 안내 아저씨가 중심버스터미널로 가라고 한다. 가던 길을 되돌아 나오다가 長白東路로 들어서 옌지궁루버스터미널(延吉公路客運總站, 한글로는 연길중심버스역)으로 가니 그곳에 용정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연길중심버스역, 延吉公路客運總站]

 

 

09:40 용정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였다(버스비 5元/인). 연길에서 용정까지는 23km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용정 시가지가 시작한다.

 

[용정으로 가는 미니버스]

 

[용정 시내에 들어서니 한글 간판이 즐비하다]

 

 

10:15 용정 시내 어떤 4거리를 지나 도로명이 龍井街로 바뀌기에 세워주는 정류장에서 내려 海蘭路를 따라 대성중학을 찾아 나섰다. 대성중학(현재는 용정중학)은 해란로를 따라가다가 民聲街를 만나 왼쪽으로 돌아서면 바로 오른쪽 안쪽으로 교문이 보인다. 교문을 들어서니 우리나라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몇 대 서 있었다. 운동장 게시판에 소개된 용정중학교의 연혁을 보니 과거 여러 학교가 합병되어 현재의 용정중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대성중학은 1921년 10월 8일 사립으로 창립하여 3회에 걸쳐 합병 및 분할되었다가 1946년 9월에 길림성립 용정중학교로 통합되었다고 했다.

 

[어떤 여행자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용정 시내 개략도]

 

[용정중학 교문]

 

[대성중학을 찾아 온 관광버스들]

 

[용정중학 연혁]

 

 

10:25-10:50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을 둘러보았다. 1층에 윤동주 교실을 새로 꾸며 책상을 갖춰놓고 윤동주의 노트를 펼쳐놓고 있었다. 앞서 있던 사람들이 그 노트를 붙들고 놓지 않아 들어다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는데 입장료가 1인당 30元이라고 한다. 2명에 30元을 주고 나왔다. 2층은 대성중학과 이상설의 박물관이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대성중학 전경]

 

[윤동주 교실]

 

[칠판에는 윤동주의 서시 가곡 악보]

 

[윤동주의 책상 재현]

 

[윤동주의 사진들]

 

[대성중학 앞의 윤동주 시비 - 序詩]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1941. 11. 20)

 

[대성중학 2층 박물관의 윤동주 코너]

 

[연전 졸업반시절 윤동주와 정병욱]

 

[윤동주의 습작노트와 성적표 - 평균점수 70점 약간 넘음]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화장실 ㅋㅋ]

 

 

11:15 이상설 선생이 세웠다는 서전서숙(瑞甸書塾) 자리를 잠시 둘러보았다. 서전서숙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갔던 이상설이 1906년 이동녕 등과 같이 간도()에 있는 한국인 자제에게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 취할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이라 한다. 현재는 그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고 앞에 용정실험소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용정실험소학]

 

[서전서숙이 있던 자리]

 

[시인 심달수의 시비 : 지평선]

 

[용정실험소학 전경]

 

 

11:30 龍井이라는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는 우물 용정(용두레 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을 둘러보았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물은 간데없고 쓰레기만 빠져 있다.

 

[용두레 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

 

[지명 기원 표지석]

 

[용두레 우물]

 

[공원에서 화투를 치는 할머니들]

 

 

12:00-12:50 그럴 듯한 고깃집에 들어가 조선족에게 물어서까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주문했는데 예상과 다른 부위가 나왔다. 삼겹살이 아니라 살로만 된 돼지고기가 나온 것이다. 옆자리에 있는 조선족 가족에 물어보니 삼겹살은 五花肉인데 내가 주문한 猪里脊(저리척)은 붉은 살코기라는 뜻이란다.

 

[점심 메뉴 牛肉과 猪里脊]

 

 

13:10 전에 어떤 여행자가 걸어서 찾아가다 포기했다는 일송정을 찾아 나섰다. 그 여행자의 글에 용정에서 화룡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비암산(琵岩山) 기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면 된다고 하였다. 일단 가이드북에 나온 거리 4.5km를 믿고 걸어서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의 정자가 4.5km 보다 훨씬 멀어 보인다. 용문교를 건너 3거리에 다다르니 마침 和龍으로 가는 버스가 서있다. “피옌산?” 하니 고개를 끄덕이기에 출발을 기다리는데 조선족 아줌마가 일송정은 먼 곳이니 택시를 타라고 한다. 그러는 사이 버스가 출발하였다.

 

[해란강의 다리 용문교]
 

[해란강]

 

 

13:30 버스가 대로를 따라 10여분 가더니 우리를 내려준다. 그런데 산꼭대기에 보이던 그 정자는 그리 가까이 와있지 않았다. 저곳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시내로 내려오다가 참외 파는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대로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그 정자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일단 다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도로 끝에 음산한 경기장을 옆으로 돌아서니 정자가 한층 가까이에 보인다. 정자가 서 있는 비암산 자락까지 흙길이 곧게 나있다.

 

[산 정상 왼쪽 끝에 보이는 일송정]

 

[바로 이 대로(龍和路) 건너편에서 갈라지는 길을 따라 일송정으로 감]

  

[해란강 경기장]   

 

 

14:00 큰 바위에 새겨진 비암산 표지석을 지나고 폐허가 된 휴게실을 지나니 가파른 등산로로 접어든다. 아마 이 휴게실은 일송정을 찾는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세운 모양인데 찾는 이가 없어 폐허가 된 모양이다. 건물 모양도 멋지고 꽤 큰 규모의 건물인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비암산 표지석]

 

[폐허가 된 一松亭 휴게실]

 

   

14:12 가파른 등산로를 10여분 남짓 올라 드디어 일송정에 올라섰다. 숨이 차오른다. 이러니 어떤 관광객이 아래의 휴게실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려고 할까?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일송정의 의미를 알았다. 일송정은 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송정은 정자 모양의 소나무를 뜻했다. 당초의 소나무는 일제에 의해 1938년에 죽었으며 1991년 용정시 인민정부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어떤 기록을 보면 이 소나무도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더 죽어서 그 때마다 다시 심었다고 했다.

 

[일송정 등정 기념]

 

[이 소나무가 정자를 닮았는가?]

 

[일송정 복원기]

 

[일송정 건너편 봉우리의 기념비]

 

[일송정 기념비 쪽에서 본 일송정]

 

[비암산 후면의 해란강]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 시 전경]

 

일송정 후면으로부터 비암산을 돌아 용정시내로 흘러드는 해란강을 보니 선구자가 절로 나온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의 가사 중에 나온 해란강, 용두레, 용문교, 비암산은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용주사는 있을 법 한데 보이지 않는다.

 

 

14:30 일송정을 내려서서 오던 길을 되돌아 화룡으로 가는 대로로 나와 시내로 들어오며 시외버스를 세워 “옌지”라고 외치니 이곳에 옌지 가는 버스 없다고 한다. 아뿔싸!! 반대 방향에 서 있었구나!! 길을 건너 화룡에서 오는 버스를 세워(15:30) 연길로 돌아왔다.

 

[화룡으로 가는 대로(용화로)에 있는 천주교당]

 

 

16:00 연길 시내에서 내려 서시장으로 가서 김치 등의 찬거리를 사고 송이버섯 반근(30元)을 사다가 저녁식사를 했다.

 

[연길 시내 번화가와 서시장]

 

[저녁 식단에 올라온 송이 반근 ㅋㅋ]

 

 

[註] 일송정 가는 방법 : 일송정에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택시를 타고 가면 일송정기념비까지 갈 수 있다. 여기서 일송정은 3분 거리. 택시비는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거리로 보아 왕복(대기시간 포함)에 3-40元가량 달라고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걸어서 가는 방법은 아래의 지도를 따라가면 된다. 시내에서 용두레 우물을 기점으로 하면 우선 우물이 있는 공원 옆으로 난 六道河路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철길을 지나고 이어 용문교를 넘게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로가 나타나는데 바로 이 도로가 화룡으로 가는 용화로다. 이 용화로를 따라 서서히 올라가면 오른쪽에 천주교당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대로에서 왼쪽으로 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바로 이 길로 들어서서 계속 올라가면 해란강경기장이 나타나는데 이 경기장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바로 일송정이 서있는 비암산 자락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이 나타난다. 가이드북에는 시내에서 4.5km라고 나와있는데 내 경험으로는 대략 5km 이상으로 느껴졌다. 여하튼 시내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2시간 이내에 정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연길로 돌아올 때는 해란강경기장에서 곧바로 대로로 나와 연길로 오는 버스를 세우면된다.

 

[용정에서 비암산(일송정) 가는 길]

 

[제 8 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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